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매
구연학 지음 | -
설중매(雪中梅)
스에히로 뎃초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장매선: 신문명의 주창자였던 아버지 덕에 학문적 소양이 깊은 데다 재색 또한 빼어난 처녀. 부모가 죽은 후에도 아버지가 정해준 정혼자 심 청년을 찾으며 정절을 지킨다.
이태순: 장매선의 정혼자 심 청년. 일시 심씨 행세를 한 적이 있으나 본명은 이태순이다. 책을 번역해서 생계를 꾸려가며, 정치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폭력 수단까지 주장하는 과격파들에 반대하여, 차츰 지식을 계발하고 공론(公論)을 변화시킴으로써 개혁을 이룰 것을 주장한다.
하상천: 이태순과 마찬가지로 독립협회에 관여하고 있는 청년. 재주는 뛰어나나 재물 욕심이 많고, 진솔한 마음이 없다. 매선의 미모와 재산을 탐내 그를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민다.
문전철: 다이나마이트 폭발 사건을 계획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아 태순과 함께 체포된 청년. 역시 독립협회 회원이다.
부모 잃은 처녀의 안타까운 정절
“너의 부친 기세(棄世)하신 후 벌써 두 해가 되도록 심랑의 소식은 묘연하고 다만 우리 모녀 서로 의탁하여 지내더니 불행히 나는 병이 깊어 명일(明日) 일을 알지 못하겠으니 너도 깊이 생각하여 결정할 일이 있도다.”
병색이 완연한 부인이 자리에 누운 채 딸을 불렀다. “아가, 매선아, 이리 좀 오너라.” 하는 소리에 나타난 딸 매선은 16~17세쯤 된 얌전한 처녀다. 매선은 어머니가 잠이 든 듯하여 나아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고 하면서, 약을 들 시간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부인은 약 먹기도 싫다고 얼굴을 찡그리며, 자기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라 했다. 심약(心弱)한 말 하지 말라는 매선에게 의원 역시 그렇게 진단하지 않았느냐고 채근했다. 매선은 극구 부인하지만 부인은 1년여 간 중병을 앓아온 처지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면서, 혼자 남을 매선 걱정을 했다.
매선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 버린 지 오래요, 매선과 정혼한 심랑(沈郞) 역시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어째야 하겠느냐는 한탄이었다. 부인은 병을 이기지 못해 잠깐 혼곤히 누웠다가, 다시 깨어나 딸의 아리따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는 심랑의 얼굴을 기억하기는 하겠느냐고 묻었다. 매선은 얼굴을 연지빛으로 물들이며, 심랑의 사진은 잘 간수하고 있으나 열세 살 때 사진이라니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염려가 있다고 답했다. 부인은 다시 한탄하면서 지난 일을 회상했다.
부인은 매선에게 심랑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혼처를 구할 것인지 의향을 묻었다. 매선은 한참 생각한 후, 이왕 맺어진 언약이고 심랑의 인품과 재주가 출중하다 하니, 2~3년 간 여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그 후에도 심랑의 소식을 듣지 못하면 숙부와 의논해 보겠다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희색이 만면하여 매선을 어루만지면서, 필경 2~3년 안으로 심랑의 소식을 듣게 되리라고 위로했다. 매선의 마음을 알았으니 죽어도 걱정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당부하는 말은, 숙부는 본래 타인인 데다 깊이 믿지 못할 사람이라, 아버지가 일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립회관 연설회의 청년 연사
뒤미처 한 소년이 나아와 단 위에 오르니 그 소년의 나이는 이십사오세 가량이요, 몸은 조금 파리한 듯하고 흰 얼굴에 검은 눈썹이요 입술이 붉고 눈이 맑으며 의위당당하여 사람이 감히 범하지 못할 듯하더라. 그러하나 다만 머리에 운동모자를 쓰고 몸에 회색 목주의를 입었으며 혼구쓰를 신었으니 묻지 아니하여도 초초한 일개 서생인 줄을 알겠더라.
이 때는 춘삼월이라, 날씨가 좋아 사람들 왕래가 많은 중에, 어느 두 신사가 양복을 입고 오다가 독립회관에서 정치 연설을 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연설회 구경을 하기로 의기투합, 둘이 독립회관에 도착해 보니 문간에는 순검(경찰)이 서서 들어가는 사람 이름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은 주소까지 수첩에 적고, 학생이 아니라는 확약(確約)을 받은 후에야 들여보내고 있다. 본래 어떤 정치 연설이든지 치안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인가하지 않고, 인가한 후에도 연설장에 경찰관이 파견을 나가 언론이 과격해지면 연설회를 중지시키는 법규가 있는 까닭이었다.
두 신사가 순검을 거쳐 연설장에 들어가 보니 어떤 사람이 한창 연설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연사 옆에는 경찰 두 명이 칼을 짚은 채 의자에 앉아 있고, 서기가 연설을 기록하고 있으며, 벽에는 연사의 성명과 연설 주제를 적은 종이가 걸려 있다. 첫번째 주제는 분발해야 할 필요니 연사는 권중국이요, 두 번째 주제는 동포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는 것이요 연사는 전학삼이며, 세 번째 주제는 동등의 권리라는 것으로 연사 문전철, 네 번째 주제는 사회 형편은 행인의 거취와 같다는 것으로 연사 이태순, 다섯 번째 주제는 정당간 경쟁 원리의 필요이니 연사 하상천이다.
두 신사가 들어갔을 때는 세 번째 연사 문전철이 연설을 끝내갈 무렵이라, 영국․미국처럼 국민 사이의 동등 권리에 기반한 정치를 행해야지 독일․러시아처럼 압제 정치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맺음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다음 연사가 등장한다. 스물너댓쯤 된 청년인데, 당당한 위엄을 갖추고 있으나 의복은 초라하니 일개 서생(書生)에 불과한 것이 명백했다. 이 청년은 이태순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후, 어떤 사람이 지방에 내려가는데 도로가 험한 데다 중도에 풍우까지 만나 진로가 더디었다는 말을 하고는, 짧은 여행도 이러한데 십 년을 계획하는 긴 길이야 어떻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근래 협회가 정부 공격하기에만 급급하여 독립심을 키우고 자유 권력을 양성하는 일은 소홀히 하는 감이 있는데, 인재를 뽑아 분야별로 훈련시키며 무조건 격렬한 주장만을 일삼는 언론을 자제해야 내실을 기하고 먼 길을 갈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 청년의 연설은 유창하고도 감동적이라, 좌중이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청년은 학문가와 실천가가 협력하고, 부패한 문벌 사상을 타파하며, 격렬한 언론 대신 보통 지식으로 인민을 계몽하는 한편 실제 사업에 힘쓰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라고 역설하고 연단을 내려갔다. 이어 마지막 연사 하상천은 병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안내가 나온 후 연설회는 성황리에 폐회되었다.
배경이 바뀌어 여관 하숙방이다. 이태순이 『전국책(戰國策)』을 읽다가 유명한 재상 장의가 수모를 당하는 대목을 보고, 세 치 혀로 천하를 움직인 소진 역시 한때 출세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족의 수모를 받았으니 지금 자기 모습을 연상케 하는 바 있다고 탄식을 발하고 있다.
바닥에 깐 자리가 군데군데 헤어지고 서양책․중국책 몇 권이 꽂혀 있을 뿐인 방에서 이태순은 그래도 소진처럼 끝내는 큰 사업을 성취하리라고 다짐했다. 이 때 전성조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전성조는 지난 번 태순의 연설에 대한 평판이 굉장하다고 전하면서, 특히 연설회에서 태순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여자가 있었다고 놀려댄다. 그러나 태순이 자기는 연설하면서 여자 얼굴이나 훔쳐보는 정신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정색을 하자, 무안해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요즘 기색이 불평할 때가 많으니 무슨 근심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태순은 조금 주저하다가, 사실 옹졸한 일이나 생활하기 어려운 것이 근심거리라고 털어놓았다. 책을 번역하는 것이 유일한 생계거리였는데, 얼마 전 번역해 넘긴『근대사』번역비를 출판사에서 주지 않은 까닭에 여관비마저 밀렸다는 사정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성조는 자기 역시 부모가 때때로 돈을 부쳐달라는 청구를 하여 괴롭다고 하면서, 자식이 부모를 책임지는 풍조는 서양에는 없지 않냐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태순은 자기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 서양 풍속에도 동양 풍속에도 다 장단점이 있을 터인데 무작정 서양 풍속을 모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옛 풍속대로 자식이 봉양해 줄 것을 당연히 기대 하는 데다 자식 또한 부모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 있으니, 이 경우는 서양 풍속만을 따를 수는 없으리라고 했다. 서양 풍속 가운데 아름다운 것, 예컨대 일부일처제 하나 제대로 따르지 못하면서 부모에 대한 도리를 저버릴 궁리부터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둘 사이의 화제는 정치 노선에 대한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태순이 부모에 대한 도리는 도리더라도 사회에 나선 이상 뜻을 변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리라 하니, 성조는 결사당을 조직해서 비밀한 수단을 써야만 협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반면 태순은 과격한 수단에 의지하기보다 공론(公論)을 좇아 개혁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엄연한 이치인 이상, 무모하게 덤벼들기보다 힘을 키워 경쟁에 나서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성조는 자못 불평스러워 하면서 협회원들 생각이 다 태순과 같으냐고 묻었다. 태순은 곰곰 생각하다가, 하상천은 속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무리한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요, 다만 재물을 지나치게 좋아함이 흠이며, 문전철은 정직한 사람이지만 언론이 너무 황당하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후 성조를 바래다주고 방에 들어오는데, 문 밖에서 “서방님 계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사람은 여관 주인 구두쇠다. 여관비를 독촉하러 온 판이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좀더 있다가는 욕지거리가 나올 판인데, 여관 하인 금년이 가만히 들어왔다. 그리고는 태순 앞에 편지가 왔다가 봉투를 내어 놓았다. 뜯어보니 “그대의 근본 뜻을 이룸이 멀지 아니할지니 목전의 군색함을 근심 말지어다. 무례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별봉을 바치나니 지금은 아직 나의 종적을 명백히 말씀하지 못할지라.”는 편지가 들어 있고 지폐 30원이 함께 들어 있다. 태순은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보낸 것인지 짐작할 수 없으나, 워낙 다급한 판이라 구두쇠에게 여관비를 지불했다.
구두쇠는 기뻐하며 누구나 태순이 장래 유망하리라 칭찬한다고 아부하면서, 차를 가져와라 화롯불을 다시 지펴라 요란스럽게 떠들었다. 그러면서 다른 방에 있던 학생이 여관비를 내지 못해 대신 맡겨 두고 간 책이 있노라는 말과 함께 정다산 문집 네 권과 일어『국민독본』두 권과 일영사전『다이아몬드』라는 책을 내 보였다.
태순은 문전철이『다이아몬드』를 구하던 생각을 하고 그 책을 사기로 한 후 전철에게 편지를 쓰는데, 주인이 옆에서 ‘다이아몬드’를 ‘다이너마이트’라고 잘못 말하는 바람에 편지에도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써서 전달을 부탁했다.
태순의 돌연한 체포와 매선과의 만남
이태순이 북한산 북한사에서 우연히 초막에 있는 한 여자와 글을 화답한 후로 세상에 범상한 부인은 눈꼬리로도 보지 아니하던 성미로되 철석 같은 심장이 자연히 황홀한지라.
하상천의 방. 아홉 시나 되었다고 일어나길 독촉하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신문에 놀랄 만한 기사가 났다고 했다. 상천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독립협회 회원 이태순과 문전철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신문에는 이상한 편지가 문제되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자세한 사정은 없다. 두 사람은 서로 자세한 사정을 모르냐고 묻다가 옆방 송군서를 불러 이야기를 들었다. 송군서의 말을 빌면 태순이 전철의 부탁을 듣고 폭발약을 준비했다고 하고, 이 사실을 증명할 필적도 있다고 들었다 했다.
태순은 5월 10일 아침, 일이 있어 외출하려다가 난데없는 순검의 방문을 받았다. 순검은 태순을 북서 경무청으로 호송한 후, 다시 여관에 와서 책도 압수해갔다. 그리고 경무청에서 심문하기를, 교우 관계 특히 문전철과의 관계를 자세히 이야기하며 전철에게 무슨 결심을 촉구한 일이 없느냐고 했다. 태순은 전철의 일본 유학 계획을 격려한 적이 있었다고는 했지만, 경찰은 일전 태순이『다이아몬드』사전을 사 놓았다고 보냈던 편지를 내놓았다. ‘다이아몬드’라고 적은 자리에는 ‘다이나마이트’라고 적었다가 지운 자취가 역력히 보이고, 친구의 이론을 듣지 말고 결심하라는 글귀도 보였다. 경찰은 이를 수상하게 생각한 데다 같은 날 익명의 편지에 돈 30원이 동봉되어 날아왔다는 사실까지 포착해서 이 점을 추궁한 것이다.
태순은 꼼짝없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서소문 안에 있는 감옥서인데, 밤에도 등불을 켜지 않고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았다. 겨울에는 담요 하나로 추위를 견뎌야 하니 수족이 얼어 터지고, 여름에는 내리쬐는 햇볕을 피할 곳이 없어 찌는 듯한 더위를 겪어야 했다. 살아서 지옥에 온 것 같은 참경(慘景)이다. 태순은 이를 보면서 감옥을 개량해야 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러면서 자칫하면 이 감옥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몇 년 전 장씨 집 데릴사위로 갔더라면 이런 고초를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두 달이 지난 7월. 북한산에 있는 어느 절이다. 이 절 한편 승방에는 어떤 부인과 소저가 함께 와 있는데, 소저가 글 읽는 소리가 매일 청아하게 들렸다. 함께 온 부인은 어머니인지 숙모인지, 50세쯤 된 이라고 했다. 청년 하나가 글 읽는 소리를 듣다가 밥 짓는 할멈을 불러 이런 사연을 들으니, 할멈은 한 마디 덧붙여 청년이 올 때 소저 얼굴에 반가운 표정이 돌았으며 언젠가 사진 한 장을 손에 들고 보는데 청년 얼굴 비슷하더라고 했다. 이 청년은 다름 아닌 태순이다. 몇 달을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별다른 증거가 없어 풀려났지만, 한여름 내내 고생한 때문에 절에서 소풍이나 할까 온 참이었다.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감동하여 할멈에게 사연을 물은 터이지만, 사연을 듣고 보니 자못 괴이쩍었다. 태순은 의심스러운 마음을 담아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서상의 밝은 달이여 누구를 위하여 비추었소. 청조의 사자가 없음이여 나의 회포를 어찌 전할고.” 이를 들은 듯 글 읽던 소저도 청아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일신의 처량함이여 하늘 높고 땅이 두터움을 모르도다. 사람은 같고 성이 다름이여 백년을 의탁할 곳이 아득하도다.” 이를 듣고 태순이 생각하니, 부모 잃은 처지요 정혼자가 없음을 알겠으나 다만 “사람은 같고 성이 다름이여”라는 구절은 이해하기 어려운 터였다.
태순은 글 읽던 소저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자연히 늦게 잠들어 늦게 깨어났는데, 밥 짓는 할멈이 방문을 열고 건넌방 소저는 벌써 떠났다고 알려줬다. 태순이 깜짝 놀라며 혹시 무슨 전갈이 없었냐고 물어보니, 할멈은 글 한 편을 건네줬다. “적설이 공산에 가득하니 초목이 모두 영락하도다. 외로이 서 있는 저 소나무는 굳센 절개를 변치 아니하는도다. 조물이 부질없이 시기함이여, 인생이 달같이 둥글기 어렵도다. 뒷기약이 아득함이여, 신(信) 있는 군자에게 맡김이로다”라고 적혀 있었다. 태순은 마지막 구절이 자기에게 부탁하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주지승에게 소저의 연락처를 물어봤다. 그리고 소저가 서울 사는 매선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태순은 또한 소저 일행의 행선지를 물어 문산포를 향하고 갔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러나 마침 그 날부터 비가 오고 건강 또한 좋지 않으므로 며칠을 연기하다가, 사오일 후 마침내 문산포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에 태순은 주점에 들렀다. 문산포가 20여리 밖에 안 남은 곳이었다. 휴식을 마치고 태순이 다시 출발하려 하는데, 가마 하나가 와 닿더니 어떤 젊은 여자가 가마에서 나와 태순을 정신없이 쳐다봤다. 여자는 다름 아닌 매선이였다.
매선은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 후 숙부 권첨사 내외와 함께 살다가 숙모인 권첨사 부인을 따라 여행을 떠난 참이었다. 권첨사는 매선이 집을 비운 틈을 타 매선의 부모의 재산을 전당 잡히려 했다. 그렇게 가 닿은 절에서 매선과 태순이 글을 주고받는 소리를 듣고 권첨사 부인이 혹시 둘이 인연이라도 닿으면 매선의 재산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을 겁내서, 서둘러 문산포로 옮겼다가 올라오라는 전보를 받고 서울로 가는 도중이었던 것이다.
매선은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한편 심랑의 사진을 늘 간직하고 기회 닿을 때마다 연설장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뜻 있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라니 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다 독립회관에서 연설회하는 날 심랑과 꼭 닮은 태순을 보았으나, 성이 같지 않아 의혹을 갖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글을 보내 태순의 뜻을 시험한 것이요, 우연히 부딪힌 이 곳에서 보아도 태순의 얼굴이 심랑을 꼭 닮았으므로, 매선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태순에게 혹시 심씨가 아닌지, 또 장씨 집과 언약한 일이 없는지 묻었다. 태순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매선은 더욱 의혹을 느끼는 참인데, 마침 권첨사 부인이 살기등등하게 다가오더니 가마에 오를 것을 재촉했다. 매선은 어쩔 수 없이 가마에 실려 사라지고, 태순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곁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