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생전
권필 지음 | -
주생전(周生傳)
권필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주생: 재주와 학식이 풍부했지만 과거에 실패한 후 장사를 함. 기생 배도를 배반하고 귀족의 딸인 선화를 사랑하는 야비함을 보인다.
배도: 주생에게 반하여 주생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주생의 배반을 알고 병들어 죽음. 주생에게 선화와 혼인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선화: 주생이 한눈에 반한 귀족의 딸. 자태가 고을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을 잘 짓고 자수를 잘놓는다. 사랑을 호소하는 주생을 선뜻 받아들인다.
주생, 배도를 만나다
배도는 주생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있었다. 주생도 배도의 아름다운 자태에 도취되어 있었다.
주생은 이름이 회(檜)이고, 자(字)는 직경(直卿)이며, 호는 매천(梅川)이다. 주생의 집안은 대대로 전당(중국 절강성에 있는 지명)에 살았는데, 그의 부친이 촉주(蜀州)의 별가(別駕)란 벼슬살이를 하면서 촉 지방에 살게 됐다.
주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했으며, 시도 잘 지었다. 그는 열 여덟살에 태학생(太學生)이 되었는데, 스스로 재주와 학식이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고, 또한 함께 공부하던 동창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주생이 태학을 다닌 지 수년이 흘렀다. 그는 계속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그는 ‘인생이란 덧없는 것인데, 명예에 얽매여 속세에서 허덕이며 아까운 청춘을 낭비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는 과거에 응시할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 장사를 해보려고 마음먹었다.
주생은 자신의 재산 반을 뚝 잘라 배를 구입했다. 나머지 돈으로는 잡화를 마련하여 뱃길을 오가며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아침에는 오(吳)지방에 저녁에는 초(楚)지방에 있었다. 그는 장사에만 집착하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제법 장사를 잘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생은 악양성(岳陽城) 밖에 배를 매어두고,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 나생(羅生)을 찾아갔다. 주생과 나생은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주생은 몹시 취하여 땅거미가 짙어졌을 때 자신의 배로 돌아왔다. 그는 돛대에 기댄 채, 곤하게 잠들어 버렸는데, 배는 맞바람을 받아 쏜살같이 흘러갔다. 주생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직 어둑한 새벽이었다. 길가는 사람에게 여기가 어느 곳이냐고 물으니, 전당이라고 했다. 주생은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즉흥시 한 수를 읊조렸다.
악양성 밖 난간에 기대었다가,
밤새 바람에 흘러 꿈속으로 들었네.
두견새 두어번 울고 봄달은 밝아,
홀연 놀라 깨니 몸은 어느덧 전당에 있네.
아침이 되자, 주생은 고향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그들 중에 태반은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뒤였다. 주생은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시를 읊조리며 배회했다.
주생은 이곳에서 어릴 적 소꼽 친구였던 배도(俳桃)를 만났다. 그녀는 현재 전당에서 재주와 미모가 제일인 기생이 되어 있었다. 배도는 주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대하여 몹시 기뻐했다. 주생은 시 한 수를 지어 그녀에게 주었다. 배도는 시를 읽고 몹시 놀라며 말했다. “낭군(郞君)의 재능이 이렇게 훌륭하니 모든 사람에게 굽히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평초(浮萍草)처럼 떠돌아다니시옵니까? 장가는 드셨습니까?” “아직 장가들지 못하였소.” 배도가 웃으며 말했다. “제 소원이옵니다. 낭군께서는 이제 배로 돌아가지 마시고 저희 집에 머무십시요. 그러면 제가 낭군을 위해 좋은 배필을 찾아보겠습니다.” 배도는 주생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있었다. 주생도 배도의 아름다운 자태에 도취되었다. 그러나 주생은 웃으며 사양했다.
이렇게 마주 않아 즐겁게 얘기하는 동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배도는 계집종을 불러 주생을 별실로 모셔 편히 쉬게 했다. 침실 벽에는 절구(絶句) 한 수가 걸려 있었다. 주생은 계집종에게 “이 시는 누가 지은 것이냐?”고 물으니, 주인 아씨가 지은 것이라 했다.
주생은 이미 배도의 고운 자태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시를 읽고 나니 더욱 정이 쏠렸고, 마음은 불같이 타올라 온갖 생각이 다 사라져버렸다. 그는 이 시의 대구(對句)를 지어 그녀의 뜻을 떠보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고심해도 시상(詩想)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밤은 깊어만 갔다. 주생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꽃 그림자가 운치있는 뜰을 배회했다. 갑자기 문 밖에서 얘기하는 소리, 말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사라졌다. 주생은 의심쩍었지만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주생이 있는 곳에서 배도가 거처하는 방은 멀지 않았다. 주생이 배도의 방을 살펴보니, 깁을 바른 창에선 촛불이 환히 비쳐 나왔다. 주생은 몰래 다가가 안을 엿보았다. 배도는 채운전(彩雲牋)을 펴놓고 혼자 앉아서 ‘접연화’(蝶戀花)란 사(詞:글)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앞부분만 지었을 뿐, 뒷부분을 아직 짓지 못했다. 이에 주생은 창문을 열면서 자신이 사(詞)를 마무리 해주겠다고 했다. 배도는 깊은 밤에 남정네가 아녀자의 침소에 들어왔다고 화를 내면서도, 주생이 찾아온 것이 싫지 않은 듯, 빙그레 미소짓고 주생이 그 사를 마무리하게 했다. 주생이 사를 완성하자, 배도는 술잔에 술을 따라 권했다. 주생은 술 마실 생각이 전혀 없어 배도가 아무리 권해도 사양했다. 배도는 주생의 뜻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토로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배도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조상은 원래 호족(豪族)이었는데, 조부께서 죄를 지어 서인(庶人)으로 쫓겨났고, 그 이후로 가난하여 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그녀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자랐다. 비록 절개를 지켜 몸을 깨끗이 간직하려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기생이 됐다. 이런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 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생의 의젓한 풍채와 빼어난 재능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모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다만 주생이 나중에 입신출세하여 자신을 기생의 명부에서 빼주어 가문을 욕되지 않게 해주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했다.
주생은 배도의 하소연에 크게 감동하여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씻어주며 소원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배도는 눈물을 거두고 안색을 달리하며 자신을 멀리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고운 명주 한 자락을 꺼내어 주생에게 건네주었다. 주생은 즉석에서 붓을 들어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시 한 수를 지었다. 배도는 이 시를 정성껏 봉해서 치마띠 속에다 간직했다. 이날 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기뻐했다.
주생, 선화를 보고 한눈에 반하다
주생은 이때다 싶어 방안으로 들어가 선화의 잠자리에 파고들었다. 선화는 나이가 어린 데다 몸이 약해 정사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엷은 구름과 가는 비처럼, 버들과 어린 꽃처럼 교태로왔다. 주생은 벌이 꽃을 찾아날듯, 나비가 꽃가루를 그리워하듯 매혹되었다.
다음날, 주생은 지난밤에 들었던 사람의 말소리와 말 울음소리에 대해 물었다. 배도는 “노승상(盧丞相)의 미망인은 날마다 노래하며 춤추는 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소일하는데, 지난밤에 사람과 말을 보내어 저를 데리려 왔어요. 그렇지만 낭군님이 와 계시어 병을 핑계대고 거절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노승상의 부인은 아직 혼인하지 않은 일남일녀를 데리고 물가의 큰 저택에 살고 있었다.
이날 해질 무렵 승상부인은 배도를 데리러 다시 사람을 보내왔다.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주생은 배도를 전송하며 밤을 새지 말고 일찍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배도가 말을 타고 가버리자, 주생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곧바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그가 물가에 이르러 보니 붉은 대문의 집이 구름에 닿을 듯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이 곳이 바로 노승상의 저택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주생은 주변을 배회하다가 고풍시(古風詩) 한 수를 지어 기둥에 적어두었다. 그가 방황하는 사이에 어느덧 어둠이 밀려왔다. 이때 여러 무리의 여자들이 붉은 대문에서 말을 타고 나왔다. 그는 배도가 이 무리 속에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는 길가의 빈집으로 숨어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배도는 보이지 않았다.
날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주생은 곧장 붉은 대문으로 들어갔다. 그는 사람이 전혀 얼씬거리지 않자, 누각 밑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누각의 북쪽에 연못이 보였고, 연못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었다. 그가 이 길을 따라 걸어가니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 집이 있었다. 그는 계단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 보를 꺾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멀리 아담한 집 한 채가 보였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촛불이 높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촛불 그림자 밑으로 붉은 치마, 푸른 옷소매가 나풀거렸다.
주생은 몰래 다가가서 숨을 죽이고 창문 사이로 방안을 엿보았다. 그 안에도 승상부인과 열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와 배도가 함께 앉아 있었다. 자색 비단옷을 입은 승상부인은 자태가 매우 아름다왔고, 소녀는 머리채를 곱게 뒤로 땋아 내렸고, 얼굴은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배도는 그들에 비한다면 봉황과 까마귀, 구슬과 조약돌 격이었다. 주생은 넋이 나가고 마음이 들떠 당장 미친듯이 소리치며 뛰어들고픈 심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배도가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가려고 하자, 승상부인이 끝내 말렸다. 배도는 돌려보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면서 주생과 인연을 맺게 된 내력을 자세히 아뢰었다. 배도의 말을 들은 부인은 웃으면서 순순히 배도를 돌아가도록 했다.
주생은 재빨리 그 집을 빠져나와 한 발 앞서 배도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를 골며 자는 체했다. 배도가 집으로 돌아와 누워 자는 주생을 깨워 일으키며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묻자, 주생은 제멋대로 읊어댔다.
꿈결에 요대(瑤臺)의 오색구름에 들어,
꽃무늬 수놓은 장막 안에서 선아(仙娥)를 꿈꾸었도다.
배도는 몹시 불쾌해 하며 ‘선아’가 누구냐고 따지듯이 묻는다. 주생은 말로는 대답할 수 없어 다시 시로써 응답하면서, 배도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대가 내 선아가 아닌가?” 라고 하니, 배도는 웃으며 “그렇다면 낭군은 저의 선랑(仙郞)이군요”라 했다. 이후로 서로 선아․선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생이 배도에게 늦게 온 사연을 물으니, 배도가 대답했다. “다른 기생들은 모두 돌아가고, 저는 선화(仙花)의 처소에서 선화가 지은 사곡(詞曲)을 노래했습니다.”
선화는 승상부인의 딸로, 자(字)는 방경(芳卿)이고, 나이는 열 다섯이다. 그녀의 용모는 빼어나고 속되지 않으며, 사곡(詞曲)을 잘 지을 뿐 아니라 자수도 잘 놓았다. 배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이 선화와 비교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주생이 선화가 지은 사곡을 궁금해 하니, 배도는 소리내어 죽 읊었다. 배도가 한 구절 한 구절 읊을 때마다, 주생은 마음속으로 칭찬하였지만, 짐짓 배도의 재주만은 못하다고 말했다. 주생은 선화를 본 후로 배도에 대한 정이 엷어졌다. 응수할 때만은 억지로 웃으며 즐거운 체했으나, 마음엔 오직 선화 생각뿐이었다.
한편 승상부인은 주생이 글을 잘하는 선비라는 얘기를 배도에게서 듣고, 선화의 남동생인 국영(國英)을 배도의 집으로 보내 주생에게 배우도록 했다. 주생은 은근히 기뻤다. 그러나 거듭 사양하다가 마지 못하는 체하면서 허락했다. 어느 날, 주생은 배도가 출타한 틈을 타 국영에게 조용히 말했다. “네가 오가면서 글을 배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네 집에 빈 방이라도 있으면 내가 너의 집으로 옮겨갔으면 한다. 너는 왕래하는 불편을 덜 것이요, 나는 너를 가르치는 데 전력을 다할 수 있을 텐데.”
국영은 주생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가 어머님에게 말씀드려 그날로 주생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다. 배도는 외출했다 돌아와 몹시 놀라며, 아마도 주생이 딴 마음이 있어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주생은 자신의 본심을 배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말을 둘러댔다. “듣건대, 승상댁에는 3만권의 장서가 있다 하오. 그런데 부인은 남편의 유품이라 함부로 내고 들이는 것을 싫어한다지 않소. 그래서 그 집에 가 세상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책들을 읽어보려는 것이요.” 주생의 얘기를 들은 배도는 주생이 학문에 정진하는 것은 자신의 복이라고 하면서 이내 안심한다.
주생은 승상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낮이면 국영이와 같이 있고, 저녁이면 집안의 문이란 문은 빈틈없이 잠가버리므로 나갈 도리가 없었다. 갖은 궁리를 다하는 동안,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문득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선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인데, 이 봄이 다 지나가도록 만나지도 못했구나. 황하의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면 몇 해나 기다려야 할지. 차라리 어둔 밤에 선화 방으로 뛰어드는 게 낫겠다. 일이 성공하면 귀한 몸이 될 것이요, 실패로 돌아가 죽음을 당해도 좋다.”
그날 저녁따라 달이 없었다. 주생은 여려 겹의 담을 뛰어넘어 선화의 방 앞에 이르렀다. 주생은 얼마간 동정을 살폈지만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선화 혼자만 촛불을 밝히고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주생은 기둥 사이에 바짝 엎드려 그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다. 연주를 마친 선화는 소자첨(蘇子瞻)의 「하신랑사」(賀新郞詞)를 작은 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주렴 밖 그 누가 와 있어 창문을 두드리나.
선경(仙境)에 노니는 이 꿈을 깨웠네.
아, 알고보니 임이 아니고 바람이 불어와 대[竹]를 쳤구나.
이것을 듣고 주생은 주렴 박에서 작은 소리로 읊었다.
바람이 불어와 대를 친다 마오.
바로 그리운 임 여기 왔도다.
선화는 사뭇 놀랐지만, 못 들은 체했다. 그리곤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생은 이때다 싶어 방안으로 들어가 선화의 잠자리에 파고들었다. 선화는 나이가 어린 데다 몸이 약해 정사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엷은 구름과 가는 비처럼, 버들과 어린 꽃처럼 교태로왔다. 주생은 벌이 꽃을 찾아날듯, 나비가 꽃가루를 그리워하듯 매혹되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주생은 깜짝 놀라 선화의 방을 급히 나갔다. 선화는 주생을 방문에서 배웅하고 들어와 ‘이른 여름 새벽녘의 꾀꼬리’라는 시 일 절을 지어 창밖에 걸어뒀다.
다음날 저녁 주생은 선화를 또 찾아왔다. 갑자기 담 밑 나무 사이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나자, 주생은 다른 사람에게 들켰다 싶어 달아나려 했다. 신을 끌던 사람이 매실을 던져 주생의 등을 맞쳤다. 주생은 피할 곳이 없어 몹시 당황해 하다가 수풀 속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신을 끌던 사람은 바로 선화였다. 주생은 선화가 한 짓인 줄 알고는 일어서서 선화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들은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생은 창문 위에 걸린 절구(絶句)를 보고 마지막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슨 근심이 있어 이런 시를 지었느냐’고 묻자, 선화가 대답했다. “여자는 임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서로 만나기를 원하고, 만나면 서로 헤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불행히도 우리의 만남이 발각된다면 친척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요, 동리 사람들은 우리를 천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해로하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령 한때는 즐겁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가지 못할 테니 어찌하겠습니까?”
선화가 말을 마친 후 눈물을 흘리며 거의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자, 주생은 선화를 위로하며 나중에 중매의 절차를 밟아 예법대로 선화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했다. 이에 선화는 조그만 화장용 거울을 꺼내 둘로 쪼개어 한 쪽은 자신이 갖고 다른 한 쪽은 주생에게 주었다. 또 흰 비단 부채를 주었다. 이 두 물건은 선화가 자기 마음의 간곡함을 주생에게 드러내어 자신을 잊지 말라고 건네 준 것이다. 이후로 그들은 밤이면 만났고 새벽녘에 헤어졌다. 하룻밤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