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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한국사: 근현대편

표학렬 지음 | 앨피
에피소드 한국사: 근현대편

표학렬 지음

앨피 / 2012년 8월 / 320쪽 / 16,000원





근대를 향한 열망



서양에서는 17~18세기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산업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했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되었다. 이후 펼쳐진 제국주의시대에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를 늘리고자 경쟁적으로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자유ㆍ평등ㆍ민주

근대는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와 ‘평등’과 ‘민주’에 대한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자유’는 농업 사회에서 벗어나 상업 사회로 넘어가며 형성된 자본주의, 즉 돈을 벌 자유를 의미한다. ‘평등’은 신분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민주’는 왕이나 귀족 등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독재정치가 아니라 다수의 일반 대중이 참여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비교적 완만하게 근대사회로 성장해 가던 동아시아는, 군함을 앞세우고 몰려든 서구 열강에 의해 서양식 근대사회 건설을 강요당했고, 이 과정에서 살아남고자 속도 경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주변 국가와의 근대화 경쟁, 서양 제국의 침략, 내부 전근대 세력과의 갈등으로 대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은 성공했고, 중국은 생존했고, 조선은 멸망했다. 이후 한국의 근대화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 그 자체였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유’, ‘평등’, ‘민주’라는 근대의 기본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모두 서양에서 들어온 것일까? 우리 사회 안에는 근대를 향한 열망이 전혀 없었을까? 우리 역사 속 근대의 모습을 살펴보고,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며 변화ㆍ발전해 온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 안의 근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실학(實學)사상에는 자본주의, 즉 자유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은 ‘도고(都賈)’라 불리던 초기 자본가들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전근대사회의 기본 도덕인 ‘근면’과 ‘순종’에서 근대사회의 기본 도덕인 ‘풍요’와 ‘합리적 사고’로 변화하고 있었다.

전근대사회를 지탱하던 신분제도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일부의 풍경이긴 하지만, 저잣거리에서 “이 양반이, 도대체 무슨 짓이야.”라는 말이 들릴 정도로 신분제는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민주’를 향한 급격한 정치 변혁이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독립전쟁처럼 민주적 정치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혁명이 없었던 것, 아니 최소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나 독일의 비스마르크 개혁 같은 정치적 변혁조차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이것이 결국 망국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혹시 우리가 근대국가를 향한 변혁을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1865년에 끝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1868년에 단행됐다. 독일의 통일전쟁과 이탈리아 통일전쟁은 각각 1860년대에 일어나 1871년경에 마무리되었다. 많은 서구 열강들이 1860년대부터 1870년대 사이에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영국, 프랑스 등 기존 제국들과 경쟁에 나섰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대원군의 개혁 작업과 고종의 근대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시기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늦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마도 개혁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근대의 싹이 막 움트기 시작하던 그때, 조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자.



‘젠틀맨’이 일본으로 간 까닭은?_ 신사유람단



조선 정부는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비밀리에 파견했다. 이들은 일본의 정부 기관, 교육제도, 산업 시설 등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귀국하였다.

1881년 음력 2월 2일, 박정양은 왕의 급한 부름을 받고 총총걸음으로 입궐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몸담은 지 15년, 벼슬은 법무부 차관에 해당하는 형조참판이었다. 고종은 박정양이 입시하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요즘 경상도 정치가 불안하다 하오. 참판이 동래(부산) 암행어사로 가서 경상도와 동래 일대의 시정(時政)을 돌아보는 게 좋겠소. 자세한 내용은 여기 봉서에 있으니 이걸 보고 그대로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박정양은 고종에게 절을 올리고 급히 궐을 빠져나왔다. 암행어사에 봉해지면 비밀리에 간단히 행장을 꾸려 그날 중으로 한양을 빠져나가야 했다. 심지어 집에 알리지도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박정양은 일단 궐에서 나오자마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봉서를 열어 보았다. 봉서의 내용은 전혀 뜻밖이었다. “동래부 암행어사는 보아라. 일본을 대략 염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 배를 빌려 타고 그 나라로 건너가 충분히 시간을 두고 살핀 뒤 문서로 보고하라. 급히 성을 나갈 필요는 없으니 집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떠나도 좋다.”

고종의 노림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지 5년이 지났지만 보수파들의 저항에 부딪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고종은, 지지부진한 개혁 작업에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몰래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해 서양 문물을 배워 오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박정양은 고종의 명대로 동래, 곧 지금의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 도착해 보니, 박정양과 마찬가지로 동래 암행어사로 임명을 받고 내려온 사람이 열한 명 더 있었다. 홍영식, 어윤중 등 평소 고종이 아끼던 개화파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각자 분야를 나누어 일본 문물을 견학했다. 내무 및 농상무를 맡은 박정양은 자기 분야의 일본 고위 관료들과 만나고 여러 제도와 문물을 시찰했다. 그 와중에 조사시찰단의 활약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면서 조선에까지 알려지자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이 고종을 비난하고 나섰다. 고종은 시치미를 뗐다. “그들은 내가 보낸 게 아니라, 자기 의지로 간 것이네.” “일본은 서양의 제도를 좇아 위로는 정치ㆍ제도ㆍ풍속에서부터, 아래로는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일본은 겉으로는 부강해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시찰단은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것을 보고 배워 와 요긴하게 써먹었다. 박정양은 온건 개혁파로서 1890년대 동학농민운동 이후에 큰 활약을 펼쳤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도 참여했다. 박정양 외에도 중요한 개화파들이 조사시찰단에서 배출되었다. 이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조사 작업을 수행했다면, 우리의 근대적 개혁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근대의 문턱에서 막중한 임무를 띠고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이 ‘신사유람단’이라는 한가한 이름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웃지 못할 사연 속에는, 당시 조선의 암울한 현실이 담겨 있다.



민족 반역자가 된 ‘엄친아’_ 이완용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에서 지배적 권리를 획득한 일본은 1905년 강압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한제국 대신들을 협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나철 등은 을사조약 체결에 협조한 다섯 명의 친일파를 암살하려고 오적암살단을 조직했다. ‘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은 이재명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육영공원의 모범생

1886년(고종 23), 조선 정부는 개화 관료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최초의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현직 관료 및 청년들을 학생으로 입학시켜 외국인 교사들에게 근대 문물을 배우도록 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양반 출신 학생들의 수업 태도였다. 그들은 도무지 혼자서는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교내 기숙사에서 교실로 이동하는 짧은 거리조차 걸어서 가지 않았다. 하인 한 명에게는 담뱃대를, 또 다른 하인에게는 책보(책가방)를 들게 한 채 본인은 나귀를 타고 천천히 행차하듯 이동하는 식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낮은 출석률이었다. 특히 현직 관료 학생들의 출석률이 매우 낮았다. 너무 결석을 많이 해서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출석하는 것으로 규정을 완화했는데도 정상적인 수업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결국 육영공원은 파행 운영을 면치 못하다가 8년 만에 문을 닫았다. 육영공원의 폐교는 곧 조선 개화 정책의 파행을 의미했다.

이완용은 만 28세의 나이에 규장각과 홍문관 등에서 일하는 ‘현직관료’ 신분으로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그만큼 그는 촉망받는 청년 개화파 관료였다. 이완용은 학식이 매우 뛰어났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대단한 명필이었다. 게다가 용모도 수려하고 성품도 온화했다고 하니, 말 그대로 그 시대의 대표 ‘엄친아’였다. 그는 1882년 만 2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하여 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고 육영공원 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친미에서 친러로, 다시 친일로

30대 때인 1890년대에도 이완용은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이때 육영공원에서 배운 영어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완용은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한 덕분에 미국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때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 활동이 필요할 때에도 이완용을 적극 활용했다. 이완용의 능력은 특히 1897년 아관파천 때 빛을 발했다. 미국과 러시아, 양쪽과 모두 친하게 지낸 덕분이었다. 이완용은 대한제국 성립 뒤에도 고종의 두터운 신임 아래 외무대신 등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초기 독립협회는 왕실의 후원을 받는 계몽운동 단체로서 어용단체와 시민단체가 혼합된 형태였다. 이완용은 정부 측 대표로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등을 적극 후원하며 2대 회장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1898년 대한제국에 맞서며 참정권과 공화정 등을 주장하자 탈퇴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정부 측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거칠 것 없던 이완용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친미와 친러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다가 양쪽 모두에게 점차 배척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1897년부터 관직에서 점점 밀려나기 시작한 이완용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신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것은, 곧 조선이란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것과 같았다. 이런 엄청난 내용을 담은 조약을 체결하는 일에 적극 앞장설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서로 책임을 미루며 시간을 끌 때, 이완용이 나서서 을사조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분위기를 몰아갔고, 이 한 방으로 그는 친일파의 거두로 떠올랐다. 이후 이완용은 일진회의 송병준과 경쟁하며 친일 행각을 벌였고,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백작의 작위를 받아 일본 귀족 명단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재벌이자 권력가로 천수를 누리다가 1926년 70세로 생을 마감했다.



쇠가 없어 세균을 쏘다_ 태평양전쟁



일제는 1930~40년대 침략 전쟁을 벌이며 우리의 인적ㆍ물적 자원을 수탈하고자 총동원령을 내렸다. 남자는 군인과 노동자로, 여자는 노동자와 위안부로 끌고 갔으며, 심지어 밥그릇까지 공출해 갔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의 해군 비행기들이 미국 하와이 주의 오아후 섬 진주만에 있는 미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태평양전쟁의 개막을 알린 첫 전투, ‘진주만 습격’의 시작이었다. 이 전투를 지휘한 일본군 사령관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다. 그런데 정작 야마모토 제독은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깨웠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야마모토 제독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또한 그렇게 비관적이었음에도 왜 태평양전쟁 연합함대 사령관을 맡았을까?

대공황, 전쟁에 휩싸인 세계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세계 경제는 동반 몰락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는 독일ㆍ영국ㆍ프랑스 등 유럽 제국으로 파급되면서 전 세계를 불황의 늪에 빠뜨렸다. 이런 엄청난 위기에서 탈출하려면 인위적으로 시장과 경제체제를 재편하는 방법밖에 없다. 미국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취업, 생산, 소비를 활성화시키는 ‘뉴딜정책’을 추진했다. 이런 방법이 가능하려면 풍부한 자원과 인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식민지가 많거나 미국과 러시아처럼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나라는 가능하지만, 일본이나 독일처럼 영토도 좁고 식민지도 별로 없는 나라는 불가능한 방법이다. 이럴 때 살아남는 길은 남의 영토나 식민지를 빼앗는 것, 즉 전쟁뿐이다.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략한 데 이어 1937년에는 중국 본토를 침략했다. 미국 등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이미 일본은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였다. 일본 국내의 저항은 강력한 군사독재로 억압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절대적 독재 체제, 군국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국은 호주, 영국, 네덜란드 등과 함께 일본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더 이상 팽창하면 미국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마침내 1941년 미국은 일본에 최후통첩을 했다. 일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경제를 회복시키고 국력을 키우려면 더 많은 인구와 자원이 필요했다. 일본은 결국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했고, 그렇게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위험한 선택

일본은 자원 부족 문제를 기술과 전략으로 해결하려 했다. 함상 전투기인 ‘0식 전투기(Zero Fighter)’와 세계 최대의 초대형 전함인 ‘야마토 전함’ 등 우수한 군함과 전투기, 그리고 진주만 습격 같은 기습 전략을 활용해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반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의 역습을 받아 일본 해군은 많은 전함을 잃었는데 다시 보충할 철이 없었다. 공격할 수단이 없으니 수비만 할 수밖에. 1942년 여름을 기점으로 일본은 미국 등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버티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무한대로 퍼붓는 중국과 미국의 인적ㆍ물적 공격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일본은 포탄과 총알을 만들기 위해 닥치는 대로 철을 거둬들였다. 밥그릇, 국그릇, 숟가락, 젓가락은 물론이고, 문 손잡이와 경첩까지 철이란 철은 모조리 다 압수해 갔다. 그래도 부족하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터지지 않는 폭탄’, 곧 ‘세균 폭탄’이었다.

일본은 만주에 비밀 부대인 ‘731부대’를 만들고, 이곳에서 납치하거나 체포해 온 중국인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독성이 강한 전염병 세균을 실험ㆍ배양했다. 이렇게 만든 세균을 도자기에 넣고 공중에서 투하하거나 대포로 쏘아 적진에 떨어뜨려 적을 살상하려는 계획이었다. 일본은 이 세균전 실험에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과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희생시켰다. 그중에는 시인 윤동주도 있었다.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유학 간 윤동주는, 교토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독립운동 관련 비밀 조직에서 활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년 뒤 그곳에서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는데, 시신을 수습하러 간 가족들은 감옥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놓아 윤동주가 사망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 실험’ 때문이라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을 자행했다. 이처럼 세균 폭탄에 자살 공격까지 감행하며 버티던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우리도 당시 세계 정세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니,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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