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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가로 읽기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가로 읽기



주현성 지음

더좋은책 / 2014년 10월 / 384쪽 / 18,000원





교양의 시작, 그리스와 세계의 신화 - 신화는 왜 알아야 하나요?



제우스, 신들의 왕이 되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많이 들어본 신이 있다면 아마 제우스일 겁니다. 그는 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들의 왕으로 알려져 있지요. 신들의 왕인 만큼 모든 신들에게 명령을 하거나 회의를 주관하기도 하지만, 그가 성경에 나오는 신처럼 이 세상을 창조했다거나 절대적인 힘 또는 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랍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숨어서 자라야 했고, 인간을 미워했으며, 왕이 된 이후에도 아내의 눈을 피해 다니며 애정 행각을 일삼던 바람둥이였답니다.

제우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렇다면 제우스는 왜 아버지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숨어서 자라야 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제우스의 할머니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여신일 뿐 아니라,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대지 그 자체였답니다. 가이아는 태초의 혼돈인 카오스에서 태어났고, 아들 우라노스를 낳습니다. 우라노스는 하늘 가장 높은 곳, 즉 ‘천공’을 의미하지요. 가이아는 아들 우라노스와 결합하여 거인 족 신들을 낳았답니다. 맙소사, 가이아가 자신이 낳은 우라노스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고요?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놀라지 마세요. 신화란 자연의 현상을 의인화하여 설명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보니, 이렇게 종종 해괴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혼돈에서 대지가 나왔으며, 대지가 하늘을 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제우스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6남 6녀의 아이들을 낳았고,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그중 막내로 태어나게 됩니다.

크로노스와 그의 형제들은 아주 거대한 거인 족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키클롭스라는 외눈박이 괴물 신 3형제와 헤카톤케이르라는 50개의 머리와 100개의 팔이 달린 괴물 신 3형제까지 더 낳았지 뭡니까. 이 끔찍하게 생긴 괴물 신들은 걸핏하면 싸우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우라노스는 이 애물단지 신들을 모두 타르타로스에 가두어버렸지요. 타르타로스는 빛이 닿지 않는 땅속 깊은 저승 세계를 의미합니다. 문제는 땅속 깊이 있는 타르타로스가 대지인 가이아의 뱃속이었고, 이 괴물 신들이 타르타로스에 갇혀서 소란을 피우면 가이아는 배가 아파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매일 복통에 시달리던 가이아가 남편 우라노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막내아들 크로노스를 끌어들입니다. 크로노스는 낫을 들고 침실에 몰래 잠입해 있다가 우라노스가 가이아에게 다가오자,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던져버렸습니다. 이에 대지의 아들이요, 남편으로서 신들의 왕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우라노스는 왕좌에서 쫓겨나고, 그의 아들 크로노스가 왕위에 오르게 되지요. 이 사건으로 인해 하늘과 땅은 영원히 갈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때 잘려 나간 성기는 바다로 떨어졌는데, 그 주위로 거품이 모여들더니 그곳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탄생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지요.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 “너 역시 자식에게 쫓겨날 것이다.” 우라노스는 쫓겨나며 크로노스를 저주했습니다. 크로노스는 이 저주의 말에 왕위에 오르고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지요. 이에 그는 신들을 함부로 대하며 폭정을 휘두르고, 부인인 레아가 자식을 낳으면 쏜살같이 달려와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지요. 레아는 벌써 다섯 명의 아이를 잃었습니다. 여섯 번째 아이를 가진 레아는 더 이상 아이를 잃을 수 없어서 가이아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이아는 레아를 크레타 섬으로 데려가 몰래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주었지요. 크로노스가 오자 레아는 커다란 돌멩이를 포대기에 싸서 자신이 낳은 아이라며 크로노스에게 주었습니다. 크로노스는 아무 의심 없이 포대기를 통째로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아이는 가이아의 보호 아래, 산양의 젖을 먹으며 요정들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제우스입니다. 제우스는 청년이 되자 아버지가 삼켜버린 형제들을 구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는 크로노스에게 다가가 몰래 구토제를 먹였습니다. 약을 먹은 크로노스는 심하게 구역질을 하더니, 예전에 삼켰던 돌멩이부터 누이와 형들을 모두 토해냈습니다. 제우스와 뱃속에서 빠져나온 그의 형제들은 재빨리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가두고,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올림포스 산으로 가 그곳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웠습니다.

당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건 거인 족 신들이었고, 제우스와 형제들은 거인 족이 아니었지요. 거인 족의 왕인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가둔 제우스의 형제들은 어쩔 수 없이 거인 족과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제우스의 형제들은 타르타로스에 갇혀 있던 괴물 신들을 해방시켜 자신들을 돕게 했습니다.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훌륭한 대장장이였던 키클롭스 3형제가 제우스에게는 번개를, 포세이돈에게는 폭풍과 지진을 일으키는 삼지창을, 하데스에게는 몸이 보이지 않는 황금투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헤카톤케이르 3형제는 수백 개의 팔을 이용해 거대한 바위들을 던져 거인 족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고, 제우스의 번개는 삽시간에 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전세는 완전히 제우스 형제들에게 기울었고, 마침내 그들은 쇠사슬로 거인 족을 묶어 타르타로스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제우스는 타르타로스를 청동 문으로 봉쇄해버리고, 헤카톤케이르 3형제를 시켜 더 이상 소란도 반란도 일으키지 못하도록 지키게 했습니다. 마침내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제우스는 신들의 왕으로 등극했으며, 그의 형제와 누이들 또한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세계사를 이해하는 첫걸음, 서양 유럽사 - 역사, 이렇게 공부해볼까요?



서양의 고대 문명을 구축하는 로마 제국

그리스 문명이 서양 문명의 씨앗이라면, 로마는 그 씨앗을 키워 서양 문명이라는 커다란 골격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는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다양한 문화들을 흡수하여 근대 서구사회에까지 전수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그에 관련된 문화를 탄생시켜 중세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종교뿐 아니라 학문과 예술 등 문화 전반에 퍼져 있는 로마의 영향은, 현대의 법률에서조차 그 영향력을 뚜렷이 볼 수 있답니다.

지배에서 벗어나 지중해를 지배하는 로마: 트로이가 멸망할 때 트로이 왕의 사위 아이네아스가 탈출에 성공하는데, 그가 로마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15대 후손이 늑대에게 길러진 로물루스와 레무스지요. 로물루스가 동생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카피톨 언덕 위에 도시를 세우면서 로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처음에 로마는 당시 강성했던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때 그들에게서 앞선 문화를 배웠는데, 특히 에트루리아의 뛰어난 토목건축 기술은 건축, 포장 도로, 하수도 등 로마의 대표적 유적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말경에 이르러 로마인들은 귀족과 평민이 힘을 합쳐 마침내 에트루리아인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건설합니다. 로마가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는 평민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한만을 강화해나갑니다. 이에 평민들은 불만을 품고 성산으로 몰려가 그들만의 국가를 세우게 됩니다. 이를 지켜본 귀족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평민들 없이 귀족만의 국가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요? 결국 귀족들은 이듬해 평민들의 모임인 평민회와 그곳에서 선출하는 호민관의 활동을 인정하기로 하고 나서야 평민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었답니다. 이후 평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점차 확대해 나갔으며, 기원전 450년에는 12표법을 제정해 평민들의 권리를 법률적으로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족과 평민들이 다시 하나가 된 로마는 그 힘을 모아 과거 자신들을 지배했던 에트루리아를 점령하고, 사납기로 유명한 삼니움 족은 물론 남쪽 끝 메시나 해협까지 손에 넣음으로써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지요.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중해였습니다. 그들이 택한 것은 지중해 서쪽의 카르타고였습니다. 카르타고는 부유할 뿐 아니라 해전에 강한 강국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을 ‘포에니’라고 낮추어 불렀는데, 그래서 3차에 걸친 이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로마는 카르타고의 강한 해군력의 맛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쇠갈고리를 단 배들을 만들어 다시 나타났지요. 이 갈고리를 이용해 적의 함선을 잡아끈 다음, 육지에서 강했던 군사들이 카르타고의 배 위로 뛰어 올라가 전투를 벌인 것이지요. 로마는 다시 승기를 잡아 마침내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아냈고 시칠리아를 얻게 됩니다.

2차 전쟁은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이 먼저 시작합니다. 어려서부터 로마에 복수하기 위해 이를 갈았던 한니발은 5만의 군사와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합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해군력이 강했기 때문에 바다로 침입해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니발은 허를 찌르기 위해 육로를 택했습니다.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군사들과 코끼리를 이끌고 넘은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거대한 코끼리에 놀란 로마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한니발의 군대는 승승장구하며 로마 전역을 휩쓸고 다녔지요. 이제 로마에서 한니발의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를 끝장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카르타고 본국에서조차 지원군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이 대반격을 시작합니다. 그 또한 한니발처럼 허를 찌르는 공격을 감행했는데, 바로 한니발이 없는 그의 본거지 에스파냐를 치는 전략이었습니다. 스키피오는 손쉽게 에스파냐를 격파하고 본국인 카르타고까지 쳐들어갔습니다. 졸지에 로마군의 창끝에 놓인 카르타고인들은 서둘러 한니발을 다시 불러들였지요. 로마 정벌의 꿈을 가지고 떠났던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고, 돌아온 카르타고에서의 일전에서조차 패하고 맙니다. 카르타고는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모든 식민지를 잃고 많은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를 악물고 노력하여 50년에 걸쳐서 물어야 하는 배상금을 10년 만에 다 물어냅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더 화근이었지요. 로마가 보기에 카르타고는 그만큼 돈을 모으기 좋은 곳이었으며, 카르타고인들은 언젠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기원전 149년, 이번에는 대(大) 스키피오의 양손자 소(小) 스키피오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카르타고를 아예 전멸시켜버렸지요. 이로써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로마는 명실공히 지중해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제국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공화정의 마지막 영웅, 카이사르: 카르타고를 격파한 로마는 에스파냐로 진출하여 많은 나라를 정복했으며, 기원전 189년에는 과거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었던 셀레우코스마저 그 대부분이 로마의 영토가 되어버립니다. 이때부터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자요, 제국으로서의 그 면모를 과시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런 로마의 확장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었습니다. 정복지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세금은 로마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지배층의 몫이었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로마의 승리를 위해 목숨과 무기를 아낌없이 내놓았던 시민들은 전사하거나 부상 등으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으며, 행여 무사히 귀환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돌보지 못한 토지는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전쟁을 통해 더 많은 농장과 노예를 확보한 지배층에게 땅을 헐값에 넘기고 고용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빈농이 되어 떠돌아야 했지요. 그러자 지배층은 농장을 더욱 키워 이른바 대농장이라 불리는 ‘라티푼디움’을 만들고 확장해나갑니다.

문제는 중산층과 빈민의 고통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까지 로마의 군사력은 중산층이 스스로 무기를 준비하고 나와 전투에 참여했던 것인데, 이런 중산층이 몰락하고 사라졌다는 것은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할 군인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바로 이 때문에 이제까지 승승장구하며 주변 나라들을 꺾어나가던 로마의 군사력이 서서히 약화되어 갔습니다. 그러자 그라쿠스 형제 등 몇몇 의식 있는 정치인들이 중산층 농민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개혁들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기존 지배층의 힘은 이미 너무나 거대한 것이었고,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곳곳의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키곤 했으며, 몸을 사리고 있던 게르만 족과 주변 속국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약해진 군사력은 기원전 111년, 속국이었던 아프리카의 누미디아의 반란과 이를 진압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지요. 이때 마리우스 장군이 등장합니다. 평민파 출신인 그는 종래의 토지를 소유한 시민만으로 군대를 꾸려 나갈 수 없음을 직시하고, 국가에서 부담하는 돈으로 빈민들을 모아들였습니다. 그는 빈민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제공해 전투에 투입시켰으며, 봉급까지 주었지요. 이 군대 개혁으로 로마의 군사들은 다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당당히 승리를 거머쥐고 입성한 마리우스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복무기간은 무려 16년에 달했으며, 여기에 마리우스는 퇴역하는 군인들에게 땅까지 주었지요. 하루하루 힘들게 살던 빈민에게 든든한 직업을 주고, 퇴직까지 보장해주었으니 군인들은 마리우스만을 철저히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마리우스는 군인들을 자신의 사병처럼 움직일 수 있었고, 연전연승과 빈민들의 지지 속에 수차례 재집권을 할 수 있었답니다. 그의 힘은 마치 왕이라도 된 듯 막강했으며, 독재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황제의 등장이 예고되고 있었지요. 그 후 술라,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이르기까지, 마리우스처럼 자신을 따르는 군인들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영웅들이 등장했으며, 그들의 권력 행사는 이미 한 나라의 왕이요, 황제의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그 정점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웅 카이사르가 있습니다. 명문 귀족이자 마리우스의 친척으로, 출신부터 우월했던 그는 평민파에 서서 사람들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요. 탁월한 정치가였던 카이사르는 이미 군사령관이 되기도 전에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이에 당시 전쟁 영웅인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와 함께 셋이서 힘을 나누어 갖기로 합의합니다. 이른바 ‘1차 삼두 정치’입니다.

평민파인 카이사르의 인기는 원로원의 귀족들을 긴장시켰고, 이에 그들은 카이사르를 갈리아 총독으로 발령내버립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오히려 이를 반겼지요. 그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군사적 업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갈리아 지방을 충분히 평정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켈트 족도 진압합니다. 카이사르는 이를 『갈리아 전기』에 직접 썼는데 오늘날까지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던 중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 도중 사망합니다. 삼두 정치인 중 한 명이 죽었으니, 이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대권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이때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에는 라이벌인 폼페이우스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군대 없이 로마로 돌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오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카이사르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오늘날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쓰이는 이 말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한 말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하고 갈리아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합니다. 카이사르의 병력은 순식간에 로마를 장악했으며, 군대 최고지휘권 및 감찰권 등 모든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쥐고 나서도 곡물과 토지를 분배하고 대규모 공사를 벌여 일자리를 만드는 등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계속했으며, 해외 식민지도 더 많이 개척해 로마의 경제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4년, 마침내 그는 비상시에 모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재자관직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종신독재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모든 권력을 영구적으로 지닌 그는 사실 황제나 다름없었지요. 하지만 공화정에서 황제란 쉽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원로원을 비롯한 공화정 지지자들은 이대로 가다간 카이사르가 진짜 황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지요. 결국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파르티아 정복을 논의하러 가는 날, 수십 명이 한꺼번에 그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어 암살하고 맙니다. 이때 암살자 중에는 카이사르가 총애하던 브루투스도 있었지요. 카이사르가 남긴 마지막 말인 “브루투스, 너마저도……”는 그런 브루투스를 원망하는 말이랍니다. 이렇게 황제를 꿈꾸며 황제와 버금가는 권리를 가졌던 카이사르는 끝내 진짜 황제는 되지 못하고 최후를 맞았습니다. 오히려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그렇게 서양 황제를 일컫는 호칭의 기원이기도 한 카이사르는 황제가 아닌, 공화정의 마지막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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