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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

현진건 지음 | -
무영탑(無影塔)

현진건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주만: 일명 구슬아기씨. 신라 귀족인 유종의 무남독녀. 아사달의 탁월한 재능에 반한다. 주만은 밤마다 불국사로 가서 아사달을 만나고 석가탑이 완공되면 아사달을 따라 부여로 가겠다고 결심한다.

아사달: 백제 출신의 석수장이. 신의 경지에 이른 기량과 재주로 다보탑과 석가탑을 완성한 예술혼의 현신(現身).

금성: 당나라 유학파로서 주만에게 청혼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함. 이에 앙심을 품고 아사달과의 소문을 퍼뜨려 주만을 곤경에 빠뜨린다.

경신: 국선파 금사량의 동생. 주만의 아버지 유종이 사윗감으로 택한 인물이지만 주만과 아사달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 두말 없이 주만을 도와주는 아량 넓은 호남아다.

유종: 주만의 아버지. 당학파(唐學派)의 횡포에 마지막까지 대적하여 왔던 국선파의 대표적 인물. 정당론(征唐論)을 펴지만 늙고 힘이 없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한다.

금지: 금성의 아버지. 사대주의자이며 간악한 당학파의 대표적 인물



아사녀: 어여쁘고 순박한 아사달의 아내. 남편 아사달을 그리워하며 안타깝게 기다리다 아버지가 죽자 아사달을 찾아 부여를 떠나 불국사로 찾아온다. 그러나 아사달은 만나지도 못하고 영지에 빠져 죽는다.





다보탑 아래의 운명적인 만남

눌지왕 때부터 몰래몰래 이 나라에 스며들어 온 서천 서역국 부처님 도는 법흥왕 말엽 이차돈의 순교로 활짝 길이 열리고, 삼한 통일을 거쳐 성덕, 경덕에 이르자 그 찬란한 연꽃은 필대로 피었다.

신라 경덕왕 시절, 사월 초파일이 내일 모레로 다가온 서라벌 서울에는 석가탄일 준비가 한창 바쁘다. 그 당시 초파일은 설, 대보름, 팔월 한가위보다 더 큰 명절이었다. 파일 놀이에 첫 번째로 중요한 연등과 관등을 만들기에 여느 집마다 야단법석이건만, 불국사만은 경내가 조용하다.

불국사로 말하면 신라에 크게 불법을 일으키신 법흥왕 시대의 초창으로 오늘날 장안에 즐비한 팔백팔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고찰이요, 초창 이후 여러 번 중창과 수리를 겪어 그 규모와 품도 어느 절 못지 않게 큰 대사찰이다. 이런 명찰이 초파일을 며칠 앞둔 지금 불전의 추녀 끝에 두어 개의 촛불이 가물거릴 뿐 온 절 안이 죽은 듯이 고요한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

아직 석가탑이 완공되지 않아 초파일 행사를 벌일 수 없기 때문이다. 대공을 시작한지 벌써 삼 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있건만 다보탑을 완공한 이래 어찌된 영문인지 아사달은 석가탑을 완공하지 못하고 있다. 금년 초파일에는 꼭 공사를 끝내고 낙성 겸 굉장한 파일행사가 열리리라 기대했던 불국사의 승려들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아사달을 향한 불평의 소리는 높아만 간다.

이즈음 ‘진기하기로 소문난 다보탑 구경을 하자’고 조르는 젊은 왕비 만월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경덕왕은 왕비를 비롯하여 후궁 비빈, 배종하는 몇몇 대관들과 그의 부인과 딸들을 거느리고 불국사에 행차한다. 불국사 입구에 도착한 일행들은 청룡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배를 타고 청운교와 백운교를 밑을 지나 연화교와 홍예문을 거쳐 불국사 경내로 들어선다. 자하문 안으로 들어서신 경덕왕과 그 일행들은 다보탑 아래에 멈추어 어여쁘고 빼어난 자태를 감상하시며 다보탑을 완성한 아사달을 불러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이 일행 중의 한 사람인 주만 역시 다보탑의 절묘함과 아사달의 뛰어난 재주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가슴이 울렁거릴 것 같은 감동을 받은 주만은 승무와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는 법당을 몰래 빠져 나와 다보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고와 보이는 돌결을 만져보고 매끄러운 돌층층대를 밟아보려는 찰나 주만은 눈앞에 난데없이 나타나는 그림자를 보고 화급하게 놀란다. 아뜩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낮에 본 석수가 아닌가?

먼 불빛과 달빛이 어우러진 여름, 희미한 광선이었건만 그 빼어난 이마와 검고 사내다운 눈썹과 연연한 입술이 또렷또렷하게 주만의 눈 속으로 아니 가슴속으로 박힐 듯이 들어왔다.

주만은 그만 그 자리에 동여 매인 듯 멈추어서 발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한 주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사달은 거듭 탑돌이만을 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달빛을 안고 흰 꽃송이처럼 피어난 주만의 얼굴을 보고 아사달은 걸음을 멈추고 선다.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한 순간 꿈꾸는 눈자위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사달의 거동에 주만은 뜨거운 저편의 눈길에 얼어 붙어버린 듯 서 있다. 마침내 두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고 오고가는 두 시선만 이 불꽃만 날린다.

아사달은 그 순간 주만의 얼굴에서 고향에 두고 온 아사녀의 환영을 본 것이다. 아내를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아사달의 안타까운 심정도 모르고 주만은 그만 아사달을 사모하게 된다. 그리고 아사달이 자신을 바라본 순간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운명적인 만남으로 믿어버린다.



밤마다 불국사로 향하는 낭만적 사랑

환상은 꼬리에 꼬리를 맞물고 한번 사로잡은 제 아름다운 포로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저와 그가 정면으로 마주칠 때 흐윽 하고 그가 제 앞으로 몇 걸음 다가들던 광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불국사에서 돌아온 날 밤 주만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아사달에게로 향하는 열정을 불태운다. 사랑에 빠진 주만은 아사달을 만나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하녀인 털이를 앞세워 불국사로 향한다. 한편 아사달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온밤을 새우고 새벽녘에야 석가탑이 있는 일터로 올라간다. 밤을 꼬박 세웠지만 이상하게도 머리가 가뿐하고 몸은 날아갈 듯 힘이 용솟음쳐 튀기면 터질 듯한 신흥에 감싸인다. 그는 곧장 겨누와 정을 들고 석가탑 위로 올라가 돌을 쏘기 시작한다. 쇠와 돌이 부딪치는 흥겨운 소리와 아내에 대한 애달픔에 이끌린 아사달은 목마른 줄도 배고픈 줄도 잊고 석가탑에 매달린다.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일하던 그는 마침내 석가탑 위에서 실신하여 쓰러지고 만다.

불국사에 도착한 주만은 다보탑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탑 주위를 맴돈다. 그러나 마음은 석가탑을 만들고 있는 아사달을 향하여 한없이 뻗어가고 있다. 주만의 마음을 헤아린 털이는 주만을 끌고 석가탑으로 가는데 아사달이 석가탑 위에 실신하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틀이 지난 후에야 깨어난 아사달은 어렴풋이 보이는 주만을 보고 또 다시 아사녀를 떠올린다. 정신을 차린 아사달은 진심어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처자가 파일날 밤 다보탑에서 마주친 주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가까이 아사달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지만 주만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밝힌다. 아사달과의 운명적 사랑에 열병을 앓는 주만은 밤마다 남몰래 죽과 밥을 날라 아사달의 건강을 돌본다.

사랑에는 반드시 방해물이 있는 법. 그것도 국경과 신분을 뛰어넘는 애틋하고 낭만적인 사랑에는 너무나 당연한 법이다. 아사달을 향한 주만의 사랑을 방해하는 자는 다름 아닌 바로 금지의 아들 금성이다. 금성은 당시로서는 소위 잘 나간다는 진골이요, 당나라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이니 누구나 탐내는 신랑감이다. 그러니 금성이 손짓만 해도 주만은 금성에게로 맨발로 달려가야 당연하건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금성과 그의 아버지 금지만의 착각이다.

신라를 두 어깨에 짊어질 만한 인물,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고리타분한 당학(唐學)을 한 손으로 막아내고 지나치게 흥왕(興旺)하는 불교를 한 손으로 꺾으며, 기울어져 가는 화랑도를 바로잡을 인물, 이것이 유종의 꿈꾸는 사윗감이었다.

주만은 물론 주만의 아버지 유종 역시 금성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국선파의 대표적 인물인 유종은 사대주의자이고 자신의 권익만을 탐하는 당학파를 경계한다. 특히 당학파의 대표자인 금지와 그의 아들 금성은 유종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이다. 금성의 집안이 경덕왕의 친인척에 해당하는 왕족이라는 점과 당나라의 벼슬인 한림학사를 지냈다는 것도 유종을 더 눈꼴이 시게 만들었다. 더구나 금성은 키가 땅에 달라붙고 얼굴에 병색조차 들어 장부로서의 기상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졸장부이므로 주만의 상대로 견줄 수조차 없다. 그러니 금성의 집안에서 일찌감치 주만을 점찍어 두고 매파를 통하여 청혼을 여러 번 했지만 유종은 주만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혼인을 차일피일 미루어 온 상태다.

상대가 냉담할수록 짝사랑은 더욱더 애가 타는 법이다. 금성은 사랑하는 주만을 만날 수 없게 되자 하루하루 몸이 달아오른다. 하루는 주만을 엿보기 위해 꾀를 내어 달 밝은 밤을 택하여 하인 고두쇠와 함께 주만의 집 담장을 뛰어넘기로 한다. 그러나 막상 담장 위에 올라보니 바로 앞이 연못이라 뛰어내리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는 참에 그만 주만에게 들켜버린다. 불국사에 다녀오던 주만은 자기 집 담을 넘는 무리들이 있어서 호통을 치고 보니 바로 금성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주만을 보려다 금성은 그만 도둑 취급을 받고 만다.

이런 망신을 당한 일이 있은 후 사흘만에 금성의 아버지 금지는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난 당주(唐酒)를 들고 주만의 집을 찾아온다. 주만의 아버지 유종 역시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라 금지가 싫어도 술을 거절하지는 못한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금지는 자신이 찾아온 본심을 드러내며 주만과 금성과의 백년가약을 청한다. 그러나 대쪽같은 기질을 지닌 유종은 비록 금지가 진골이고 경덕왕과 그리 멀지 않은 종친이지만 용기를 내어 정중하게 거절한다.



사랑을 억압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제도

금성이와의 혼인은 설령 아버지가 허혼을 하셨다 해도 끝내 반대할 이유와 거리가 있었지만 경신과의 혼담은 저쪽에서 거절을 하기 전에는 모면할 핑계조차 없었다.

유종은 금지의 청혼을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그렇다고 아량이 넓지 못한 금지의 보복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주만을 금성에게 시집을 보낸다는 것은 ‘구슬을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머리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유종은 하루라도 속히 주만을 혼인시켜야 한다고 결정을 내리고 사윗감을 고르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아는 젊은이는 다 꼽아 보았지만 신통한 인물이 없다. 고심 끝에 마지막으로 금량상의 아우 경신을 떠올리며 유종은 무릎을 친다. 금량상과 그의 아우 경신은 그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내물왕의 직계 후손이요 국선도를 숭상하는 국선파라는 점에서 골품으로나 덕망으로나 주만의 배필로 나무랄 데가 없는 인물이다.

유종은 주만을 불러 경신을 사윗감으로 점찍은 이유와 혼담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러나 이미 아사달에게로 향하는 사랑을 간직한 주만에게 경신과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자신의 사랑을 솔직히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한 주만은 그 자리에 고꾸라지며 엉엉 울기만 한다. 영문도 모르는 부모님들은 그저 부모 곁을 떠나기 싫어하는 딸아이의 어리광으로만 받아들인다.

마음이 바빠진 주만은 밤이 되자마자 아사달에게로 달려간다. 그 동안 주만의 정성으로 원기가 많이 회복이 된 아사달은 석가탑 완공을 향해 열심히 정을 휘두르고 있다. 마음이 조급한 주만은 석가탑 위로 올라가 아사달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조른다. 남에게 일하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아사달이지만 주만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사다리를 오르는 주만의 손을 잡아준다. 석가탑 위에 오른 주만은 아사달에게 집에서 결혼을 서두른다는 이야기를 전하지만 주만의 안타까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사달은 석가탑이 완공되면 곧 부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아사달을 만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주만은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아사달을 향하여 아사달이 부여로 가면 자신도 따라갈 것이라고 대담하게 고백한다.

이 몸은 아사달님 없이는 이 세상에 못 살 줄 알았습니다. 아사달님 아니고는 나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이가 또 다시 없는 줄 깨달았습니다.

주만의 사랑 고백에 충격을 받은 아사달은 머뭇거리며 고향에서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아사달은 주만의 열정을 감당할 수 없어 하염없이 비를 맞고 서 있다. 안타깝게 아사달을 바라보는 주만은 ‘부부의 연을 맺을 수가 없다면 기필코 제자라도 될 것이라’고 다짐하며 아사달에게 매달린다. 한편 주만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금성은 하인을 시켜 주만의 뒤를 밟다가 주만이 밤마다 불국사에 가서 아사달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리고 건달들을 시켜 주만과 아사달이 같이 있는 현장을 붙들어 망신을 주려고 음모를 꾸민다. 어느 날 밤 석가탑 사다리를 막 내려오는데 주만은 그림자가 얼씬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는 자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 밤 금성 일행은 불국사로 향하여 석가탑 완공에 열을 올리며 석수 일을 하고 있는 아사달에게 덤벼든다. 막 아사달을 덮치려는 순간 어두움 속에서 호통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번개 같이 나타나 금성 일행에게 칼을 들이댄다. 그들은 다름 아닌 주만의 남편감인 경신과 경신의 후배인 용신이다. 경신 등이 덤벼들자 일행은 벌벌 떨며 흩어지고 금성은 단번에 오랏줄에 묶이게 되었다. 경신에게 혼줄이 난 금성은 아사달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 사건에 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 장안에 쫙 퍼지게 되고 주만도 하녀 털이를 통해 듣게 된다. 주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불국사로 향하지만 혼인식 준비를 서두르는 어머니 때문에 꼼짝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다. 그러던 중 불국사에서 심부름하는 아이인 차돌이가 와서 자세한 진상을 전해준다. 주만과 아사달이 밀어를 나누는 동안 주만 모르게 털이도 불국사 시중인 차돌이와 사랑에 빠졌다. 털이가 며칠 보이지 않자 몸이 달은 차돌이는 소식을 전해주며 털이를 보려는 속셈을 차리고자 꾀를 낸 것이다.

차돌이를 통하여 경신의 도량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된 주만은 경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한다. 몸은 깨끗하지만 마음의 정조가 깨진 자신이 경신과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아사달과 부여로 떠나기로 약조가 된 자신을 도와 달라고 애원하리라고 마음먹는다.

한편 유종의 청으로 서라벌에 올라온 경신은 주만과 아사달의 사이도 전혀 모르는 채 아리따운 색시감을 본다는 설레임을 안고 주만의 집에 초대된다. 유종은 경신 앞으로 주만을 불러 인사를 시키는데 경신 앞에 선 주만은 곁눈으로 경신을 보고는 과연 대장부답다고 감탄한다. 주만은 경신과 둘이 있게 되자 드릴 말씀이 있으니 다음 날 임해전 궁전 뒷길에서 보자고 말을 건넨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나온 경신에게 주만은 그간의 사정을 모두 다 털어놓고 자신을 위해 파혼해달라고 애원한다. 경신은 보물과 같은 주만을 놓치는 것은 안타깝지만 애절한 목소리로 간청하는 주만의 청을 과감하게 받아들인다.



비련한 여인의 애달픈 사랑

서라벌로 가자! 서라벌로 가자. 서라벌이 아무리 멀다 해도 보름 가고 한 달 가면 못 갈 리가 있더냐. 죽기를 결단한 목숨이거니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설마 죽기밖에 더하랴.

한편 아사달이 서라벌로 떠난 후 부여에 남은 아사녀는 병든 아버지 부석을 모시고 그럭저럭 2년이란 세월을 지냈다. 그리워도 보고 싶어도 대공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남편의 건강과 안녕만을 기원하며 아버지를 모시고 병구완에 힘쓴다. 그러나 아사녀의 정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 부석은 3년째 봄이 되던 해에 애타게 아사달을 부르며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 동안 아버지의 그늘에서 평온하게 보냈던 아사녀은 아버지의 제자들에게 추행을 당한다. 스승이 살아계실 때는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스승이 돌아가시자 예쁘고 착한 아사녀를 능멸하고 농락한다. 부석의 제자들은 친구의 아내이고 스승의 딸인 아사녀를 하나같이 애욕의 대상으로 욕심을 내어 폭력을 휘두르고 음모를 획책한다. 짝지의 추행, 장달과 웃보의 싸움, 심지어 친절하고 자상하게 돌봐주던 팽깨까지 아사녀를 손에 넣을 음모를 꾸민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 이후 믿었던 남편 친구들의 욕망 앞에서 아사녀는 진정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자 부여를 떠나 아사달이 있는 서라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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