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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메이드 인생

채만식 지음 | -
레디 메이드 인생

채만식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P: 허울 좋은 일제의 문화사업에 의해 교육을 받았으나 취업하지 못한 무능력한 인텔리. 교육의 결과가 무직이라는 데 반감을 품은 P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인쇄소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창선이: P의 아들. 부모가 4살 때 이혼한 후로 큰아버지 집에서 9살까지 지낸다. 아버지로 인해 인쇄소 노동자로 취직한다.

술집계집애: 돈 때문에 팔려와 16살부터 3년 동안 술집에서 일했다. P가 돈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 돈을 얻기 위해 정조를 팔고자 한다.

A: 인쇄소 문선과장. 창선이를 맡으며 자식처럼 잘 데리고 있으면서 착실히 가르치겠다고 한다.



취업운동에서 백전백패의 노장 인텔리

“그렇지만 지금 조선 농촌에서는 문맹퇴치니 생활개선이니 합네 하고 손끝이 하얀 대학이나 전문학교 졸업생들이 몰려오는 것을 그다지 반겨하기는커녕 머리살을 앓을 것입니다.”

신문사 K사장은 안락의자에 파묻힌 몸을 뒤로 벌떡 젖히며 하품을 하듯이 시원찮게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지’하고 대답을 한다. 두 팔을 쭉 내뻗고 기지개라도 한 번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것 같은 눈치였다.

P는 K사장과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공손히 마주앉아 극히 존경한다는 비굴한 미소를 띄면서 말주변 없는 말을 다하면서 직업 동냥을 위해 구걸을 하고 있었다. P는 취직운동에 있어서는 백전백패의 노장인지라 힘들게 하는 K사장의 한마디 거절에도 새삼스럽게 실망을 하지도 않았다. 거절을 했으니 더 이상 졸라도 별 수 없는 것을 알았지만 P는 빈말로 한 번 더 청해본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해달라고 무리하게 조를 수는 없지만 나중에라도 결원이 있으면 그 때 꼭 부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P는 외면하고 있던 K사장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K사장은 고개를 흔들면서 거절한다. P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더 이상 부탁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어설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동안 깍듯이 모시던 태도에 비추어 바로 일어나기 민망해 실망하는 체 하고 잠시 더 앉아있었다. "거 참 큰일났어." K사장은 P가 낙심해하는 것을 보고 밑천이 들지 아니하는 일이라서 알뜰히 걱정을 나누어준다. "저렇게 좋은 청년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저렇게들 애를 쓰니."

P는 속으로 코똥을 '흥' 하고 뀌었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K사장은 P가 더 이상 일자리를 조르지 않자 안심하고 가슴에 묻어 두었던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취직만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도회지에서 월급생활을 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농촌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P는 기왕에 취직운동이 안될 바에 속 시원히 시비라도 해보고 싶어 농촌으로 돌아가서 무얼 하냐고 반문한다. 구직을 원하는 지식 청년들에게 농촌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구직군을 격퇴하기 위한 행세거리였지 어떤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K사장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운동이나 생활개선운동을 헌신적으로 해보라고 했다. P는 먹고 살 생계비도 없는 데 무엇으로 헌신적인 인도주의운동을 하냐고 대꾸했다. P는 K사장의 말도 안 되는 억지 핀잔에 더 이상 말을 하기 싫어 일어섰다.

복도에서 P는 일전에 취직을 부탁한 사이가 각별한 신문사 편집국장 C를 만났다. C가 사장을 만나러 왔냐고 묻자 P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C가 K사장이 신문사는 구제기관이 아니라며 거절했다면서 신문사 취직을 단념하라고 했다. P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허물뿐인 일제 문화사업으로 만들어진 인생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 가도 도로 오는 것이 구십구 퍼센트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의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 메이드 인생이다.

P는 광화문 네거리에 나와서 어디로 갈까 망설였다. 봄에 어울리게 새로 지은 춘추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명랑하게 오고갔다. P는 교외로 나가고 싶었으나 자신의 낡아빠진 겨울 행색을 보니 마음이 변하여 집으로 돌아가 드러눕고만 싶어졌다. 마침 기념비각 앞에서 서양 사람 내외가 내려 기념비각을 구경했다. 이 모습을 보고 P는 대원군이 이 꼴을 본다면 하고 생각하고 저절로 입가의 미소를 흘렸다.

한말의 돈키호테였던 대원군은 바가지를 쓰고 벼락을 막으려 했지만 역사는 조선을 오랫동안 방치하지 않았다. 갑신정변과 한일합방으로 급격한 역사 변천을 거쳐 자유주의 사조는 기미년에 확실해졌다. 양반 상놈의 구별 없이 만인이 법률 앞에서 평등하다고 했고,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했다. 상놈도 배우면 양반이 될 수 있으니 논밭을 팔아서라도 가르치라고 했다. 총독은 문화정치를 내세우며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의 입학을 권유했다. 곧 연애결혼과 신학문이 유행하고 대학을 졸업한 천여 명의 인텔리가 직장이 없어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그들은 레디 메이드 인생이었다.

P는 투덜거리며 기념비각을 떠났다. P는 자신과 세상의 모든 일에 짜증이 나고 원수 같았다. 그는 동십자각 앞에서 담배 한 갑을 달라고 했다. 담뱃가게 주인이 P의 행색을 보고 값싼 마코 담배를 내주자 P는 심술이 나서 비싼 해태 담배를 달라고 소리 질렀다. 담뱃가게 주인이 무신경하게 마코를 해태로 바꿔주자 P는 담뱃가게 주인이 얄밉게 보였다. P는 겨울 외투를 잡혀 얻은 돈으로 객기를 부리며 비싼 해태를 샀다.

P는 방세, 전기료가 두 달치나 밀렸고, 빚쟁이의 독촉에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그런데도 P는 젊은 때의 야심으로 고식한 안정이나 명색이 없는 생활은 피하고 싶어했다. 삼청동 꼭대기에 있는 행랑방에 돌아온 P는 집주인 노파가 방세를 내라고 독촉할까 염려했다. 노파는 방세보다도 우선 고향의 형에게 온 편지를 건네준다.

P에게는 일 년 전에 헤어진 아내의 사이에서 생긴 아홉 살 짜리 아들 창선이가 있었다. 헤어질 때 아내는 아이를 양육하게 해주면 거기에 혼자 사는 재미를 붙이고 적어도 중학교까지는 마치도록 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렇게 했으면 P도 한 짐을 덜었을 것인데, 그는 듣지 않았다. 어미 곁에서 아비의 원망과 푸념을 듣고 자란 아들이 청년이 되면 늙은 아비를 박대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너댓 살밖에 안된 아이를 아내에게서 빼앗고 보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형에게 맡겼다. 보통학교 다닐 나이가 되면 서울에 데려오겠다며 혼자서 서울에 올라왔다. P의 형이 작년에 창선이를 입학시켰으나 극빈 가정이라 중도에서 퇴학시켰다. P는 공부는 필요 없으니 노동이라도 시키라고 했다. 형은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조카가 공부도 못하고 배를 굶고 있는 것이 보기 안타깝다며 P에게 데려가 공부를 시키라고 작년부터 편지를 해왔다.

편지에는 어린것이 굶기를 밥먹듯 하고 재주는 있으면서 남의 집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부러워하는 꼴은 차마 애처로워 볼 수가 없다며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속 편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P는 한숨을 내쉬고 편지를 박박 찢어 던져버렸다. 그는 창선이를 공부시키라는 형을 원망했다. P는 죽어도 창선이를 인텔리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돈 때문에 정조를 파는 술집 창녀

방금 세상에는 한 번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목숨을 버려 자살하는 여자가 있다. 그러는 한편 ‘이십전도 좋소’하는 여자가 있다. 여자의 정조가 그것을 잃었다고 자살을 하도록 그다지도 고귀한 것이라면 ‘이십 전에도 팔겠고’하는 여자가 눈을 멀끔멀끔 뜨고 살아있는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때마침 P의 직장 없이 그날그날 빈둥빈둥 지내는 무직의 인텔리 친구 M과 H가 찾아왔다. 이들은 무어나 일을 맡겼으면 불이 번쩍 일게 해낼 팔팔한 젊은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몸을 비비꼬며 어울려 선술잔이나 하는 아무 데도 용납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부르주아 기성 문화기관에 들어가자니 그곳에서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레디 메이드로 된 존재들이니 아무 때라도 저편에서 필요해야만 몇씩 사들여 갈 뿐이다.

그날 밤 P와 M은 H를 졸라 그의 법률책 다섯 권을 잡혀 돈 육 원을 만들어 가지고 나섰다. 선술집에 가서 취하도록 먹은 뒤에 C라는 카페에 가서 술 두 병을 시켜 놓고 자정이 되도록 노닥거렸다. 그곳에서 나올 때 돈이 남아 다 쓰러져 가는 늴리리 가락으로 들어박힌 싸구려 술집에 들어갔다.

P가 무심결에 해태 담배를 피우자 선술집 계집아이가 달라붙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술값을 치르는 것을 보고 P가 M과 H를 따라 일어섰다. 계집아이가 P에게 자고 가라고 조르자 M이 슬쩍 밀어 P를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계집아이가 P의 주머니에서 돈 소리가 난다며 자고 가는 대가로 50전도 좋고 20전도 좋으니 돈 좀 주고 가라고 한다. P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부터 잔돈 소리가 찰랑거리는 것을 깨닫고 주머니 속의 돈을 움켜쥐고 방바닥에 내던지고 뛰어나왔다. 그의 눈에 눈물이 괴었다.

P는 순진한 정조를 지키는 사나이가 아니었다. 기생과 한동안 살기도 했다. 그러나 유곽이나 색주가의 잠자리는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정이 들지 않은 여자와는 절대로 관계를 하지 않았지만 한 번 정이 들면 여자에게 전부를 내주어 버리는 괴벽이 있었다. 이날 밤도 계집애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정조의 대가로 얼마 안 되는 푼돈을 달라는 소리에 인간이 악착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일의 끼니를 때울 가진 돈 모두를 던지고 뛰쳐나온 자신의 인도주의적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몰라 괴로워했다.

P는 술 때문에 머리가 띵하고 속이 뉘엿거리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삼청동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목이 말랐는데 물이 없었다. 목이 점점 더 말라 창자까지 말라 내려가는 것 같았다. P는 배고픈 고비는 많이 넘겼으나 목마른 것은 처음이었다. 겨우 몇 시간을 참았다가 물지게 소리가 나자 물통이 있는 곳에 뛰어나갔다. 사정 이야기도 하지 않고 쏟아지는 물통 꼭지에 매달려 한 동이 정도의 냉수를 들이켰다. 물장수가 어이없이 쳐다보고 있다가 P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혀를 찼다. 밥보다 더 다급하던 물을 마시니 취기도 걷히고 정신이 말쑥해졌다.

P는 방에 들어가 정조 대가로 이십 전을 부르던 여자를 생각했다. 세상에는 한 번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자살하는 여자가 있는 한편, 이십 전에도 정조를 파는 여자가 사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지 몰랐다. 두 여자 모두 건전한 양심의 소유자로 볼 수 없지만, 정조를 파는 여자보다 자살한 여자를 더 나무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여섯 살부터 3년 동안 색주가를 굴러다닌 여자에게 도덕이나 정당한 인생관이 없는 것은 당연하며 정조를 파는 것은 일종의 정당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인텔리가 흥분하는 것은 병적인 결벽일 뿐이었다. 다만 돈을 던져주는 취객 때문에 여자는 운이 좋다고 감격했을 것이다. P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주제넘게 자신의 처지도 모르며 남을 불쌍해했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교육을 포기하는 인텔리

“거 참 모를 일이오. 우리 같은 놈은 이 짓을 해가면서도 자식을 공부시키느라고 애를 쓰는데 되려 공부시킬 줄 아는 양반이 보통 학교도 아니 마친 자제를 공장엘 보내요?” “내가 학교 공부를 해본 나머지 그게 못쓰겠으니까 자식은 딴 공부를 시키겠다는 것이지요?”

그후 일주일 동안 돈이 생길 데도 없고, 잡힐 데도 없고, 어디서 벌이를 한 적도 없고, 구걸한 적도 없고, 남의 것을 훔치지도 않았는데도 P가 야위긴 했어도 멀쩡히 살아있는 기적이 일어났다. P와 같은 인생이 이 세상에 없어진다면 근로하는 사람이 조금은 편해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P가 소부르주아 축에 끼이는 인텔리가 아니고 노동자였다면 거지가 되었거나 비상수단을 썼을 테지만 그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죽지도 않고 살아있지만 잠시도 그를 해방시켜 주지는 않았다.

P의 형이 창선이를 올려보낼 테니 역에 나와서 데려가라는 전보를 보냈다. 오전에 전보를 받은 P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쩔쩔매고 돌아다녀 최소한의 돈을 변통했다. 종로에서 간단히 살림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잡지사에 있을 때 알고 지낸 인쇄소의 문선 과장 A를 찾아갔다.

P는 A에게 월급도 필요 없고 다만 일만 가르쳐주면 그만이니 어린아이 하나를 써달라고 졸랐다. P가 요리조리 졸라대자 A는 누구 친한 사람의 집 어린애를 부탁하는지 알고 보통학교나 마쳤냐고 물었다. P가 아니라고 솔직히 대답하자, 나이를 물었다. 아홉 살이라고 하자 A가 너무 어리다며 놀란다. P는 이왕 일을 배우려면 아주 어려서부터 배워야 한다고 잘라 말하니까, A가 뉘집 아이냐고 반문한다. P가 자기의 자식이라며 얼굴이 붉어진다. A는 이 말에 별일도 다 있다며 입만 벌리고 한참동안 P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P는 자식이라고 공장에 보내지 못하는 법이 있냐고 하면서 학교에 보낼 처지도 못되고 보내봤자 사람 구실도 못할 테고, 자신이 학교 공부를 해보니 못 쓸 일만 생기니 자식은 인쇄소 공부를 시키겠다고 한다. A는 이해할 수 없다며 수락하지만 어린것이 너무 애처롭지 않느냐고 묻는다. P는 애비가 더 애처롭다며 자식에게는 약이 될 거라고 하면서 당부를 하고 인쇄소를 나왔다. P는 한 짐 벗어 놓은 것같은 가벼운 기분이었다.



인쇄소에 맡겨지는 아들의 미래

이튿날 아침 일찍 창선이를 데리고 ××인쇄소에 가서 A에게 맡기고 안 내키는 발길을 돌이켜 나오는 P는 혼자 중얼거렸다. “레디 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이튿날 P는 전에 없이 첫새벽에 일어나서 서투른 솜씨로 화롯밥을 지어 놓고 창선이를 마중하러 정거장에 나갔다. 형의 전보에 창선이를 서울에 올라오는 고향사람 S와 함께 보낸다고 했다. P는 창선이보다 얼굴이 더 익은 S를 찾았다. 기차가 도착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과연 S가 창선이를 데리고 두리번거리며 기차에서 내려왔다.

창선이는 어디서 생겼는지 새까만 양복을 입고 이화표를 붙인 학생 모자를 쓰고 보따리를 지고 내렸다. P는 창선이를 보자 얼굴이 붉어지면서 한편 가엾게 생각했다. 짐을 든 S가 두리번거리다 P를 알아본다. 창선이가 인사를 하자, P는 외가를 닮은 아들의 얼굴에 불만을 가진다.

S는 P에게 창선이 외할머니가 양복을 해줬고 객지에서 혼자 데리고 있기 불편하면 당신에게 보내라고 했다는 말을 전한다. P는 옛날의 반감이 솟아나 자기자식 알아서 어련히 잘 할텐데 무슨 말이냐고 대답한다. P는 창선이 외할머니의 말이 아내의 조종인 줄 알고 화를 냈다. 화가 나는 대로 하면 창선이의 양복도 벗겨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꿀꺽 참았다.

P는 창선이와 일찍 맛보지 못한 새 살림을 시작했다. 창선이가 도착한 날 밤 창선이는 아랫목에서 삭삭 잠을 잤다. P는 창선이를 보고 외롭게 꿈을 꾸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전에 없는 애정을 느꼈다. 이튿날 아침 일찍 P는 창선이를 전에 부탁했던 인쇄소에 데리고 가서 A에게 맡겼다. 안 내키는 발길을 돌이키고 나가면서 P는 중얼거렸다. 레디 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하고 말이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레디 메이드된 인생에 대한 풍자

레디 메이드(ready made)란 누군가에 의해서 이미 만들어져 가게에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구두나 양복 같은 기성품이라는 뜻이다. 레디 메이드 인생이란 기성품처럼 만들어진 실업자들이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이들은 필요한 수요에 맞춰 바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넘치게 만들어져서 팔리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작품이 발표된 1930년대는 지식인 실업자가 대량으로 산출되던 시대였다. 지식인은 자신이 배운 학식과 재능을 써 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무능력자로 살아가야 했다. 단순노동직은 취업이 되는 데 비해 지식인들은 취업이 되지 않는 것은 당시 일제의 정책에 구조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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