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
류태형 지음 | 명진출판
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
류태형 지음
명진출판 / 2012년 9월 / 360쪽 / 14,000원
Part 01 음악의 비밀을 찾아서
어머니의 존재감이 내 음악의 탯줄이야
피란길에도 피아노를 싣고 간 어머니: 정명훈의 음악 인생에서 근원은 어머니에게 맞닿아 있다. 어머니는 배화여고를 졸업한 후 이화여전(이화여대) 가사과(가정학과)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도쿄 영양과요리학교에서 1년간 유학했다. 귀국하여서는 동덕여고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시기에 결혼했다. 당시 생활은 궁핍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국밥 장사를 시작했다. 장국밥 장사를 하느라 늘 시끄러운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시장통이라는 정서가 아이들을 거칠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생각이 미친 것이 피아노였다. 어머니는 국밥을 팔아 모은 돈과 약간의 빚을 보태 피아노 한 대를 빌렸고, 선생님을 모셔다 아이들에게 레슨을 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아이들에게 안정된 정서를 심어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으나, 아이들이 피아노를 좋아하자 어머니는 생각이 달라졌다. 더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어 실력 있는 선생님을 모셔 왔다.
그 후 어머니는 국밥집을 그만두고 명동에 대형 음식점 '고려정'을 열었다. 당시 명동은 음악 하는 사람들의 메카로 통했다. 음악인들은 거의 매일 명동으로 쏟아져 나와 돌체다방에서 음악 감상을 하거나 근처 악보사에 들르곤 했다. 그중에는 꽤 실력 있는 음악인들도 많았는데, 어머니는 그런 사람을 찾아내 레슨을 부탁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그동안 빌려 쓰던 피아노를 아예 사들였다. 그렇게 해서 피아노는 재산목록 제1호가 되었다. 그런데 6ㆍ25전쟁이 터졌다. 부산으로 피란을 가게 되었다. 고민 끝에 어머니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래, 모두들 미쳤다고 하겠지만 피아노를 가지고 가는 거야.'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피란길에 피아노를 끌고 가겠다는 사람이 또 있을까? 덕분에 아이들의 피아노 교육은 피란지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피란지인 부산에서 1951년에 다섯째인 명철이 태어났고 1953년에 명훈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휴전과 함께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1955년에는 막내이자 명훈의 유일한 동생인 명규가 태어났다.
각자에게 맞는 악기가 따로 있어: 어머니는 형제가 모두 음악을 배우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세심하게 관찰하여 각자 가장 잘할 수 있는 길을 찾아주었다. 그래서 첫째 명소는 플루트로 바꿨다. 둘째 명근이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리고 피아노에 별로 흥미를 못 느끼던 명화와 경화는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그런데 명화가 바이올린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어 첼로로 바꾸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후배에게 명철과 명훈의 음악 기초를 가르치게 했는데, 명훈은 피아노를 참 좋아했다. 명훈이 다섯 살 때인 1958년, 서울 명동의 시공관(현재 명동예술극장)에서 열일곱 살 명소와 열여섯 살 명근, 열네 살 명화와 열 살 경화가 한 무대에 섰다. 한국일보가 주최한 음악회였다. 여기서 사 남매는 각각 플루트와 비올라, 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날 명훈은 객석 맨 앞에서 공연을 보았다. 연주가 끝난 후 엄청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날 이후 명훈은 '나도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아노 연습에 더욱 열중했다. 형과 누나들에 이어 어린 명훈이 생애 처음으로 무대에 설 기회가 찾아왔다. 명훈이 일곱 살 때였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주최한 제5회 '소년소녀를 위한 협주곡의 밤' 공연에 명훈이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연주가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음악 때문에 가족 모두 미국에 갔어
언젠가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기 위하여: 명소, 명근, 명화, 경화 그리고 명훈까지……. 아이들의 재능이 하나둘 드러났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처럼 외국을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우선 해외유학과 관계된 정보가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직접 찾아가 만났다. 그러던 중 한 사람으로부터 이공계 대학에서 2년 이상 공부하면 쉽게 출국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명소와 명근은 고1이었다. 곧 명소와 명근은 학교 대신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고 둘 다 연세대학교 수학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2학년을 마치고 나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는 서로 다른 길을 갔다. 명소는 줄리어드 음대에 들어가 플루트를 전공했지만, 명근은 예술보다는 공부를 선택했고, MIT 공대에 들어갔다.
명화와 경화도 이제 한국땅이 좁았다. 나가는 콩쿠르마다 최고상을 거머쥐었고, 이어지는 연주회마다 찬사가 쏟아졌다. 그즈음 줄리어드 음대에 가 있던 명소가 초청장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하여 명화와 경화를 뉴욕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시애틀에서 친구가 한 가지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년 4월에 이 도시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린대. 아마 한국에서도 참가할 거야. 그러면 거기서 일할 사람도 모집하겠지?" 정보를 안고 돌아온 어머니는 당장 준비를 시작했다. 과연 정부에서는 세계박람회 한국관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식당 인력에 지원했고 너끈히 합격했다. 어머니가 이화여전 가사과를 나온 데다가 식당도 운영하고 있어서 꼭 필요한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 분은 네 아이가 있는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밑의 아들 셋이 문제였다. 어머니는 미국에 있는 경화에게 초청장을 부탁했다. 또 서류를 제대로 작성하려면 콩쿠르 입상을 비롯해서 눈에 띌 만한 경력이 필요했다. 명훈은 콩쿠르 입상을 목표로 묵묵히 연습을 시작했다. 명훈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명훈은 본선에서 상을 받지 못했으나,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는 올랐기 때문에 '입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명철은 클라리넷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했고, 명규는 남산 KBS어린이합창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그렇게 하여 1961년 명훈은 어머니, 명철, 명규와 함께 미국으로 출발했다. 아버지만 한국에 남아 있다가 몇 개월 후 박람회에 참가할 인원들과 함께 뒤따라왔다.
시애틀에 와서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함께 식당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온 일행 중에 하나둘 사라지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 일이 생길 때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물론 아이들까지 이를 악물고 일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틈만 나면 아이들의 연주회를 열었다. 박람회 기간에는 박람회장 옆에 새로 지어진 콘서트홀에서 사 남매 연주회를 했다. 명소, 명화, 경화 옆에 명훈까지 붙인 것이다. 그런데 연주회에 대한 반응이 무척 좋았다. 연주 실력이 대단하다고 입소문이 퍼져 나갔다.
명훈이 누나들과 연주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 찾아왔다. 낯선 남자는 명훈과 어머니를 워싱턴 주립대학으로 안내했다. 학교 음악홀에서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빌리(명훈의 영어 애칭)니? 피아노를 한번 쳐보렴." 명훈은 평소에 연습하던 곡 중 하나를 골라 연주를 시작했다. 한참을 치다가 건반에서 손을 뗐는데, 지켜보던 두 사람 중 여자 분이 피아노로 다가왔다. 그리고 몇 가지 멜로디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내가 들려준 음계를 칠 수 있겠니?" 명훈은 정신을 집중해서 방금 들은 음계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음표가 보이는 것 같았다. 명훈이 건반을 두드리자 좀 전의 멜로디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듣고 있던 여자 분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빌리는 제가 맡아서 가르치겠습니다." 그날부터 제이콥슨 여사의 가르침이 시작됐다. 레슨비는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네가 단지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한다면, 나는 너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너 역시 굳이 내게 배울 필요가 없단다. 연주 기술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아주 많으니까. 그러나 네가 피아니스트를 넘어 음악가가 되고자 한다면 내 제자가 되렴." 제이콥슨은 그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명훈을 가르칠 때도 단순히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었다. 협주곡이나 교향곡 전체의 악보를 보면서 곡 하나하나의 분위기와 특성, 사용하는 악기들, 악기를 쓴 부분과 그 효과 등 곡 전체를 감지하는 힘을 기르도록 했다. 제이콥슨은 어린 명훈에게 피아노를 지도하기 위해 만났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가 지휘자가 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연주 기술보다는 곡 전체를 느끼고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주었다.
음악 공부를 제대로 해볼 거야: 명훈이 음악 공부를 제대로 하기로 결심한 걸 확인하자 어머니는 줄리어드 음대를 방문했다. 총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위로 세 아이를 익히 보아온 터라 총장 역시 명훈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좋아요. 그 아이에게 입학 허가서를 주도록 하지요. 장학금도 주겠습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선생님을 모셔 오려고 하는데, 가능하다면 그분이 교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총장은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 어머니는 놀랍고 감동스러웠다. 다음에 들른 곳은 학장실이었다. 학장은 명훈이 로지나 레빈 교수에게 배울 수 있도록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흥분된 마음으로 돌아와 명훈에게 말했다. "명훈아, 너도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명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어머니, 저는 줄리어드는 가기 싫습니다. 거긴 너무나 경쟁이 심해요. 저는 그런 곳에서 음악을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매네스에 가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기껏 뉴욕까지 달려가 받아 온 입학 허가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서가 아니었다. 항상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들에게서 진지하게 진로를 고민한 흔적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여러 말 않고 명훈의 선택에 따랐다. 그렇게 하여 명훈은 매네스 음대에 들어갔고, 총장은 명훈에게 선생님을 소개해주어, 칼 밤 베르거 선생님과 나디아 라이젠버그 선생님에게 지휘와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묵묵히 정진해온 명훈의 피아노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다. 1973년 뮌헨의 유서 깊은 ARD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 참가해 2위를 했고,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영국의 《더 타임스》지는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에서 정명훈의 연주에 대해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을 떠올리게 한 연주'라고 극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명훈을 불렀다. "명훈아, 이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한번 나가보자." 한편으론 너무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어머니의 절실함에 답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어머니." 명훈은 그날부터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모스크바에서 예선과 결선 리사이틀에서 정명훈은 스크랴빈 소나타 5번, 쇼팽 소나타, 바흐 전주곡과 푸가, 하이든 소나타, 라흐마니노프 연습곡 등 열다섯 곡을 연주했다. 순조롭게 결선에 올라간 명훈은 결선에서 협주곡을 연주했다. 드디어 마지막 결선이 끝나고 결과 발표 시간이 되었다. 1등은 소련의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2등은 정명훈과 소련의 스타니슬라프 이고린스키가 공동으로 수상했다.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의 매스컴은 일제히 이 쾌거를 주요 뉴스로 다루었고, 김포공항에서 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수상한 이후 명훈이 어린 시절을 보낸 시애틀에서는 8월 1일을 '정명훈의 날'로 선포했다. 명훈이 본격적으로 피아노와 지휘를 배운 뉴욕에서는 뉴욕 시장이 감사패를 전했다. 그리고 10월 29일에는 한국인 최초로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알수록 더 알고 싶은 게 음악의 비밀이었어
지휘봉을 꿈꾸기 시작했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한 이후 명훈에게는 세계 각지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주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던 중 앙드레 프레빈의 초청으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피아노 협연자가 되어 일본 순회공연에 동행하게 되었고, 명훈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피아노 연주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녹초가 되었다. '아아, 정말 피곤하다. 물론 이런 생활 나쁘진 않아. 피아노가 좋고, 연주에 몰두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간간이 드는 이 느낌은 뭐지? 뭔가가 목에 걸린 듯 개운하지가 않아.' 그때 옷을 갈아입기 위해 셔츠 단추를 풀던 그는 무심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에 앙드레 프레빈의 손이 겹쳐 보였다. '아, 바로 그거였어. 프레빈 손에 들린 지휘봉!'
결국 어느 날 명훈은 어머니를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어머니, 지휘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저는 피아니스트보다는 지휘자가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래, 가고 싶은 학교는 정했니?"
"이번에는 줄리어드에 가고 싶어요."
명훈은 줄리어드에 거뜬히 합격했다. 그것도 장학생으로 말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지휘 수업이 시작됐다. 2년 후 줄리어드 대학원 졸업연주회 때 명훈은 링컨센터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지휘해 격찬을 받았다.
그 후 명훈은 지휘자 줄리니에게 초청을 받아 LA로 가서 오디션을 봤고, 1978년부터 줄리니가 음악감독을 맡은 LA 필하모닉에서 부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 줄리니는 명훈에게 이상적인 롤모델이었다. 줄리니는 연습할 때 단원들을 제압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해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해석과 세계를 공감케 하고 설득하는 힘이 있었다.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동료임을 느끼도록 부드럽고 조용하게 지시했으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단원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힌트를 주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짚는 능력이 있었다.
명훈이 줄리니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연주의 기술이나 음악을 이해하는 방법이 아니라, 인격과 덕성이었다. 참고로 명훈은 자신의 지휘에 대해 '따라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지휘자란 무릇 이끌어가야 하는 법인데 따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오케스트라와 연습할 때는 주문을 많이 하고 철저하길 원하며, 높은 완성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어서 실제로 청중 앞에서 연주할 때는 단원들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주고 '따라가는 것', 이것이 지휘자 정명훈의 리더십이었다.
사랑이 없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야: 1971년 뉴욕의 맨해튼 파크 애비뉴의 한 교회. 명훈네 가족이 오랜만에 모두 모였다. AP통신 미국 특파원이었던 매형 구삼열 기자와 명화 누나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명훈은 아까부터 한곳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사돈처녀 구순열이었다. 명훈은 순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첫눈에 반한 것이다. 짝사랑의 불같은 열정은 명훈이 그리 싫지 않았던 순열의 마음을 함락시켰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했던가. 2년 넘게 철저히 비밀이 유지됐던 그 관계를 누나들이 알게 됐고 자연스레 가족 모두에게 알려졌다. 부모님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 결혼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아버지의 말은 추상같았다. 이때만큼은 어머니도 명훈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명훈은 결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79년 명훈은 순열을 아내로 맞이했다. 결혼은 명훈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우선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습관이 규칙적인 생활로 바뀌었다. 또 형제들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고기를 먹던 식성도 바뀌었다. 명훈은 결혼 이후 인생에서 균형감을 얻게 되었다고 자랑하곤 한다. 그가 평생 음악에서 추구해온 균형감의 바탕이 바로 결혼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Part 02 음악의 비밀을 알아낸 마에스트로
꼬마 피아니스트가 세계인의 마에스트로가 된 거야
세계인에게 인정받기 시작했어: 1990년 2월, 파리에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프랑스 국민의 문화에 대한 강한 긍지와 명예를 걸고, 세계 최고를 목표로 지은 극장이었다. 원래 바스티유 오페라의 첫 음악감독은 다니엘 바렌보임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향은 미테랑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 사회당과는 맞지 않았고, 결국엔 해임되고 말았다. 바스티유 오페라 위원장 피에르 베르제는 새로운 음악감독을 찾았는데, 그는 당시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이자 이탈리아 피렌체 오페라의 수석객원지휘자인 정명훈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베르제가 정명훈을 주목한 부분은 특히 명석한 두뇌로 악보를 암기하여 살아 있는 듯 꿈틀대는 음악을 펼쳐내는 능력이었다. 정명훈과 바스티유 오페라 측의 밀고 당기기는 3개월 교섭 끝에 정명훈은 음악감독직을 맡았고,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피렌체 오페라의 수석객원지휘자 자리를 사임했다. 서른여섯 살 청년 정명훈이 파리의 예술을 품 안에 넣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