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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틈에서 키운 하얀 꿈

소민호 지음 | 달과소
바위틈에서 키운 하얀 꿈

소민호 지음

달과소 / 2012년 8월 / 164쪽 / 10,000원





바위틈에서 키운 하얀 꿈



백련암을 등지고 앉은 작은 연못에 빛을 잃은 연잎들이 둥둥 떠 있었습니다. 다람쥐들도 가을걷이에 연못가를 뛰어다녔습니다. 종종 걸음으로 다니는 다람쥐들만 보면 자꾸만 옛날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내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냥 소쿠리 안에서 동무들과 봄을 기다리며 하얀 꿈만 꾸고 있었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딱딱한 껍질 때문이었습니다. 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들은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마냥 꿈만 키운답니다.

어느 날, 큰스님이 없는 틈을 타서 다람쥐 두 마리가 장독대로 들어왔습니다. 다람쥐들은 우리를 볼 주머니가 볼록하도록 입에 쓸어 넣었습니다. 우리를 물고 달리던 다람쥐가 바위 위에서 꼬리를 깔고 앉아 나를 앞발로 움켜쥐고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눈을 꼭 감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다람쥐가 움켜쥐고 있던 내 몸이 바위 위에 똑 떨어졌습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위틈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다람쥐는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그냥 가버렸습니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바위틈으로 비친 좁은 하늘, 그때 본 하늘은 참 맑았습니다. 그렇게 삼십 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뭘 생각하고 있어?”

바위 뒤에 서 있는 소나무가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생각은 무슨 생각.”

내 대답은 늘 똑같았습니다. 말해 봐야 소나무의 마음만 아프게 할 뿐 소용없는 일이었거든요.“쯧쯧, 저 덕구 스님도 어쩌면 너랑…….”

소나무가 말을 하다 말고 얼버무렸습니다.



다섯 해 전, 겨우 일곱 살짜리 아이가 어떤 아주머니 손을 잡고 백련암 큰스님을 찾아왔습니다.“스님, 이 아이는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뒤 말문을 닫았습니다. 부디 가족도 없는 이 아이를 거두어 주십시오.”아주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훌쩍 가버렸습니다.



그 뒤부터 큰스님은 아이랑 같이 지냈습니다. 다음 해, 큰스님은 아이의 머리를 깎고 덕구라는 법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덕구 스님은 큰스님을 따라 기도는 했지만 염불은 하지 못했습니다. 들을 수는 있었지만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야 맞겠네요.

덕구 스님은 시간만 나면 내 앞에 앉아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냈답니다. 덕구 스님 옆에 와 앉은 큰스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려라. 주어진 운명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생각을 바꾸면 달라질 수 있단다.”큰스님은 덕구 스님 등을 토닥여 주고 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덕구 스님은 그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연못에 눈길을 던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이봐, 너도 큰스님 말씀 들었지.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소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내게 말했습니다. 나도 덕구 스님처럼 늘 연못만 바라보았거든요.

“아, 이 바위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우리 한번 노력해 보자. 늦었지만 이제는 될 것 같아.”

소나무는 힘자랑이라도 하듯 가지를 흔들어댔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음, 이제 조금씩 움직인다!”

소나무의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있었습니다. 그때, 바위틈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내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이얏, 빨리 나가!”

소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소나무 뿌리 한 가닥도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몸은 땅으로 톡 떨어졌습니다. 나는 힘을 모아 떼구루루 굴렀습니다. 만약에 다시 바위가 오므라들면 삼십 년 만의 탈출은 물거품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렇게 그리워하던 흙냄새도 맡기 전에 나는 그만 연못 속으로 퐁당 빠져버린 것입니다. “앗, 그게 아냐!”

나는 소나무의 애타는 소리만 가슴에 품고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까만 진흙 속으로 내 몸이 서서히 묻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진흙이 엄마 품속처럼 참 포근했습니다. 잠이 스르르 왔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떴습니다. 옴츠렸던 몸을 기지개로 풀자 내 몸은 껍질을 뚫고 진흙 밖으로 쑥 나갔습니다. 나는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물 위로 뻗어나갔습니다.“아, 소나무다!”

나는 넓은 잎을 물 위에 올려놓고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소나무는 나를 못 알아보고 그냥 가지만 흔들 뿐이었습니다.

이내 여름이 왔습니다. 드디어 내 이파리 사이에서 촛불을 닮은 하얀 꽃봉오리가 햇살에 빛났습니다. 아, 연못 위에는 분홍빛 꽃봉오리들이 동동 떠 있었습니다. 생긴 모습은 같아도 색깔이 다르다는 게 왠지 걱정되었습니다. 나만 흰 꽃이었으니까요. 그때였습니다.

“스님, 저기 흰 연꽃이……!”

덕구 스님이었습니다. 마음으로만 말하던 덕구 스님이 말을 한 것입니다.

“삼십 년 전에 잃었던 백련, 돌아가신 큰스님이 그렇게도 좋아하셨던 그 흰 연꽃이로구나!”

촉촉이 젖은 듯한 스님의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래, 올해부터는 향 좋은 백련차 맛을 볼 수 있겠구나!”

큰스님은 덕구 스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기다림



화분 하나가 돌담을 등지고 앉아 있었습니다.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화분은 크고 화려한 꽃을 안고 넓은 거실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찬바람이 불자 시들어버렸습니다.“이제 저 플라스틱 화분은 버려야겠어.”

화분은 그 길로 소망원이라는 고아원 돌담 아래 버려졌습니다. 외로움과 무서움에 떨던 화분은 어느 날 가람이를 만났습니다. 아홉 살 가람이는 작은 키에 몸도 약해 보였습니다. 웃음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에 데리러 오겠다는 아버지 약속만 믿고 소망원에서 2년 동안 기다렸던 가람이를 보면서, 화분도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직은 모르지만, 화분을 아껴줄 누군가가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생겼답니다. 어느 날 우두커니 앉아 있던 가람이가 화분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푸석푸석한 흙에 마른 나뭇가지를 꽂고, 종이로 만든 꽃도 달아주었습니다.“아버지가 보면 좋아할 거야.”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람이의 마음이 매일매일 종이꽃으로 피어났습니다.



그날도 가람이는 추위를 잊은 채 화분 앞에 앉았습니다. 콧물을 흘리며 콜록콜록 기침도 했습니다. 다음 날이었습니다. 구급차가 불을 반짝거리며 소망원을 다녀갔습니다. 그 뒤부터 가람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다시 화분은 외로워졌습니다. 가람이가 꽂아 놓은 나뭇가지는 바람에 넘어졌고 종이꽃도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가람이를 지우려고 하면 더욱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가람이가 아버지를 기다리듯이 화분도 가람이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이사이 불어오는 바람결이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봄이 올 것 같습니다.

‘응, 이게 뭐야?’

안고 있는 흙 속에서 꼬물거리는 게 있었습니다. 그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는 모래알보다 작은 씨앗이었습니다. 화분은 힘이 솟았습니다. ‘아, 내가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가람이에게 자랑해야지!’

화분은 밤마다 이슬을 모아 흙을 녹녹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람에 쓰레기라도 앉을라치면 몸을 옴츠렸습니다.

어느새 소망원 돌담 옆에는 개나리가 피었습니다. 씨앗은 벌써 싹을 틔워 차 숟갈만 한 잎을 펼쳤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풀이지만 화분에게는 소중했습니다. 며칠 뒤 화분에 작고 앙증맞은 보랏빛 꽃들이 피었습니다.

“원장님, 가람이가 어떻답니까?”

“의사 선생님이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했습니다.”

화분은 원장님과 이야기하는 사람이 가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참, 가람이가 지난겨울 내내 저 화분 옆에서 놀았습니다.”

원장님은 돌아서서 화분을 가리켰습니다. 나뭇가지를 꽂고 종이꽃을 달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가람이 아버지가 다가와서 화분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화분을 가람이 병실에 갖다 놓으면 안 될까요?”

원장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화분은 가람이 아버지 가슴에 안겼습니다.

‘제비꽃처럼 활짝 웃는 가람이 얼굴을 오래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감나무와 석류나무



“감나무야, 무서워.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엄청 무서워!”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허물어지는 집들을 보고 석류나무가 가지를 파르르 떨었습니다.

“그러게 누가 석류를 맺으라고 했어?”

감나무가 톡 쏘아붙였습니다.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숨을 쉬는 동안은 그냥 지낼 수 없잖아.”

“저 기계 소리가 안 들려? 며칠 안 있으면 이 집과 함께 우리도 끝장이야!”

감나무는 몇 장 안 남은 누르스름한 이파리를 똑똑 따서 바람에 날려 보냈습니다



20년 전 어느 날, 화가 아저씨와 시인 아주머니가 집을 지어 이사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어린 감나무와 석류나무 묘목을 사왔습니다. “3년 뒤에는 감과 석류가 열린다고 했지요?”

“그렇다는구먼. 3년만 있으면 열매 맛을 볼 수 있다고 했어.”

그렇게 3년이 지났습니다. 따가운 햇살이 무디어지는가 싶더니 가을이 되었습니다. 감나무에는 가을 햇살을 담은 감이 노랗게 익어갔습니다. 석류나무에는 노을빛을 닮은 빨간 석류가 발그레한 이를 드러내고 가을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두 나무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담장 너머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과 차들은 다른 세상처럼 보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저씨와 아주머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구름 빛을 닮아갔습니다. 감나무와 석류나무도 키가 훌쩍 커서 담장 너머에서도 가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 찬바람을 앞세우고 찾아왔습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것 같았습니다.“우리 동네가 재개발이 된대요.”

“그렇다는구먼. 곧 철거를 한다지?”

아저씨와 아주머니 말이 한겨울 눈바람보다 더 매서웠습니다. 두 나무는 뿌리와 가지가 모두 꽁꽁 얼어붙는 듯했습니다. 집이 없어지고 담장이 무너지면 다른 세상이 다가올 게 뻔했습니다.“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뽑아서 버리지는 않을 거야. 우리에게는 아직 열매가 많이 열리니까!”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감나무와 석류나무 가지에도 살며시 내려앉았습니다. 석류나무는 여느 해보다 더 힘차게, 젖 먹던 힘까지 모아 물을 빨아올렸습니다. 하지만 감나무는 가지를 늘어뜨렸습니다. 이미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의 끈마저 놓아버린 것입니다. “감나무야, 그렇다고 꽃을 안 피우면 어떻게 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라질 때까지 해야 할 일이잖아!”“흥, 이런 마당에 꽃은 웬 꽃이며, 열매는 무슨 열매. 난 다 싫어졌어!”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집을 자주 비우며, 이사할 집을 보러 다녔습니다.

“이사 갈 집이 아파트만 아니면 이 나무들을 모두 옮겨 심으면 좋겠는데…….”

“이 집에 사는 동안 나무들 때문에 참 행복했어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마을은 먼지를 옴팍 뒤집어썼습니다.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기계소리가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석류나무는 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는 석류 꼭지를 꼭 잡았습니다. 미련을 버리고 빨리 포기한 감나무가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집들이 먼지를 뿜으며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너진 벽돌 조각들이 나무 밑동에 쌓였습니다.

“다행히 아직 나무들이 그대로 있어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낯선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쯧쯧쯧, 나무에도 먼지투성이구먼!”

“그래도 석류는 잘 익었네요.”

아주머니가 석류 하나를 땄습니다. 석류 빛깔이 맑은 날 저녁노을을 닮았습니다.

“석류나무는 지금 옮겨 심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감나무를 보세요. 이미 가지가 말라 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감나무는 뿌리에 힘을 주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물을 빨아올려 잎이라도 싱싱하게 보이고 싶었던 겁니다.“석류나무야, 난 어떻게 하면 좋니? 네가 보기에도 내가 못 살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려고 마음먹었으면 진작 말해주지. 이제 와서 이게 뭐야!”감나무는 몇 장 안 남은 이파리에도 힘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뿐, 애를 써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감나무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니?”

석류나무가 몸부림을 치자 가지에 매달린 석류들이 톡톡 터졌습니다. 하지만 석류나무는 제가 맺은 열매는 뒷전이었습니다. 잘 익은, 저녁놀을 닮은 석류를 보고 즐거워할 마음이 안 생겼습니다. 뿌리가 할 일이 급했거든요. 석류나무는 땅 속 뿌리로 감나무 뿌리를 칭칭 동여매듯이 감았습니다. 감나무만 남겨놓고 석류나무만 파가지 못하도록 칭칭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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