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1%의 용기와 희망
이채윤 지음 | 스코프
버락 오바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1%의 용기와 희망
이채윤 지음
스코프 / 2012년 11월 / 136쪽 / 12,000원
1장 외로운 소년 오바마
검은 아빠, 하얀 엄마
1961년 8월 4일, 버락 오바마는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케냐인 아버지 '버락 오바마'와 미국 캔자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습니다. 오바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와이 대학에 함께 다닌 동창생이었습니다. 수줍음 많고 새침데기였던 열여덟 살의 미국인 어머니는 아프리카에서 온 잘생기고 똑똑한 흑인 청년에게 반해버렸습니다. 스탠리는 오바마를 부모님께 소개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에 펄쩍 뛰면서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얼마 안 가서 그들의 결혼을 허락했지요. 두 사람은 조용히 결혼식을 올렸고, 얼마 후에 검은 피부에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귀여운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된 버락 오바마는 아들에게 '버락 오바마'란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년이 두 살 되던 해에 헤어졌습니다.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 아프리카 대륙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국인 케냐로 돌아갔고, 어머니와 아들은 미국에 남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지고도 씩씩하게 살아가던 어머니에게 인도네시아의 '롤로 수토로'라는 사람이 청혼을 해왔습니다. 소년 오바마는 어머니와 새아버지와 함께 인도네시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신비한 나라,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어린 오바마에게 정말이지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살게 된 집의 뒷마당은 닭과 오리들, 극락조, 앵무새, 새끼 악어까지 그야말로 작은 동물원이었습니다. 오바마가 인도네시아의 말과 풍습 그리고 온갖 장난을 배우는 데는 여섯 달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양아버지인 롤로는 어머니와 오바마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롤로의 월급이 적어 집안 살림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미국 대사관에서 인도네시아 사업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아들의 교육이었습니다. 자카르타에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 아이들은 국제학교에 다녔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오바마를 그냥 인도네시아 아이들처럼 인도네시아 학교에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직접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일주일에 다섯 번,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아들을 깨워서 출근하기 전에 세 시간 동안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어머니의 결단
마침내 어머니는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인도네시아 사람이 아니고 미국인이며, 아들이 공부해야 할 곳은 미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와이에 있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했습니다."어머니와 아버지가 저 좀 도와주세요. 오바마를 그곳으로 보내야겠어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선뜻 딸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열 살짜리 소년 오바마는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소년은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다는 기쁨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만나게 된다는 설렘에 몸을 떨었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하자 오바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오바마의 하와이 생활은 두 분의 지극한 사랑 덕분에 순조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열 살짜리 소년의 악몽
소년 오바마는 하와이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호우 아카데미 5학년으로 다시 입학했습니다. 푸나호우는 역사가 130년이나 된, 하와이에서 많은 엘리트를 배출해낸 명문 학교였습니다. 오바마의 어머니가 아들을 하와이로 보낼 결심을 한 것도 이 학교의 명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는 자신이 학교의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혼란스러웠습니다. 피부색, 입고 다니는 옷, 취미도 다 달랐습니다. 반 아이들은 대부분 하와이의 상류층 집안 자제들이었고, 집집마다 수영장이 있는 부자 동네에 살면서 유치원 때부터 함께 어울린 사이였습니다.
상상 속의 아버지
"네 아빠가 널 만나러 온다는구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 들고 오면서 외쳤습니다. 오바마는 그동안 얘기만 들었던 아버지를 만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후,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키가 크고 피부가 검은 남자였습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재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몸을 심하게 다쳐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건강을 돌본 후에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 오바마를 만나기 위해 하와이에 온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리를 조금 절면서 다가와 아들 오바마를 안았습니다. "오바마, 정말 오랜만이구나. 너는 아빠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아버지는 오바마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야윈 모습이었습니다.
"아빠는 한 달 정도 여기 있을 거다. 그동안 아빠랑 친해져 보자꾸나."
한 달 동안 아버지는 아주 낯설고 강한 힘으로 어린 오바마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제야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현실에 진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어쩌면 자기 곁에 영원히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일일교사 활동을 하며 오바마의 기를 살려 주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백인들과 맞서 싸운 용감한 아프리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 아버지가 하와이를 떠난 이후 오바마는 아버지와 수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지요.
지식창고 - 존경받는 미국의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미국의 초대 대통령입니다.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영국과 벌인 독립전쟁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총사령관으로 활약했습니다. 명석한 두뇌와 지도력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그 이름을 알렸습니다. 결국 미국은 악조건 속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독립을 얻어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의 16대 대통령입니다. 미국에서 현재까지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실과 노력으로 독학을 했고, 수많은 실패를 거치면서도 대통령까지 오른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 미국의 아픈 상처였던 노예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려서 노예해방선언을 했고,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지휘하여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2장 성장의 고통
몸속에 흐르는 피
오바마의 외할아버지의 친구 중에는 프랭크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카고에 살 때 유명한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와 친구였습니다. 늙은 시인은 오바마에게 자기 집에는 책이 많으니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언제든지 보라고 했습니다. 오바마는 프랭크에게 두 권의 책을 빌렸습니다. 랭스턴 휴즈의 시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이었습니다. 오바마는 미국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읽으며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라이트의 소설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집을 읽고, 민권운동에 대한 책도 찾아서 읽었습니다.
말콤 엑스도 오바마처럼 흑백 혼혈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기 몸에 흐르는 폭력적인 하얀 피가 말끔하게 제거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오바마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오바마는 만일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헤어진다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온 것입니다.
나는 흑인이 아니야
1980년, 버락 오바마는 하와이를 떠나 로스앤젤레스의 남부에 있는 옥시덴탈 대학에 입학해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학교에는 흑인 학생들이 꽤 많아서 따로 동아리를 구성해 자유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 중에 조이스라는 여학생은 초록색 눈동자에 멋진 갈색 피부를 가진 미녀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오바마는 조이스에게 '흑인학생회' 모임에 함께 나가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오바마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흑인이 아니야. 난 여러 민족에 동시에 소속된 사람이야. 내 혈관 속에는 이탈리아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어. 거기에 아프리카 사람의 피도 조금 흐르고, 프랑스 사람과 인디언의 피도 조금씩 흐르고 있지. 이렇게 여러 민족의 피가 섞였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겠니?"
대학 2학년 때 오바마는 레지나라는 이름의 여학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시카고의 외곽 지역인 사우스 사이드에 살았는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말했습니다. 레지나는 어머니가 억척같이 일을 해서 자식들을 키운 이야기를 해 주었고, 삼촌들과 사촌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모여 북적이던 저녁 무렵에 함께 웃음소리를 피워내던 풍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오바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흑인들의 삶에 대해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바마는 레지나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따뜻하게 느껴져. 네가 부럽다."
레지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내가 하와이에서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었단 말이야."레지나의 말은 오바마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작게 보고 남의 것을 크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최초의 연설
그 무렵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오바마는 친구들을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 분리정책)를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바마는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바마는 마이크를 잡았고 연설을 시작했습니다."누군가 투쟁하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만 그를 바라봤습니다. 오바마는 사람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습니다."누군가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투쟁은 바다 건너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여기 있는 우리 모두의 투쟁이기도 합니다. 그 투쟁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에게 누구 편을 들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흑인 편이냐 백인 편이냐, 부자의 편이냐 가난한 사람의 편이냐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지키느냐 남에게 복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옳은 편에 설 것인가 부당한 편에 설 것인가입니다!"누군가 박수를 쳤습니다. 또 누군가는 계속하라고 외쳤습니다. 그 순간 오바마의 연설은 다시 청중을 장악했고, 그들과 오바마 사이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파티에서 레지나는 오바마에게 축하를 건넸습니다.
"너의 연설 덕분에 오늘 모임이 살았어. 넌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열정적인 연설을 했어."그때 오바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대학 생활 2년 동안 한 번도 어떤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단지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일 뿐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 후 오바마는 컬럼비아 대학에 편입하여 정치학과 외교학을 공부했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오바마는 술, 담배를 끊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오바마는 이 시절을 '수도승처럼 공부한 때'라고 회상하곤 합니다.
지식창고 -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미국 흑인해방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미국의 급진파 흑인해방운동가로 본명은 맬컴 리틀입니다.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출생으로 흑인 이슬람권의 지도자였으나, 이 파의 목표나 정치·시민운동의 부정 등에 불만을 갖고 이 파를 떠나 직접적 행동방식을 택하는 흑인 민족주의 운동으로 나섰습니다. '흑은 흑이고 백은 백'이라는 신념 아래 흑인과 백인 사이의 통합을 부정하며 백인 사회에서 독립한 흑인만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의 궁극적 지향점이었습니다. 과격한 주장을 펼치긴 했지만 미국 내의 흑인들이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자의식을 얻게 된 것은 주로 말콤 엑스 덕분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조지아 주 애틀랜타 출생으로 침례교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비폭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및 식민지 해방과 사해동포론 등을 주장한 간디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업적으로는 미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차별법 폐지에 대한 위헌 판결을 받은 것과 미국 내에서의 인권운동을 가열시킨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바마가 롤 모델로 따르고자 하는 그의 명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합니다.
3장 꿈을 주는 사람이 되자
공동체 조직가의 꿈
1983년, 오바마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오바마는 졸업을 앞두고 '흑인 중심의 풀뿌리 조직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겠다'고 마음먹고 민권운동단체 등에 편지를 보냈으나 어떤 단체에서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오바마는 하는 수 없이 빌린 학자금을 갚기 위해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고, 곧 능력을 인정받아 자신만의 비서를 둔 고액 연봉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바마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전화를 한 통 받게 됩니다. 케냐에 있는 이복동생 아우마였습니다. "데이비드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어. 왜 우리 집에는 슬픈 일만 생기지?"
데이비드도 오바마의 이복동생입니다. 전화를 끊고, 오바마는 뉴욕 거리를 몇 시간이고 걸었습니다."지구 저편에서 나와 피를 나눈 누군가가 죽었는데 나는 아무 일도 해줄 수 없고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고 있구나."
몇 달 후 오바마는 회사를 그만두고 시카고에서 빈민 지역을 돕기 위해 일하는 단체를 찾아갔습니다. 적은 월급의 일자리였지만 오바마는 그 일이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시카고라는 낯선 땅으로 건너간 이유는 자신이 속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동경과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오바마가 일하게 된 곳은 가난한 흑인들이 모여 사는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 지역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의 주민들의 주거 및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씩 작은 성공들을 거두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활동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는 사회 구조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더없이 성숙해졌고 흑인으로서의 열등감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더 길러 꿈을 이루겠다는 희망을 품고 하버드 대학 로스쿨(법학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버드로 가다
1988년 9월 오바마는 학자금을 빌려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곳에 다니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치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하버드 로스쿨의 분위기는 앞서 나가자는 진보파와 그대로 지키자는 보수파로 완전히 나뉘어 있었습니다. 오바마는 진보파이면서도 보수적 성향의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특히 그는 두 집단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바마를 로스쿨의 학생회장으로 추천했고 그는 하버드 대학이 탄생한 지 104년 만에 탄생한 첫 흑인 학생회장이 되었습니다. 학생회장은 권위 있는 법률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장도 맡았는데, 흑인 학생이 처음으로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이 됐다는 사실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습니다. 오바마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선출은 미국의 진보를 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훗날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것을 예상하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