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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정찬일 지음 | 산하
우당 이회영

정찬일 지음

산하 / 2010년 12월 / 184쪽 / 9,800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소년


1867년 4월 21일, 조선 제일의 명문가에서 씩씩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회영이었고, 자라면서 회영은 '우당'이라는 호를 갖게 됩니다. 회영이 태어난 집안은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이항복이 10대조 선조였으며, 10여 명이나 되는 정승이 나온 가문이었습니다. 회영의 아버지인 이유승은 이조판서까지 지낸 바른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하였는데, 그의 올곧고 강직한 성품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이유승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회영은 그 중 네 번째였습니다. 위로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이 있었고 밑으로 이시영, 이호영과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이들 남매는 양반 집안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아 품행이 반듯했고, 형제들끼리 사이도 아주 좋았습니다.

조선의 양반집 아이들이 그렇듯, 회영은 어렸을 때부터 한문을 익히며 유교를 배웠지만, 유교에는 이회영이 알고 싶은 내용이 없었습니다. 회영은 서양 문물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청나라에서 들어온 책들을 구해 읽었습니다. 그리고 회영은 옆집에 살던 이상설이라는 소년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면서 우정을 쌓아 갔는데, 회영과 이상설은 함께 신학문을 공부했습니다. 회영에게 신학문은 호기심만 채워주는 지식으로 그치지 않고, 생각과 삶의 태도까지 바꿨습니다.

회영은 조선이 나약해진 것이 관리들 책임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원수 대하듯 싫어했고, 자신은 관리가 되는 시험인 과거를 절대로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반면에 이상설은 과거에 급제했지만, 그 뒤로도 신학문을 꾸준히 공부하여 높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이상설이 궁궐에 들어간 뒤로도 둘은 뜻을 같이하는 평생 동지였습니다. 이회영은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노비문서까지 불태워 버렸습니다. 회영의 집 머슴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습니다.

나라의 운명은 짙은 어둠 속에

당시 조선은 그야말로 혼란의 소용돌이였습니다. 일제, 그러니까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의 조정을 압박하여 과거 제도와 노비 제도를 금지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변화를 강요했습니다. 얼마 뒤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임금이라는 명칭도 황제로 바꾸게 됩니다. 일본은 마침내 궁궐에 침입하여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명성 황후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고종 황제는 목숨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급히 러시아 대사관으로 몸을 피하기까지 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는 일본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수많은 신하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고, 백성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온 나라에서 의병들이 봇물 터지듯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독립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금 억울하다고 일본 놈들에게 대든다면 애꿎은 목숨만 잃을 뿐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이회영의 고민은 깊어만 갔고, 친구 이상설을 비롯하여 많은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선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의견을 모았고, 적당한 곳은 두만강 건너편의 만주 용정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용정은 조선과 가깝고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어,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을 함께 펼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가서 독립운동 기지의 터전을 닦는 일은 이상설이 맡기로 했습니다. 이상설은 외국어가 유창하고 신학문에 밝으며, 인내심도 강해 불모지를 개척하는 데 적임자였습니다. 이상설이 용정으로 가고 나서 이동녕과 여준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1906년 8월, 이들은 용정에 최초의 해외독립운동 기지이며, 민족 교육의 중심이 될 '서전서숙'을 설립했습니다.

이회영은 애국지사들과 날마다 교회 지하실에서 비밀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백성을 깨우치는 운동을 하기 위해 비밀 조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름을 '새로운 백성'이라는 뜻의 '신민회'로 지었고, 회원들도 신중하게 뽑았습니다. 이동휘, 김구, 이갑, 여준, 김진호, 김형선, 이관직 등이 새로 들어왔고, 얼마 지나 안창호가 가입하면서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사 기자였던 신채호와 조선의 이름난 청년 작가 최남선도 가입했습니다. 그즈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이회영은 생각했습니다.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졌다는 고종황제의 편지를 알리면 국제 사회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이회영의 생각에 동지들도 찬성했고, 이를 비밀리에 전해들은 고종황제도 반가워하며 만주 용정에 있는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신임장은 비밀리에 만주의 이상설에게 전해졌고, 이상설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우당, 내 기필코 성공하리다.'그러나 온갖 고생을 하며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나라들도 일본 눈치를 보느라 도와주길 꺼렸습니다. 결국 헤이그 특사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화가 난 일본은 고종을 물러나게 하고, 순종을 황제 자리에 앉혔습니다.

헤이그 특사의 배후를 캐내기 위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신민회의 일부 간부들은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이회영도 남몰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습니다. 그 곳에서 다시 만난 이회영과 이상설, 두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힘쓸 것을 굳게 맹세했습니다. 국내로 돌아온 이회영은 신민회를 바탕으로 교육 운동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일제와 직접 싸울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해외에 독립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의 끝에 신민회는 해외에 독립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마침내 대한제국을 합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500년 역사의 조선은 주권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망명의 길, 독립의 꿈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한 달 뒤, 이회영과 이동녕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와 무관학교를 세울 만한 장소를 찾아보았습니다. 다시 귀국한 이회영은 육형제를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대로 나라에서 녹을 먹은 공신 집안입니다. 우리가 왜놈 치하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짐승과 다르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나라를 되찾는 일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식구들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터를 잡은 다음,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으려 합니다. 원컨대, 형님과 아우님들은 제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이회영의 말의 뜻을 형제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백 년 살아온 이 땅을 떠나 고달픈 망명객이 되어 목숨까지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한마음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이회영의 뜻에 찬성했습니다. 이회영은 형제들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형제들은 재산을 급히 정리한 다음, 일제의 눈을 피해 가족별로 따로 출발하여 모두 무사히 국경을 넘었습니다. 만주 압록강 북쪽에 자리 잡은 유하현 삼원포의 추 씨 마을에 이회영 일가를 시작으로 독립 운동가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하여 300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회영은 '경학사(농사를 지으며 민족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란 뜻)'를 세운다고 발표했습니다. 경학사 설립을 마친 이회영과 이동녕은 허술한 옥수수 창고를 간신히 빌려 '신흥무관강습소'라는 간판을 단 무관학교를 서둘러 열었습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가 문을 열었다는 소문이 나자, 일제와 악덕 지주에게 쫓겨났거나 독립운동의 뜻을 품은 한국인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이회영은 무관학교를 지을 땅을 어렵게 구했고, 1912년 봄부터 신흥무관학교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만주에 온 동포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추위에다가 홍역과 풍토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또한 만주 지방을 휩쓸던 마적들은 재물을 약탈했으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 이윽고 '신흥무관학교'간판이 걸리자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대한독립만세!" 무관학교는 바깥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고 입학도 까다로웠지만,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한 청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뒷바라지한 것이 바로 이회영 집안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에 문을 닫을 때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들은 독립군이 되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힘차게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만주는 흉작의 연속으로 곡식 값이 크게 올랐습니다.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 위한 신민회의 모금 계획도 일제에 발각되어 실패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회영은 직접 고국에 돌아가서 자금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회영이 고국으로 가면 일본 경찰에게 암살될 위험이 컸던지라 모두 반대했지만 이회영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이회영은 제자의 집에 묵으면서 어렵게 자금을 모았습니다. 일본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가 밝혀지지 않아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회영이 세운 또 다른 중요한 계획은 고종을 해외로 망명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고종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을 선언한다면 아직까지 충성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도 뛰어들어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이회영이 고종의 망명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 갇혀 지내는 처지나 마찬가지였던 고종 황제가 밤중에 식혜를 마신 뒤 복통을 일으켜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67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건강했던 황제의 이러한 죽음은 누가 봐도 일본이 꾸민 음모였습니다. 이회영은 크나큰 슬픔에 빠졌지만, 더 이상 국내에서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이회영은 두 번째 망명을 하게 되었고 조국과는 영원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혼을 바치다

북경으로 돌아온 이회영은 또다시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장 친한 벗 이상설이 러시아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다가 쓰러져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회영은 너무도 슬펐지만, 마음 놓고 슬퍼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러시아 등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해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 그리고 이동녕과 함께 상해로 갔습니다.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회영은 정부를 세우면, 힘 있는 자리에 앉겠다고 서로 다툴 수 있으므로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시영, 이동녕, 그리고 신민회원 출신들마저 의견을 달리 했고, 결국 이회영은 홀로 북경으로 돌아왔습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출범했고,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했습니다. 북경으로 돌아온 이회영의 집에는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애국지사들이 모여들어 늘 북적거렸습니다.

그런데 이회영은 만주에서 들려오는 소식 때문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신흥무관학교에 마적들이 자주 습격하여 학생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고, 교관들마저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제의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으로 인하여 결국 신흥무관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고, 만주의 독립군들은 방향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회영은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힘을 합해 싸워야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이회영의 노력으로 만주 환인현에 독립군 대표 70여 명이 모여 조직을 만들고 이름을 '통의부'라 지었습니다. 통의부는 만주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 통의부마저도 결국 의견을 달리하며 갈라섰습니다.

이회영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다 같이 독립에 뜻을 두고도 왜 서로 다툴까? 독립한 나라는 어떤 나라여야 할까?' 이회영은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이회영의 집에 드나드는 독립운동가 중에는 유자명, 정화암, 백정기, 이정규 같은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나키스트였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그 누구도 지배하거나 지배당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백성을 지배하는 벼슬을 싫어한 이회영은 아나키즘 사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회영뿐만 아니라 신채호도 아나키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마침내 이회영의 집에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신문 <정의공보>를 발행했습니다.

북경에 있던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위해 10여 년 만에 상해를 방문했습니다. 이회영이 상해에 도착하자, 임시정부는 크게 반기며 환영식을 열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이회영에게 임시정부에 들어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이회영은 1931년 9월,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남화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일제와 무장 투쟁을 선언하고, 비밀 조직인 '흑색공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932년 4월, 일제는 만주를 차지하고 상해까지 점령했습니다. 일제가 점령한 상해에서 독립운동이 더욱 어려워지자 이회영은 다시 만주를 떠올렸습니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좋을 리 없으니 이 기회에 만주에서 다시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자!" 이회영은 몰래 중국군 장교를 만나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쳐 일본과 싸울 것을 제의했고, 무기와 자금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중국군 장교는 만주의 의용군 사령관에게 연락하여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도록 해 주었고, 만주 의용군에서는 이회영이 직접 만주로 와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회영이 만주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의용군 사령관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회영이 직접 만주로 가는 것은 일제에 발각될 위험이 컸지만, 이회영은 결국 비밀리에 떠났습니다.

1932년 11월 13일, 대련에 도착한 이회영 일행은 그만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회영은 여순감옥으로 보내졌는데, 그 곳은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한 곳입니다. 일본 경찰은 이회영에게 잔인한 고문을 하며 독립운동 계획에 대해 물었지만, 이회영은 끝까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회영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32년 11월 17일에 예순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회영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왔고, 개성에 있는 선산에 묻혔습니다. 겨레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나, 눈을 감고 나서야 조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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