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배비장전

무명 지음 | -
배비장전

작자 미상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배비장: 신임 제주목사인 김경을 수행하는 비장. 겉으로는 군자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이중적인 인물. 애랑과 방자의 꾀임에 빠져 동헌 마당에서 발가벗고 망신을 당한다. 후에 애랑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애랑: 제주도의 이름난 기생. 용모와 맵시는 양귀비에 견줄 만하고 지혜 또한 뛰어나 어떤 남자라 도 능히 유혹한다. 제주목사, 방자 등과 공모해 배비장을 유혹하고 나중에 그를 웃음거리로 만드나 나중에 위기에 처한 배비장을 돕는다.

방자: 배비장의 시중을 드는 천인. 애랑과 함께 배비장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정비장:배선달과 같은 비장 신분. 애랑의 꾀와 언변에 빠져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은 물론 속옷까지 그녀에게 빼앗기는데 심지어는 자신의 이빨까지 그녀에게 준다.

김경: 신임 제주목사. 배비장의 상급자로, 관례적으로 이루어지던 신관사또 연회와 기생수청을 배 비장이 거부하자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 계략을 세운다. 후에 배비장과 화해하고 그를 정의 현감으로 제수한다.



신임 제주목사의 비장으로 제주로 내려가는 배선달

“제주라 하는 곳이 비록 떨어진 섬이오나 색향(色鄕)이라 하옵디다. 그곳에 계시다가 만일 주색에 몸이 잠겨 돌아오지 못하시면, 부모님께 불효되고, 첩의 신세 그 아니 원통하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씨는 같지만 우열은 판이하게 달라 현인과 군자, 열녀와 음녀가 대를 이으니, 가지각색의 성질을 측량하기 어렵다. 사람의 성질은 산천의 정기를 타고나는데 호남 좌도 제주군 한라산의 험준하고 아름다운 정기를 타고 기생 애랑이가 생겨났다.

애랑이가 비록 천한 기생으로 태어났을 망정 고운 맵시는 미인으로 유명한 월나라 서시나 양귀비보다도 뛰어나고 지혜 역시 총명했으며, 간교한 꾀는 구미호가 환생한 듯하여 호색하는 사나이가 한 번 걸려들면 결코 헤어나지 못했다.

한양의 김생이라는 양반은 문필과 재능이 비범하여 일찍이 제주 목사를 제수 받았다. 김경이 도임길에 오르고자 육방 관속을 뽑을 적에 서강에 사는 배선달을 불러 예방(禮房) 소임을 맡기니 높이 불러 배비장이라 했다.

배비장이 집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고하자 대부인과 아내가 만류했다. 대부인은 배비장이 떠난 사이에 자신이 세상을 버리게 될까 걱정했으며 배비장의 아내는 배비장이 주색에 빠져 허우적댈 것을 걱정했다. 배비장은 걱정 말라며 큰소리치고는 하직 인사를 마치고 제주도로 길을 떠났다.

신임 제주 목사 일행이 길을 떠난 날, 온 산천은 봄빛으로 아름다웠다. 영주와 강진을 거쳐 해남에 다다라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니 처음에는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이 순조로와 하늘과 맞닿은 바다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즐겁게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여 물결이 크게 일자 사또를 비롯한 모든 비장들이 겁을 먹고 곧 죽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신관 사또가 사공들에게 명하여 용왕제를 지내게 했다. 온갖 음식과 제물로 정성껏 고사를 지내니 풍랑이 잠잠해져서 다시 바다 풍경을 즐기며 뱃길을 계속했다. 신관 사또 일행이 어느덧 제주성에 다다르니 지세도 좋거니와 풍경이 더욱 좋았다.



간교한 꾀와 빼어난 말솜씨로 정비장을 알거지로 만드는 애랑

애랑이란 년 달라는 말 아니하여도 정비장을 물 오른 송기 때 벗기듯 하려는데, 가지고 싶은 대로 달래라고 하니 불한당 같은 마음에 피나무 껍질 벗기듯이 아주 홀랑 벗기려고….

제주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망월루(望月樓)에서 구관 사또의 관속이었던 정비장이 수청기생 애랑과 애타는 이별을 하고 있다. 정비장이 애랑의 손을 잡고 서울로 떠나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우미인과 이별하던 항우나 양귀비와 이별하던 당명황도 자신의 심정보다 더 애틋하지 않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애랑은 애써 마음에도 없는 슬픔과 눈물을 자아내며, 하루 아침에 이별하게 되니 이제 누구에게 의탁하여 먹고 입고 살겠냐고 길게 탄식했다. 이 말을 들은 정비장이 자신이 올라간 후에도 한동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자신의 볏짐을 풀어줬다. 볏짐에는 제주에서 나는 온갖 이름난 특산물들과 비단, 고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애랑이 정비장이 떠난 후 애타는 그리움과 긴긴 밤의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겠냐며 슬픈 척하자, 정비장이 노리개를 풀어줬다. 애랑은 이 기회를 틈타 정비장의 모든 것을 빼앗으리라 마음먹고 정비장에게 갓두루마기를 벗어주고 가면 그것으로 외로움과 시름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비장이 양가죽으로 만든 갓두루마기를 벗어주며 자신을 잊지 말라 당부했다.

애랑이 추운 겨울날에 귀가 시려워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자 정비장이 돼지 가죽으로 만든 휘양을 벗어주며 자신을 잊지 말라 당부했다. 애랑이 또 칼을 달라고 하나 이번에는 정비장이 거절했다. 애랑이 이별 정표로 달라고 다시 애원해도 끝내 거절하다가 애랑이 자신을 겁탈하려는 젊은 호남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칼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정비장은 껄껄 웃으며 자신의 칼을 내어줬다.

이렇게 해서 애랑에게 의복은 물론 고의적삼까지 벗어준 정비장은 알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랑은 여기서 그만 두지 않고 정비장에게 상투를 베어 달라 하고 정비장이 이를 거절하자 앞니를 빼달라 했다. 죽은 후에 관에 넣어 가겠다는 애랑의 말에 미혹된 정비장이 방자를 시켜 자신의 이빨을 뽑으려 했으나 잘못하여 코를 다치고 말았다. 마침내 떠날 시간이 임박하여 두 사람은 죽어서라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기생수청을 거부한 후 계락에 말려 알몸으로 목욕하는 애랑에게 빠져드는 배비장

우르렁 출렁 목욕하는 저 거동, 손도 씻고 발도 씻고, 배, 가슴, 젖도 씻고 예도 씻고 게도 씻고 샅도 씻고 한창 이렇게 목욕할 때에 배비장은 그 거동을 보고 어깨가 실룩해지고 정신을 잃어 구대정남(九代貞男) 간 데 없고 도리어 음남(淫男)이 되어 눈을 모로 뜨고 도둑나무하다가 쫓기는 듯 숨을 헐떡거리며 혼자 이르는 말이, “어! 저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 여럿 녹였겠구나.”

배비장이 정비장과 애랑이 이별하는 장면을 보고 양반의 체신이 땅에 떨어졌다며 탄식했다. 곁에 있던 방자가 코웃음을 치며 누구라도 애랑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응수하자 배비장이 그의 경솔함을 나무랐다. 이에 방자가 내기를 제안하는데, 그 내기의 내용인즉, 배비장이 올라가기 전까지 애랑에게 빠져들지 않으면 자신의 가솔들이 모두 배비장의 든안밥 머슴(머슴이긴 하지만 잠은 아니자고 밥만 얻어먹는 머슴)이 되고 애랑에게 반하면 타던 말을 방자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신관 사또가 부임하고 모든 비장들이 여러 기생들을 골라 각기 기생수청을 받는데 배비장만이 이를 거부했다. 배비장 역시 속마음은 그들처럼 즐기고 싶었으나 방자와 내기한 바가 있어 어쩌지 못하고 참았다. 동료 비장들이 계속 권하자 속이 뒤틀린 배비장은 자기 눈앞에 기생을 보이는 자는 엄벌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이러한 사실을 사또가 듣고 일등 명기들을 모두 불러모아 제안하기를, 배비장을 즐겁게 하여 웃게 하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고 했다. 이때 애랑이 선뜻 나서 배비장을 유혹하겠다고 했다. 애랑이 계책을 내 다음날 신관 사또를 비롯한 모든 비장들이 꽃놀이를 가기로 했다.

때는 봄날이라 온 산에 꽃이 만발하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며 폭포수와 계곡물이 굽이굽이 흘러가니, 사또와 비장들이 춘흥에 겨워 기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다. 이때 배비장만은 혼자 고고한 척하며 이를 외면하는데 문득 수풀 사이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하는 애랑을 발견했다.

애랑의 아름다운 자태와 용모, 그리고 알몸을 보고 배비장은 끓어오르는 정욕을 참을 수 없었다. 배비장은 가장 정숙한 남자인 척하던 이제까지의 품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랑을 탐하기 시작하여 사또와 모든 비장들이 돌아갈 때 혼자 꾀병으로 숲 속에 남겠다고 했다. 육방 관속들이 이를 눈치채고 그 병은 여인이 만져주어야 낫는 병이라며 그를 우롱하나 배비장은 애랑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방자와 함께 산 속에 남겨진 배비장은 경치를 구경하는 척하며 애랑의 모습을 훔쳐보다가 방자에게 놀림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방자는 이제 더 이상 배비장에게 말을 높이지 않고 색(色)을 밝히는 인간이라며 배비장을 나무랐다. 방자가 일부러 헛기침을 하자 애랑은 짐짓 놀란 척하며 수풀 속으로 숨고 애간장이 타는 배비장은 방자를 시켜 애랑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배비장의 심부름으로 애랑을 찾아간 방자는 배고픔이 심하니 음식을 좀 나누어 달라 하고 애랑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음식으로 정성스레 상을 차렸다. 음식상을 받아든 배비장은 애랑이 이빨로 꼭지를 물어뗀 감을 맛있게 먹고 방자를 시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애랑이 이를 거절하자 배비장은 어쩔 수 없이 길게 탄식하고 하릴없이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배비장은 애랑을 잊지 못해 시름에 잠기고 죽더라도 애랑을 한 번 보고 죽으리라고 결심하고 급기야 방자를 불러 애랑을 만나보게 해달라고 애원하나 방자는 이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방자와 함께 소설책을 보던 배비장은 여전히 애랑의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구전으로 삼백 냥을 주고 노모를 보살펴주겠다는 조건으로 방자에게 다시 애랑 만나보기를 간청했다.

배비장은 스스로를 ‘걸덕쇠’라 칭하며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편지로 쓰고 방자는 이 편지를 들고 애랑을 찾아갔다. 방자는 애랑에게 답장을 하되 쉽게 허락하지 말고 애타게 하라고 주문하고 다시 애랑의 편지를 받아들고 배비장에게 돌아온다.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는 애랑의 편지를 읽은 배비장은 낙담했다. 그러나 편지의 맨 아래쪽을 읽어보라는 방자의 말을 듣고 이를 살피던 배비장은 북쪽 창의 빈틈으로 들어오라는 애랑의 뜻을 읽고 뛸 듯이 기뻐했다.



발가벗고 궤 속에 들어갔다 동헌 마당에서 망신당하는 배비장

함정같이 잠긴 금거북쇠를 덜커덕 열어 놓으니, 배비장은 알몸으로 썩 나서면서 그래도 소경이 될까 염려되어 두 눈을 잔뜩 감고 이를 악물고 왈칵 두 손을 짚으면서 허우적거린다. 한참 동안 이 모양으로 헤엄쳐 갈 때 동헌 댓돌에다가 대가리를 부딪히니 배비장은 눈에서 불이 번쩍 나서 두 눈을 번쩍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동헌에 사또가 앉고 대청에 삼공형(三公兄)이며 전후 좌우에 기생들과 육방 관속 노령배(奴令輩)가 일시에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참는 것이 웃음이다.

애랑의 전갈에 씻은 듯이 병이 나은 배비장은 해가 지자마자 의관을 정제하고 애랑의 집을 찾아갔다. 배비장을 따라 가던 방자는 배비장에게 양반 의복을 벗고 개가죽 두루마기와 놋벙거지를 쓰기를 권하고, 배비장은 제주사람 옷차림이어야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방자의 말에 속아 그의 말대로 다시 옷을 차려 입었다. 마침내 애랑의 집에 도착한 배비장은 담 구멍으로 들어가다가 배가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자 방자가 배비장의 상투를 잡아당겨 겨우 빠져나갔다.

집안으로 들어간 배비장은 문구멍을 뚫어 몰래 애랑의 고운 자태를 엿보다 담배 연기에 기침을 하고 말았다. 애랑이 누구냐고 묻자 자신을 ‘배걸덕쇠’라고 소개한 배비장은 애랑과 이부자리에 들기를 서두르는데 갑자기 방자가 소리를 지르며 들어왔다. 깜짝 놀란 배비장은 알몸으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애랑에게 누구냐고 묻었다. 애랑이 자신의 남편인데 기운이 항우와 같고 화가 나면 몹시 무섭다고 하니 배비장은 겁에 질려 애랑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할 방도를 내달라고 애걸했다.

애랑이 미리 준비해둔 커다란 자루에 들어가라고 하자 배비장은 그대로 따랐다. 애랑은 자루의 끈을 배비장의 상투에 모두어 감아 매고 방구석에 세워 둔 뒤 불을 켰다. 방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방구석에 세워둔 자루가 무엇이냐며 묻자 애랑이 거문고에 새 줄을 달아 세워둔 것이라 하니, 방자가 거문고면 한 번 타보라고 하며 대꼬챙이로 자루를 찌르자 배비장은 아픈 것을 참고 마치 거문고인 냥 ‘둥덩 둥덩’ 소리를 냈다.

방자가 잠시 소피를 보겠다며 나간 사이 배비장은 애랑에게 필시 자루를 열어볼 듯 하니 자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 했다. 애랑이 피나무 궤를 열고 들어가라고 하자 배비장은 작은 궤에 들어가 몸을 옹송그린 채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애랑이 자물쇠를 채우자 방자가 들어오면서 ‘아까 꿈을 꾸니 백수 노인이 이르기를, 궤 속에 금신(金神)이 들었다고 했으니 저 궤를 당장 불에 태워버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애랑이 악을 쓰며 궤 속에는 업귀신이 들어 그 덕에 먹고사니 절대 그리할 수 없다고 했다.

궤를 두고 옥신각신하던 방자와 애랑은 결국 궤를 톱으로 잘라 반으로 가르기로 하고 이 말을 들은 배비장은 방자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배비장의 말을 들은 방자는 업귀신이 말을 한다고 하며 물에다 넣어 버리자고 했다. 방자가 궤짝을 짊어지고 상두꾼 소리를 하며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업귀신의 자지가 장질병에 좋다며 궤를 팔라고 했다. 배비장은 목숨이라도 건져야 겠다는 생각에서 업귀신인 척하며 그 사람에게 궤를 팔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방자는 바닷물에 띄워보내겠다며 궤를 던져버렸다. 주위에서 궤 틈에 물을 부으며 마구 흔들어대자 배비장은 자신이 바다에 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사또가 하인들을 불러 사공들이 배를 몰고 가다 닻을 감고 노를 젓는 소리를 흉내내게 하자 배비장은 배를 탄 사공들이 자기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고 살려달라며 소리를 질렀다. 곁에 있던 사령이 소리를 들은 척하며 구해주겠다고 하자 배비장은 자신을 ‘배걸덕쇠’라고 말했다.

사령들이 사공인 척하며 짠물이 들어가면 눈이 상하니 눈을 감고 나오라고 했다. 사령들이 궤를 열자 배비장은 알몸으로 나와 허우적대다 동헌 댓돌에 머리를 부딪혔다. 놀라 눈을 뜨고 보니 동헌 마루에 알몸으로 허우적대는 자신을 보고 사또와 육방관속, 사령들이 모두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또가 웃으며 웬일이냐고 묻자 근래에 곤손풍(坤巽風. 서남풍. 곧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반대방향에서 부는 바람)이 불어 이리 되었다고 대답했다. 사또가 웃으며 의복을 내어주고 동료들이 그를 위로했다.



다시 애랑에게 속아 제주로 돌아온 후 정의현감이 되는 배비장

“나으리 떠나실 때에 제주목사께서 애랑을 시켜 나으리를 중도에 가서 ‘한달만 머무르게 하라’ 하시더니, 과연 오늘 이 경사 있게 하셨구려. 속담에 ‘물에 잡아 넣으면 건져낼 힘도 있다’ 하더니, 사또께서 나으리를 여지없이 속이시고 다시 이와 같이 보살펴 생각하시니 첫째는 나으리의 복이요, 둘째는 사또의 은덕이오.”

사또가 애랑으로 하여금 배비장의 수청을 들게 하며 머물길 권하나 배비장은 더 이상 고개들 면목이 없어 서울로 돌아가려 했다. 해진 도포를 입고 망가진 갓을 쓴 초라한 행색으로 해변에 앉아 있던 배비장은 마침 일을 끝내고 바다에서 나오는 해녀에게 뭍으로 가는 배가 있는지 묻었다. 그러나 해녀는 배비장의 하대에 버럭 성을 내며 세도가 대단하던 배비장도 궤 속 귀신이 될 뻔한 판에 웬 양반 흉내냐고 따졌다. 이에 배비장은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데 뭍으로 가는 배가 이미 떠나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는 해녀의 말에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제주성 안의 어느 양반 부인이 단독으로 배를 내어 친정인 해남으로 간다는 말을 들은 배비장은 그 배 사공들에게 하소연하고 애걸하여 몰래 배를 얻어 타기로 했다. 배를 타고 가던 배비장은 자기도 모르게 기침을 하고 이 소리를 들은 부인이 사공들에게 호통을 치자 사공들이 사실을 고했다. 이에 부인은 몹시 화를 내며 배삯을 다 낼 수 없으니 자신이 내지 않은 나머지 삯은 그 사람에게 받으라 했다. 화가 난 사공들이 삯을 낼 수 없는 배비장을 어느 집 방안에 가두자 배비장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하릴없이 신세만 한탄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