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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될까보다 어떻게 살까를 꿈꿔라

김원석 지음 | 명진출판
김원석 지음

명진출판 / 2011년 3월 / 304쪽 / 14,000원



PART1_ 숨어 있는 정의와 사랑의 DNA를 찾아서




1장. 어수룩한 시골 소년의 갈등

수환의 집은 가난했지만 가족 간에 따뜻한 정이 흘렀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수환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였다. 수환이 보통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가 끝난 뒤 여느 때보다 빨리 집으로 달려왔다. 대구 외갓집에 다니러 갔던 어머니가 돌아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형도 학교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둘을 불러 앉혔다. "동한아, 수환아. 너희 둘은 앞으로 신부가 되도록 하거라." "신부님 말이에요?" "그래, 이번에 대구에 갔다가 사제 서품식을 봤다. 너무 장엄해서 눈물이 쏟아지더라. 우리 동한이와 수환이도 신부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 말씀이 끝나자 동한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네." 하고 대답했다. "수환아, 형은 대답했는데 너는 왜 안 하니?" 어머니의 채근을 받자 수환은 겨우 대답했다. "네에……." 그리고 이듬해 동한 형은 대구에 있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2장. 자네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덩이가 있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어: 동한 형을 뒤따라 수환도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들어갔다.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이 아니다 보니, 신학교 공부는 수환에게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상관없이 2년 동안 다닌 후 서울에 있는 동성상업학교(지금의 서울 동성고등학교) 을조에 입학했다. 당시 동성상업학교의 갑조는 일반 상업학교였고, 을조는 신부가 되려는 학생들이 다니는 소신학교(小神學校)로 모두가 장학생이었다. 수환은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해서도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꼭 신부가 돼야 하나?' 하는 회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 같은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3학년에 올라가서는 마음이 더욱 안정되었고 전보다 훨씬 열심히 공부했다. 책도 많이 읽었는데, 그때 읽기 시작한 책이 가톨릭 성인전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안 나와: 어느덧 수환의 마음에서는 성직자의 길을 거부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전에는 몰랐는데 성직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뒤부터 자신의 부족한 점이 자꾸 눈에 보였다. 큰일이었다. 며칠을 고민해도 답을 찾지 못하자 수환은 고해 신부님인 공베르 신부님을 찾아갔다. "신부님, 아무리 생각해도 전 성직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애초에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지 꾀를 부리곤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성직자가 된다면 오히려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이만 자퇴를 할까 합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공베르 신부님이 말했다. "스테파노, 내 말 잘 들어라. 성직자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다. 너도 나도 그걸 결정할 자격이 없다. 마음을 비우고 계속 기도를 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답을 주실 것이다." 수환은 그날 공베르 신부님이 들려준 말을 가슴에 새기고 마음을 다잡아갔다. 한편 수환이 신학교를 다니던 때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한 시기였는데, 5학년 졸업반 수신(修身, 오늘날의 윤리 과목) 시험시간에 다음과 같이 어처구니없는 문제가 나왔다. '조선 반도의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勅諭)를 받은 황국(皇國)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써라.' 그 문제를 읽는 순간 수환의 민족적 자존심과 젊은 혈기가 불처럼 일어났다. 수환은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종이 울릴 무렵 답안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

이튿날 교장실에서 수환을 불렀다. "이거 자네가 쓴 거 맞나?" "네." "어쩌려고 이런 답을 썼나?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면 학교는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하고, 자네는 감옥에 가게 된다. 어디 그 정도로 끝날 일인가? 우리 천주교회 전체가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자네는 그걸 몰랐단 말인가?" 같은 민족인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화를 내니 수환은 자신도 모르게 반항심이 솟았다. "그럼 그 답안지를 밖에 내보이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잘못했다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말대꾸를 하고 만 것이다.

수환은 교장실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제 정말 쫓겨나나 보다. 이제 겨우 참된 신부가 되고자 마음먹었는데, 역시 나는 신부가 될 만한 재목이 아닌 게야.' 마침 며칠 후 여름 방학이 시작되어 수환은 대구 집으로 내려갔고, 방학 동안 퇴학 통지서가 날아오리라고 예상했으나, 이상하게 학교에서는 방학 내내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결국 수환은 여름방학을 끝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졸업을 두어 달 남겨두었을 때였다. 대구교구장인 무세 주교님이 신학교를 방문하였다. 마침 수환은 교장선생님이 주교님이 있는 방으로 바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교장선생님께서 분명히 주교님께 나에 대한 얘기를 하실 거야. 그러면 이제 정말 퇴학 처리가 되겠구나.'

아니나다를까. 얼마 뒤에 주교님이 수환을 불렀다. 그런데 주교님은 수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스테파노, 졸업하면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더 하고 오너라." 시험지 사건 때 교장선생님은 버릇없이 말대꾸한다고 수환의 뺨을 때렸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이 살아 있는 쓸 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책임지고 있는 학교 어른의 입장 때문에 수환을 나무라긴 했지만 나라 잃은 분통함을 모르지 않았기에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기특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꿈도 설렘도 없이 분노와 함께 떠난 일본 유학: 1941년 4월, 수환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학교는 조치대학(上智大學)으로 정해졌다. 수환은 그곳에서 철학을 전공하기 전까지인 예과 2년 동안 주로 독일어 공부를 했다. 그 무렵인 1941년,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일본 당국은 조선 청년과 유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수환과 친구들은 그들에게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그런 어느 날, 일본인 교수가 수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이, 수환 학생! 조선 학생은 다 그런가? 내가 겪어보니 조선 학생들은 좀 교활한 데가 있어." 그 말을 듣자 수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조선 학생들이 교활하다고요? 교수님, 조선은 지금 일본 통치 아래에 있는 식민지 상황이 아닙니까? 도리어 질 나쁜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이간질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 아닌가요?" 수환이 워낙 당당한 태도로 되받아치자 일본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독일인인 게페르트 신부님이 수환을 따로 불렀다. "스테파노, 며칠 전 교정에서 자네가 하는 말을 들었네. 엿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지나가다 우연히 들었다네. 자네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있더군. 물론 나도 그 불덩이를 이해하네. 하지만 조심하게. 잘못하면 그 불덩이에 자네가 데겠어. 더구나 자네는 신부가 될 사람이 아닌가?" 게페르트 신부님은 진심으로 수환을 위한 충고를 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심이 느껴졌기에 수환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수환도 결국 학도병 지원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이유는 일제가 '대구에 있는 가족에게 식량 배급을 끊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수환은 결심을 굳히고 게페르트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다. "스테파노, 하느님을 원망하는가?" 수환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수환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이렇게 얘기했다. "예수님도 이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 절규했네.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하지만 하느님은 결코 자네를 버리지 않으실 거야."

전쟁은 끝났지만 귀향은 쉽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 왕은 연합군에 항복했다. 일본군이 항복한 후, 지치시마 섬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에게서 병기를 빼앗았다. 하지만 아직 학도병들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고, 일본군 측에서는 부대원들이 미군과 접촉하는 걸 엄하게 금지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미군은 일본 군인들을 본토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이건 잘못된 거다. 억울하게 끌려온 우리 조선 사람들을 먼저 풀어주는 게 순리다.'라고 생각한 수환은 미군에게 편지를 쓰기로 작정했다. 편지 내용은 '여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 사람들이 있으니 빨리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 병사에게 편지를 사령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수환은 미군 사령관에게 불려갔다. 수환을 보자마자 미군 사령관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령관이다. 이런 편지를 써서 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 다시는 이런 편지를 쓰지 말라." 실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나오는 수환을 사령관 부관인 중위가 따로 불러 물었다. "우리 조종사 십여 명이 공격을 받고 이 섬에 추락했다. 그들의 행방에 대해 아는 게 있나?" 그 질문을 알아듣고서야 수환은 미군이 왜 조선 사람들을 풀어주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본 병사들에게는 미군 조종사들에 대해 물어봐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으니 우리 조선 학도병들에게 정보를 캐내려고 붙잡아두었던 모양이군.' 수환은 "그 문제라면 내가 알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붙잡힌 미군 조종사들이 묶여 있는 걸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중위가 사실이냐고 되물었다.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건너편에 일본 군인들이 있으니 말할 수가 없다. 우리 조선 학도병들과 노동자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해주면 말해주겠다." 미군은 수환의 요구를 받아들여 조선 학도병들과 노동자들을 미군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후 수환은 괌으로 갔다. 그때 괌에서 전쟁 범죄자 재판이 열리고 있었는데, 미군 측에서 재판 증인으로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재판이 열리는 6개월 동안 괌에서 머문 수환은 다시 일본을 거쳐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3장. 서른, 전쟁 통에 사제가 되다

마지막 갈등과 유혹을 이겨내고: 귀국 후 1947년 9월, 수환은 서울에 있는 성신학교(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편입했다. 그 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3일 전부터 수환은 여권 수속을 밟고 있었다. 로마로 유학을 떠나려 했던 것인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신 수환은 후방인 대구에서 동기 정하권과 함께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에게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수환과 하권이 신부가 되는 예식을 거행하는 날, 대구 계산동성당에 신부들과 교우들이 모였고, 서품식 중간쯤 이르러 '성인 호칭 기도'가 울려 퍼졌는데, 제단 앞 바닥에 엎드린 수환은 하느님께 이렇게 속삭였다.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느님이 내게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흘러나왔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내가 배운 사랑을 실천하는 길: 사제품을 받은 수환은 곧장 안동 본당(지금의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구가 그랬지만 안동교구는 특히 가난했다. 주민들을 도우려면 우선 돈이 필요했다. 수환은 며칠 궁리한 끝에 미국 교회에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편지로 써 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안 제오르지로 주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안 제오르지오 주교는 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이었다.

그런데 부산에 도착해보니 안 주교는 일본으로 출장가고 없었다. 수환에게 안 주교를 만나러 온 이유를 들은 주교 비서신부는 필스텐벨그 대주교를 만나보라고 했다. 수환은 필스텐벨그 대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안 제오르지오 주교를 만나러 온 이유를 설명하고 영문 편지를 전했다. 편지를 읽은 필스텐벨그 대주교는 "내일 안 주교님이 돌아오니까 그 분을 꼭 만나고 가게."라고 말했다. 수환이 다음날 안 주교를 찾아가니, 몹시 반기면서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 어제 필스텐벨그 대주교님을 만났다면서? 자, 이거면 김 신부 걱정이 줄어들 걸세. 하느님 사랑을 열심히 나누시게나." 안 주교가 내미는 수표를 받아든 순간, 수환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와아, 2천만 원!' 안 주교는 대구교구장인 최덕홍 주교에게 함께 전하라며 편지도 한 통 건네주었다.

대구로 돌아온 수환은 최 주교에게 수표와 편지를 모두 전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바랐다. '내게 300만 원만 떼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성당도 조금 고치고, 우리 안동 본당 주민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그때 최 주교가 물었다. "김 신부, 얼마쯤 받아가고 싶은가?" "교구장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아가겠습니다." "절반이면 되겠지?" "네? 감사합니다. 주교님!" 수환은 그 돈을 가지고 안동 본당으로 돌아와, 무작정 돈을 나누어주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일을 시키고 품삯을 후하게 쳐주었다. 그리고 아주 가난한 신자들에 한해서는 비밀리에 돈을 나누어주었다. 수환은 훗날 성직자 생활 50여 년 중 가장 행복했던 때로 안동 본당 신부 시절을 꼽곤 했다.

이론을 겸비한 실천가로 만들어준 독일 유학: 1956년, 수환은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여비만 가지고 도착한 독일에는 또 다른 세계가 수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뮌스터대학 요셉 회프너 교수신부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운 건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회프너 교수신부는 수환이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열린 시야를 갖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창 공부 재미에 빠진 수환이 유학생활 3년째로 접어들 때였다.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대구교구 서정길 주교가 독일 교회 초청을 받아 독일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는 길에 감기에 걸렸고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폐렴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수환이 가서 서 주교의 병수발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에서 다른 신부가 와서 교대해주기도 했지만 수환은 꼬박 2년 동안 서 주교를 모셨다. 그 바람에 수환의 공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가 흔들려 학위를 받는 데는 지장을 주었지만, 서 주교를 모시는 시간은 수환이 자신의 됨됨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기회가 되었다. 몸이 회복된 서정길 주교가 한국으로 돌아가자 수환은 다시 뮌스터대학으로 돌아왔다. 이번에야말로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으로 학업에 정진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공부만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서독에서 상업 차관을 얻으려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기 시작했고, 또 한국에 진출한 독일 계통의 성 베데딕도회에서도 어학과 간호학을 공부시킬 목적으로 수녀와 수사들을 독일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독일에 한국 신부가 거의 없어 이들이 툭하면 수환을 찾는다는 데 있었다. 수환은 학위에 조바심 내는 대신 사람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기에 또 폭탄 같은 사건이 터졌다. 지도교수였던 요셉 회프너 신부가 주교가 되어 뮌스터교구장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독일의 학교 분위기는 특별하다. 지도교수가 없으면 수하의 학생은 그날부터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수환은 고민에 빠졌다. '학위를 받기 위해 계속 독일에 남아 있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 그래, 박사가 되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 한국 교회의 발전과 신자들을 위해 일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역시 내 운명은 이론가보다는 실천가인 것 같아.'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수환은 이제 그만 독일 유학생활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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