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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

이인직 지음 | -
모란봉

이인직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옥 련: 평양성에 사는 김관일과 최씨 부인 사이의 외동딸. 청일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일본인 군의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건너간다. 그후 다시 구완서를 만나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다. 자신을 좋아하는 서일순과 그에게서 돈을 빼내려하는 서숙자의 음모로 괴로움을 당한다.

김관일: 옥련의 아버지. 청일전쟁을 겪은 후 깨달은 바 있어 미국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후에 역시 미국 유학을 온 외동딸 옥련과 우연히 해후한다.

최씨 부인: 김관일의 부인이자 옥련의 어머니. 난리 통에 가족을 잃자 자살을 결심하고는 대동강 다리에서 몸을 던진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근심과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낸다. 남편이 귀국할 때 죽으러 도망갔다가 서일순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 옥련에게 서일순과 결혼하라고 강요한다.

구완서: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로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진 젊은 남성. 미국 유학길에 잠시 머문 일본에서 우연히 옥련을 만나 그녀의 후원자가 된다. 후에 옥련과 결혼을 약속한다.

서일순: 돈이 많은 미남자로 옥련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상사병에 시달리다 친구 최여정과 서숙자의 도움을 받아 음모를 꾸민다.

서숙자: 원래 최여정의 집에서 행랑을 살면서 시중드는 여자인데, 최여정과 같이 서일순을 도와주고돈을 얻으려 한다. 그래서 서일순의 누나 행세를 하기 위해 이름을 서숙자로 바꾼다. 별명은 하늘밥도둑. 하느님 밥상도 훔치려 드는 엉큼한 계집이라는 의미.



님과의 이별과 귀국의 길

열요(熱鬧)하기로 유명한 샹푸란시쓰코의 야소 교당 쇠북소리는 세간진루가 조금도 없이 맑고 한가하고 고요하고 그윽한데, 여음이 바람을 따라 흩어져 나가다가 수천 미돌(미터) 밖의 나지막한 산을 은은히 울리며 스러지고, 산 아래 공원 속에 가목무림 푸른빛만 보인다.

화창한 일요일 공원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다. 공원 연못가에서 옥련이 고기들을 바라보고 있다. 옥련은 지금 자신의 지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모란봉 밑에서 총을 맞고 살아난 일, 일본으로 가던 일, 구완서를 만나 미국 유학을 하던 일 등을 떠올리면서 감회에 젖어 있다. 이때 옥련을 부르는 부친과 구완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김관일이 딸 옥련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구완서는 이곳까지 작별하러 따라온 것이다. 처음에 김관일의 생각에는 옥련을 몇 해 더 공부시켜 조선 부인사회 중에서도 우수한 학문의 실력을 성취한 후에 데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옥련이 과거 청일전쟁 때 당한 괴로움을 떠올리면서 모친에 대한 그리움이 커가면서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완서는 김관일이 자기 딸과 지금 결혼하라고 하자 10년만 더 공부하고 조선에 돌아가 결혼하겠다고 미룬다. 10년이 지나면 옥련이 27세가 되고 구완서는 32세가 된다. 워싱턴에서 작별하기가 너무 안타까워 샌프란시스코까지 따라왔다가 하루 지체하고 공원 구경을 간 것이다.

김관일은 구완서에게 묻는다. 10년 후에 돌아와 옥련과 결혼할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느냐고. 구완서는 염려 놓으라고 하고, 김관일은 다시 부모가 반대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니 구완서는 설득해보다가 안되면 자유결혼이라도 하겠다고 한다. 그러자 김관일은 안심한다. 그날 저녁 셋은 호텔로 가서 머문다. 옥련은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구완서만을 생각한다. 구완서가 들어와서는 작별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간다. 옥련은 날이 밝으면 구완서와 이별이라고 밤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다. 그랬다면 만나고 싶을 때 마음대로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명이인으로 인한 소란

평양은 하나이나 옥련은 둘이라. 하나는 김옥련이요, 하나는 장옥련이다. 김옥련의 집은 평양 북문 안이요, 장옥련의 집은 평양 남문 밖이다. 김옥련은 열일곱 살이요, 장옥련은 열여섯 살인데….

평양에 옥련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둘 있었다. 하나는 김옥련이요, 다른 하나는 장옥련이다. 둘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예쁘다. 아침 안개 희미한데 힘없는 봄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지는 두견화같은 쪽은 장옥련이고, 누각에 눈 쌓이고 사창에 달 돋는데 반쯤 핀 매화 같은 쪽은 김옥련이다. 장옥련의 부친은 장치중으로 그는 본래 부인과 금슬이 좋았다. 장옥련이 일곱 살 때 안씨부인이 병이 들었는데, 장치중은 지성으로 보살핀다. 덕분에 안씨부인의 병은 낫는다.

그러던 중 장씨가 평양 기생 농선이를 첩으로 들여앉히더니 안씨부인을 박대하기 시작한다. 어느날 농선이 자기 남동생을 시켜 부인을 모함하려 한다. 깊은 밤에 동생을 부인 방 옆 담에 있으라 하고 장치중에게 부인이 외인과 통간을 한다고 무고한다. 그러면서 한번 직접 보라고 한다. 장치중이 나가자 남동생이 담을 훌쩍 뛰어 넘고 이를 본 장치중은 자기 부인이 다른 남자와 그릇된 일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이튿날 자기 부인이 통간을 했다고 욕을 한다. 너무 억울한 사실에 부인은 유서를 남기고 대동강 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다.

장옥련은 농선이 자기 부친에게 어머니 욕하는 것을 듣고는 울분에 겨워 자기도 죽으려 한다. 그리고는 밤거리로 뛰어 나간다. 캄캄한 밤에 누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아 도망을 가다 정승에 부딪친 장옥련은 그만 미쳐 버린다.

바로 이날 평양 북문의 김옥련의 부인 최씨부인은 내일 남편 김관일과 딸 옥련이 온다는 사실에 가슴을 설레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다음날 날이 밝자 미친 장옥련이 어머니를 부르며 평양 성내에 들어와 돌아다닌다. 그러다 우연히 김관일의 집으로 들어서며 옥련이가 어머니를 보러 왔다고 한다. 이 소리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힌다. 최씨부인은 진짜 옥련이 온 줄 알고 얼마나 오랜만이냐, 아버지는 어찌하여 떨어졌느냐 묻는다. 최씨부인이 청일전쟁이 나고 10년만에 보는 것이니 그 얼굴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이에 장옥련은 다음처럼 대답한다. 아버지가 서모에게 혹하여 어머니를 원수같이 미워해서 눈에 띄면 죽이겠다고 하고 옥련이도 죽일 년이라고 해서 모르게 도망나왔다고. 최씨부인은 기가 막힌다면서, 첩에게 혹해 처자를 의심한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며 한탄한다. 동시에 첩에게 모함을 당하더라도 근심될 것 없고, 남편에게 박살난다 하더라도 겁날 것 없이 죽으면 되니 근심할 것 없다고 옥련에게 말한다.

장옥련은 갑자기 최씨부인을 보더니 요년이 모녀를 모함하던 서모라면서 하나님에게 벼락을 내리라고 한다. 최씨부인은 옥련이 구박을 너무 받아 실성한 줄 알고 장옥련을 껴안고 운다. 이때 김관일이 옥련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집안에 있는 노파는 그것을 보고 최씨부인에게 서방님이 어디서 여자를 데리고 온다고 전달한다. 최씨 부인은 자신을 박살내려 오는구나 하고 차라리 물에 빠져 죽자 하면서 부엌 뒷문으로 도망을 간다.



절개를 지키는 지혜

구름같은 차일 밑에 앞 뒤 휘장 둘러치고 진수성찬과 갖은 풍악을 베풀어놓고 김씨부녀가 십년 간에 해외풍상에 고생한 것을 위로하고 지금 가속이 서로 만난 것을 경축하는 회인데 회원이 삼백여 명이라.

그 일주일 후 평양성내 유명한 신사들이 김관일의 귀국환영회를 연다. 이 자리에 김관일은 자기 부인과 딸 옥련을 데리고 간다. 이 자리에 최씨부인을 구해주었던 서일순도 참석했다. 서일순의 별명은 삼부지로 서씨의 나이가 벌써 21세인데 장가를 안 간 이유, 돈은 잘 쓰는데 재산이 얼마인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 이렇게 세 가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본래 의주 사람으로 삼 년 전 부친 사후 경성으로 이사를 하고 구경차 평양에 와서 머물고 있다.

얼굴은 관옥 같고 눈은 샛별 같고 입술은 빨갛고 키는 적당한 미남이다. 그날 최씨부인이 자살하러 뛰어 나갈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서일순은 그녀를 쫓고 물에 뛰어들려 하자 구해낸 것이다. 최씨부인은 서일순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갚을까 생각하고는 옥련이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하면 좋을 텐데 한다. 이 자리에서 옥련의 모습을 본 서일순은 한눈에 반해버린다. 옥련이 울적한 마음에 까마귀를 보고 던진 돌이 하필 서일순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남문안 최여정의 집에 기거하던 서일순은 이제 약도 없는 상사병을 앓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여정은 서일순에게 김옥련이 미국에 구완서라는 사람과 미리 정혼을 한 사이라고 전해준다. 이 말에 서씨의 답답증은 커져만 간다. 답답한 마음에 잠도 오지 않는 서일순은 최여정을 붙잡고 같이 술을 나눈다. 이 두사람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이 집 행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계집이다.

그 여자의 별명은 하늘밥도둑으로 하느님 밥상조차도 훔쳐먹으려 하는 앙큼한 계집이라는 뜻이다. 서일순이 최씨 집에 있은 후로 그를 잘 호려서 아내는 못되더라도 첩이라도 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가 데리고 살고 있는 본서방은 내버릴 참이다. 그런데 서일순이 김옥련을 사모한다니 화가 난다.

이렇게 엿듣고 있는 하늘밥도둑을 최여정이 재빠르게 붙잡는다. 최여정은 하늘밥도둑에게 서일순의 일을 잘만 해결하면 돈냥이나 건질 수 있을 것이라면서 자기를 도와달라 한다. 결국 서일순의 손끝에서 황금이 펄펄 나오는 서슬에 최여정의 지혜 주머니가 열리고 하늘밥도둑의 욕심이 부풀대로 부풀었다.

그 계집이 서씨와 남매를 맺어 이름을 서숙자라 짓고 서일순의 장가 들여줄 임무를 맡는다. 평양성내에 혼자 사는 나이 오십 먹은 노파가 있는데 서숙자가 소문을 듣고 그녀를 찾아간다. 극진히 잘 해주고는 그 노파에게 자기 말만 잘 들으면 영감 하나와 논 두 섬지기가 생긴다면서 꼬드긴다. 그리곤 서일순의 집에 와서 일을 거들라고 한다.

그 다음해 서일순의 생일날 김관일 내외와 김옥련을 초대한다. 서일순은 이때 새로 집을 한 채 지어놓고 있었다. 김관일 식구를 붙잡아 두고는 최여정이 서숙자의 원래 남편 허첨지를 시켜 김관일의 집에 불을 지르게 한다. 갑자기 북문 안에 불이 났다는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모두 구경을 간다. 김관일은 자기 집이 이미 타버린 것을 보고는 하인으로 데리고 있던 고장팔의 집에서 기거하겠다면서 가려한다. 그러자 서숙자와 서일순이 자기가 새로 지은 집에 머물라고 애걸을 한다. 김관일은 이 청을 못이기고 그쪽으로 식구를 데리고 가서 살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김씨 부부의 마음에 서일순이 아주 자비심 있는 부처님같이 알고 은혜 갚을 도리만 생각한다. 어느날 서숙자가 옥련과 서일순을 데리고 한방으로 들어간다. 오늘 결정을 짓자는 이야기다. 서숙자는 옥련에게 부모님 목숨을 구하여 준 서일순의 은혜가 큰가 아니면 공부시켜준 구완서의 은혜가 큰가를 따져보라 한다. 옥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다. 이제 최씨부인도 들어오며 자신이 갚지 못한 은혜를 갚을 수만 있으면 대신 좀 갚아달라 한다.

그러면서 벌써 19세인데 언제 8년을 기다리냐면서 자기 사위는 자기 마음에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옥련은 혼인은 혼인, 은혜는 은혜, 서로 다른 문제를 섞지 말라, 결혼은 자기행복을 위해서다, 누구보고 강제로 권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딱부러지게 말을 한다. 그래도 최씨부인은 자기가 죽을 뻔한 것을 구해준 사람이 서일순인데 은혜를 갚아야 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갑자기 옥련이 그러면 어머니 목숨을 구해 드린 은인에게 시집을 가겠다면서 그래도 남편될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일순은 옥련의 말을 듣고 그녀가 결혼을 허락한 줄 알고 당장 사주라도 쓰겠다면서 염려 말라고 한다. 옥련은 서일순의 은혜를 갚지 못하는 것을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좌중을 놀라게 한다. 좀전에 은혜를 갚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서일순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결심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옥련은 자신이 허락을 받을 대상은 고장팔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도 예전에 청일전쟁 때 어머니가 대동강에 뛰어 내렸을 때 고장팔의 배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은혜를 먼저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자신이 구완서에게 혼인을 파약하는 편지를 쓰겠다고 하니 좌중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입을 봉한 듯이 방안이 적적하다.



극악해지는 계략과 음모

그때는 러일전쟁 계엄중이라. 철령 큰 싸움은 승부가 판단치 못하고 함경북도에는 노서아 정탐이 출몰하고 파아적 함대는 동양을 향하여 나오는 때라.

계엄하 인천항 부두에 수상한 남녀가 나타난다. 최여정과 서숙자다. 최여정은 미국으로 가서 구완서에게 음모를 꾸미려하고 서숙자는 경성으로 간다. 서숙자는 삼청동 서부령집을 찾아간다. 이 집은 구과부집으로 남편 서부령이 삼 년 전에 죽고 가난하게 오남매를 키우고 있다. 이 구과부의 친정 오라비 되는 사람이 구즉산인데 그가 바로 구완서의 아버지이다.

서숙자가 구과부를 만나서 서부령과 일가인 체 하면서 아주머니하며 반갑게 군다. 서울 온 이유가 집을 한 채 사려는데, 그 집을 사서 아주머니와 같이 지냈으면 한다고 하자 구과부는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는 바로 오라비 구즉산을 불러온다. 서숙자는 돈 있는 체 하면서 아주머니를 잘 모실 터이니 구즉산도 자신을 조카처럼 여겨 달라 한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구완서에 관한 내용으로 흐른다. 구즉산은 평양에 있는 옥련이라는 여학생을 알고 있느냐고 서숙자에게 물어본다. 서숙자는 말을 한참 돌리다가 옥련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 요악한 계집이 절개나 있는 듯이 방탕한 사람은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으며, 항상 하는 말이 자신은 미국에 있을 때 혼인 정한 사람이 있어 10년 언약을 맺었다하니 모든 사람이 칭찬을 하는데, 서일순이를 털어먹으려 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김관일과 그 마누라도 서일순의 돈을 빨아먹기 위해 딸을 판 나쁜 인간이라고 꾸며댄다.

원래 서숙자는 구즉산의 여동생 구과부를 만나 옥련의 험담을 하려 했으나 직접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구즉산은 하마터면 집이 망할 뻔했는데 서숙자 덕분에 살았다고 고마워한다.(미완)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관념으로서의 애정과 자유결혼

상편 『혈의 누』는 신학문의 섭취에 의한 국권의 자주적인 확립이 가장 중추적인 주제이지만, 하편인 이 작품은 남녀애정 및 혼인문제가 전편에 걸쳐 주류를 이룬다. 특히 남녀의 삼각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그 근대성을 인정할 만하다.

구완서는 김관일과의 대화에서 자유결혼에 대한 의사를 명확히 표명한다. 그러나 그 관념은 명확하되, 인물 성격은 모순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바로 이런 빈틈이 신소설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그는 약혼을 하고 옥련을 고국으로 보내면서 10년 후에 만나자고 하는데, 이런 설정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10년 동안이나 이별할 수 있는가? 왜 좀더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는가? 우리의 감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구완서는 신학문의 섭취에만 골몰하여 혼인문제 같은 것은 중시하지 않을 정도로 대국적 관점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개화기의 이념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완서가 과연 현실적인 측면에서 살아 있는 인물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심이 가고, 따라서 개화기의 이상적 개화인을 상징하는 관념상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옥련이 구완서를 그리워하긴 하지만, 다만 생명을 구해주고 공부를 시켜준 은인으로서 구완서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아직 이성간의 사랑을 체감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형식적인 의리나 은혜의 측면에 휠씬 많이 기울어져 있다. 근대적 애정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들은 알 수 없었다. 개인이 자아로서 각성을 완전히 이룩한 후에 근대적 애정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옥련과 구완서에게는 아직 자아로서의 개인의식이 확고하지 않은 바탕 위에 서구의 근대적 애정이라는 관념만 주입되어 있다. 옥련과 구완서 사이에 어떠한 사랑의 흔적과 행위들이 보이지 않는다. 5년이란 긴 세월 동안 미국에서 같이 공부를 하면서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철저히 관념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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