태평천하
채만식 지음 | -
태평천하(太平天下)
채만식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윤직원: 주인공, 이름은 윤두섭. ‘직원’은 돈을 주고 얻은 직함이다. 젊은 시절 별명은 윤두꺼비, 고리대금업으로 재산을 불린, 돈과 자신밖에 모르는 천하의 수전노다.
윤용규: 윤직원의 아버지. 별명은 말대가리. 출처가 모호한 돈으로 재산을 모았으나 화적패에게 대들다가 목숨을 잃는다.
창식: 윤직원의 외아들. 윤주사. 노름과 첩살이로 가산을 탕진한다.
종수: 윤직원이 군수를 만들려 하는 맏손자. 현재는 군청의 서기로 술과 여자로 윤직원의 재산만 축낸다.
종학: 윤직원의 둘째 손자, 일본의 대학 법과생, 윤직원이 경찰서장을 만들려 하나 사회주의 사상 운동으로 피검된다.
경손이: 윤직원의 맏증손자,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하는 어린 기생 춘심이와 연애 중이다.
맏며느리 고씨: 생과부로 늙어가며 심통만 늘어 늘상 시아버지 윤직원과 싸움이 잦다.
대복이: 윤직원의 집안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는 차인 겸, 비서로, 윤직원이 보배 같이 여긴다.
태식: 윤직원이 첩에게서 얻은 늦둥이 아들로 좀 모자란다.
천하의 수전노 윤직원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가는 가을 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 날 석양. 저 계동(桂洞)의 이름난 장자〔富者〕 윤직원 영감이 마침 어디 출입을 했다가 방금 인력거를 처억 잡숫고 돌아와, 마악 댁의 대문 앞에서 내리는 참입니다.
윤직원은 자신을 태우고 집까지 온 인력거꾼과 인력거 삯을 두고 시비가 붙는다. 좋은 약을 오랫동안 먹어서 건강해 보이는 데다 풍채가 당당하다. 일흔 두 살이나 먹었지만, 윤직원은 장정들 뺨치게 정정하고 차림도 화려해, 옛날 세상이라면 한 지방의 수령감이다. 그런데 입이 삐뚤어진 친구들은 광대나, 카라멜 선전 모델쯤으로 침을 흘리니 통탄할 노릇이다. 워낙 엄청난 체구의 윤직원을 싣고 온 터라, 젖 먹던 힘까지 다 쓴 인력거꾼은 삯이 얼마냐는 윤직 원의 물음에 후히 달라는 뜻으로 “그저 처분해 줍시요!”했다가 낭패를 당한다. 윤직원은 맘대로 하라는 줄 알고, 돈 한 푼 안 주고 그냥 가라고 한다. 이런 저런 실랑이 끝에 이십 오 전을 겨우 받아낸 인력거꾼이 가 버리자, 윤직원은 돈을 괜히 썼다고 투덜댄다.
좋은 풍채에 어울리지 않는 구두쇠 윤직원 영감은 명창대회를 무척 좋아한다. 오늘도 기생 춘심이와 거길 갔다오는 참이다. 소리를 좋아해 매일 기생이나 광대를 불러들이고 싶지만 돈이 문제다. 그래서 라디오를 사다가 매일 남도소리나 음률가사를 듣는 게 그의 낙이다. 라디오를 조종하는 것은 ‘차인 겸, 비서 겸, 무엇 겸, 직함이 수두룩한’ 대복이인데, 하루라도 그것이 안 나오는 날이면 얼토당토않게 대복이가 혼쭐이 난다. 그러면서도 청취료 내는 것은 아까워한다. 늘 있는 게 아니라서 아쉽지만, 명창대회 구경은 빼놓는 법이 없다. 그런 윤직원 영감이 오늘 명창대회를 보러 춘심이를 앞세우고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춘심이가 자동차를 타자고 하자, 더 ‘비싼’ 차-- 버스를 타고, 잔돈을 두어 두고 십 원짜리를 내는 등 결국은 공차 타는 기술을 발휘한다.
시간은 많이 걸렸어도 회장에 첫 번째로 도착한 윤직 원은 군밤 값 이십 전으로 춘심이를 꾀여 뒷문으로 공짜로 들어가게 한 다음, 오십 전을 내고 하등표 ‘홍권(紅券)’을 사서 상등석인 아래층 맨 앞자리에 앉는다. 양복 신사 하나가 자신을 명창 이동백으로 오해한 게 기분이 상한 참에, 이번엔 그가 홍권을 사서 백권석에 앉아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다른 양복쟁이가 시비를 건다. 하지만 윤직원이 하등표를 샀기 때문에 아래층에 앉아야 된다고 우기자 그들도 짐짓 지고 만다.
가외로 오 전을 더 뺏겼다고 화가 난 윤 영감은, 집의 쪽문이 열려 있자 더욱 더 역정을 낸다. 돈을 주는 일은 없지만 성가신 거지 등의 손님이 들어올까 봐, 대문은 물론 쪽문까지 잠가놔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멍청해서 갑갑한 때도 있지만 무엇하나 축내지 않고 월급 한 푼 안 줘도 되는 ‘미상불 천하일품’인 삼남이가 그를 맞는다. 쪽문을 열어 놨다는 며느리 고씨에게다 “짝 찢을 년”이란 욕을 해댄다.
윤직원의 문벌 계획
“오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또한 웅장한 절규이었습니다. 아울러 위대한 선언이었구요.
얼굴이 말처럼 길어서 말대가리라는 별명을 듣던 윤직원 영감의 아버지 윤용규는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며 빈둥거리는 판무식꾼이었다. 어느 해인가 ‘자못 출처가 모호한’ 난데없는 돈 이백 냥이 생기고 부터 노름방에 발길을 끊고 돈놀이를 하며 ‘착실한 살림꾼’이 된 그는 마침내 삼천 석을 윤직원에게 남겼다. 윤직원은 어려서부터 잇속에 밝아 착실히 집 재산을 늘려왔다. 이 양대에 걸쳐 모은 재산은 욕심 사나운 수령들에게 뺏기기도 하고, 화적들에게 약탈당하기도 하고, 마침내 윤용규가 화적의 손에 죽으면서까지 이룬 녹록치 않은 재물이다.
계유년 삼월 보름,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한 윤두꺼비(젊은 시절 윤두섭의 별명)는 바지가 벗겨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뒷담을 넘어 보리밭 고랑을 기어 달아난다. 화적패가 몰려온 것인데, 그의 아버지 말대가리 윤용규는 악이 치받쳐 그들 두목에게 대든다. 화적 두목은 이미 그와는 구면인데, 전에 자신의 작인 중 하나가 화적패에 끼여 있는 것을 윤용규가 고을 원에게 일러바쳐 잡아 가두게 했던 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토색질이 심한 고을 원님 백영규에게 되려 잡혀가 이천 냥이나 뇌물을 써서 풀려나온 윤용규는 화적들이나 고을 원에 대한 원한이 깊다. 그래서 부하를 뇌물을 써 풀려나게 해 달라는 두목의 말에는 눈썹도 까딱 않는다. 그러다가 마누라가 두목의 팔을 물어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혀 칼을 채어 휘두르다가 결국은 목숨을 잃는다. 곳간에 불을 지르고 화적패가 물러간 다음, 발가벗은 채로 돌아온 윤두꺼비는 제 아비의 시체를 안고서 통곡을 한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물이라 한 푼 쓰는 것에도 인색한 것은 당연하고, 부지런해서 모은 것을 착취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시대가 바뀌면서 양복청년, 혹은 권총 청년에게 대낮에 돈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태평한 시절이 되자 윤두꺼비는 자신의 변변찮은 문벌을 빛나게 할 네 가지 방책을 세운다. 우선 ‘족보에다 도금’을 하듯 가짜 족보를 만들고, 또 윤두꺼비 자신이 향교의 역원들에게 사음을 맡기거나 농토를 주는 대가로 직원 벼슬을 얻었다. 그리고 양반 혼인으로 사위와 손주며느리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계획은 손자 둘을 군수와 경찰서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족들의 불화
이렇게 생과부, 통과부, 떼과부로 과부 모를 부어 놓았으니 꽃모종이나 같았으면 춘삼월 계절을 기다려 이웃집에 갈라주기나 하지요. 이건 모는 부어놓고도 모종으로 갈라줄 수도 없는 인간 모종이니 딱한 노릇입니다.
윤직원의 집안에 있는 여인들은 첩 살림하느라 생과부가 된 맏손자 종수의 처, 못생긴 얼굴과 새수빠진 소리를 곧잘 해서 소박맞은 둘째 손자 종학이의 처, 서울 양반한테 시집갔다가 일 년만에 진짜 과부가 된 딸, 생과부 맏며느리 고씨, 침모 전주댁까지 죄다 과부다.
가족 중에서, 늙으막에 시골 주모한테 얻은 아들 태식이는 영락없는 콩나물 형국에다 좀 모자라지만 윤직원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런 바람에 태식이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윤직원은 밥상의 밥이 새하얀 쌀밥인 걸 보고 아까워한다. 그리고 보리밥이 건강에도 좋고, 애도 밸 수 있게 한다고 며느리들을 꾄다. 그 말을 듣고 세 과부들이 보리밥 먹을 생각을 한다.
건넌방의 며느리 고씨만이 싸움을 벼르고 있다. 고집이 세고 거만한 고씨는 ‘이 세상 며느리의 썩 좋은 견본’인데, 삼십일 년 동안 시집살이를 해오다가 작년에 ‘삵쾡이요 진지꼽재기요, 담배씨’ 같던 시어머니 오씨가 죽어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안방 차지는커녕 시아버지의 미움을 독차지하고 산다. 맘대로 담배를 피울 수 있게는 되었지만, 살림은 곧바로 종수의 아낙인 박씨한테로 모든 권한이 넘겨졌다. 이래저래 고씨는 심화가 사납다.
그녀의 남편 윤주사(윤창식)는 첩을 둘씩이나 두고 딴 살림을 차려, 집에는 윤직원이 두세 번씩 불러야만 겨우 와서 부친만 보고 휑하게 가버린다. 부친 윤직원의 평대로 하면 “위인이 농판이요, 오십이 되도록 철이 덜 든” 그는 살림살이를 할 줄 모르는 데다, 아쉬운 소리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대로 털어 주거나, 빚 보증 섰다가 집행을 맞기 일쑤라, 윤직원이 준금치산 선고를 시켜버렸다. 하지만 돈이 필요하면 윤직원의 도장을 위조해 쓴다. 윤주사는 남의 사정을 쏠쏠히 봐주는 사람이면서도 공공사업이나 자선 사업 같은 데는 일전 한 푼 쓰질 않는데, 그래도 윤직원은 경찰서나, 소방대 등에는 곧잘 기부를 하는 편이다.
윤직원의 재산은 더 이상 늘지 않는데, 그것은 아들 창식이 그런 낭비를 하고 또, 맏손자 종수가 난봉을 부리거나 군수가 되기 위해 운동비를 쓰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윤직원은 아들과 손자와 결국은 번번이 지고 마는 싸움을 한다. 그밖에도 다른 식구들과 고루고루 싸움을 한다. 서로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이다.
그래서, 싸움 싸움 싸움, 사뭇 이 집안은 싸움을 근저당 해놓고 씁니다. 그리고 숱한 여러 싸움 가운데 오늘은 시아버니 윤직원 영감과 며느리 고씨의 싸움이 방금 벌어질 켯속입니다.
속이 후련해지도록 대판 싸움을 벼르는 고씨가 꼬투리가 없어 조바심 치고 있을 때, 경손이가 들어온다. 고씨는 생트집을 잡아 목소리를 높이고, 대거리하는 손자 경손이는 불손하기만 하다. 결국 ‘뉘 놈의 집구석 씨알머리’라는 둥의 욕이 나오고, 결국은 윤직원과 며느리 고씨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밑구녁’만 들쳐지는 싸움 끝에, 윤직원은 고씨의 입심을 당하지 못하고 경손이 더러 아들 창식을 불러오라고 한다. 이혼하라는 게 유세지만, 그것도 대충하고 그만이다. 싸움 뒤에 평화가 회복된다. 태식이와 경손이, 즉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입가심 같은’ 싸움이 벌어진다.
윤직원과 가족들의 화려한 사업
“그럴 것이네 워너니, 일본이 부국강병하기루 천하 제일 사라던디…. 어 참, 속이 다아 후련하다!
사랑방엔 브로커요, 윤직 원 밑에서 거간을 해먹는 ‘올창이’석 서방이 와서 윤직원과 돈 빌려주는 이자 문제로 실랑이를 벌인다. 윤직원은 이 수형 장사(고리 대금업)를 해서 돈을 불린다. 쇠가 쇠를 낳는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윤직원은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청승을 떤다. 그러나 그뿐, 기부금 문제가 생각이 나자 도로 제정신이 돌아온다. ‘올창이’가 윤직원에게 나이 지긋한 마나님을 얻으라고 권하자, 그는 자식과 손주들이 여편네를 들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첩이 끊일 새가 없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십 년 동안만도 무려 십여 명은 된다. 이제는 기생첩이나 가짜 여학생 첩 따위는 싫고, 젊은 보험회사 외교원과 달아났지만 알뜰했던 첩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서 서른 댓 살이나 사십이 갓 넘은 여자를 바랐다.
중일전쟁의 호외를 돌리던 신문 배달부의 방울 소리로 인해, 화제가 전쟁으로 옮겨졌다. 윤직원에게는 부자의 것을 모두 뺏어다가 농꾼이나 노동자를 나눠주는 아라사(러시아)와, 그들의 부추김을 받는 청국(청나라)이 이겨서는 안 되는 전쟁이다. 그렇기에 관리들과 순사를 보내 흉악한 부랑당들을 소탕해주고, 못된 사회주의를 막아주는 일본이 고맙고 장했다.
‘올창이’가 가고, 출출하고 심심하던 차에 대복이가 돌아와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음을 보고한다. 윤직원에게 대복이는 보배다. 윤직원과 같은 고향인 대복이는 생김은 별 볼일 없지만, 매사에 꼼꼼하고 재치가 있다. 더군다나 절약하는 데 있어서는 ‘도락가’를 넘어 입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월급을 따로 주지 않고 용돈을 마음대로 쓰라고 했지만, 제 비용까지도 절약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요즘 홀아비가 되어, 이 집의 과부 딸 서울 아씨에게 대망을 품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눠 받을 오백 석 재산이 실제 초점이다.
한편 서울 아씨도 전 서방(대복이)이 돌아왔다는 전갈이 오자마자 반가워하며 부엌으로 달려가 평생 않던 밥상을 차린다. 그저 과부는 두 번째 남편을 맞지 않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그녀지만, 단지 대복이가 남자라는 것 때문에 보인 본능이다. 그들 자신까지도 눈치를 못 채지만, 경손이만 대고모의 이변을 발견한다.
대복이가 라디오를 켜주고 나가는 사이 춘심이가 들어온다. 열 다섯 살 먹은 어린 기생(동기;童技) 춘심이는 금년 봄부터 시작해서 윤직원 영감이 다섯 번이나 내리 실연을 겪은 뒤, 여섯 번째 애인이다. 기생 애인 불러들이기는 안면이 있었던 기생이 인사차 들르면서 동기를 데려온 게 실마리가 되었다. 큰 기생을 불러오려면 돈이 많이 드는지라, 잔돈푼을 쥐어주고 소일거리도 하고 재미도 볼 요량으로 어린 기생을 불러들인 것이다. 돈 덜 드는 소일거리에다 계집애가 더 귀엽고 재미도 있다. 또 소일거리 이상의 경우를 생각하면 비공식적이라 좋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사흘만에 첫 번째 어린 기생이 오자 윤직원은 홀딱 그 재미에 빠진다. 그러다 이십여 일 지나 은근슬쩍 아이의 목을 끌어안자, 동기는 마치 불에 덴 것처럼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한 번 맛들인, 아니 맛을 보려다 회만 동해 놓은 그 놈 식욕이 아예 가셔지질 않아, 대복이가 나서서 열네 살 짜리 두 번째 계집애를 구해 왔는데, 이번에는 욕을 냅다 깔리고 통통 나가버렸다. 윤직원은 그래도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 번째 아이까지 윤직원 영감을 싫다고 도망갔다. 실연의 쓴 술잔이 아니라 그는 핀잔을 거듭 마셔온 것이다.
윤직원 영감으로서는 일생일대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시골에 있는 사음한테 기별만 하면, 소작인들의 어린 계집애들을 한데 쓸어올 수야 있지만, 서울 동기들보다 쓸모는 적으면서 뒷돈이 훨씬 더 들어 금방 데려오지 못했다. 그러나 춘심이까지 낭패를 본다면 그것도 보장하기 어렵다.
춘심이와 윤직원 영감이 하는 찧고 까불고 하는 수작은 영락없이 애들 짓이다. 윤직원은 춘심이에게 자기 나이를 일곱 살을 깎아 예순 다섯이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속을 떠본다. 그리고 눈치를 아는 것 같아 마음놓고 덥썩 안으려 하자, 춘심이가 빠져 달아난다. 하지만 아주 달아나지는 않고, 날 잡아보라는 듯이 밴들밴들 웃으며 간장을 녹인다. 춘심이는 결국 칠 원 오십 전 한다는 루비 박은 반지를 사주겠다는 윤직원의 약속을 받아낸다. 그리고는 삼남이가 간신히 외워서 사온 우동과 탕수육을 서로 맛있게 먹는다. 윤직원은 그러면서도 뒤가 구려 제 부모한테 말하지 말라는 당부도 하고, 건성이지만 약속도 받아낸다.
한편 안방에는 경손이가 어디서 돈 뜯어낼까를 궁리하며, 배짱 안 맞는 대고모 서울 아씨와 보기 싫은 대부(할아버지 뻘) 태식이만 남아 있는 안방에 누워 있다. 서울 아씨는 천 번 정도는 읽어 줄줄 외우는 「추월색」을 들고 장단을 맞춰 읽고 있고, 태식이는 무려 이년하고도 반 년 동안 배우고서도 다 잊어버린 「조선어 독본」 일 권을 열심히 읽고 있다. 하지만 발음이 분명치 못해 왕개구리 우는소리다.
짜증이 나서 건너간 자기 모친의 방에는 경손이의 숙모 조씨까지 와서 바느질을 한다. 경손이는 그 많은 집안 사람들 가운데 유독 숙부 종학만은 존경한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숙부 종학이 경찰서장 될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 그래서 남편과 집안 두루두루 속이 안 좋은 숙모 조씨에게 이혼하고 새로 결혼하라고 부추긴다.
돈을 달라던 경손이가 서울아씨 시집보내 주라는 숙모의 대꾸에 돈 우려낼 궁리가 섰는지 방을 나선다. 두 동서가 다 같이 이름 좋은 종 같은 신세를 한탄하는데, 윤주사의 둘째 기생첩 옥화가 얼굴을 내민다. 옥화는 이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큰집 사람들과 친해지는 능숙한 외교수완을 발휘한다. 그녀는 기생 냄새가 흐르지만, 언제고 여학생 차림을 하고 다닌다. 종수를 서울서 만났다는 말을 전해주고, 마실 나온 알리바이를 만든 옥화는 긴한 사무를 보러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