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만 이야기
해리 러바인 3세 지음 | 명진출판
파인만 이야기
해리 러바인 3세 지음
명진출판 / 2013년 5월 / 318쪽 / 13,000원
순수한 호기심으로 과학을 좋아하다
세상에는 신기한 게 많다는 것을 일깨워 준 아버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푹 빠졌어: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은 1918년 5월 11일, 뉴욕시 맨해튼에서 태어나, 퀸스 지역 파 락어웨이에 있는 커다란 정원이 딸린 큰 이층집에서 자랐다. 파인만의 아버지인 멜빌 파인만은 유대인으로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하자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나중에 커서 과학자가 될 거예요.” 멜빌의 예언은 적중했다. 훗날 그 아이는 20세기 최고의 명성을 떨친 물리학자가 되었다. 멜빌은 제도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우 박학다식했다.
파인만은 아버지가 선물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파인만이 글을 읽기 전에는 멜빌이 브리태니커를 대신 읽어주었는데, 멜빌은 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읽어 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파인만이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주변 사물이나 상황 등에 빗대어 실감 나게 묘사하고 설명해 주었다. 이 덕분에 파인만은 어떤 책이든 그 내용을 알기 쉽게 다른 말로 표현하거나 실감나게 묘사해서 설명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워 나갈 수 있었다. 거기에다 무엇을 읽더라도 그것이 진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나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아버지의 진지함과 어머니의 재치를 골고루 물려받았어: 파인만은 5학년 때 이미 과학 신동으로 알려졌다. 파인만은 과학 못지않게 수학을 좋아했다. 문제를 풀어 나가는 과정과 답을 알아냈을 때 느껴지는 희열이 무척 좋았다. 게다가 파인만은 자신만의 계산법을 스스로 만들어 내곤 했는데, 오래된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수학에 대한 호기심을 풀기 위해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다.
재미를 넘어 운명의 기초가 되어 버린 과학
실험실은 완전 행복한 곳이었어: 과학에 대한 파인만의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고, 부모님 역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파인만이 열두 살 때, 부모님은 지하실에 작은 실험실을 만들어 주었는데, 파인만은 이곳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화학 실험을 하고, 전기모터를 가지고 놀았고, 또 증폭기도 직접 만들었다. 파인만은 이렇게 과학 실험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수학과 과학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어 / 과학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사랑으로 이어졌어: 파인만은 고등학생이 되자 과학보다 수학에 더 빠져들었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 7학년과 8학년 때 벌써 자신만의 계산법으로 일차방정식과 연립방정식을 풀곤 했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파인만은 수학도 좋아했지만, 그 또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여학생들과 사귀는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알린이라는 소녀를 사귀고 결국 나중에 그녀와 결혼까지 한다.
수학 때문에 MIT에 갔지만 결국 물리학을 선택했어
처음에는 MIT의 수학에 끌렸어: 1935년 5월, 최고 학년이 된 파인만은 뉴욕시에서 열린 수학 대회인 피 뮤 앱실론 대회에 참가하여 1등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파인만은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친구들이 뽑은 ‘최고의 천재’로 기록되었다. 졸업 후 파인만은 먼저 컬럼비아 대학교에 지원했지만 입학이 거절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해 놓은 유대인 할당 인원이 파인만이 지원하기 전에 이미 초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인만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파인만은 MIT에서 자신이 정말 원하던 수학과 물리학과 공학 수업을 쉽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결과도 좋았다. 하지만 필수과목인 문학, 예술, 음악, 종교, 철학 과목은 그렇지 못했다. 한편 애초에 파인만은 MIT에서 가르치는 순수수학에 끌려 지원했지만, 재미있는 문제를 푸는 데에만 수학을 이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파인만은 수학 대신 물리학에 집중했다. 1936년 봄, 파인만은 웰턴과 함께 양자역학을 스스로 공부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물리학자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 MIT에 다닐 시절, 파인만은 학과 교수들과 함께 일련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발라르타 박사와 함께 《피지컬 리뷰》지에 「은하계의 우주선의 확산」이라는 제목으로 첫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여가 시간에는 공식을 물리적인 상황으로 변형하는 놀이를 했다. 방정식들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직관적으로 느끼기 위함이었다. 또 파인만은 헬만이라는 물리학자와 함께 ‘파인만과 헬만의 힘의 정리’를 완성하였고, 곧 고체물리학의 표준 도구가 되었다.
이후 파인만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하고, 지도 교수인 슬레이터에게 MIT에서 계속 공부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더니 슬레이터 교수가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왜 MIT에서 계속 공부하기를 원하는가?” “MIT는 과학과 공학 부문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수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슬레이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대학원은 다른 학교에서 다니길 바라네.”슬레이터 교수는 파인만에게 정체하지 말고 계속해서 변화하라는 조언을 한 것이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파인만은 다른 대학을 찾았고,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결정했다.
결국 파인만은 1939년 가을에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학과의 모든 학생이 한 건물에서 숙식을 함께했다. 덕분에 다양한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레 많아졌다. 파인만은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생물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여가 시간은 수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는 학문적 연구에 중점을 두는 것이 자신에게 맞는다는 사실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파인만은 예비시험과 자신의 논문에 대한 구두 문답 시험에 통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도 교수인 존 휠러 교수와 함께 자신의 공부 방향을 정했다.
휠러 교수는 파인만의 특별한 재능을 곧 발견했고, 그들은 곧 사제 간이라기보다는 동료와 같은 관계가 되었다. 박사 과정 논문을 진행하던 때였다. 파인만은 휠러 교수와 함께 전자 사이에 작용하는 원리를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그들은 장(場)과 파동의 성질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 자체로는 전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학적인 해결책으로 전자에 근접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파인만은 마침내 경로적분에 기초해서 그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경로적분은 최소 작용의 원리를 일반화하여 양자론을 기술하는 방법으로, 파인만이 만들어 낸 ‘라그랑지안’이라고 불리는 수식 체계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를 이용하면 뉴턴의 운동 법칙을 따르는 ‘고전역학’과 파동과 입자를 다루는 ‘양자역학’ 모두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의 연구로 인해 올바른 고전 이론이 정립될 수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휠러 교수가 파인만을 불러 말했다. “파인만 자네는 젊고 뛰어난 사람이야. 앞으로 자네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하네. 그러니 고전 이론을 가지고 세미나를 해 보는 게 어떻겠나? 그동안 나는 양자론 부분을 만들어서 나중에 합류하겠네.” 그렇게 해서 파인만은 세미나를 시작하게 되었고, ‘전자의 자기 작용’이라는 난제를 고전물리학에서 제거하는 것에 대한 첫 번째 세미나를 열기로 했다. 한편 휠러 교수는 유진 위그너 교수에게 파인만이 진행하고 있는 세미나를 정규 세미나로 잡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파인만은 세미나를 하기 며칠 전에 위그너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파인만, 자네가 진행하고 있는 세미나를 다들 기대하고 있네. 자네와 휠러 교수가 같이 한 연구는 무척 흥미로울 것 같아. 그래서 그 세미나에 러셀 교수도 초대했네.”
파인만은 놀랐다. 러셀 교수는 행성의 스펙트럼과 절대등급의 관계를 나타낸 유명한 천문학자가 아닌가. “폰 노이만 교수도 분명 관심을 가질 것이고, 파울리 교수도 초대했다네.” 파인만의 얼굴은 점차 노랗게 변했다. 위그너 교수가 이어서 말했다. “본래 아인슈타인 교수는 주례 세미나에 잘 오는 편이 아닌데, 자네 연구가 워낙 흥미로운 것이어서 그분도 특별히 초대했어.” 이제 파인만의 얼굴색은 파랗게 변해 버렸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말게. 분명 좋은 세미나가 될 걸세.”
드디어 첫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파인만은 노트를 넘기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파인만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새 발표가 끝나고 질문 시간이 되었다. 파울리 교수가 질문을 하면서 파인만의 이론이 틀린 이유를 몇 가지 댔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 교수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난 파인만이 발표한 이론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에 대응하는 중력이론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가 문제입니다.” 아인슈타인 교수가 말하는 중력이론은 바로 상대성이론이었다. 파인만의 첫 세미나는 성공적이었다.
과학이 소중한 만큼 내 사랑도 소중해: 1942년 6월, 파인만은 공식적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그해 7월 29일에 스태튼 섬에서 알린과 결혼식을 올리고, 둘은 고작 페리호를 타고 스태튼 섬에 들렀다 나오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즐겼다. 알린의 건강 상태가 너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파인만의 부모님은 똑똑하고 배려심 많은 알린을 예뻐했지만 알린과의 결혼을 찬성하지 않았다. 알린이 아무리 괜찮은 여자라고 해도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그녀를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린의 병은 임파선결핵이었다. 파인만은 부모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알린과 결혼을 하지 않거나 미룰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근데 결혼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요. 제가 후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그 후 파인만의 부모는 찬성하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반대도 하지 않았다.
때로는 행복한 과학자로, 때로는 그
저 자유인으로
내가 과학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야?
핵분열 실험을 하게 되다: 파인만이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밥 윌슨 교수가 들어와 말했다. “내가 요즘 비밀스러운 일에 참여하고 있네. 이 일은 비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얘기해서는 안 되지만, 자네가 알면 이 일에 동참하고 싶어 할 것이고, 또 자네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말을 하게 되었네.” 그러면서 밥 교수는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밥 교수가 하고 있다는 그 일은 우라늄의 어떤 동위원소를 분리해서 폭탄을 만드는 일이었다. 파인만은 조금 놀랐다. 밥 윌슨 교수가 덧붙였다.
“원자를 연구하는 독일의 많은 물리학자들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췄다네. 우리는 우라늄을 이용해 특별한 폭탄을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지. 미국 정부로서는 상당히 걱정하고 있어. 그래서 프로젝트가 시작된 거야. 난 자네가 미국의 과학자로서 이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네. 함께할 거지?” 파인만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선 박사 논문을 완성하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일 같았고, 폭탄을 만드는 일에 선뜻 나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밥 교수가 나가고 난 뒤 파인만은 하던 공부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파인만은 어느새 책이 아니라 바닥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만일 독일이 폭탄 개발에 먼저 성공한다면? 원자폭탄이 만들어진다면 독일이 아니라 우리 미국이 먼저 만들어야 해.’ 파인만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상을 전쟁의 참혹함 속으로 몰아넣은 독일과 히틀러를 생각했다. 히틀러는 집권 기간 동안 약 8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처형했는데, 그중 약 60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파인만은 히틀러가 새로운 폭탄을 먼저 만들게 놔둘 수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합류했다.
파인만은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미 육군 공병대의 한 사무실에서 일했다. 파인만은 그곳에서 동위원소의 분리 가능성과 같은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고, 이 작업은 1941년 말쯤 시작되었다. 파인만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얻게 된 또 다른 경험은 위대한 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로스앨러모스(Los Alamos)에는 평가위원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위원회는 콤프턴, 톨먼, 스미스, 유리, 라비 등 여러 명의 대가들로 구성되었다. 파인만은 우라늄 분리 과정과 관련된 이론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원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질문을 하고 답을 하면서 토론을 했다. 파인만은 그 과정이 아주 특별하고 흥미로웠다.
파인만은 이론적인 연구를 담당하는 T부서에 배정되었다. 이 부서는 베테 교수가 이끌었는데, 파인만에게는 핵폭발의 효율을 계산하라는 직무가 주어졌다. 이제 그들은 원자로에서 일어나는 급진적 핵분열 반응인 초과임계를 위해 핵분열 물질의 최소량을 알아내야 했다. 당시 파인만은 24세에 불과했지만 베테 교수는 솔직한 비판력과 날카로운 통찰력 때문에 파인만을 높이 샀다. 그리고 베테 교수는 파인만이 여러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자 고마워하고 대견스러워했다. 또한 그는 파인만의 독창성과 날카로운 현실적 감각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를 질량 문제를 다루는 T-4의 팀 리더로 지명했다. T-4는 핵 확산 문제를 담당하는 그룹이었다. 파인만이 25세가 되었을 때는 웰턴을 포함해 4명으로 이루어진 팀의 팀장이 되었다. 그들의 과업은 핵분열물질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가슴에 묻고 프로젝트에만 몰두하다: 1945년 4월, 알린의 아버지가 딸을 방문하기 위해 뉴욕으로 왔다. 알린을 본 그는 딸에게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로스앨러모스에 있는 파인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자네가 와야겠네.” 파인만은 밤에 병원에 도착했다. 장인은 파인만을 만나자마자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왔으니 나는 이제 집으로 가겠네. 도저히 내 딸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네.” 파인만은 병실로 들어가 알린의 침상 옆에 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녀는 너무나도 쇠약해져서 눈으로만 사물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파인만은 한동안 알린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살며시 놓았다. 알린은 초점 없는 눈으로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보다가 가끔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그 동작조차 힘겨워 보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잠시 후, 알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온 간호사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알린이 숨을 거뒀다. 파인만은 간호사가 나간 뒤에도 꼼짝하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알린에게 키스를 했다. 마지막 키스였다. 장례식을 끝낸 다음 날, 파인만은 연구소로 돌아왔다. 베테 교수는 휴식을 권했다.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베테가 워낙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인 파 락어웨이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파인만은 대부분 시간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해변을 거닐면서 보냈다. 그러면서 슬픔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신적 발판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베테 교수에게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알리는 암호화된 전보를 받았다. “아기를 곧 출산할 예정이네.” 그는 곧장 짐을 꾸려 로스앨러모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아기를 출산할 예정이라는 그 말은 바로 원자폭탄을 완성하여 곧 폭파 실험이 있을 것이라는 암호였다.
플루토늄 폭발 무기인 트리니티 실험 장소로 선정된 곳은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근처에 있는 죠르나다 델 무에르트라는, 평평하고 광활하며 시야가 확 뚫린 사막 지역이었다. 모두들 미리 지급된 색안경을 썼다. 하지만 파인만은 끼지 않았다. 3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색안경을 낀 채로는 폭발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눈을 상하게 하는 것은 밝은 빛이 아니라 자외선이야.’ 파인만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트럭에 올랐다. 자외선은 유리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트럭 유리를 통해 본다면 안전하게 폭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