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NO 이젠, 아프다고 말해요
윤학렬 외 지음 | 힐링21
학교폭력 NO 이젠, 아프다고 말해요
윤학렬 외 지음
힐링21 / 2014년 4월 / 256쪽 / 12,000원
폭력의 아픔, 자신의 꿈으로 극복하세요 -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상봉
왜소한 체격과 내성적인 성격, 외톨이가 된 초등학교 시절
아들이 귀한 집안에 외아들로 태어난 상봉은 집에서 거의 간섭을 받지 않았습니다. 특히 할머니는 이 귀한 손자를 ‘금이야 옥이야’, ‘오냐 오냐’ 하면서 모든 것을 상봉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습니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가 상봉을 싸고도니 며느리인 어머니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이 올바르고 바람직한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상봉을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께서 상봉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꾸짖고, 나무라며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야 했는데 전혀 그러질 않으셨습니다. 그저 어린 상봉이 편하고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런 태도는 바른 인성으로 친구관계를 맺어야 하는 상봉의 어린 시절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상봉은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는 데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공동생활의 규칙을 지키면서 함께 지내야 하는 학교생활은 체구가 작고 내성적인 성격의 어린 상봉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지요.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1년, 2년, 3년이 지나면서 점점 말이 없어진 상봉은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집을 그냥 오가는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런 상봉에게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다가왔다면 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렇게 이해심이 많은 친구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지요. 그러니 친구가 없는 외톨이, 지금 표현으로 거의 왕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학교폭력의 엄청난 피해자였던 중학교 시절
시계추처럼 집과 학교만을 오가며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한 상봉은 중학생이 되면서 더욱 조용한 아이로 변했습니다. 그런 상봉 학생에게 남모를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종례 후에 교실을 나서는데, 좀 논다 하는 친구들이 와서는 시비를 걸었습니다. “야! 땅딸이 벙어리~ 너 말할 줄 알아?” 그러고는 서로 키득대며 웃더니 상봉에게 무작정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했습니다. 지금 표현으로 학교에서 일진이라고 불리는 애들이었기에 겁이 나서 안 간다는 말은 감히 못 하고, 조용히 따라갔습니다. 따라간 곳은 학교 근처 빈 공터였습니다. 공터에는 이미 여러 명이 와 있었습니다. 곧 무슨 얘기를 하는지 서로 키득거리면서 상봉을 보며 손가락질을 해댔습니다. 그러고는 빙 둘러서더니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는 아이가 얘기합니다.
“오늘은 누가 먼저 시작할래?” 퍽퍽~ 별안간 아이들이 상봉을 정신없이 때리기 시작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상봉은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 너 우리한테 왜 맞는지 알아?” 윽, 으으. “야, 이 자식 봐라. 이렇게 맞고도 말을 안 하네?” 퍽, 퍼벅. “어디서 쪼그만 놈이 건방지게 모자에 각을 세워 멋을 내? 너 죽을래?” 당시 교복은 검은색 상하의였고, 각진 모자를 써야 했습니다. 교복에 대한 단속이 매우 심했던 시절이었지요. 조용한 상봉은 사실, 학교에서 입으라는 대로 교복을 갖춰 입었을 뿐인데, 그 친구들은 그런 상봉이 눈엣가시였던 모양입니다. 벙어리처럼 말도 없이 조용히 학교만 다닌 상봉이 만만하게 보인 것은 당연했고, 그런 상봉이 그 친구들에게는 재미있는 시빗거리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땅딸이 벙어리, 너 앞으로 모자 또 그렇게 쓰고 다니면 알지?” 아이들이 상봉의 가방을 한 번 걷어차더니 뭐가 좋은지 시시덕거리며 학교 근처 공터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렇게 상봉은 논다는 학교 친구들에게 이유 없이 얻어맞았습니다. 아이들이 보이지 않자 상봉은 교복의 흙먼지를 털고 학교 옆 인적이 드문 나지막한 동산 위로 올라가 풀숲에 누웠습니다. 드러누워서 온몸 구석구석 통증을 가라앉히며 달이 떠오를 때까지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어둑해지면서 달이 뜨더니 별들이 총총 얼굴을 내밀며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두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무리 눈물을 멈추려고 애써보지만 그럴수록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렀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친구들이 수시로 몰려와서 폭력을 가하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자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럴 때 친한 친구라도 있었다면 친구에게 푸념을 하면서 위로도 받고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을 텐데, 그런 친구도 없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외톨이, 이른바 왕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이후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친구들이 장난삼아 상봉을 괴롭혔지만, 점차 상봉을 자신들의 무리로 끌어들이려고 더 거칠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상봉은 그런 친구들의 무리와 휩쓸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조용히 음악을 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럴수록 그 친구들은 더욱 자주 상봉을 괴롭히며 때렸습니다. 너무 두들겨 맞아 버스를 탈 수 없어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집까지 걸어서 가던 때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습니다.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며 맞고 사느니 강으로 뛰어들까?’ 학교도 싫고, 친구들은 더더욱 싫고, 세상도 싫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문득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강물에 뛰어내리면 그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주고, 사랑해주시는 할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 상봉은 친구들에게 그렇게 맞으면서도 절대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는 부모님이었기에 말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적어도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더욱 자주 맞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온몸에 멍이 들도록 맞고 와도 물어봐주지 않고 오히려 눈치만 살피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상봉을 괴롭힌 친구들은 상봉을 괴롭혀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 마음 놓고 집단으로 때렸던 것이지요. 이후 상봉은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서너 번을 더 맞은 뒤에 결국 그 무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멋진 음악을 만들고 싶었던 중학생 상봉은 소중한 학창시절에 폭력을 일삼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 싸움을 대신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학교폭력의 피해학생에서 가해학생이 된 고등학교 시절
상봉은 중학교 3학년, 1년 남짓 ‘싸움을 하는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른바 폭력의 피해학생에서 가해학생이 된 것이지요. 싸움이 계속되자 상봉은 그 모임 친구들을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나지 않으면 싸울 일이 없어지니까요. 어서 이 지옥 같은 중학교 생활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예술고등학교에 무사히 진학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시절을 그런 모임의 아이들과 휩쓸려 다녔기에 마음과는 달리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상봉이 그토록 원했던 음악을 할 수 있는 예술고등학교의 진학이 좌절되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더욱 심한 방황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예술고등학교도 떨어졌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그저 내가 당한 만큼 다른 애들에게 똑같이 해주는 것밖에 없잖아.’ 결국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한 상봉은 싸움의 앞잡이가 되기를 자청했습니다. 누구의 하수인이 되기보다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진 최고임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상봉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폭력 모임이 아닌, 더욱 강한 학교 외부의 폭력 모임에 가입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제 발로 찾아가 받아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한 차례 몰매를 맞았습니다. 과연 그 모임에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절차와도 같았습니다. 상봉은 쏟아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에 이를 악물고 견뎠습니다. “센데? 좋아, 가입을 허락하지. 그런데 우리 모임은 들어올 땐 쉬울지 몰라도 탈퇴는 네 맘대로 안 돼. 그래도 들어올 거야?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할 거냐고?” “할게.”
그 이후로 상봉은 더욱 견디기 힘든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원해서 외부 폭력 모임에 가입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나면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진정 옳은 길인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싸움이나 하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상봉은 결국 모임에서 탈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탈퇴는 쉽지 않았습니다. 탈퇴하기까지 수차례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야, 이 짜식 봐라. 들어올 땐 네가 원해서 들어와도 나갈 땐 네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잖아. 죽도록 맞아봐야 알겠냐?” 퍽퍼버벅, 퍽 퍽. “웃기지 말고 내일모레 꼭 나와. 안 나오면 네 학교 앞에서 기다린다.”
그래도 상봉은 모임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학교 앞에서 폭력 모임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상봉을 끌고 가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상봉은 그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만신창이가 되어 곧 죽을 것 같았지만 참아야 했습니다. 잠시 어긋난 길로 들어서면서 잃어버렸던, 아니 놓치고 살았던 꿈을 찾고 싶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음악을 하고 싶어 했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며 참았습니다. 그동안 망가져 살았던 자신에 대한 자책과 반성으로 그 모든 것을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픈 시절
사춘기를 거치면서 한순간 방황했던 상봉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마음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봉을 또다시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야, 이상봉! 너 ○○ 모임 앞잡이라며?” “그만해라.” 반 친구 한 명이 어디서 들었는지 상봉이 가입했던 모임 얘기를 꺼내자 아이들이 ‘우’ 하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 친구는 재미있는지 계속 상봉의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그만하라니까.” “왜 그래, 인마? 없는 얘기 한 것도 아닌데, 쪼그만 게.”
순간 상봉은 더 이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주먹으로 친구의 얼굴을 쳤습니다. 나름 싸움 깨나 한다는 그 친구는 상봉에게 한 대 맞자 거칠게 대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싸움에 이골이 난 상봉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봉에게는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겨우 모임에서 벗어나 마음먹고 다시 시작하려 했는데……. 이게 뭐야?’ 선생님에게 제대로 혼이 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상봉은 더욱 자포자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나 같은 놈은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아. 친구도 못 사귀고 싸움질이나 하고. 그래, 학교를 다니면 뭐하냐? 그냥 때려치우자.’
이후 아침에 학교 간다 하고 집을 나서서 그냥 하릴없이 거리를 방황하다가 하교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상봉이가 학교에 안 나옵니다. 얼마 전에 학교에서 친구를 때려 혼냈는데, 그 이후로 나타나질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머니와 긴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상봉에게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왜 친구를 때렸는지, 왜 며칠씩 학교에 가지 않았는지, 학교 안 가고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단 한 번도, 한 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상봉을 쳐다보자 상봉은 미안해서라도 무슨 말이든 해야 했습니다. “그냥 학교에 가기가 싫었어요.” 어머니에게 짧게 대답하고는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후 상봉은 자신과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으니 친구들과의 관계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하루 종일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외롭게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비록 학교에는 가지 않았지만 다시 잃어버렸던 꿈을 구체화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봉의 꿈은 음악에서 작가로 바뀌었습니다. 책을 읽을수록 책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 이상봉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더 이상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던 상봉은 학창시절 왕따의 대상이었고, 학교폭력의 피해학생이기도 했고 가해학생이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방황의 시기는 지금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온갖 아이디어들을 쌓은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을 거치면서 상봉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바로 친구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런 친구가 없어 방황의 시간이 길었고, 또 나쁜 길에서 쉽게 헤어 나오기 힘들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 나에게 좋은 친구가 있어 마음을 나누고 의지했다면 나쁜 길에 빠져서 방황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학교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자신의 꿈!
이상봉은 지금 세계적인 디자이너입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은 그야말로 힘들었고 암울했습니다. 그는 내성적이었기에 더더욱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고, 가끔은 세상을 등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한글을 의상에 디자인하여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우뚝 서 있습니다. 과연 어떤 힘이 그를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우뚝 서게 한 것일까요? 그의 말을 곰곰이 새긴다면 학교폭력의 피해학생도 가해학생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꿈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어릴 적 꿈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좌절해서도 안 됩니다. 누구에게든 꿈은 조금씩 변합니다. 그런 변화가 오히려 더 멋진 꿈을 이뤄냅니다. 나 역시 음악을 하고 싶다고 꿈꾸다가 작가와 연극인을 꿈꾸었고, 결국에는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사실 음악이나 작가, 디자이너 모두 창조적인 분야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비록 분야는 다를지라도 결국은 애초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셈이지요. 그러니 절대로 꿈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어찌 보면 지금 내 직업은 내성적인 내 성격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내가 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더 멋진 디자이너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성격이라는 것이 쉽게 고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쁜 점이 있다면 고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는 그런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도 없었고, 폭력에 시달렸던 것이지요. 다음은 가족과의 좋은 추억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가족은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더구나 가족과의 유대관계가 좋을수록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이유든 폭력은 범죄라는 사실입니다. 주먹만이 아니라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폭력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평생 그 아픔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떨쳐내려 해도 쉽게 떨칠 수 없지요. 가해학생은 장난삼아 재미로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피해학생은 평생 아픔으로 기억됩니다. 절대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서로를 존중하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는 멋진 학창시절을 보내기를 기원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동반자가 되세요 - 국민언니 록 가수 김경호
서로 위로와 용기를 주는 멋진 친구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는 우수한 타자였다고 합니다. 1947년, 도비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팀의 선수로 출전하는 첫 날이었습니다. 스탠드를 꽉 채운 관중이 도비를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도비는 긴장한 탓인지 타석에서 그만 삼진 아웃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도비는 힘없이 자리에 돌아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습니다. 도비 다음으로 타석에 나간 선수는 구단 최고의 강타자 조 고든이었습니다. 배트로 공을 맞히는 감각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매우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평소 같지 않게 고든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도비처럼 어이없이 삼진 아웃을 당한 것입니다.
고든은 도비와 마찬가지로 실망한 모습으로 도비 곁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습니다. 고든이 일부러 삼진 아웃을 당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는 자기 같은 강타자도 공을 맞히지 못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팀 동료인 도비에게 보여주기에 충분했지요. 도비에게 낙심하지 말라며 위로와 배려의 뜻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두 선수의 우정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흑인과 백인, 신인과 고참, 무명 선수와 스타 선수의 벽을 뛰어넘는 고든의 위로와 격려하는 마음이 곧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떤가요, 멋지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