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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록

무명 지음 | -
임진록

작자 미상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이순신: 조선 중기 때의 무신.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을 근거지로 삼아 전함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 침략에 대처했다.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유성룡: 조선 선조 때의 명상. 영의정으로서 중국 명나라 장군들과 같이 국난을 처리한다. 전란 후 북인의 탄핵을 받고 조용히 벼슬에서 물러난다.

권율: 조선 선조 때의 도원수. 이치싸움, 행주싸움에서 대승한다. 정유 재침 때 다시 활약하다가 병사했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 일본 전국 시대의 무장이다. 해외 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에 파병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다.



풍전등화같은 조선의 운명과 성웅 이순신

왜국이 소위 막부정치를 시작하여 임금은 천황이란 이름만 가지고 있고 제후 중에서 강한 자가 천하의 정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에 조선에서는 선조대왕이 방탕하기 시작하여 충신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는데다가, 붕당이 생겨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서로 헐뜯기 시작했다.

조선의 선조대왕은 점점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방탕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충신과는 벌어지고 당파가 갈라져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또한 이 무렵 임금은 총애하던 김귀인이란 궁녀에게 몰래 밀(蜜) 오백 근을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고 충신들 또한 임금 곁을 하나 둘 떠난다.

북방에는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여 식량이 모자란데, 국방을 염려한 조정은 무조건 북쪽으로 쌀을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는 벼슬을 주기로 했다. 이 틈을 탄 김귀인의 오라비 김공량은 사람을 시켜 목화 수만 근을 가지고 북쪽으로 가 쌀과 바꿔다가 남쪽에서 팔아 폭리를 취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은 펄쩍 뛰면서 김공량을 원망할 뿐 아니라, 임금까지 원망하게 되었지만, 이미 충신들은 다 물러간 상태라, 국가는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한편, 왜국에서는 제후 중에서 풍신수길이 가장 세력이 있었다. 그는 임진란이 일어나기 십 년 전부터 조선 정벌에 뜻을 두고 현소(玄蘇)라는 중을 조선에 간첩으로 들여보내 팔도강산지도를 샅샅이 그려서 돌아갔다. 또한 조선에서 건너간 많은 반역자들을 통해 조선 정세의 어지러움을 간파한 뒤 군비확충에 정열을 쏟았다. 풍신수길은 조선을 정벌할 생각으로 조선에 통신사를 보냈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이율곡이 군사 십만을 양성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지 여덟 해가 되었다. 이때 왜국사신이 풍신수길의 국서를 바쳤는데, 왜국이 명나라를 치겠으니 조선이 왜국의 선봉이 되어 명나라를 함께 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선조대왕은 그 국서를 보고는 점잖게 꾸짖어 돌려보내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통신사로 갔던 서인 황윤길은 풍신수길이 반드시 큰일을 저지를 위인이라 했다. 그러나 선조는 풍신수길이 큰인물이 못된다는 동인 김성일의 의견을 따라 국방에 소홀했다.

임진년 삼 월 십삼 일에 풍신수길은 대군을 편성했는데, 총 삼십만 군사가 동원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한 줄도 모르고 조선에서는 왜국사신의 국서 중에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치러가겠다는 사실을 명나라에 알려야 옳으냐 마느냐를 놓고 동서인이 서로 다투었다.

이순신은 을사년 삼월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사놀이를 즐겼으며 병서읽기를 좋아했다. 그는 항상 청렴결백하며 모든 일에 공명정대했다. 서른 두 살에 비로소 무과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함경도에서 권관(權管)이란 벼슬을 했다.

이순신이 여러 벼슬을 거친 후 함경도 건원보의 권관이 되었을 때, 여진의 오랑캐가 자주 난을 일으켜 변경을 침략하여 백성을 괴롭히곤 했다. 이때 이순신은 오랑캐를 무찔러 난을 평정했다. 그러나 이순신을 시기하던 이들의 모함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때 이순신은 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남모르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다시 조정에선 이순신을 천거하고 다시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나이 47세 때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년 전이었다.

이순신은 항상 왜가 조선을 쳐들어 올 것을 염려했다. 그는 왜란을 예상하고는 좌수영에 있는 배를 모조리 고치고, 쇠사슬과 마름쇠를 만들도록 했다. 이것은 좌수영 앞 바다를 쇠사슬로 가로지르고 돌에 구멍을 뚫어 매달아 적의 배가 못 들어오도록 하고, 마름쇠 수만 개를 만들어 얕은 바다에 깔아 적의 배가 부딪치면 침몰이 되도록 하자는 계획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화약과 폭발물이 달린 화살을 만들었다.

이순신은 배 만드는 일, 대장장이 일, 석수 일 등을 감독하는 한편, 조총을 사용한다는 왜적의 총알을 막아낼 배를 연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옷과 투구가 화살을 막아낸다는 이치를 생각하고는 배도 거북의 등같이 갑주를 입히면 총알을 막아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순신은 몇 달 후에 세계 최초의 장갑선인 거북선의 설계도를 그렸다. 그리고 일등 편수(編修)를 불러다가 이와 같은 배 두 척을 빨리 만들도록 했다. 마침내 왜적이 들어오기 이틀 전인 임진년(1592) 4월 12일 세계 최초의 장갑선인 거북선의 진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왜군의 상륙과 연전연패의 조선

풍신수길은 임진년 삼월 열나흘에 이십팔 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대마도로 모이도록 영을 내렸다. 워낙 숫자가 많았으므로 모이는데 한 달이 걸렸다. 드디어 사월 십이일, 소서행장․종의지․평조신이 선봉장이 되어 병선 사만이 까마귀 떼같이 바다를 덮고 부산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었다.

풍신수길은 임진년 3월에 왜군 28만을 대마도로 모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워낙 많은 숫자였기에 모이는 데만도 한 달이 걸렸다. 드디어 4월 12일에 풍신수길의 무장들은 병선 4만 척을 이끌고 까마귀떼 같이 바다를 덮고 부산을 향해 쳐들어왔다.

왜군은 밤새도록 항해해 4월 13일 새벽 5시에 부산진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조선에서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왜군은 부산, 동래를 함락시키고 서울로 치닫는 판이었다. 4월 27일에 왜군은 성주까지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왜적은 부산을 시작으로, 대구, 인동, 경주 등을 줄줄이 함락시켰다. 그들은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백성의 재산을 뺏고, 장정을 죽이는 등 남쪽의 비보는 시시각각 잇달아 들어왔다.

조선에서 손꼽는 명장들이 패하자, 백성들이 수군수군하고 인심이 흉흉해졌다. 피난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달아날 준비를 했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들고일어났다. 이에 임금은 할 수 없이 신하들을 달래고, 신립의 의견을 받아들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공빈(恭嬪)의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 무렵에 신립장군이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으뜸가는 장수들이 다 패하고, 왜적은 서울과 하루 반나절 길밖에 안 되는 충주까지 함락을 시켰다. 선조는 그날 밤에 대궐을 떠났다.

임금이 서대문 밖으로 나서 다리에 닿으니 서울 장안은 이미 불바다가 되었다. 대궐도 불탔다. 그런데 대궐에 불을 지른 사람은 왜적이 아니라 피난민들이었다. 임금과 양반들이 먼저 왜군을 피해 도망가니 설움을 받던 백성들은 종문서를 보관해 두었던 예장원에 불을 지르고 그 문서를 없애려 했다. 여기에 더하여 하층민 중 불만세력이 합세하여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의 대궐은 무엇에 쓰느냐고 대궐에 불을 지르고 금은 보화를 훔쳐내기 시작했다.

임금이 탄 가마가 임진강 나루에 당도한 때는 깜깜해서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적은 뒤를 쫓는데, 강을 앞에 두고 한치 앞을 분간 못하니 일행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때 이항복이 강변 언덕의 한 정자에 불을 질렀다. 종일 비를 맞은 정자였지만 어찌나 잘 타는지 불빛이 환하여 대낮처럼 밝았다. 그리하여 배 일곱 척을 마련한 임금과 일행은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다. 일행이 송도에 들어서니 송도 백성들이 길가에 죽 늘어서서 통곡하는 자도 있고, 소리지르는 자도 있는가 하면, 임금에게 돌을 던지며 행패하는 자도 있었다.

임금은 좌의정 정철은 억울하게 귀양을 갔으니 다시 불러 쓰면 민심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의론을 따라 정철을 다시 불렀다. 그리고 영의정 이산해를 파직시켰다. 또한 언관들이 들고일어나자 좌의정 유성룡도 면직시켰다.

한편 왜군은 죽산에서 비를 만나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때 별안간 한 방의 신호소리가 울렸다. 소리와 함께 수 만 개의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는데, 모두가 백발백중 왜군 병사의 심장에 꽂혔다. 그리고 한 장수가 수백 명 군사를 거느리고 말을 달려와 남은 왜적의 목을 모조리 베었다. 이 장수가 바로 강원도의 조방장 원호(元豪)란 사람이었다.

강변에서 왜적 선봉을 몰살시킨 원호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팔대수(八大藪) 속으로 돌아왔다. 장차 날이 밝으면 강 건너 왜적을 다시 몰살시킬 계획이었다. 드디어 날이 밝아지자 팔대수 속에서 강 건너 왜진으로 화살이 쏟아졌다. 싸움은 승리를 목적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 순찰사가 원호에게 급히 본영으로 돌아오라는 군령을 내렸다. 적을 막아내려면 이곳에서 막아야만 하는데, 순찰사의 명령이니 어길 수도 없어서 원호는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해산시키고 강원도로 돌아갔다. 원호 장군은 강원도 금화에서 가등청정의 군사를 만나 싸우다 패하고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말았다.

5월 4일 아침, 마침내 소서행장이 서울을 점령했다. 정기룡과 방어사 조경은 추풍령을 지킬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의병대장 장지현이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정기룡은 왜적이 야습할 것을 대비해 허술하게 위장을 하고,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또한 소 열 필 머리에다 호랑이 가죽을 씌우고, 꼬리에 기름 묻은 솜을 달아놓고, 등에는 검부나무 한 짐씩을 지워 놓게 명했다.

밤이 깊어지자 군사들은 제각각 부서를 따라 추풍령 중턱으로 내려갔는데, 어느새 왜병은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정기룡은 소로 만든 불호랑이의 꼬리에 불을 붙여, 화포를 쏘자 불호랑이는 불에 활활 타오르면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기습공격에 왜군들은 놀랐고, 이에 왜병 천여 명을 죽었다. 곧 왜장 흑전장정은 오만 명의 왜군을 총출동시켰다. 정기룡은 다시 불호랑이를 적진으로 보냈다. 그러자 이에 무서웠던 왜병들은 또 무서워 도망치기 시작했다. 왜장은 도망하는 자들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었다. 결국 왜병들도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왜군은 수적으로 우세했다. 결국 의병 대장 장지현은 총알을 맞아 쓰러지고, 방어사 조경은 왜병의 창에 찔려 붙들려 갔다. 하지만 정기룡은 적의 일진을 무찌르고 무사히 조경을 구해냈다. 그리고 같이 샛길로 빠져나가 조경을 치료하고 다시 영남병사 김성일을 찾아갔다. 정기룡이 적토마를 타고 상주목사를 찾으려 화룡동으로 들어가니 벌써 왜적은 그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이에 정기룡은 왜적을 물리치고 상주성을 탈환했다.

서울이 왜병의 수중에 들어가자 임금은 이제 임진강 하나를 믿고 송도에 더 있을 수가 없어서 평양으로 향했다. 이항복, 이덕형, 홍순언이 어떻게 왜적을 물리칠지를 의논하는데, 명나라의 구원병을 불러오는 것이 최상책이란 결론을 내렸다.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이 한 번 변변한 싸움도 못하고 달아난 것이 부원수 신각은 억울했다. 그래서 김명원에게 욕을 하고 혼자 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다. 그들은 마침 함경도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온 이혼을 맞아 사기가 충천했다. 이들은 드디어 나타난 왜적 천여 명의 머리를 떨어뜨리고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편 김명원은 신각에게 욕을 먹은 것이 분해 임금에게 신각을 모함했다. 평양에 피난 가있던 임금은 양주싸움을 알 리가 없었고 선전관에게 칼을 보내 스스로 목을 베도록 했다. 그러나 선전관이 양주로 떠난 날 저녁, 파발마가 뛰어들어 신각의 공을 알리자 임금은 후회하고 신각을 죽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신각은 이미 칼로 자결하고 난 뒤였다.



거북선의 위력과 임금의 몽진

거북선 진수식을 거행한 지 이틀째 되는 사월 십사일, 이미 부산은 왜적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그러나 전라도 여수에 있는 좌수영에서는 이 일을 전연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통문이 와서 이순신은 왜적이 쳐들어와 부산에 이어 동래까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은 곧 출전할 계획을 세웠다.

거북선 진수식을 거행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이미 부산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 여수 좌수영에선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전갈을 받고 이순신은 왜적이 부산에 이어 동래까지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을 드디어 출전을 결심했다.

드디어 91대의 배가 죽 늘어서서 위풍당당하게 나아갔다. 멀리 옥포섬 안에서는 왜적이 들어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분탕질을 하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이순신이 깃발을 흔드니 북이 울리고 징소리가 나면서 80척 배에서 황자총통이 터졌다. 적선에 불살이 물 쏟아지듯 하였다. 적의 배와 아군 배가 합하여 140여 척, 남해도에서는 사상 처음 벌어지는 큰 싸움이었다. 왜적들은 황자총통에 맞자 뜨거워서 날뛰다가 배까지 뒤집혔다. 이때 왜적의 배 여섯 척이 달아나려고 언덕 기슭으로 살살 노를 젓는 것을 본 이순신은 그 배들을 부수라고 명령했다. 황자총통을 맞은 적선 여섯 척은 한꺼번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다. 이에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왜적의 배 스물여섯 척을 단번에 쳐부수었다. 대승이었다. 이에 왜군은 앞다투어 물러났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뒤, 거북선에다가 다시 천자총통을 장치했다. 천자총통은 그 당시에는 가장 큰 대포였는데, 이순신은 왜적을 막기 위해 거북선을 창조하고 또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대장군전 등의 신무기를 발명했다. 또 왜적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승자총을 만들고 또 가벼운 대완구 호준포를 만들었다. 또 옥포 싸움의 경험을 살려 네발갈구리 쇠뭉치와 장병겸을 많이 만들어 배마다 간수하게 했다. 네발갈구리는 쇠사슬을 매어 멀찍이 있는 배를 끌어당기는 무기이고, 장병겸은 가까이 있는 적의 배를 끌어당기는 무기였다.

다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순신은 5월 28일, 날이 밝자 출동준비령을 내렸다. 거북선에는 각종 총통과 살을 가득 싣고 수철연의환과 화약도 많이 실었다. 5월 29일, 철갑으로 만들어진 거북선이 첫 출범을 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순신의 함대가 노량바다에 막 당도했을 때 경상우수사 원균이 쫓아왔다. 왜적과 조선 배들은 총과 활을 쏘며 전투를 벌였다. 우리 수군들은 거북선 입을 열고 각종 총통의 포문을 열고 화전을 쏘기 시작했다. 불을 뿜은 총포에 순식간에 왜선 열두 척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또한 거북선의 용의 머리가 고개를 들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불이 쏟아져 나왔다. 이 불길은 삽시간에 왜선들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러자 왜선들은 모두 불타고 말았다.

6월 5일, 고성 당항포에 왜선들이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순신은 곧 출동명령을 내렸다. 왜적들은 조선함대가 오는 것을 보더니 징을 치고 조총과 활을 쏘기 시작했다. 왜적의 조총이 콩볶듯하고 화살이 비오 듯 했지만 거북선은 계속 전진했다. 이윽고 거북선의 각 총통에서 일제히 화전이 나가며 불을 내뿜자, 왜선들은 뒤집혀지고 온통 수라장이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적을 육지로 못 달아나게 하려고 후퇴명령을 내리고, 추격하는 왜선을 향해 천자총통을 발사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한편 부원수 신각이 양주 게넘이에서 도원수 김명원의 참소로 억울하게 죽자,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왜적을 막는 군대는 김명원의 오합지졸 뿐이었다. 이제 임진강에 나라의 존폐가 달린 것을 안 임금은 북병사로 있던 신할과 그 부하 천여 명을 임진강으로 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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