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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세로 읽기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세로 읽기

주현성 지음

더좋은책 / 2014년 11월 / 444쪽 / 18,000원





인간의 마음을 읽는다, 심리학



삶의 의미를 추구한 칼 융과 프랭클의 심리학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아실현 욕구를 믿으며 인간의 가치를 높이려 했지요. 여기에 그와 궤를 같이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삶의 태도와 자아실현의 방법 등을 제시하며, 실제 생활 속에서 삶의 철학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한 심리학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칼 융과 빅터 프랭클인데요, 이 둘은 모두 우연하게도 프로이트의 직간접적인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아주 독특한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이론을 전개해나갔답니다.

자기실현을 제시한 칼 융의 분석심리학: 한때 프로이트의 수제자였던 칼 융은 과학을 내세우기는커녕, 비과학적이고 영적인 것까지 추구하는 정신분석학자였답니다. 그는 스스로가 신비로운 경험의 소유자이기도 했는데요, 미신적으로 보이는 심령적인 것들을 고집했기 때문에 스승인 프로이트와도 결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답니다. 칼 융이 말하는 원형이니 집단 무의식 같은 것들은 일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론은 많은 상담 치료와 자신의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며, 동시에 수천 년을 이어져온 신화와 다양한 종교 등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지요.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심리적 안정 효과와 치료 효과를 경험하거나 자기실현을 시도하게 되었답니다.

융은 먼저, 인간은 자신이 인정하기 힘든 인격의 다른 측면인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아와 그림자가 서로 양극에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볼 때는 열등하거나 야만적으로 보이는 어두운 면이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이 그림자가 우리 스스로 긍정적으로 보는 자아와 반대편에 있으면서 균형을 이룬다고 주장했지요. 융은 우리가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경우,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자는 꿈속에서 대개 부정적인 인물 등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융은 그림자를 나쁜 것으로 외면하기보다, 자신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적절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자아와 무의식이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를 충분히 고찰할 수 있을 때, 꿈 등을 통해 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접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하고 있답니다.

여기서 ‘아니마(Anima)’는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이지요. 반대로 ‘아니무스(Animus)’는 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입니다. 융은 남성적인 것은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면이 강하고, 여성적인 것은 감성적이며 공감하는 면이 강하다고 전제하고 있지요. 그래서 남자는 그 무의식 내부에 여성적인 것, 감성적인 것을 품고 있고, 반대로 여자는 이성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많은 부분 자신의 아니마나 아니무스와 유사한 대상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각 민족 속에 내려오는 오랜 집단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더 복잡하며, 꿈속에서 등장하는 상징물 또한 더욱 격렬한 심리적 반응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꿈은 깨어난 후에도 강한 심리적 여운과 신비로운 감정을 동반하기도 하지요. 남성은 꿈속에서 창녀, 신성한 영적 지도자나 동굴, 비옥한 토양, 바다 등으로 아니마를 접할 수 있으며, 여성은 영웅, 시인, 영적 지도자나 검, 불꽃같은 바람, 불 등의 이미지로 아니무스를 접할 수 있답니다. 융은 이런 각자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인식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융이 말한 자기실현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의식하는 것이 자아라면, 이 의식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또는 집단의식까지 포함하는 말이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이란 단순히 스스로가 의식하는 바람과 욕구를 충족시키고 실현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의 욕구까지도 모두 충족시켜가며 실현하는 온전한 실현인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실현이라는 것은 자신의 못난 점, 부정적인 것, 뿌리 깊게 새겨져 있는 무의식적 욕망이나 집단의식조차도 다 인정하며 찾아가는, 온전한 의미의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융의 생각들을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유사하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한편 융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등을 의식화하는 데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 행동의 유형을 외향형과 내향형, 감각형과 직관형, 사고형과 감정형, 판단형과 인식형 등의 4가지 기능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요, 이는 후에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융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고안한 자기 보고식 성격유형검사)’라고 하는 성격유형검사에 반영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융의 의식화를 돕기 위한 놀이와 만다라 그리기 등의 작업은 오늘날 미술 치료 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답니다.

구체적인 생활철학을 제시한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었기에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의 극단적인 삶을 경험해야 했지요. 그는 다른 포로들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고, 수용소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굴욕,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답니다. 여기에 책으로 내려고 했던 소중한 원고까지 독일군에게 빼앗기자 그는 몹시 절망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빅터가 입을 죄수복을 건네주었는데요, 그 옷 안에는 작은 종이쪽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쪽지에는 ‘진심으로 네 영혼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라는 구절이 쓰여 있었는데, 그 글을 보는 순간 그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열심히 살아서 하느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찾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프랭클은 그 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었지요. 당시 포로들은 마실 물조차 얻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루에 한 컵씩 배급되는 물을 반만 마시고 나머지는 세수를 하는 데 사용했으며, 유리 조각으로 면도도 했지요. 턱없이 부족한 물과 유리 조각으로 하는 세수와 면도가 제대로 될 리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몸 씻기와 면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결코 낙담하거나 절망하는 말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그는 다른 유대인보다 건강하고 깨끗해 보여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해방을 맞이했답니다. 프랭클은 이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가 삶의 자세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과, 삶의 의미가 가지는 심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정신분석학자였던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공허감과 욕구불만으로 신경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목격하고는 ‘의미 치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를 제안하게 됩니다. 이는 환자가 도피하고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과 책임을 환기시키고, 스스로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적극적으로 책임지도록 조력하는 것이지요. 이런 그의 심리학은 삶의 의미를 잃은 신경증 환자뿐만 아니라 정신병이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한부 환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일반인에게도 구체적인 생활철학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우리 사상의 뿌리, 동양과 한국의 철학



간단하게 살펴보는 한국 사상의 흐름

우리 고유의 신화, 단군신화: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을 추적해 들어간다면, 단군신화와 그에 따른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신의 아들 환웅(桓雄)이 땅에 내려와 우리 시조인 단군(檀君)을 낳았다는 것이 단군신화이며, 그 신화에서 나타나는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 또는 인간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우리는 이 단군신화와 홍익인간 사상을 통해, 인간을 위하는 인본주의적 사상과 내세를 거론하지 않는 현실적인 세계관을 목격할 수 있답니다. 또한 환웅이 홍익인간을 실천하기 위해 곡식ㆍ생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 등 인간 사회의 온갖 일을 주관하였다는 점은 그것이 추상적 표어가 아니라, 경제와 사회, 복지 등 실제 인간 사회의 개선과 향상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개념을 담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요. 우리의 신화와 고유 사상을 대표하는 단군신화는 원래 한반도 서북 지방의 부족 설화였고 그런 만큼 부족국가 시대에는 일정 부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지요. 하지만 국가 체제가 완비되는 삼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가와 지배받는 개인의 삶까지도 함께 하나로 묶는 좀 더 설득력 있는 사상 체계가 요구되었지요. 이에 삼국은 모두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유교와 불교, 노장 사상 등의 외래 사상을 본격적으로 수입하고 적용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게 됩니다.

신라와 고려, 불교의 시대: 삼국은 유학을 받아들여 국가 운영 및 관료체제 정비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율령을 반포하고 교육기관을 세우거나 사서를 편찬하는 등 유학을 현실 사회에 적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하지만 그것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행정력 향상에 주로 편중되어 있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일반 백성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선 것은 불교였는데요, 이에 불교가 나라를 하나로 묶는 강한 지배 사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뒤늦게 국가 체제를 완성한 신라는 불교와 유교를 현실 정치적 차원으로 융합하여, 삼국 통일을 달성하는 동력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고려는 지방 호족인 왕건이 세운 나라이지요. 그래서 고려 시대 초기에는 지방 호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종(禪宗)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조를 세운 이상, 중앙집권을 강화해나가야 했지요. 이에 갈수록 유교적 지식이 강화되었고, 새로 힘을 얻는 문벌 귀족들에 의해 문치 또한 강화되었답니다. 이런 분위기는 다시 교리를 중시하는 화엄종(華嚴宗)을 불러들였지요. 그런데 무신 정변으로 무신들이 권력을 잡자 다시 선종이 힘을 얻게 되는데요, 이에 지눌이 등장해 선종을 중심으로 다시 교종(敎宗)을 통합하게 됩니다. 그는 선종의 교의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佛性)의 드러남이라는 화엄 사상이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보고, 화엄 철학과 선이 결합된 한국의 독자적인 불교 사상을 성립해 이후 한국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된답니다. 당시 다양한 불교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고, 이들 또한 지배층과 승려들의 불교에 불과했답니다. 그렇다면 고려 시대 민중의 불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백성들의 불교는 윤회설을 기반으로 도교의 풍수지리 사상과 결합되어, 여전히 기복 신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란과 몽고 등의 외침은 민중의 불교에 호국 불교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했답니다.

조선, 성리학의 시대와 실학 사상: 삼국 시대부터 고려까지 이어져 오던 불교 중심의 흐름은, 고려 말 신진 사대부들이 들고 온 성리학에 의해 사라지고 맙니다. 고려 말 무신정변과 민란, 몽고의 침입 등으로 고려가 붕괴 위기에 놓이자, 철학적으로 재무장된 유교인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우며 신진 사대부가 등장하여 다시 문치의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 정도전이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을 들고 나와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촉구하게 됩니다. 특히 그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의 주축이 되어 조선 왕조를 세우고, 성리학을 그들의 통치 철학으로 채택함으로써 본격적인 성리학의 시대를 열었지요. 조선의 통치 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그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민본과 덕치를 중시하는 유교 이념과 의례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요. 하지만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죽임을 당하고, 태종과 세조의 왕위 찬탈 등으로 훈구 세력들이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성리학적 명분론은 쇠퇴하고 철학적인 연구도 침체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후 성리학의 체계화에 힘쓴 사람은 길재인데요, 그는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요. 벼슬 대신 성리학 연구에 정진한 그는 김숙자ㆍ김종직ㆍ김굉필ㆍ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만들어냈는데요, 지방에서 세력을 확보해나간 이들 성리학 세력을 ‘사림(士林)’이라고 하지요. 이들은 연산군이 퇴위되고 왕위에 오른 중종에 의해 정치의 전면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새로운 개혁 세력이 필요했지요. 이에 당시 사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던 조광조를 중용합니다. 조광조는 국왕을 교육하고, 사림을 적극 등용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지요. 하지만 훈구 세력의 반발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음모에 휘말리면서, 끝내 죽임을 당합니다. 왕이 마음을 바로잡아 왕도 정치를 실현할 것을 내세운 조광조는 사림 유학파의 정통 적자였으며,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 한 유학자의 표상이었지요. 또한 조선 유학자들의 정신적 지주요, 사림 정신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동시대의 철학자로는 기생 황진이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서경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이(理)를 중요한 실체로 생각하는 성리학의 논리에 반기를 들고, 기(氣)만이 실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기(氣)뿐이고, 그 기(氣)가 조리 있게 운용되는 원리로 이(理)가 존재할 뿐이라는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내세웠지요. 그의 유물론적 세계관에 가까운 철학은 이후 이이(李珥) 등으로 이어지는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편 조광조를 정통으로 이어진 사림의 학맥은 조식, 이황, 이이라는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하며, 조선 성리학의 황금기를 구가합니다. 먼저 조식은 학문 연구보다 실천을 더 가치 있게 여겨, 마음을 곧게 수양하는 동시에 일상생활과 사회 속에서 이를 실천하기를 주문했지요. 그와 그의 후학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론과 수양을 중시하고, 정치적인 것을 많이 언급하지 않는 이황의 학풍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답니다.

조식과 동년배인 이황은 실천보다는 학문적 바탕 위에서 수양의 기초가 되는 심성을 탐구한 학자입니다. 그는 서경덕의 ‘기일원론’과 마음을 중시하는 양명학에 맞서 이(理)를 중시하는 성리학을 다시 확립함으로써, ‘동방의 주자(朱子)’라고 일컬어지는 대학자가 되었지요. 주희는 이(理)를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마땅히 그리되어야 할 원리라고 했고, 기(氣)의 작용으로 만물이 구체화된다고 하였지요. 따라서 이(理)가 기(氣)를 제어하고 명령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이(理)는 실재하는 본체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원리로, 오직 기(氣)만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지요. 하지만 이황은 이(理)가 운동하지 못한다면 죽은 것에 지나지 않아 기(氣)를 제어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理)가 움직이면 기(氣)가 따라서 생긴다”고 주장하며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하였지요. 그의 철학은 이(理)를 강조하는 성리학의 정수로 인정받으며, 당시 조선 성리학의 주류 학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그의 문집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 내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지요.

조선 최고의 학자인 이황이 이(理)의 역동성을 주장했다면, 이황과 함께 역시 조선 최고의 학자로 불리는 이이는 기(氣)의 역동성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답니다. 그는 “이(理)는 형체도 없고 작위도 없는 원리로, 행위와 작용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행위자는 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이(理)의 역동성을 강조한 이황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가 서경덕처럼 기(氣)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氣)가 전부인 것처럼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이(理)가 기(氣)의 중요한 원인이요, 세상의 보편적인 원리임을 인정하고 있었지요. 다만 실제로 보이는 것과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는 기(氣)의 역동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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