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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정

이광수 지음 | -
무정

이광수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형식: 경성학교 영어교사. 개화기 지식인의 면모를 보인다.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 어느 여인을 선 택해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결국 선형과 약혼하여 미국 유학을 떠난다.

영채: 형식과 어렸을 때 정혼한 여인. 그러나 현재는 기생. 기생이면서도 형식을 위해 정절을지킨다. 배학감에게 강간을 당한 후 죽음의 길을 택하려 했으나 우연히 병욱을 만나 자아에 대한 의식을 깨닫고 일본 유학의 길에 나선다.

선형: 신여성의 면모를 보이나 그렇지 못한 면도 많다. 형식에게서 영어를 배운다. 형식이 진정으 로 자신을 사랑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다.

병욱: 죽기 위해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영채를 죽음에서 구하는 일본 유학생. 영채의 의식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나중에 영채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





형식, 선영과 영채를 만나다

형식은 얼른 선형을 생각하였다.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그 부모의 귀여워함은 피차에 다름이 없건마는 현재 두 사람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다른고. 하나는 부모 갖고, 집 있고, 재산 있어 평안하게 학교에도 다니고, 명년에는 미국까지 간다 하는데, 하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어디 의지랄 곳이 없어 밤낮을 눈물로 보내는고.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은 수업을 마치고 김장로의 집으로 갔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그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개인지도 하기 위해서다. 형식은 아직 독신이라 여자와 가까이 교제하여 본 적이 없어 젊은 여자를 대하면 자연 수줍은 생각이 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찾아간 김장로의 집에서 형식은 선영을 만났다. 눈썹과 입만 가지고도 익히 미인이라 할 수 있는 선형은 누이를 많이 닮았다. 형식은 남의 처녀를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선형과 그녀의 친구인 순애를 놓고 알파벳을 가르치고 형식은 자신의 하숙으로 돌아왔다.

주인 노파가 저녁상을 차리다가 “이 선생 웬일이시어.” 하며 이상하게 웃더니 아까 어떤 어여쁜 아가씨가 찾아왔더라는 말을 전했다. 머리는 여학생 모양으로 하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기생 같더라는 것이다. 저녁때가 지나서 형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돌아오셨어요?” 낮에 왔다던 젊은 여자였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박응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연이어지는 여자의 물음에 형식은 그녀가 십 년 전 자신이 몸을 의탁하고 있던 박진사의 딸 영채라는 걸 알았다.

박진사는 고아가 된 이형식을 문하에 두고 신학문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는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헌신적인 사람이었으나 결국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다가 나중에는 제자의 잘못으로 감옥에까지 갔다. 그리하여 형식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때 영채와 형식도 헤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7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 그녀가 형식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당시 암묵적인 혼약이 이루어져 있었다.

“선생님을 뵈오니 돌아가신 부친과 오라버님들을 함께 뵈온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가신 뒤에 이삼일이나 더 있다가 저는 외가로 갔습니다.” 영채가 서럽게 울었다. 쓰러져 울던 영채는 그간의 자신의 삶의 내력을 털어놓았다. 외가에서 그녀는 물긷고 불때며 오만 어려운 일을 다 하면서도 맏오라버니댁의 자심한 구박을 받았다. 그러던 것이 은가락지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녀는 도둑으로 몰리게 되고 결국 그녀는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또 아버지가 계신 평양 감옥으로 가던 길에 악한에게 잡혀가 욕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형식은 그러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그녀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느끼기도 하고 그녀를 선형과 대비해 보기도 했다. 영채는 영채대로 형식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기생으로서의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사실 어렵게 아버지가 계신 평양 감옥에 도착하지만 만사가 어린 영채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는 사람의 꾀임에 빠져 영채는 기생으로 자신의 몸을 팔았다. 그러나 영채는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몸을 허한 적은 없다. 형식을 생각한 때문이다. 영채는 형식의 얼굴을 보매, 자기를 만난 것을 반가워하는 것과 자기의 신세를 불쌍히 여기는 줄은 알건마는 만일 자기가 몸을 팔아 기생이 되어 오륙 년간 불량한 남자의 노리개가 된 줄을 알면 형식이 얼마나 낙심하고 슬퍼할까 생각했다.

"내가 왜 기생이 되었던고. 왜 남의 종이 되지 않고 기생이 되었던고." 영채는 한숨을 쉬며 눈물을 씻고 형식과 노파를 바라본다. 영채는 “일후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형식 앞을 떠났다. 형식은 한참 망연히 섰다가 모자도 아니 쓰고 문 밖에 뛰어나갔다가 많은 행인 중에서 그녀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늦도록 영채 생각에 젖었다.



배학감과 월향

형식은 교문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하였다. 그 월향이란 것이 영채가 아닌가. 어제 영채가 자신을 찾아옴도 이러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내게 의탁할 양으로 온 것이 아닐까. 와서 내 의복과 거처가 극히 빈한함을 보매, 나에게 구원을 청하여도 무익한 줄을 알고 중도에 말을 그치고 돌아갔음이 아닐까.

이튿날 형식은 여덟 시가 지나서야 일어나 조반을 먹고 있을 때 경성학교 학생들인 김종렬과 이희경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자신들은 동맹퇴학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경성학교 학감 겸 지리역사를 담임한 교사인 배명식이 술을 먹고 화류계에 다니매, 청년을 교육하는 학감이나 교사될 자격이 없을 뿐더러 또 매양 학생 전체의 의견을 무시하고 학과의 배당과 기타 모든 것을 자기의 임의대로 하며 학생의 상벌과 출석이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형식은 그냥 있을 수 없어 급히 학교로 나갔다. 그러나 배학감은 학생들이 자기를 배척하는 것이 형식이가 철없는 학생들을 유혹하여 고의로 자기를 배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배학감은 아랫사람에게는 대하는 것은 혹독하면서도 윗사람에게 대하는 것은 오래 먹인 개가 그 주인을 보고 꼬리를 두르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교주 김남작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배학감이 없는 틈을 타 교원들이 “학감과 월향의 사건”을 떠들어댔다.“모르시오? 학감과 월향의 사건이라고 유명합니다. 근래에 월향이란 기생이 화류계에 썩 유명합니다. 평양서 두어 달 전에 왔다는데 얼굴은 어여쁘지요, 글을 잘하지요, 말을 잘하지요, 게다가 거문고와 수심가가 일품이라는구려. 그래서 아마 장안 풍류 남아가 침을 흘리고 덤빈다는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어요. 아직 아무도 그를 손에 넣어 본 사람이 없다는구려. 학감이 암만하여도 견딜 수가 없어서 요새에는 단연히 그 기생을 낙적을 시켜서 아주 자기 손에 집어 넣으려 하는데 경쟁자가 많아 그 값이 천 원까지 올랐다는구료."

형식은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그 월향이란 것이 영채가 아닌가. 어제 영채가 자신을 찾아온 것도 이러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내게 의탁할 양으로 온 것이 아닐까. 사실 형식은 영채를 구원할 능력이 없었다. “천원! 천원을 어찌하는고" 형식은 마음이 괴로웠다. 전달에 탄 월급 삼십오 원 중에 오 원은 플라톤 전집 값으로 동경 책사에 부치고 십 원은 학생들에게 갈라주고, 팔 원은 주인 노파에게 밥값으로 주고 이제 돈지갑에 남은 것은 오 원 지표 한 장과 은전 몇 푼이다. 형식은 마음이 괴로웠다. 이럴까 저럴까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형식은 선형을 가르치러 간다.

“선생님”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본즉, 선형과 순애가 서있다. 형식이 눈을 뜨매 그녀들은 은근하게 경례를 한다. 형식은 두 처녀를 바라보매 얼마큼 뒤숭숭하던 생각이 없어졌다. 수업을 끝내고 김장로의 집을 나온 형식은 이희경을 찾아가 그와 더불어 월향의 집을 찾아나섰다.

한편 형식을 만나고 돌아온 영채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회한에 젖었다. 그녀는 기생이 되어 처음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월화를 생각한다. 월화는 그녀에게 “너는 부디 세상 사람에게 속지 말고 일생을 너 혼자 살아라. 만일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든”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기생이다. 영채가 그 동안 정절을 지켜온 것도 그 월화의 힘이 컸던 것이다.

영채는 형식이 아직 혼인을 아니 하였다는 말을 듣고 잠깐 기뻐하였으나, 자기가 기생인 줄을 알면 형식은 반드시 자기를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생각한다. 또 설혹 돌아볼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돈이 있고야 구원할 몸이어늘, 가만히 형식의 살림살이를 보니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영채의 위기, 강간과 죽음

여자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흑흑 흐느낀다. 손과 발을 동여매였다. 그리고 치마와 바지는 찢기었다. 머리채는 풀려 등에 깔렸고 아랫입술에는 빨간 피가 흐른다. 형식은 얼른 치마로 몸을 가리우고 손발을 동여맨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이희경을 따라 월향의 집을 찾아온 형식은 당황했다. 형식으로서는 그러한 집을 드나든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월향의 집안으로 들어서자 저편 방에 이렇다 하는 화류자개 장롱이 보이고 아랫목에는 분홍빛 그물 모기장이 걸리고, 오른편 구석에는 아롱아롱한 자루에 넣은 가야금이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바라보는 형식의 머릿속에는 수천 가지 생각이 이어진다. 그는 어색하게 “월향씨”를 찾는다. “아까 오후에 청량사에 나갔소. 여섯 점에 들어온다더니 아직 아니 오는구려.” 응대나온 노파가 대답했다. 형식은 이 말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 듯이 생각하고 몸이 오싹했다.

“영채가 혼자 어떤 남자로 더불어 청량사에 가 있어! 더구나 밤이 여섯 시가 지났는데! 옳다. 청량사로 가자.” 형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식의 귀에는 “형식씨, 나를 건져 주시오. 나는 지금 위독하외다.” 하는 영채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형식은 전차를 탔다.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의 땀을 씻었다. 누군가가 형식의 어깨를 친다. 신우선이었다. 형식은 우선의 귀에 입을 대고 “여보게, 큰 일이 났네” 하였다. 형식은 우선의 팔을 당기며 다시 말을 이어 간다. 자기의 은인의 딸이 기생의 몸이 되어 있는데 지금 청량사에서 어떤 사람에게 위협을 당하는 중이라고, 자기는 지금 구원을 가는 길이니 도와 달라고. 신우선은 그 기생 이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형식은 “본명은 박영채인데 계월향이라고 한다네.”라고 답하면서도 ‘계월향’이가 과연 ‘박영채’인가 하고 의심도하여 본다.

우선은 계월향이라는 말을 듣고 또 계월향이가 형식의 은인의 따님이라는 것과 월향이가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선은 전에 월향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려 본다. 그때 월향은 간접적으로 형식에 대한 소식을 탐문했던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경성학교 교주 김남작의 아들 김현수와 배명식이 월향을 청량사로 데리고 갔다는 말에서 월향이 오늘 두 사람 손에 들어가는 줄을 짐작하고 종로 경찰서로 가서 형사에게 말을 한 후 후원을 요청하고 청량사로 향했다.

두 사람은 청량사에 다다랐다. 두 사람의 뒤에 형사들도 따랐다. 우선은 김현수가 가는 집을 잘 알았다. 형식은 “여기 영채가 있는가” 하고 다리를 떨며 귀를 기울였다. 똑똑치는 아니하나 여자의 괴로워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형식은 그만 눈에 불이 번뜩하면서 툇마루로 뛰어올라 구두 신은 발로 영창을 들입다 찼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배학감이 여자를 누르고 있었다. 형식은 배학감의 면상을 힘껏 때렸다. 여자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형식은 “이것이 과연 박영채인가” 하면서 “박영채가 아니면 좋겠다” 하였다.

우선은 참다 못하여 “여보시오! 박영채 씨! 여기 이형식씨가 오셨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여자는 몸을 흠칫하며 두 손을 얼굴에서 떼더니 정신 없는 듯한 눈으로 형식을 본다. 형식도 그 얼굴을 보았다. 그는 월향이었다. 박영채였다. 영채도 형식을 보았다. 그는 형식이었다. 청량사에서 다방골로 오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서로 얼굴도 보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우선은 형식을 데리고 계월향의 집을 찾아갔다. 노파는 월향이 평양에 성묘하러 갔다는 말을 전하면서 형식에게 편지 한 통을 내어놓았다. 편지에는 전날에 영채가 형식을 찾아가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사연과 더불어 죽음의 뜻이 담겨 있었다. “선생이시여! 이 몸은 가나이다. 십구 년의 짧은 인생을 슬픈 눈물과 더러운 죄로 지내다가 이 몸은 가나이다. 그러나 차마 이 더럽고 죄 많은 몸을 하루라도 세상에 두기 하늘이 두렵고 금수와 초목이 부끄러워 원도 많고 한도 많은 대동강의 푸른 물결에 더러운 이 몸을 던져 양양한 물결로 하여금 이 몸을 씻게 하고 무정한 어별로 하여금 죄 많은 이 살을 뜯게 하려 하나이다.”

형식은 그 길로 노파와 함께 남대문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형식은 차창을 열고 멀리 능라도 편을 바라보았다. 영채의 시체가 바로 철교 밑으로 흘러내려오는 듯하여 창밖으로 머리를 내어밀어 물을 내려다보았다. 평양역에 내린 두 사람은 전보를 쳐 놓은 경찰서로 가 보았으나 영채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노파와 형식은 노파의 아는 집을 찾았다. 역시 기생집이다. 어린 기생 계향이 형식의 옆에서 온갖 아양이다. 형식은 그 어린 기생의 말과 모양을 보고 무슨 맛나는 좋은 술에 반쯤 취한 듯 쾌미를 느꼈다. 그 조그마한 손으로 자기의 넓적다리를 가만가만히 때릴 때에는 마치 몸에 전류를 통한 때와 같이 전신이 자릿자릿함을 깨달았다.

형식은 다음날 계향과 함께 칠성문에 다다라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형식은 계향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은 동그스름하다. 두 뺨이 불그레하다. 적삼 등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형식은 선형의 적삼에 땀이 배어 있던 것을 생각하고 빙긋이 웃었다. 계향과 형식은 영채의 아버지인 박주사와 그의 아들들의 무덤을 찾았다. 그러나 형식은 슬퍼하지 않았다. 형식은 무슨 일을 보고 슬퍼하기에는 마음이 즐거웠다. 그는 영채를 생각했다. 영채의 시체가 대동강으로 둥둥 떠나가는 모양을 생각했다. 그러나 형식은 슬픈 생각이 없었고, 곁에 있는 계향을 보매 한량없는 기쁨을 깨달았다.



형식과 선형의 약혼과 영채의 재생

그 말이 옳은 것 같다. 과연 지금토록 형식을 사랑한 적은 없었고, 다만 허깨비로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형식이라 짓고, 그리고는 그 사람과 형식을 진정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하략). 이렇게 생각하매 영채는 잘못 생각하였던 것을 깨닫는 생각과 또 아직 절망하였던 중에 새로운 광명을 발하는 듯하다.

평양서 올라 올 때 형식은 무한한 기쁨을 얻었다. 형식은 외롭게 자라났다. 부모의 사랑이라든가, 형제자매의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그러다가 경성학교 교사가 되어 여러 소년들과 가까이 접하면서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형식은 동경유학에서 배운 신학문의 내용과 정신을 학생들에게 열성으로 가르쳤다.

평양에 다녀오느라 며칠 수업에 빠진 형식은 반가운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희경이가 형식을 슬쩍 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는 그동안 어디 갔다왔느냐고 물었다. 평양 갔다 왔다는 말에 누구하고 갔다 왔느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형식은 말이 막혔다. 학생들 사이에서 “계월향이 따라서 후후.” 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떨리는 목소리로 학생들을 향해 “사 년간 교정이 이에 다 끊어졌소. 나는 가오.” 하는 말을 남기고 교실을 나온다. 교실에서 웃는 소리,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배학감은 “아마 재미 많으셨겠습니다. 평양 경치 좋지요?” 한다. 형식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학교에는 사표를 제출하면 될 것이나 목숨의 뿌리를 잃어버린 현실이 슬픈 것이다. 다시 어디다 뿌리를 두고 살아야 할지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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