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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전

작자미상 지음 | -
운영전(雲英傳)

작자 미상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서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문학 작품 중에 『로미오와 줄리엣』과 나란히 놓아도 손색이 없는『운영전』이란 작품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운영전』과『로미오와 줄리엣』은 이야기 내용뿐 아니라 플롯까지 매우 흡사하다. 이 두 작품이 얼마나 유사한지는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자명하게 나타난다. 첫째 창작시기와 배경이 중세봉건사회이고, 둘째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는 신분적 또는 가문적 난관이 있고, 셋째 이들을 방해하는 인물은 모두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며 넷째, 사랑하는 여인이 거처하는 내실로 몰래 들어가 꿈같은 하룻밤을 지내고, 다섯째 남녀주인공 둘 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유사한 점은 두 작품 모두 문학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같이 높은 수준의 작품이『춘향전』만큼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미학적 완성도 최고의 경지

『운영전』은 우리 나라 애정류 고전소설 가운데 그 미학적 완성도가 최고의 경지에 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내용의 재미와 흥미뿐 아니라 형식, 문체의 우수성으로 보아 당대 제일의 문인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작품이다. 필경, 당대의 유명 문인이 지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짐작이 가지만 작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알려진 바는 없다. 물론 문화 유씨 족보에서 『운영전』의 시대적 배경과 일치하는 실존인물인 ‘유영’을 찾아내어 『운영전』의 작자로 내세운 연구결과도 있지만, 논거와 설득력이 부족하다.『운영전』의 작자로 확실시되는 인물이 아직 문헌상에서 발견되지 않은 현재로선 『운영전』은 작자미상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창작연대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창작설과, 영․정조 시대 ‘18세기’ 창작설이 있다. 그런데 보다 많은 연구자들이 17세기 창작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17세기 창작설의 근거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운영전』이 『영영전』『주생전』『위경천전』『왕경룡전』과 같은 전기소설들과 함께 필사되어 전한다는 사실이다. 이 전기소설들은 17세기 초․중반기에 생산된 작품이라는 데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운영전』이 이들 전기소설과 함께 묶여 읽혔다는 점은, 무엇보다 애정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동질성 때문이겠지만,『운영전』의 창작시기의 유사성까지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한문필사본은 『수성궁몽유록(壽城宮夢遊錄)』또는『유영전(柳泳傳)』이라고도 한다. 한문본과 한글본이 있는데, 부분적인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인 줄거리는 동일하며, 한문본이 원본이고 한글본은 한문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이본이다.


Short Summary

옛날 안평대군이 살았던 집인 수성궁은 인왕산 밑에 있었다. 청파사인(靑坡士人) 유영(柳泳)은 그 곳의 경치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서, 술 한 병을 사 가지고 혼자 궁문으로 들어갔다. 유영은 그윽하고도 깊숙한 서원(西園)으로 들어가, 혼자 술을 마시고 바위 위에서 잠을 자다가 꿈결에 절세미인과 한 소년이 마주앉아 있는 것을 본다. 미인은 수성궁의 궁녀였던 운영이고, 소년은 김진사였다. 운영의 명으로 시녀들이 술상을 마련해 오자, 세 사람이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 운영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노래를 부른 후 한숨을 쉬면서 흐느껴 울었다. 유영이 그 까닭을 물으니, 운영은 자신과 김진사의 한 맺힌 사랑얘기를 들려주었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안평대군은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 당대의 이름 있는 문객들이 수성궁에 드나들었다. 김진사는 어린 나이에 시문을 잘 지어 일시에 유명해졌다. 이 소문을 들은 안평대군이 수성궁으로 김진사를 불러들였다. 이 때 김진사와 수성궁의 궁녀인 운영은 보자마자 서로 한눈에 반했다. 김진사는 집으로 돌아와 운영을 잊을 수 없어 오매불망(寤寐不忘)하다가 수성궁에 드나드는 무녀(巫女)를 통해 운영에게 편지를 전했다. 운영 또한 1년에 한 번씩 궁 밖으로 빨래하러 나가던 날을 틈타 궁녀 자란의 도움으로 김진사를 만나 편지를 전했다. 이후로 밤마다 김진사는 수성궁의 담을 넘어 운영을 만나러 왔다. 이렇게 밤마다 만나 정이 쌓이자, 둘은 함께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자, 안평대군은 크게 노하여 운영을 별당에 가두는데…….운영전(雲英傳)

작자 미상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유영: 수성궁에 놀러가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꿈속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운영과 김진사 를 만나, 이들의 한 맺힌 사랑얘기를 듣는다.

운영: 수성궁의 궁녀. 김진사에게 첫눈에 반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 발각되자 결국 자살 한다.

김진사: 글재주가 빼어났지만 심약한 성격의 선비. 안평대군의 부름을 받고 수성궁에 갔다가 운영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다 운영이 자살하자, 그녀를 따라 죽는다.

자란: 서궁의 궁녀. 운영의 사랑 고백을 듣고, 운영과 김진사의 만남에 많은 도움을 준다. 운영이 곤경에 처했을 때도 운영의 편이 되어 대군에게 선처를 호소한다.

안평대군: 수성궁의 주인으로, 상당한 안목을 소유한 풍류가. 궁녀 중에 특별히 아끼는 운영이 김진사와 사랑에 빠짐을 알게 된 후, 분노하여 운영을 별당에 가둔다.

특: 김진사의 하인. 운영과 김진사의 결합에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보아 김진사를 죽이고 운영을 차지하려 한다.



유영, 운영과 김진사를 만남

그 때 한 소년이 절세미인(絶世美人)과 마주앉아 있다가 유영이 오는 것을 보고 흔쾌히 일어나 맞이했다.

수성궁(壽聖宮)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옛날 집으로 서울의 서쪽 인왕산(仁旺山) 밑에 있었다. 그곳은 산천이 수려하고,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과 같이 험준했다. 인왕산의 산맥은 굽이쳐 내려오다가 수성궁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하며 복도가 공중에 비껴 있고, 구름과 연기는 아침저녁으로 푸른빛을 더해 운치(韻致)있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수성궁에서 노래부르는 기녀와 피리 부는 동자를 데리고 와서 놀았고, 문인들은 꽃피는 춘삼월과 단풍이 무르익은 구월이면 음풍영월(吟風咏月)을 즐기느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청파사인(靑坡士人) 유영(柳泳)은 이 동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익히 듣고, 한번 가서 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의복이 남루하고 얼굴빛이 파리하여 유객(遊客)의 조롱을 받을까 염려되어 가보려다가 주저한 지가 오래됐다. 만력(萬曆) 신축(辛丑) 춘삼월 열엿샛날에야 탁주 한 병을 사들고 홀로 궁문으로 들어가니, 구경 온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고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유영은 부끄러워 어찌할 줄을 모르다 바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유영은 무너진 담도, 깨어진 기와도, 묻혀진 우물도, 흙덩어리가 된 섬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오직 동문(東門) 두어 간만이 우뚝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유생은 천석(泉石)이 있는 그윽하고도 깊숙한 서원(西園)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온갖 풀이 우거져 있었고, 땅위에 가득히 떨어져 있는 꽃잎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아니하여 미풍이 일 적마다 향기가 코를 찔렀다.

유영은 바위 위에 앉아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시구(詩句)를 읊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술을 마시고 취하여 바위 주변에서 돌을 베개 삼아 누웠다. 잠시 후 술을 깨고 보니 유객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동산에는 달이 떠 있고, 바람은 꽃잎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때 말소리가 가늘게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유영은 이상해 일어나 그 말소리의 정체를 찾아보았다. 그 때 한 소년이 절세미인(絶世美人)과 마주앉아 있다가 유영이 오는 것을 보고 흔쾌히 일어나 맞이했다. 유영은 그 소년에게 왜 밤에 노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빙긋이 웃으며 우리들은 처음 만났지만 바로 친해질 것 같다고 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아이를 부르니, 시녀 두 사람이 숲 속에서 나왔다. 미인은 두 시녀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우연히 옛친구를 만났고, 또한 기약하지 않았던 손님도 만났으니, 쓸쓸하게 헛되이 넘길 수 없구나. 너희들은 가서 술상을 준비하고 아울러 붓과 벼루도 가지고 오너라.”

두 시녀는 명을 받고 갔다가 잠시 후 돌아왔다. 세 사람이 석 잔씩 마시고 나자, 미인이 새로운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했다. 미인은 노래를 마치고 나서 한숨을 쉬면서 흐느끼며 울었다. 유영은 이상히 여겨 미인에게 물었다. “노래 가사를 들으니, 격조가 맑고 뛰어나나 시상(詩想)이 슬프고 괴이하구료. 오늘 같이 좋은 밤은 즐길 만한데, 서로 마주하고 왜 구슬피 우는 것입니까? 술을 마실수록 정의(情誼)가 깊어졌어도 성명을 서로 알지 못하고 회포도 펴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구료.”

유영이 먼저 자신의 성명을 말하고, 상대편도 성명을 알려주길 원했다. 이에 소년은 마지못해 자신과 미인 및 두 시녀의 성명을 알려줬다. 소년은 김진사(金進士)이고, 미인은 수성궁의 궁녀였던 운영(雲英)이며, 두 시녀는 녹주(綠珠)와 송옥(宋玉)인데, 둘 다 옛날 안평대군의 궁인이었다. 유영은 김진사와 운영에게 사연이 있음을 알아채고, 안평대군 때의 일과 김진사가 상심한 까닭을 자세히 듣고 싶어했다. 이에 김진사가 운영을 돌아보며,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 그때의 일을 기억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운영은 마음속에 쌓여 있는 한을 잊을 수 없다면서 자신이 그때의 일을 얘기하겠다고 했다.



운영과 김진사의 운명적 만남

자란은 술상을 차려 내오고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문을 닫고 나갔다. 이윽고 운영이 등불을 끄고 잠자리를 펴니 그 밤의 즐거움은 가히 말로 다하지 못했다.

안평대군은 13세에 사궁(私宮)으로 나와 거처하시며 궁 이름을 수성궁이라 했다. 대군은 유업(儒業)에 힘써 밤에는 독서하고, 낮에는 시를 읊거나 글씨를 쓰면서 조금이라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때의 문인재사(文人才士)들이 다 그 문하(門下)에 모여서 그 장단점을 비교했고, 새벽닭이 울어도 그치지 않고 담론(談論)했다. 대군은 특히 필법에 뛰어나 이름이 났다.

하루는 대군이 저희 궁녀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모든 재사(才士)는 반드시 안정(安靜)한 곳에 나아가서 갈고 닦은 후에야 학문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 도성(都城) 문밖은 산천이 고요하고 인가에서 좀 떨어졌으니 학업을 닦으면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그 위에다 정사(精舍) 여남은 간을 짖고, 비해당(匪懈堂)이라 이름했다. 당시 문장과 글씨로 명성이 있던 자들이 다 모이니, 문장에는 성삼문(成三問)이 으뜸이었고, 필법에는 최흥효(崔興孝)가 으뜸이었다. 비록 그렇더라도 이들은 대군의 재주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루는 대군이 술에 취해 궁녀들을 보고 말했다. “하늘이 사람에게 재주를 내리심에 있어서, 어찌 남자에게만 풍부하게 하고 여자에게는 적게 하셨겠느냐. 지금 세상에 문장으로 자처하는 사람이 많지만 다 능히 상대할 수는 없다. 아직 특출한 사람이 없으니 너희들도 힘써 공부하여라.”

그러고는 궁녀 중에서 나이가 어리고 얼굴이 아름다운 열 명을 골라 몸소 가르친 결과, 이들은 모두 5년 안에 대성했다. 대군은 외출했다 들어오면 그들을 눈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여 시작(詩作)을 권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은 시의 수준은 음률의 청아함과 구법(句法)의 완숙함에 있어 성당(盛唐) 시인들의 작품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였다.

열 명의 궁녀 이름은 곧 소옥(小玉)․부용(芙蓉)․비경(飛瓊)․비취(翡翠)․옥녀(玉女)․금련(金蓮)․은섬(銀蟾)․자란(紫鸞)․보련(寶蓮)․운영(雲英)이니, 운영은 바로 지금의 운영이었다. 대군은 이들을 모두 몹시 사랑해 항상 궁 안에 있게 하고, 바깥 사람과는 더불어 이야기도 못하게 했다. 날마다 문사(文士)들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시재(詩才)를 다투었지만 한 번도 열 명의 궁녀를 그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는 혹시라도 바깥 사람들에게 저들이 알려질까 봐 염려돼서였다. 그래서 항상 명령을 내렸다. “궁녀로서 한 번이라도 궁문을 나가는 일이 있으면, 그 죄는 죽음에 해당할 것이요, 또 외부 사람으로 궁녀의 이름을 아는 이가 있다면, 그 죄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루는 대군이 외출했다 돌아와 궁녀들을 불렀다. “오늘 문사 아무개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상서로운 푸른 연기가 궁중의 나무로부터 일어나, 혹은 성첩(城堞)을 에워싸고 혹은 산기슭을 날고 있었다. 내가 먼저 오언시(五言詩) 일절(一絶)을 읊고 나서 객에게 차운(次韻)하라 하였으나,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너희들이 나이 순서대로 각각 시 한 수씩을 지어 올려라.”

먼저 소옥이 지어 올렸고, 다음엔 차례대로 부용․비취․비경․옥녀․금련․은섬․자란과 보련, 그리고 운영이 시를 지었다. 대군은 그들이 지은 시를 보고 크게 놀라며, 시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두 세 번 더 음미한 후에 각각의 시를 평했다. 대군은 비취와 옥녀의 시를 으뜸으로 삼았다. 대군이 또 말했다. “내가 처음 시를 볼 때는 우열을 판단할 수 없다가 다시 음미하여 생각해보니, 자란의 시는 생각이 심원(深遠)하여 사람들이 찬탄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춤을 추게 하는 요소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의 시도 다 맑고 좋았다. 그러나 운영의 시만은 외로이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뜻이 분명히 보이는구나. 어떠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으니 마땅히 심문을 하여야 하겠지만, 그 재주를 아끼기 때문에 잠시 그냥 두겠다.”

운영은 즉시 뜰에 내려가 엎드려 울면서, 시를 지을 때 우연히 발로한 것이니 전혀 다른 뜻이 없다고 했다. 대군은 시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므로 가리거나 숨길 수 없는 것이라 했다. 대군은 운영을 한 번도 마음에 둔 적이 없으나 궁인들은 모두 대군이 운영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열 명의 궁녀들은 모두 동쪽 방으로 물러 나와 옛날 궁녀들이 지은 시의 고하(高下)를 논했다. 그러나 운영은 혼자 병풍에 기대어 수심에 잠긴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소옥이 저를 돌아보며, 대군의 의심을 사서 근심스러워 말하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대군의 뜻이 너에게 있으니 대군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을 상상하느랴 기뻐서 말하지 않는 것이냐고 물었다. 운영은 방금 시 한 수를 생각하다가 기이한 구절을 얻지 못하여 고민하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은섬은 운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시험해 본다면서 창 밖의 포도를 시제(詩題)로 하여 칠언사운(七言四韻)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 운영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지어냈다. 소옥은 운영의 시를 보더니 천하의 기재(奇才)라고 칭찬했다. 운영은 이로써 모든 의심이 풀린 듯 했으나 다 풀리진 않은 것 같았다.

이튿날 손님들이 와, 대군은 궁녀들이 지은 시를 내 보였다. 손님으로 온 문인 재사들은 시를 보더니 몹시 놀라 칭찬했다. 그리고 이런 지극한 보배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대군에게 물었다. 대군은 궁녀들의 존재를 밝히지 않으려고 종녀석이 우연히 길에게 주어 온 것이라고 둘러댔다. 아마도 여염집 재주 있는 여인이 지은 것일 것이라고 넌지시 말했다. 조금 있다 성삼문이 말했다.

“이 시를 살펴보니, 풍격(風格)이 청진(淸眞)하고 사의(思意)가 초월하여 조금도 속기(俗氣)가 없습니다. 이 시들은 깊은 궁궐에 있는 사람이 세속 사람과 서로 접하지 아니하고 다만 옛사람의 시를 읽고 밤낮으로 읊고 외어서 스스로 마음에 체득(體得)한 것입니다. 이 열 편의 시는 격조(格調)에 있어서는 고하(高下)가 있으나 닦은 기상은 모두 똑같습니다. 궁중에 반드시 열 명의 여선(女仙)을 기르고 있을 것이니, 원하건대 숨기지 마시고 한 번 보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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