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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계

이인직 지음 | -
은세계

이인직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최병도: 옥순 옥남 남매의 아버지. 강원도 지방의 부호로서 강원 감사의 학정과 수탈에 죽는다. 그는 젊어서 김옥균을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아 개화정신을 갖는다. 그가 부자가 된 이유는 돈을 모아 문명국에 유학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옥남: 최병도의 아들. 최병도의 죽음 이후 태어난 유복자다. 아버지의 친구 김정수의 도움으로 미 국에서 유학하면서 신문명과 신사상을 접한 개화주의자. 미국 유학 후 돌아와서는 의병들에게 잡혀감으로써 개화사상을 펼쳐보지 못한다.

김정수: 최병도의 친구. 최병도가 죽자 그가 직접 최병도의 부인과 옥순, 옥남을 보살피고, 재산을 늘린다. 이렇게 늘린 재산으로 옥순 옥남과 같이 미국 유학을 떠난다. 5년후 비용이 부족해져 고국에 혼자 돌아왔으나 아들이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린 것을 보고 화병에 술만 마시다 죽는다.



밤중에 들이닥친 관리들의 횡포

밤은 이경이 될락말락하였는데 웬 사람 오륙 인이 최본평 집 사립문을 두드리며 문 열어 달라 소리를 지르나 앞에서 부는 바람이라, 사람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대로 바람에 싸여서 덜미 뒤로만 간다.

때는 겨울, 강원도 강릉 경금 동네는 겨울눈을 맞아 온 마을이 눈으로 푹 파묻힌다. 이 동네는 강릉에서도 부촌으로 이름났다. 두메 사는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일해서 푼돈을 모아 양돈을 만들고, 양돈 모아 궷돈 만들고, 송아지 길러 큰 소 만들고, 박토를 긁어 옥토를 만들어서 부자 된 사람이 여럿이다. 이 동네에 최병도 집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 집은 최병도 내외가 억척같이 벌어서 생일이 되어도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모으기만 해서 불과 몇 해 동안에 소리 소문 없이 부자가 된 집이다.

이 집은 아무 걱정 없이 지내는데, 다만 불한당이 쳐들어오는 것만이 염려가 된다. 그런데 이날 밤 불한당들이 쳐들어온다. 최병도와 그 부인, 그리고 머슴 천쇠 내외는 갑작스런 침입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들은 최병도를 잡아 묶으면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강원 감영 장차로서 최병도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수행하러 온 것이다. 당시 강원 감사의 성은 정씨인데, 강원 감사로 내려오던 날부터 강원도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이느라고 눈이 벌개서 날뛰는 판에 영문의 장차들이 각 읍의 밥술이나 먹는 백성을 잡으러 다니느라고 이십육 군 방방곡곡을 들쑤시고 다녔다.

장차들은 한번 출동하면 자신의 욕심부터 챙기려고 했다. 이들의 욕심은 남의 묘를 파서 해골 감추고 돈 달라는 도적놈보다 몇 층 더 극악하다. 일종의 수고비를 달라는 셈이다. 관리가 정당한 공무수행을 하면 될 터이지만, 이때는 관리의 수탈이 몹시도 심한 시대라, 한 마디로 제세상 만난 듯이 행동한다. 최병도는 이들의 행동이 고약해 돈을 내놓지 않겠다고 버틴다. 그러나 이놈들은 남의 돈 뺏어먹는데 이골이 난 놈들이라 최병도의 저항은 아무런 득도 없다. 결국 최병도는 부인과 어린 딸 옥순을 안심시키기 위해 돈 칠백 냥을 주기로 한다.

다음날 최병도를 앞세우고 원주 감영으로 떠나려 하는데, 눈은 샛별 같고, 나이는 삼십이 막 넘은 듯한 젊은 양반 하나가 마당에 섰다가 안으로 들어서며 최병도를 좀 만나겠다고 장차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는 최병도의 친구인 김진사 댁 서방님 김정수이다. 그러나 장차들은 무지막지하게 쫓아낼 뿐이다. 이에 화가 난 김정수는 천쇠를 시켜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양반, 상인,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모여 마당은 터질 듯하고, 이들이 장차들을 마당에 무릎 꿇게 한다. 그래 놓고 김정수가 일갈 호령을 한다. 민란이 나면 원과 감사가 민란에 죽는 일이 있고, 군란이 나면 세도 재상이 죽는 일이 있다, 내가 오늘 민란을 일으켜 원주 감영 장차 몇 놈을 때려죽일 터이니 백성들도 나를 따르라. 그러자 백성들이 달려들어 장차를 때려죽이려 했다.

장차들이 이제는 최병도 부인 뒤에 가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렇게 상황이 험악해지자 최병도가 나서서 말린다. 김정수를 방으로 데리고 가서 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한다. 최병도는 김정수에게 잠시 다른 지방으로 피신하라고 권유한다.

“돈푼이나 있는 백성은 죄가 있든지 없든지 다 망하는 이 세상에 내가 가면 어데로 가며, 피하면 어느 때까지 피하겠나, 응? 뺏으면 뺏기고, 죽이면 죽고, 당하는 대로 앉아 당하지. 말이 났으니 말이지, 백성이 이렇게 살 수 없이 된 나라가 아니 망할 수 있나, 응?” 그러면서 엽전 천 냥 표를 써서 김정수에게 주고 잘가라고 한다. 김정수가 장차들 몰래 떠나고, 최병도 부인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해 한다. 부인은 남편 최병도에게 묻는다. 당신의 죄가 무엇이기에 원주 감영에서 잡으러 왔느냐는 것이다. 최병도는 사실 내가 죄를 많이 지었지 하며 부인을 놀린다. 부인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깜짝 놀란다. 자신이 지은 죄는 다름이 아니라 재물을 모은 죄 하나와, 세력이 없는 죄 두 가지라며 최병도는 현실을 한탄한다. 우리나라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 씌우는 나라이니 자신이 당한 이런 일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때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최병도는 아들이나 낳아 공부 잘 시키라는 말을 하고 장차들과 함께 대관령을 넘어 원주 감영으로 향했다.



턱없는 죄목으로 죽어가는 최병도

내려왔네, 내려왔네, 불가사리가 내려왔네.

무엇 하러 내려왔나, 쇠 잡아먹으러 내려왔네.



원주 감영에 동요가 생겼는데 그 동요가 너무 괴악해서 어른들은 그런 노래를 하지 말라고 꾸짖고 철모르는 아이들은 종종 그 노래를 한다. 불가사리는 다름이 아니라 감사를 지적하는 말이다. 감사가 내려와서 강원도 쇠를, 다시 말해 돈을 싹싹 핥아먹으려 하는 고로 이런 동요가 생긴 것이다. 감사는 백성들의 원망은 모른 체 하고 오로지 강원도 일대의 재물을 뺏어서 서울에 있는 권문세가에 바치는 일만을 할 뿐이다. 이러니 강원 감영 선화당 마당에는 형장 소리가 끊이지 않고, 선화당 위에는 풍류 소리가 끊어지 않는다.

감사가 기생들과 한바탕 놀고 있을 때, 최병도를 붙잡아 온 장차들이 아뢴다. 감사는 최병도를 보자 범이 노루나 사슴 잡아 놓은 듯이 한 밥 잘 먹겠다 싶은 생각에 흥이 나서 죄를 닥달한다. 부모에 불효하고 형제하고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니 이런 죄는 천지간에 용서할 수 없다고 불호령이다.

이 말을 들은 최병도는 정말 기가 막힌다. 모친은 자신을 낳자 마자 해산 후더침으로 삼칠일만에 죽고, 부친도 돌 전에 죽었는데, 불효죄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비꼬아서 얘길 한다. 생이 장성한 후에 생의 손으로 밥 한 술 부모께 봉양치 못했으니 그런 불효가 어디 있겠는가. 또한 형제간의 불화에 대해서도 어처구니가 없다. 삼대독자인데 어떻게 형제간에 화목할 수가 있겠는가? 다시 비꼬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매도 없는 사람이라 단독 일신이 평생에 우애라고는 모르고 지냈으니 이것도 죄라고.

이 말에 감사는 얼굴이 벌개지며 불호령을 내리는데, 삽시간에 새로운 죄목을 만들어낸다. 관리에게 대들었다는 죄다. 그러면서 형틀을 들어 매우 치란다. 한 대 한 대를 온 힘을 다해 치니 최병도는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 그런 그를 칼을 씌워 별옥에 가두고 만다.

감옥 내에 일종의 독방이라고 할 수 있는 별옥을 따로 지어 놓고 부자를 잡아오면 이곳에 가둬놓는다. 그렇게 해서 뒤로 사람을 보내 으르고 달래고 꼬이고 별 농락을 다하여 돈을 우려냈다. 최병도가 그런 옥중에 여러 달 동안을 갇혀 지냈는데, 매맞은 자리가 아물만 하면 잡혀가서 다시 맞고 나을만 하면 맞고 하여 장독이 올랐는데, 그럼에도 그는 감사에게 돈 바칠 생각이 없다.

이듬해 여름이 가까워 올 무렵 들녘에서는 농부들의 바쁜 몸놀림과 농부가 소리가 높다. 농부들의 흥에 겨운 농부가 소리에도 현실에 대한 비판이 잔뜩 서려있다. “삼대 독자 최서방님 조실부모하였으니 불효, 부제 죄목 듣기 아니 원통한가? 순사도 그 양반이 정씨 성을 가지고 돈 소리에만 귀가 길고, 원망 소리에는 귀먹었데, 여어허 여어허 어여라 상사디이야. 우리 동무 내 말 듣게. 이 농사를 지어서 먹고 입고 남거든 돈 모을 생각 말고 술 먹고 노름하고 놀 대로 놀아 보세, 마구 뺏는 이 세상에 부자 되면 경치느니, 여어허 여어허 어여라 상사디이야.”

농부들은 새참으로 술 한 잔씩 걸치고 다시 농부가를 한다. 농촌의 풍경과 인정 등을 농부가 속에 담아 놓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최병도 타령이다. “독하더라 독하더라, 순사도가 독하더라, 아비 쳐죽인 원수라도 그렇게는 못 하네, 목을 베면 베었지, 사람을 어데 썩여 죽이나, 여어허 여어허 어여라 상사디이야. 글 잘하는 양반이 말을 하여도 남과 다르데, 최서방님이 나를 보고 순사도를 욕을 하는데, 나라 망할 놈이라고 이를 북북 갈고 피를 퍽퍽 토하면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불쌍하다고 말을 하니, 그 매를 그렇게 맞고 그 고생을 그리 하면서 내 몸 생각은 조금도 없고 나라 망할 근심이데, 여어허 여어허 엉라 상사디이야.“

이때 최병도 부인과 옥순이는 서로 마주 보며 연일 울고만 있다. 모녀 울음소리에 동네 사람들은 최병도가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우는 줄 알고, 삽시간에 최병도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어느 할멈이 그 소문이 사실인 줄 알고 최병도 부인에게 와서 최병도가 죽었다는 말을 한다. 그러자 부인은 기가 막혀 울기만 한다. 동네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고 감영에 알아본즉 헛소문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최부인은 남편 생전에 얼굴이나 보겠다고 옥순과 같이 가마를 타고 원주 감영으로 떠난다. 치악산 비탈을 향해 가는 도중에 나무꾼 아이들이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노래를 한다. “강원도 두멧골 살찐 백성을 다 잡아먹어도 피똥도 아니 누고 뱃병도 없다데, 애에고 날 살려라. 아귀 귀신 내려왔네, 아귀 귀신 내려왔네, 원주 감영에 동토(動土)가 나서 아귀 귀신 내려왔네, 애에고 날 살려라.” 이 노랫소리에 최부인의 오장은 살살 녹는 듯 한다.



죽음을 통해 보여준 국가에 대한 걱정

“순사도께서 이 백성들을 수족같이 알으시고, 동생같이 여기시고, 어린 자식같이 사랑하시면 이 백성들이 무궁한 행복을 누리고, 이 나라가 태산과 반석같이 편안할 터이오나 만일 그렇지 아니하여 백성이 도탄에 들을 지경이면, 천하의 백성 잘 다스리는 문명한 나라에서 인종을 구한다는 옳은 소리를 창시하여 그 나라를 뺏는 법이니, 지금 세계에 백성 잘못 다스리던 나라는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습니다.”

최병도는 원래 강릉 바닥에서 재사로 유명하던 사람이었다. 갑신정변 나던 해 나이 스물 두 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 개화당의 유명한 김옥균을 만나도 보았다. 최병도가 김옥균을 보고 심복이 되어서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같이 천하 형세도 말하고, 우리나라 정치 득실도 토론하고,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으나, 김옥균이 우리나라를 개혁할 경륜은 최병도에게 말하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을 하자, 최병도는 시골로 내려가 재물 모으기를 시작했다. 이유는 재물을 모아 부인과 옥순을 데리고 문명한 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여 지식이 넉넉한 후에 우리나라를 붙들고 백성을 건지려는 뜻이다.

최병도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고 했으나 사실 최병도의 뜻은 한 두 사람 구제가 아니라 팔도백성 구제에 있었다. 최병도의 이런 포부 못지 않게, 그에게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가 있었다. 그래서 감사에게 잡혀가서도 그렇게 욕을 보면서도 감사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은 것이다.

최병도의 생각에 백성을 못살게 구는 놈은 나라에도 적이요, 백성의 원수라 그런 몹쓸 놈을 칼로 모가지를 도려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럴수록 감사는 돈을 제대로 긁어내지 못한 분에 더욱 엄한 형을 내린다. 그러자 최병도가 감사에게 일갈했다. “순사도께서 이 백성들을 수족같이 알으시고, 동생같이 여기시고, 어린 자식같이 사랑하시면 이 백성들이 무궁한 행복을 누리고, 이 나라가 태산과 반석같이 편안할 터이오나 만일 그렇지 아니하여 백성이 도탄에 들을 지경이면, 천하의 백성 잘 다스리는 문명한 나라에서 인종을 구한다는 옳은 소리를 창시하여 그 나라를 뺏는 법이니, 지금 세계에 백성 잘못 다스리던 나라는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습니다.”

애굽, 인도 같은 나라도 식민지가 되었는데 우리나라도 백성에게 포학한 정사를 행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감사는 나라가 망한다는 말 한마디만을 시비 걸고 넘어져 당장에 물고를 내라고 한다. 그러자 좌우 사령들이 최병도의 입을 장대로 찧으니 이는 부러지고 아래턱은 어그러지면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다. 이때 최부인은 감영 가까이 도착했다. 그러면서 서방님을 때려죽인다는 소문을 듣고는 철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감사 네가 이 세상을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죽어서 귀신 되어 지옥으로 가면 네 죄를 천겁만겁 지나도 씻지 못할 것이다.”

최병도는 명이 거의 떨어질락말락 하는 지경인데, 관원 중의 호방이 나서서 감사에게 말한다. 지금 감영 내에서 죽이게 되면 민심이 사나워질 테니까 물고령을 중지하고 내보자는 것이다. 어차피 목숨이 끊어질 터인데, 무죄한 백성을 죽였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최병도는 풀려나고,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주막에서 최부인과 옥순을 만난다. 그리곤 집으로 가는 도중 대관령에서 숨이 끊어진다. 죽은 후에도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를 내려다보겠다면서 대관령 꼭대기에다 묻어달라는 유언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온 동네 사람이 장사 지내는 일을 돌보고, 상여 메고 나가면서 들리는 상두소리는 그야말로 처량하다.

“워어허 워어허 이 죽음이 무슨 주검인고 학정 밑에 생주검일세 / 워어허 워어허 생떼 같은 젊은 목숨, 불연목에 맞아 죽었네 / (달고소리)인생이 이러한데 천명을 못다 살고 악형 받아 횡사하니 그대 신병 가긍토다 어어여라 달고 / 희생 같은 우리 동포 살아도 고생이나 그대같이 죽는 것은 원통하기 특별나네 어어여라 달고.”



새 생명의 탄생과 신문명

“이천만 인민이 도탄에 들어서 나라는 쌓아 놓은 닭의 알같이 위태하고, 인종은 봄바람에 눈 녹듯 스러져 없어지는 때라. 이 나라를 붙들고 이 백성을 살리려 하면 정치를 개혁하는 데 있는 것이니, 우리는 아무쪼록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을 넓혀서 아무 때든지 개혁당이 되어서 나라의 사업을 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성하는 것이오.”

근심은 모르고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아이는 열 달만에 인간에 나오면서, 응아 응아 우는데, 최부인이 오래 지친 끝에 해산을 하고 기운 없고 정신 없는 중에도 아들인지 딸인지 어서 바삐 알고자 하여 해산 구원하는 사람더러 여보게 아들인가 딸인가? 묻는다. 최병도가 죽고 그 후손으로 옥남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최부인은 이때부터 미쳐가기 시작하는데, 옥순이를 보아도 정감사라고 식칼을 들고 원수 갚는다 하며 쫓아다니는 때가 있는 고로, 밤낮없이 안방에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옥남은 일곱 살이 되도록 그 어미 얼굴을 모르고 자랐다. 옥남을 키워주는 사람은 과거 최병도의 친구인 김정수이다. 옥남은 그 어미가 미쳤으므로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김정수의 집에서 자라났다. 어느날 옥남은 김정수의 부인과 함께 그 어미를 보러 갔다. 머리가 까치집같이 헙수룩하고 얼굴은 몇 해 전에 씻어 보았든지 때가 켜켜이 끼었고, 몸은 뼈만 남은 듯이 앙상한 옥남의 어미는 옥남이 방으로 들어올 때도 베개에 식칼을 꽂아 놓고, 남편 죽이던 놈의 원수 갚는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옥남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태평양 너른 물에 크고 큰 화륜선이 살 가듯 떠나가는데 돛대 밖에 보이는 것은 파란 하늘뿐이요, 물 밑에 보이는 것은 또한 파란 하늘 그림자뿐이라. 해는 어데서 떠서 어데로 지는지? 배는 어데서 와서 어데로 가는지? 오던 곳을 살펴보아도 하늘에서 온 것 같고, 가는 곳을 살펴보아도 하늘로 향하여 가는 것만 같다. 이런 배를 타고 옥순과 옥남은 김정수의 안내로 미국 유학길을 떠나는 중이다. 드넓은 바다도 처음 보고, 화륜선도 처음 타는 것이다. 원래 김정수는 세상을 걱정하던 인물은 아니었다. 친구 최병도를 만나 그에게 여러 세상사를 들어가면서 나라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최병도가 남긴 유언을 받아 김정수는 최병도 집의 살림을 모두 책임지게 된다. 그렇게 하여 재산을 삼사 배나 늘려놓았고, 그 돈으로 옥순 옥남 남매의 유학을 주선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식을 늘리는데 힘을 쓰던 유학 5년만에 미국 워싱턴의 비싼 물가 때문에 가지고 있던 돈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래서 스물한 살이던 김정수의 아들에게 맡겨 놓았던 살림을 생각하면서 학비를 구하러 고국으로 홀로 돌아간다. 아들이 살림을 많이 늘려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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