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축일기
작자미상 지음 | -
계축일기
작자 미상
“이건 수필이야” “이게 어찌 수필인가 소설이지”
『계축일기』는 1947년 10월 24일부터 10월 26일까지 서울대학교 조선어문학연구회 주최 도서전시회에 전시되면서 학계에 알려진 작품으로, 상․하권 한 책의 필사본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광해군 5년(1613) 계축년에 일어났던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중심으로 하여 선조 35년(壬寅年, 1602)에 인목왕후가 정명공주를 가졌던 때부터 광해군 15년(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의 역사적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갈등과 대립을 중심으로 당시 전권을 자행하던 대북파의 권신들, 광해군의 외척, 광해군의 내인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영창대군, 인목대비의 친정 가족들,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서궁의 내인들을 등장시켜 당시 궁중에서 벌어진 권력쟁취를 위한 암투를 내인들의 궁중어를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제목 자체가 ‘일기’로 되어 있고, 내용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수필이냐 소설이냐의 논란이 있었으며, 그 지은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지은이에 대한 논의는 작품에 기록된 대로 인목대비의 내인 중의 하나로 보는 입장과 인목대비 자신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데, 현재 대체로 지은이를 내인으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장르 문제에서 수필로 보는 입장은, 이 작품이 수필의 가장 기본적 서술인 일기체로 되어 있으며, 객관적 관찰자의 태도로 사실의 기록에 치중하고 있는 점을 들어 궁중일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소설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 작품이 비록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기록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지은이의 의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허구화하여 기술하고 있다고 보고, 사실소설(寫實小說)이라고 분류한다. 그 근거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광해군이나 인목대비에 대해서 그 인물됨됨이나 당시의 행동을 실제 역사적 기록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대립구도 속에서 편파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건들도 작자가 재구성하여 허구적 사실들이 첨가되고 있음을 들고 있다.
아직 분명하게 지은이와 장르상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만약 이 작품을 소설로 볼 경우, 다른 고전소설들과 달리 우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서술이 아니라 체험을 사실적으로 재구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갖게 된다.
아들 13명, 딸 10명을 둔 선조의 욕심에서 시작된 혈전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왕비에 책봉된 뒤로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소생이 없었다. 선조는 여러 후궁들의 소생으로 아들 13명과 딸 10명을 두었지만, 선조 자신이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가 40을 넘기자 대신들이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세자책봉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후사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선조는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평양성에서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그의 형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하여 세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러던 중 1602년 인목왕후가 계비가 되어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는 그렇게 염원하던 적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 기미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일부 신하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조정은 광해군 지지파와 영창대군 지지파로 나뉜다. 그러나 선조는 영창대군을 정식 세자로 책봉하기 전 병이 악화되어 1608년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광해군은 즉위 후 자신을 지지하다가 귀양간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을 다시 불러들여 중책을 맡기고 자신을 등극시키는 데 공이 컸던 김상궁(일명 개시)을 신임하여 가까이 둔다.
명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어렵게 등극한 광해군은 등극 이후 자신의 형인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 강화도에서 죽이고, 광해군 5년 계축년에 일어났던 은도적 박응서의 무고를 빌미삼아 이복동생인 영창대군 역시 강화도에서 방에 가두고 불을 때 뜨겁게 달아오른 방안에서 질식시켜 죽였는데, 이때 대군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은 자신의 서모가 되는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킨 후 일절 바깥출입을 못하게 했으며 외인들의 출입도 금했다. 이때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던 이항복, 기자헌 등을 귀양보내는 등 여러 죄 없는 선비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는데 이를 가리켜 ‘계축사화’ 또는 ‘계축옥사’라고 한다.
결국 왕권강화 과정에서 많은 피를 본 광해군은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인목대비 폐비와 형제 살해를 빌미로 일으킨 반정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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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Summary선조는 갑진년에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명에 주청하나 거절당하였는데, 병오년에 기다리던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영창대군을 다시 세자로 책봉하려 하지만, 그 일을 이루기 전에 병세의 악화로 승하하고 만다. 상감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은 정인홍, 이이첨 등의 이간질로 친형인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에게는 점점 불경스런 태도를 취하고, 광해군의 장인인 유가는 무당을 동원하여 인목대비에게 저주를 행한다. 계축년에 이이첨 등이 은을 훔친 박응서, 서양갑 등을 사주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역모를 꾸민다는 자백을 하게 만들어 큰 옥사를 일으킨다. 이 사건을 빌미로 광해군은 서궁에 있는 어린 영창대군을 밖으로 내어놓으라고 하는데…….
계축일기
작자 미상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광해군: 선조 승하 후 등극하나 서모인 인목대비와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미워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서 죽인다.
인목대비: 선조의 계비로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아 광해군의 미움을 받게 되어 모진 수모를 당한다.
정명공주: 영창대군의 누이로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된다.
영창대군: 선조의 적자라는 이유로 이복형인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어린 나이에 죽는다.
가히(개시): 원래는 선조의 후궁으로, 광해군의 즉위에 공이 커 광해군 등극 후 총애를 받으며 인목 대비에 대한 온갖 만행을 자행한다.
나인들: 서궁에서 인목대비를 모시는 나인들은 서궁이 폐쇄된 후 인목대비와 함께 모진 고생을 한 다.
광해군이 왕이 된 후 인목대비에게 불손하게 굴다
“마음씨는 흉악하고 말은 실없이 하여, 위엄은 천하고금에 포악한 임금인 걸주를 본받고, 행실은 운하를 파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며 대군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던 수나라 제 이대 임금인 양제보다 더하였으니 대비께서 두려워하시며 후일에 선묘를 저버릴까 하여 걱정을 하셨던 것이었다.”
병오년(丙午年)에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은 선조에게 적자가 태어났으니 동궁의 자리가 위태하다고 생각하여 동궁을 모시고 있는 정인홍 등의 권세 있는 신하들과 친하게 사귀었다. 한편으로는 임해군이 자식이 없으니 임해군으로 세자를 삼아 이제 막 태어난 영창대군에게 전하게 하려 하신다 하는 소문을 내어 명나라의 황제에게 아뢰기를 재촉했다. 갑진년에 광해군을 세자로 봉해야 한다는 사연을 명나라의 황제에게 소상하고 간곡하게 지어 올리나, 명나라 황제를 뇌물로 구워 삶을 수도 없는 일이고, 또 조정이 옳은 것만 좇는 터이라, 형인 임해군이 있는데도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우는 것은 예법상 어긋나며 집과 나라가 망하는 일이니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상감께서도 이 문제와 관련된 글을 올리면 크게 꾸중하셨다. 정인홍, 이이첨 등은 선조임금이 병환이 나셨을 때 유영경이 임해군을 세자로 세우기 위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는 청을 아니하니 그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리자 상감께서,"제 어찌하여 군부를 협박하는 짓을 하는고?"하시며, 몹시 화를 내시며 인홍 등을 유배보내라고 명을 내리신 후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 선조가 돌아가신 후 인목왕후는 세자와 세자빈에게 임금이 승인한 서류에 찍는 도장인 계자와 옥새와 마패 등을 즉시 내주고 선조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리신 명을 전하시었다.
선조는 광해군을 어렸을 때부터 탐탁치 않게 여겨오신 터였으나, 임진왜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셨기 때문에 항상 훈계를 내리셨지만 광해군은 순순히 순종하는 적이 없었다. 선조임금이 타이르시는 족족 원수처럼만 생각하다가 의인왕후 때 선조를 속이고 후궁을 위협하여 그녀의 조카를 빼앗아갔으며, 병오년에 영창대군이 태어나시면서부터는 장인인 유가와 날마다 대군을 없애버릴 모의를 했다. 철부지 어린 대군이 그지없이 불쌍하고 가엾게 생각될 것이건만 크든 작든 간에 능히 할 수 있는 일도 순종하여 행하지 않고 뜻을 거스르며 반대하는 것이 너무 심했다.
광해군은 선조임금이 돌아가시자 즉시 그날로 정인홍 등을 불러들여 마땅한 절차도 밟지 않고 벼슬에 올려 쓰고, 돌아가신 지 두 주일이 되자 형님인 임해군을 교동으로 귀양을 보내어 독약을 내려 죽이고야 말았다.
광해군은 왕이 되고 나서 처음에는 하루에도 세 번 인목대비께 문안을 자주 드는 척하더니 차차 초하루와 보름으로 한 달에 두 번이 되고 그것도 무슨 일이 있으면 핑계삼아 거르기가 일쑤였으며, 문안을 드리러 와서도 대비께서 하시는 말씀은 자세히 듣지도 않고, 무슨 말씀을 의논이라도 하시려면 손을 내둘러 휘저으며 국모의 분부를 들을 생각도 않고 그냥 일어나 휭하니 나가버리곤 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는 한참 만에야 문안을 드린답시고 와서는 머물기는커녕 앉는 듯 마는 듯 일어나 버리니 모자간에 무슨 말 한마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돌아가신 선조임금의 공덕을 기리어 이름을 올리게 될 때 대비께서 선조의 공이 크시니 깊이 헤아려 이름을 올려 주시길 청하시자, “비록 공이 있으시되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조정이 편안히 지내시지를 못하였으니 어찌 공이 있으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하시지 마십시오.”하며 거절했다. 대비께서 선조임금의 능에 가시려고 하여도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삼 년을 두고 간곡히 빌어도 보시고 달래도 보셨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그렇게도 불쌍하신 일이 또 어디 있으리요.
광해군이 어쩌다 대비께서 계신 내전에 들러도 영창대군의 누나인 정명공주는 영특하고 예쁘다고 칭찬하나 영창대군은 본 체도 않으며, 늘 말하되, 세조가 단종을 죽였듯이 영창대군이 자신의 사후에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 대군을 없애 세자를 편히 살게 해주겠노라고 했다.
광해군은 나라의 공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것을 하도 못하여 단 한 장의 문서도 친히 결재를 못 내리는 형편이라, 내전을 모셔다 두고 주야로 공사를 물어봐서 결재를 했다. 내관에게 한 번 일을 시키려면 열 번은 고쳐 시키며, 심부름을 한 번 시킬 때도 열 번씩이나 다시 시키고 하였고, 아무리 잘 한들 상을 주는 법도 없으며 잘못한다 해도 벌을 줄도 몰랐다.
선조가 돌아가신 후에 처음으로 선왕의 능에 가서도 울지 않다가 예조에게 물어보고 그때야 우니, 천성이 효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포악함이 심하니 인목대비에 대해서야 어떻게 지극하게 할 수 있을까보냐.
또 은덕이와 갑인이란 나인은 선조를 모시고 계실 때의 세간을 대비께서 자신들에게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광해군이 있는 대전의 종들은 인목대비를 몹시 박대하여 길을 가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하며, 대비께 대한 험구를 있는 대로 지어서 퍼뜨렸다. 나인인 은덕이와 가히 등은 그때부터 하는 말이, “어느 누가 잘 사나 두고 보자. 영창대군의 물건이나 수진궁에 있는 물건이 아니 올 리 있나. 몽땅 우리에게 오고야 말걸.” 이렇게 무서운 말을 번번이 하는 것이었다.
인목대비를 모함하다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어진 일을 하여도 복을 못 얻을까 두려워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특한 일을 하여 어찌 복이 올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하늘이 헤아려 하시는 일이매 설움이 태산같으나 죽지 못하는 것을 고이하게 여기는 바이로소이다. 밤낮으로 눈앞을 떠나지 아니하던 종을 잡아내어가고 행여 남았을지도 모를 종을 마저 내라 하시니……. 여편네들이 앉아서 대전 낯에 똥칠을 하는 짓 좀 제발 고만 하소서.”
인목대비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임자년 김직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목대비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붙잡힌 죄수들에게 인목대비와 관련이 있다고 거짓 자백을 하라고 했다. 다행히 그 난에서는 벗어날 수 있어서 복이 있으신가 보다 했는데, 그 뒤로 시기하는 게 더욱 심해져서 궁궐 밖의 이름이 있다는 점쟁이는 모두 불러다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의 집에다 앉혀놓고 자기네 뜻을 이룰 수 있는 방법과 대비 쪽의 액운을 실컷 물어봤다.
임자년 겨울에 유자신의 아내 정씨가 대궐 안에 들어와 딸과 사위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사흘 동안을 자정이 되도록 의논하여 계축년 정월 초사흗날부터 저주를 시작했다. 털이 하얀 강아지의 배를 갈라 궁궐에 들여오고, 사람을 그려서 쏘는 시늉을 하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과 광해군이 자는 곳에 놓고, 또 담 너머와 광해군의 책상 밑이며 베개 밑에까지 놓았다. 이렇게 사월까지 하면서 온갖 소문을 내어 인목대비편에서 자기들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월에는 유자신이 이이첨, 박승종 등 심복과 모의하여 은(銀)을 도적질한 죄로 잡혀온 박응서에게 인목대비의 아버지가 관련이 있다고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박응서는 부원군은 모르며, 아무리 살려주겠다고 하시지만 남에 대하여 애매한 말을 어찌하겠느냐고 했다. 박응서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그의 부모를 데려다가 그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그를 때리기도 하고, 아들을 앉혀 놓고 어미와 동생을 치는 등 온갖 극형을 다하였으나, 어버이와 자식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한들 어찌 없는 말을 지어내겠느냐면서 끝내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같이 잡혀온 서양갑은 그의 어머니가 극형을 당하여 죽자, 자기는 비록 형을 받았지만 제 아버지만큼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부원군을 안다고 거짓 자백했다.
이 뒤부터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더욱 극형에 처하여 어떻게 하든지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인목대비를 모시던 나인들을 죽일 구실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박동량이란 사람이 선조가 편찮으셨을 때 대비께서 무녀 순창이를 시켜 저주했다는 말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자, 그것을 빌미삼아 침실상궁 김씨와 대군의 보모상궁, 침실시녀 여옥이와 대군의 보모상궁 환이를 잡아내어가 죽였으며, 유월 십삼 일에 열 세 사람의 나인들을 잡아갔다. 유월 이십팔 일에는 영창대군의 유모를 잡아가겠다고 하였으나, 영창대군이 다 자라서 유모가 필요 없어져 모두 궁궐 밖으로 다 나가고 없다고 하여도 듣지 않고 계속 내놓으라고 하더니 결국 궁궐 밖으로 나가서 잡아갔다. 칠월에는 십여 명의 하인들을 잡아갔다. 잡혀간 사람이 삼십여 명이 되었는데도 모두 한 마디도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자 인목대비를 모함하는 무리들이 자기들이 그동안 저주를 한 노릇이 헛일이 될까 걱정을 하여 나인의 종으로 나이가 열다섯쯤 된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는 달래니, 남들이 죽은 것을 본 그 아이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
평소부터 유자신은 알고 지내던 여자 맹인 고성이를 대접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종인 오윤남이 영창대군의 운에 대해 점을 치고 다녔다고 말하게 하고는 이를 빌미로 오윤남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오윤남이 끝내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죽자 열 두 살 된 그의 아들을 잡아들여 시킨 대로 말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달래어 거짓 자백을 받아내었다. 인목대비는 살인 도적의 일로 자신의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잡히셨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자신 때문에 어버이에게 해가 미치는 일은 차마 살아서 못 보겠다고 하시며, 아버지를 살려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