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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혜경궁 홍씨 지음 | -
한중록

혜경궁 홍씨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혜경궁 홍씨 - 영의정 홍봉한의 딸.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에 간택되지만 남편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모습을 본다. 영조 -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년. 탕평책을 기본정책으로 삼아 당쟁을 눌렀다.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사도세자 - 영조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영빈 이씨, 부인은 혜경궁 홍씨. 신임사화에 대한 진상을 오해하여 그 복수를 공언함으로써 당시 집권층인 노론의 미움을 산다. 기이한 언행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아사하는 비운의 왕세자.홍봉한- 혜경궁 홍씨의 부친이자 사도세자의 장인. 하지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 한강에 나가 대신들과 뱃놀이를 한다.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궁중 생활

선왕조 을묘년 유월 십팔일 오시에 선비께서 나를 반송방 거평동 외가에서 낳으시니, 전날 밤에 선친께서 흑룡이 선비 계신 방안 반자에 서려 있는 꿈을 보셨는데…

나(혜경궁 홍씨)는 영조 을묘년 유월 십팔일 오시(오전 11~1시)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기 전날 밤 아버지(홍봉한)는 꿈속에서 흑룡이 아내가 있는 방안 반자(방이나 마루의 천장을 평평하게 만든 시설)에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언니가 있었으나 일찍 죽어, 하나뿐인 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집안은 예부터 청렴했는데, 이 때문에 살림이 궁핍할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비록 재상가의 맏며느리였으나 일년에 한 번도 비단 옷을 입은 적이 없으며, 상자에 단 몇 개의 패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외출의복도 단 한 벌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옷에 때가 묻으면 밤에 손수 빨았으며, 길쌈과 바느질로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나 또한 이러한 어머니에게 배운 바가 많아 어린 나이에도 남의 고운 옷을 탐낼 줄 몰랐다.

계해년(癸亥年)에 왕세자의 간택으로 단자(單子-처녀 집에서 하는 신고)받는 명이 내렸다. 집이 가난하니 단자를 내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라에서 녹봉을 받는 신하의 예로써 나도 단자를 하였다. 뜻하지 않게 구월 이십 팔일 초간택이 되어, 수망(首望)(첫번째로 뽑힘)에 들고, 마침내 세자빈으로 간택됐다.

내가 입궁해서는 영조와 인원왕후, 정성왕후 세 분 윗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나는 정월 초아흐렛날 빈에 칭해져 열 하룻날 가례(결혼)했는데, 마침내 부모님 떠날 날이 임박하여서는 종일 울음으로 보냈다.

내가 궁중에 들어와 본 남편(사도세자)은 기품이 훌륭하고 효성이 지극하셨다. 남편의 친모인 선희궁은 천성이 엄숙하고 인자하셔서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면서도 가르침을 엄숙히 하셨다. 세자도 어머니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하셨다. 선희궁은 나도 세자와 다름없이 사랑하셨다.

나는 일찍이 임신하여 경오년에 의소(擬訴-사도세자의 1남)를 낳았으나, 임신년 봄에 죽고 말아 세 분의 윗전과 선희궁이 모두 애통해 하셨다. 그해 구월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으니 바로 정조임금이다. 정조는 풍채가 훌륭하고 골격이 기이해서 진실로 용과 봉황 같은 모습이며, 하늘의 해와 같은 위풍이었다. 신미년 시월에 세자의 꿈에 용이 침실에 들어와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이상한 징조라 하며 그 밤에 곧 흰 비단 한 폭에 꿈에 본 용을 그려서 벽에 걸어놓았는데, 그때 나이가 십칠 세였다. 그 해에 홍역이 크게 번졌는데 세자 또한 많이 앓았다. 병이 나은 후 나의 아버지가 세자에게 글을 읽어주었는데, 그 후로 세자는 장인의 가르침을 받았다.

세손(정조)이 홍역을 앓은 후에도 잘 자라 돌 즈음에는 글자를 능히 알고 어른같이 점잖고 책을 놓고 읽는 것이 보통 아이와 아주 달랐다. 여섯 살 때에는 유생이 전강(殿講-성균관 유생을 대궐에 모아 임금이 직접 행하던 시험)할 때, 대왕이 불러 용상 머리에서 글을 읽도록 하였다. 글 읽는 소리가 맑고 청아해 보양관 남유용(南有容)이 신동이 내려와서 글 읽는 소리라 하고 아뢰니 영조는 크게 기뻐했다.

나는 갑술년에 청연(淸衍-사도세자의 장녀) 을 낳고 병자년에는 청선(淸璿-사도세자의 차녀)을 얻었는데, 청연은 기질이 부드럽고 너그러우며 청선은 온화하고 아담하여 보배 같았다. 이때 나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해를 보냈다.

을해년 팔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병자년 이월에 선친이 광주유수(廣州留守)를 하였다. 그해 윤구월에 청선을 낳았다. 그해 동짓달 세자가 마마를 앓았는데, 그후 백일이 못 되어 정성왕후가 승하하셨다. 그때 슬퍼하는 효심이 거룩하여 모든 사람들이 감복했다. 정성왕후가 승하한 이듬해에 인원왕후도 승하하셨다. 나를 사랑해주던 두 분을 하루아침에 잃으니 애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사도세자의 탄생과 불우한 어린시절

무신년 후로 왕세자가 오래 비오시매 영조께서 주야로 초조하시다가 을묘년 정월에 선희궁께서 경모궁을 탄생하시니 영조께서와 인원, 정성 두 성모께서 종사의 큰 경사를 기뻐하심이 비할 데 없고 나라의 신민이 또 뉘 아니 기뻐 춤추었으리오.

왕세자의 자리가 오래 비어있던 차에, 을묘년(영조 11년) 정월에 선희궁이 세자(사도세자)를 낳으시니 모두 큰 경사로 생각하고 기뻐하셨다. 세자는 천성과 용모가 비범하고 특이하셨다. 영조임금은 슬기롭고 총명하여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민정을 자세히 살피는 성품이셨지만, 세자는 말없이 침중하여 행동이 날래지 못하고 민첩치 못하니, 덕과 기풍은 거룩하나 모든 것에 있어 부왕의 성품과는 다르셨다. 묻는 말에 항상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대답하셨다. 자기의 소견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하며 곧 대답하지 못하여 영조임금이 늘 갑갑하게 여기셨다.

영조임금은 한 번 갑갑하고, 두 번 갑갑해 하다가 결국 격분도 하고 참기도 하셨다. 이럴수록 가깝게 두어서 직접 가르쳐야 지극한 정이 생기게 되는데 영조임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항상 멀리 떼어 두고 스스로 잘 알아서 자기 마음에 맞기만을 기다리셨다.

세자가 병진(丙辰,영조 12)년 삼월에 동궁에 책봉되고 일곱 살 때 글을 배우고 여덟 살 때 종묘에 배례하고 삼월에 입학하셨으니, 뛰어난 기질을 흠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계해(癸亥, 영조 19)년 삼월에 관례(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고 어른이 되던 예식)하고 갑자년 정월에 가례하셨다.

궐내에 세 분의 대비가 계시지만 법이 엄하고 예가 중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정이 없었다. 그리하여 두렵고 조심스러워 마음을 잠시도 놓지 못했다. 세자는 부왕에게 친한 마음보다는 무서운 마음이 앞서서, 열 살 된 아기이지만 감히 부왕 앞에 마주 앉지도 못하고 신하들처럼 몸을 엎드려서 보셨다. 세수를 일찍 하는 일이 없고 늘 글 읽을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하시더니 을축(乙丑 영조 21, 사도세자 11세)년 즈음에 병을 얻으셨다.

화평옹주는 성품이 어질고 덕이 있어 오빠(사도세자)를 귀중히 여기며 친하게 지내셨다. 영조임금은 화평옹주를 지극히 사랑하여 특별히 너그럽게 대하고 즐거워하셨으므로 그 덕으로 세자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나아지셨다. 정묘년에는 글공부도 착실히 하셔서 근심 없이 지냈는데 시월에 창덕궁의 화재로 경희궁으로 옮기게 되면서, 화평옹주와 처소가 멀어지자 세자는 다시 공부를 멀리하고 놀이에만 빠지셨다.

무진(戊辰,영조 24년)년 유월에 화평옹주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영조는 각별히 귀여워하시던 딸을 잃고 매우 애통해 하셨다. 선희궁께서도 그 슬픔이 커서 세자의 생활을 돌볼 겨를이 없으셨다. 이때 세자는 꺼릴 것 없이 놀았는데 주로 활쏘기, 칼쓰기, 기예붙이 등이었다. 또한 경문 잡서를 좋아하여 점치는 이가 쓴 글을 외우는 등 잡일에만 신경을 쓰고 경서공부는 멀리하셨다.



깊어져만 가는 부자간의 갈등

밖에서 정사하시고 들어오실 제 입으신 채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오셔, "밥 먹었느냐?"하고 물으셔 대답하시면 그 대답을 들으신 후에 그 자리에서 귀를 씻으시고 씻으신 물을 화협옹주 있는 집 광장 대궐 담 너머로 버리셨다.

영조임금은 한번도 세자를 친근히 앉히고 가르친 적이 없으셨다. 도리어 남에게 맡겨 아는 체 하지 않다가 남들이 모인 때면 항상 흉보듯이 말씀하셨다. 영조임금은 조정에서 안 좋은 일을 말할 때에는 세자를 불러 듣게 하셨다. 화평옹주와 화완옹주가 방에 들어올 때는 옷을 갈아입고 세자를 볼 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밖에서 정사를 마치고 들어올 때 입던 채로 와서 세자를 부르고는, "밥 먹었냐"고 묻고 세자가 대답을 하면 그 대답을 들은 후에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씻은 물은 대궐 담 너머로 버리셨다.

영조임금은 가뭄이나 천재 이변이 있어도, 세자에게 덕이 없어 그렇다고 하며 꾸중하셨다. 그러므로 세자는 날이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 치거나 하면 또 무슨 꾸중이 내릴까 근심 걱정을 하여 일마다 두렵게 여기고 겁을 내게 되어 마침내 병이 드는 징조를 보이셨다. 그러나 영조임금은 세자에게 이런 병이 생기는 줄은 깨닫지 못하셨다. 세자는 15세가 되도록 조상의 능을 찾아가는 행차에 한 번도 따라가지 못하셨다. 교외 구경을 하고 싶어 늘 영조임금의 행차에 따라가는 것이 허락될까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번번이 못 가게 되면, 처음에는 서운하게 여기다가 점점 성화가 되어서 울기도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마침내 병이 되어 화를 잘 내게 되었는데 화가 나면 내관과 나인에게 풀고 심지어는 아내인 나에게까지 화풀이를 하셨다.

경오(영조 26년)년 팔월에 내가 의소를 낳으니, 영조임금이 매우 기뻐하셨다. 그러나 영조임금은 며느리인 내가 순산 득남한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딸 화평옹주가 그렇지 못한 것을 더욱 애달프게 여기셨다. 그래서 내가 순산 생남한 것에 대해 기특하다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 때문에 득남한 기쁨도 모르고 도리어 황송해했다. 세자는 아들이 생겨서 나라의 기틀이 굳어짐을 기뻐하셨으나 부왕이 덜 기뻐하는 것에 대해 슬퍼하시고, 자기 하나도 어려운데 아이가 나서 어쩔까하며 근심하셨다. 그러던 차 임신년 봄에 세손이 세상을 떠났다.

신미년 섣달에 다시 임신하여, 임신년 구월에 득남하니 곧 정조임금이다. 세자가 기뻐하신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온 나라의 즐거움이 경오년(영조 26년에 의소를 낳은 일)보다 백 배나 더하였다.

홍준해가 올린 상소 때문에 영조임금이 대단히 화가 났다. 세자가 선화문에 엎드려 대죄를 하셨는데 이 때 세자는 큰 병을 앓고 난 직후였다. 마침 설한이 혹독하여 엎드린 몸에 눈이 쌓였는데도 세자는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인원왕후께서 일어나라고 하여도 듣지 않다가 영조임금이 화를 진정한 후에야 일어나셨다.

영조임금은 그 후에도 노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여러 차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셨다. 그럴 때마다 세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며, 시민당 손지각 뜰의 얼음 위에 짚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죄하시다가 창의궁에 걸어가 또 짚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죄하시고 머리를 돌에 부딪쳐 망건이 다 찢어지고 이마가 상하셔서 피가 나기도 했다.

십여 세부터 병이 나 식사와 행동이 예사롭지 않더니 도교의 주문인『옥추경』읽은 후로 아주 기질이 변화하여 공연히 무서워하시고, '옥추' 두 글자를 입에 담지도 못하셨다. 임신(영조 2)년 겨울에 그 증세가 나타나서 계유(영조 29)년에는 경계증이 생기고, 갑술(영조 30년)년에도 그 증세가 점점 고질이 되었다. 세자의 증세가 더 심해져 문안도 안하고 강연에도 전념치 못하셨다. 마음의 병이라서 늘 신음이 잦고 병폐한 모양이 되셨다. 어느날 영조임금이 숭문당에 들렀다가 갑자기 세자의 처소에 들르셨다. 이때 세자는 세수도 안하고 의대 모양이 단정하지 않은 상태셨다. 그때는 금주가 엄한 때인데 혹시 세자가 술을 먹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크게 화를 내셨다. 그리고 술 드린 사람을 찾아내라 하고, 누가 술을 가져왔냐고 엄하게 물으셨다. 세자는 술 먹은 일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너무 두려워 감히 변명을 못하셨다. 게다가 영조임금이 하도 강하게 물으니 하는 수 없이 먹었다고 하셨다. 또 '누가 주었냐'는 물음에 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가 주었다고 하시니 영조가 때리며 엄책하고는 쫓아내었으며 희정이는 멀리 귀양을 보냈다.

때때로 화재가 났는데 그럴 때마다 영조는 세자가 홧김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닌가 하고 화를 내시며 신하들이 있는 데서 호통을 치셨다. 그때 설움이 가슴에 복받쳐 거기서 그 불이 촉대가 굴러서 난 불인 줄을 여쭙지 않으시고 또 변명을 않고 스스로 방화한 듯 하시니 절절이 슬프고 갑갑하였다. 그 날 그 일을 지내시고 기가 막히셔서 청심환을 잡수셔서 울화를 내리시고 "아무리 하여도 못 살겠다." 하시고 저승전 앞 뜰의 우물로 가서 떨어지려고 하시니, 가을에 어머니를 잃고 서러운 정이 이를 데 없는데 세자의 병까지 점점 심하니, 내 근심이 더하였다.

세자는 22세가 되도록 능행을 따라가지 못하시니, 언제나 갈 수 있을까 기다리다가 그 일 때문에 마음에 병을 얻으셨다. 드디어 병자 팔월 초에 처음으로 명릉(숙종대왕의 능)에 가시게 됐다. 그때 세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서 목욕하고 정성을 다하여 요행히 탈없이 다녀오셨다. 다녀오시는 사이에 인원왕후, 정성왕후, 선희궁과 자녀에게까지 편지하셨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금도 병이 있는 것 같지 않고 순조롭게 환궁한 것을 스스로 큰 경사같이 여기셨다.

그해 윤구월에 청선이 태어났으나, 병이 더 심해진 세자는 들어와 보지도 않으셨다. 그해 동짓달 열흘께 세자가 마마병에 걸리셨다. 영조임금은 세자가 병에 걸렸는데도 한번도 찾아보지 않으셨다.

정축(丁丑) 이월 십삼일에 정성왕후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손톱이 모두 푸르고 토한 피가 한 요강이나 되는데, 빛이 붉은 피도 아니고 검고 괴이한 것이었다. 세자가 피를 토한 그릇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영조임금께 미처 아뢰지도 못한 채 그릇을 들고 중궁전 장방(관아에 서리가 쓰던 방)에 친히 나가서 의관에게 보이며 우셨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성왕후가 기절하니 세자가 망극해하며 우시던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날이 밝은 후에야 영조임금이 알고 왔는데 아버지를 본 세자는 또 황공하여 몸을 움추리시고는 차마 울지도 못하고 전신을 움츠리고 고개도 들지 못하셨다. 그러니 영조임금은 세자가 아까 울고 서러워하던 일은 모르시고 옷 입은 것, 행전(무릎아래 묶는 천)친 모양까지 꾸짖으셨다. 천지간에 터질 듯 갑갑함에 아까 그 지극하시던 모양은 다 감추어졌다. 정성왕후 승하하셨다. 영조임금은 더운 날씨에 여러 가지로 세자를 꾸짖으시니, 그대로 격화가 되어 세자의 병이 점점 더해갔다. 그래서 내관들에게 매질하는 일이 그때부터 더해지고 그 유월부터 화병이 더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셨다.



임오화변 - 비운의 왕자, 뒤주 속에서 죽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짐승을 죽이거나 하여야 마음이 낫노라" "어찌하여 그러하냐?"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는가?" "사랑치 않으시므로 슬프고 꾸중하시기로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합니다."

하루는 영조임금이 세자를 불러 사람 죽인 것을 추궁했다. 세자는 부왕 앞에서 자기가 한 일을 바로 아뢰었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짐승을 죽이거나 하여야 마음이 낫습니다." "어찌하여 그러하냐?"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는가?" "사랑치 않으시므로 슬프고 꾸중하시기로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합니다." 영조임금도 이때는 일시적으로 마음이 측은해져서 크게 역정을 내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내게 세자의 말이 사실이냐고 하문하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세자가 어려서부터 사랑을 입지 못해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병이 되었다고 하니 영조임금이 조금은 세자를 이해하시는 듯 했다. 국상후 세자가 홍릉 참배에 따라갔는데 그해 장마가 지루하다가 거동하는 날 큰비가 왔다. 영조는 날씨가 이런 것을 세자 탓이라 하고 능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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