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생기
이상 지음 | -
종생기
이상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이상: 열세 통의 유서를 써놓았지만 마땅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고민하는 인물. 정희에게 속는 줄 알면서도 그녀의 속달 편지를 받고 맵시 있게 단장하고 나간다.
정희: 이상의 여인이 되고 싶다며 이상을 동소문 밖 버스 정류장으로 불러내지만, 실은 S 등과의 교제도 계속하고 있는 이중적 여인
천하의 눈 있는 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지중한 산호편을 쓰고 싶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산호 채찍일랑 꽉 쥐고 죽으리라. 네 폐포파립(廢袍破笠) 위에 퇴색한 망해(亡骸) 위에 봉황이 와 앉으리라. 나는 내 「종생기」가 천하 눈 있는 선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놓기를 애틋이 바라는 일념 아래 이만큼 인색한 내 맵시의 절약법을 피력하여 보인다.”
‘극유산호(郤遺珊瑚)’. 원래는 다섯 자였던 것을 이렇게 네 자로 줄여놓고, 게다가 일부러 글자 한 자를 틀리게 써놓았으니, 이것은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일이겠으나, 이런 오류는 오히려 인지가 발달해가는 면목을 실로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이상은 다짐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산호 채찍은 꽉 쥐고 죽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해지고 부서진 자신의 남루한 시신 위에 봉황이 와 앉을 것이다."
이상은 천하의 안목 있는 선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놓기를 애틋이 바라는 일념으로 이 「종생기」를 쓴다. 영웅이 되었던 희대의 군인 모씨는 아흔에 죽으면서 이렇다할 유언 한 마디 지껄이지 않았으며, 톨스토이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나선 데까지는 좋았으나 마지막 5분 동안 자자레한 유언 나부랭이를 하는 바람에 70년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허울 좋은 일생에 가실 수 없는 흠집을 하나 내놓지 않았는가? 일개 교활한 옵서버의 자격으로 그런 우매한 성인들의 생애를 자신이 방청했으니 그런 실수를 다시 범할 리가 없다고 자신한다.
거울을 향하여 면도를 하다 잘못해서 상채기를 내었다. 벌컥 화를 내보지만 거울을 보고 있던 이상은 와글와글 들끓는 여러 ‘나’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들이 제각기 베스트를 다하여 제 자신을 변호하기 때문에 범인을 좀처럼 잡을 수가 없다. 어리석은 민중들은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낸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이 원숭이 흉내를 내는 것이다. 나는 이미 아담 이브의 충동적 습관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니, 자의식이 날카롭게 살아있을 때 콧잔등을 만지작해보거나 명경같이 맑아야 할 두 눈에 혹시 눈꼽이 끼지 않았나 손수건을 꺼내어 두 눈을 만지작 해보거나 하는 사소한 기척들을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나의 처소에다 일러바쳐야만 하는 그런 분주함을 감당해낼 수 없다.
그러나 이상은 지중한 산호편(鞭)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치사한 소녀는’, ‘해동기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이 낙화지듯 좀 파래지면서’, ‘박빙(薄氷)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 가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 운기를 품은 훈풍이 불어와서‘, ’스커트‘, 아니 아니, ’너무나‘, 아니, 아니, ’좀‘’슬퍼보이는 홍발을 건드리면‘ 등의 자자레한 치레를 해보고 거기에 ’나붓나붓‘이란 가련한 어휘를 첨가할 성의를 보이는데, 이는 그 소문 높은 산호편을 더 여실히 하기 위해서 너무나 과감히 치사스럽고 어머어마하게 세간을 장만한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이젠 혹 지나친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천하에 눈 밝은 사람이 없지 않을 텐데 너무 금칠을 했다가 들키면 어쩌나 하는 염려. 그러나 그냥 그대로 써보기로 한다.
어머니 아버지의 충고에 의하면 이상은 추호의 틀림도 없는 만 25세와 11개월의 ‘홍안 미소년’이다. 그렇건만 이상은 자신이 늙은이라고 확신한다. 그날 하루 하루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기다랗다’ 하는 엄청난 평생이다. 날마다 운명하였다.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잠에서 깨어나면 자신의 통절한 생애가 개시되는데 청춘이 여지없이 탕진되는 것이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웠지만 또렷하게 보인다.
이상은 12시간 내에 종생을 맞이할 것이라며 할 수 없이 그럴듯한 유언을 몇 개 추려본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고독한 만년에 하나의 멋진 구절 하나 얻지 못하고 그대로 처참히 죽고 말 것을 탄식한다.
종생을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 정희를 만나다
“묘지명이라.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생의 대작 「종생기」 한 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일천 구백 삼십 칠년 정축 3월 3일 미시(未時)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맺고 문득 졸하다. 향년 만 25세와 11개월. 오호라! 상심 크다.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 하나의 이상 구천을 우러러 호곡하고 이 한산(寒山) 일편석을 세우노라. 애인 정희는 그대의 몰후 수 삼인(三人)의 비첩된 바 있고 오히려 장수하니 지하의 이상아! 바라건대 명목하라.”
이상에게는 거의 완성되어 가는 열 세 편의 유서가 있었지만, 어느 것도 서른 여섯 살에 자살한 어느 ‘천재’의 머리맡에 있던 일품의 아류에서 일보도 나서지 못한 것들뿐이다. 요만 재주밖에 없느냐며 분하고 억울한 마음으로 끙끙 앓고 있는데 소녀에게서 속달 편지가 왔다.
“선생님! 어젯저녁 꿈에도 저는 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로 시작되는 편지에서 소녀는 이상이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비굴한 행동이라며, 자신은 R과도 깨끗이 헤어졌고, S와도 절연한 지 벌써 다섯 달이나 되었다고 했다. 희멀건 살의 매력이 다섯 달 동안이나 놀고 있는 것은 참 아까운 일이니 자신을 불러달라고 하며, 3월 3일날 오후 두 시에 동소문 버스 정류장 앞으로 꼭 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상은 이것이 모두 거짓뿌렁인 줄 알지만 깜빡 속기로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상이 세상을 놀라게 할 인재라고 생각하며 속기 때문에 이상은 남들 좀 보라고 낮에 잔다. 그것이 자신의 시시한 자세나마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희의 편지를 받은 날은 기뻐하며 이발소로 가 거울 앞에 앉아 호화롭게 개막하려는 자신의 종생을 유유히 즐기기 위해 거기에 해당하는 맵시를 만들었다. 까치집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덥수룩한 머리를 깨끗이 다듬고 수염도 깨끗이 깎고 귀를 후비고 코털을 다듬고 안마도 했다. 겨우내 꾸겨박아뒀던 모자를 꺼내 15분간 세탁소에 가지고 가서 멀쩡하게 만들고 흰 바지저고리에 고동색 대님을 치고 능직두루마기를 입으니 어떤 천재의 풍모에 비겨 손색이 없었다. 거기에 단장을 하나 쥐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이상은 점잖게 한 30분쯤 지각했고 정희는 정희답게 한 30분쯤 일찍 와서 있었다. 정희의 모습은 마치 제정러시아의 우표처럼 적잖이 슬퍼 보였다. 둘은 이 땅을 처음 찾은 제비 한 쌍처럼 앙징스럽게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 이상은 우연한 종생을 감쪽스럽고 찬란하게 꾸미기 위해서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조심하였다. 이상은 정희에게 뭔가 멋진 첫마디를 해보려고 궁리를 하다가 선뜻 “설마가 사람을 죽이느니.”라고 말해버렸다. 정희 네가 오라고 그랬다고 해서 자신이 이렇게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스스로 그 말에 흡족해하고 있는데, 정희는 아무 대답이 없다. 이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손짓 발짓을 한번 해 보이고는 이윽고 낙담했다는 표시를 하고는 정희에게 가겠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파란만장한 생애가 자자레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만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5초--10초--20초--30초--1분--. 결코 뒤를 돌아다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긴장이 이상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묘지명을 떠올리며 이만큼에서 자신의 구지레한 흠집을 살짝 감추기로 하고 실수는 묘기로 겸사겸사 메꾸고 다시 후일에 관해 차근차근 고려하기로 한다.
지금까지의 풍자적 글이나 경구들이 다 이상 자신의 위선을 감추는 한 스무스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죽어가는 순간에 임종을 합리화하려는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그냥 난데없이 다리를 삐어 넘어지듯이 스르르 죽어 가겠다고 한다. 거룩하다는 칭호를 달고 찾아오는 ‘연애’라는 것에 대해서도 어떤 의뭉스런 노인들이 발라먹고 내버린 그런 훈계를 헐값에 걷어다가 다듬어서 다시 써먹는다고만 알았다가는 혼나는 경우가 있으리란다.
이상은 일세를 위압할 만한 유익한 충고의 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지만, 자의식의 절정 위에 발돋움하고 올라선 단말마의 비결을 시골 아주머니에게 서너 푼에 그냥 넘겨주고 그만두는, 자신의 에티켓을 미화시키는 겸허의 방식도 또한 빠짐없이 터득하고 있음을 자부한다.
복잡하게 뒤얽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얼마간 비극적인 자기 탐구. 이런 남루한 주제는 문벌이 버젓한 자기로서는 택할 신세가 아니지만 차 한 잔을 마실 때의 포즈에 대해서도 세심하고 세심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며, 휘파람을 한 번 불 때도 절차를 지켜야 한다. 동물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풍경에 대해서도 어떤 풍경을 묻지 않고 풍경의 근원, 중심, 초점이 자기의 ‘도련님’다운 소행에 있어야 할 것을 무조건 강조한다. 제 스스로 우매해지고 무시하는 것은 참 어렵단다.
‘백구(白驅)는 의백사(宜白沙)하니 막부춘초벽(莫赴春草碧)하라.(흰 갈매기는 흰모래 사장이 어울리니 푸른 봄날 풀밭에 가지마라.)’ 이상은 이태백을 닮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오언절구 한 줄에서도 한 자 가량의 태연자약한 실수를 범해야한다. 사람들은 이런 실수에 대해 어수룩한 체들 하고 속는다.
곱게 빨아서 곱게 다리미질을 해 놓은 한 벌 슈미즈의 꼬박 속은 정절처럼 그렇게 아담하게 어떤 계획이 어긋나는 경우가 있어도 거뜬하게 얄미운 미소와 함께 일어나야만 한다. 오늘날 분명치 못한 소녀에게 섣불리 딴죽이 걸려 넘어진다기로서니 이대로 호화로운 종생에 한 방울 하잘 것 없는 오점을 낸 채로 포기해서야 어찌 면목이 족히 서겠는가 하는 허울 좋은 구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술을 핑계삼은 탕아
“李箱이 자자레한 문학의 빈민굴을 교란시키고자 하던 가지가지 진기한 연장이 어느 겨를에 빼물리기 시작한 것을 여기서 깨단해야 되나보다. 사회는 어떠쿵, 도덕이 어떠쿵, 내면적 성찰 추구 적발 징벌은 어떠쿵, 자의식 과잉이 어떠쿵, 제깜냥에 번지레한 칠을 해 내어걸은 치사스러운 간판들이 미상불 우스꽝스럽기가 그지없다. 예술이라는 허망한 아궁지 근처에서 송장 근처에서보다도 한결 더 썰썰 기고 있는 그들 해반주룩한 사도(死都)의 혈족들 뗏국내 나는 틈에 가 낑기워서, 나는….”
이상은 담배를 한 갑 사 피워 물고 정희의 뒤를 다시 따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휘파람을 불고, 구두 뒤축이 아스팔트에 닿는 소리를 신경써서 조절해가면서 3분 가량 뒤엔 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을 수 있게 된다. 부질없는 세상에 제 심각하면, 침통하면 어쩌겠느냐는 듯 싶은 서운한 눈의 시선은 동소문 밖 어디쯤에 두고 부득부득 지근거리는 자세이면서도 또 그렇지도 않을 성싶은 자세로 묘기에 묘기를 한층 더하기에 골몰하는 것이다.
‘비천한 뉘집 딸이 해빙기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이 낙화지듯 좀 파래지면서 박빙 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가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의 향기를 품은 훈풍이 불어 와서 스커트, 아니 너무나, 슬퍼 보이는, 아니 좀 슬퍼 보이는 홍발을 나붓나붓 건드리면-- ’ 이와 같은 개기름 도는 가소로운 무대를 앞에 두고 이상은 이상대로 가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채석장 희멀건 단층을 건너다보며 일어서서 탄식 비슷이, “지구를 저며내는 사람들은 역시 자연 파괴자리라”는 둥, “개미집이야말로 과연 정연하구나”라는 둥 하며 제법 의젓하게 보일 만한 화제들을 골라서 점잖게 말해본다. 그러자 정희는 불쑥 “봄이 이렇게 왔군요.”라고 말한다. 이상은 지극히 만족했다. 고개 대신 단장을 끄덕끄덕해 보이고는 창졸간에 정희 어깨 위에 손을 얹어놓는다. 그랬더니 정희는 해괴하다는 듯이 잠시 침묵하더니 자신도 문벌이라든가 에티켓이라든가 하는 것은 제법 배워서 짐작하노라고 속삭인다.
정희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났다. “꿀꺽! 넘어가는 내 지지한 종생, 이렇게도 실수가 허해서야 물화적 전생애를 탕진해 가면서 사수하여 온 산호편의 본의가 대체 어디 있느냐?” 자신이 그윽히 음모해온 탕아의 면모들, 문학의 빈민굴을 교란시키고자 했던 가지가지 진기한 연장들이 어느 겨를에 빼물리기 시작한 것을 이제 깨닫게 되나 생각했다. “내 딴에 번지레하게 내걸었던 치사스런 간판들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독화(毒花)’.
그동안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 틈에 끼워 자기 계집의 치마 단속곳을 갈갈이 찢어 놓았고, 곰의 발자국이 지나간 것처럼 얼굴을 망가뜨려 놓았고, 친척의 돈을 떼먹었고, 좌수터 유래 깊은 상호를 쑥밭을 만들었고, 대금업자의 수금인을 졸도시켰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시켜 싸움을 붙여 놓았으며, 사글세방 새 다다미에 잉크와 요강과 팥죽을 엎질렀다.
잘못 빚은 증편 같은 시 몇 줄 소설 서너 편을 꿰어차고 조촐하게 등장하는 것을 무슨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깜박 속고 손뼉 한 두 번 친 죄로 큰 망신을 짊어지고는 시치미를 떼지 않으면 안 되는 치사스런 예의절차를 마귀의 소행이라고 돌려버릴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상은 내일 새벽에 늘 다니던 길에서 자신과 필적할 만한 숨은 탕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신바람 난 무당처럼 어깨를 치켰다 젖혔다 하면서라도 비바람에 깎이는 고행을 쉽사리 그만두지 않겠다.
어쩐지 전신이 몹시 가렵다. 아마 많은 중생들의 원한 탓에 나쁜 병이 침투했나보다. 이상은 은근히 속으로 앓으면서 토일레트의 정한 대야에다 양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자리로 돌아가 앉아 차근차근 자신을 반성해보았다.정희에게 간파당하다
“씻어 버릴 수 없는 숙명의 호곡, 몽고레안푸렉게(蒙古痣) 오뚝이처럼 쓰러져도 일어나고 쓰러져도 일어나고 하니 쓰러지나 섰으나 마찬가지 의지할 얄팍한 벽 한 조각 없는 고독, 고고, 독개(獨介), 초초. 나는 오늘 대오한 바 있어 미문을 피하고 절승의 풍광을 격하여 소조하게 왕생하는 것이며 숙명의 슬픈 투시벽은 깨끗이 벗어 놓고 온아 종용 외로우나마 따뜻한 그늘 안에서 실명하는 것이다.“
정희의 거부에 찔끔 정희 어깨 위에 얹었던 손을 뚝 떼인다든지 했다가는 큰 망신이며 일을 잡칠 것이므로 어디까지든지 좋아, 좋아, 좋아 그래만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피차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어깨를 나란히 하여 흥천사 경내로 들어가 길을 잃은 듯이 하여 산 위로 올라가 버리고, 산 위에서도 정교하게 머뭇머뭇해 준다.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한 대 피워물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포즈를 취해보지만, 정희는 그만두자고 한다. 이상의 그 어림없는 몸치레에 어지간히 식상이 되었으니 그만두잔다.
이상은 자신의 꾸준한 노력이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대체 정희라는 가련한 ‘석녀’가 무슨 재주로 자신의 그런 음흉한 간계를 이만큼이나 간파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이상은 맥이 탁 풀리고 앞이 팽 돌다 아찔하는 것이 까무러칠 듯하여 단장을 의지하여 버텨 보지만 자신의 기사회생의 종생도 이번만은 회춘하기 어려울 것같았다.
“이상! 당신은 세상을 경영할 줄 모르는 말하자면 병신이오. 그다지도 미혹하단 말씀이오? 건너다보니 절터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나 「40년」을 좀 구경삼아 들러 보시지요.” “아니지! 정희! 그게 뭐냐하면 나도 살고 있어야 하겠으니 너도 살자는 사기, 속임수, 일부러 만들어 내어놓은 미신 중에도 가장 우수한 무서운 주문이오.” “이상! 그러지 말고 시험삼아 한 발만 한 발자국만 저 개흙 밭에다 들여놓아 보시지요.”
이상은 정희와의 담소 속에서 자신과 필적하는 탕아가 있는 것을 느낀다. 이상은 자신의 무덤이 될 만한 조촐한 터전을 찾는 듯한 서글픈 마음으로 정희를 재촉하여 그 언덕을 내려왔다. 풍경 소리가 뒤에서 마지막 심통함을 한층 더 들볶아 놓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