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앤디 워홀 이야기

아서 단토 지음 | 명진출판
앤디 워홀 이야기

아서 단토 지음

명진출판 / 2010년 8월 / 248쪽 / 12,000원




1장. 그림을 그리며 병을 이겨낸 아이



그림도 좋고 영화도 좋아

소년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연필과 스케치북: 초등학교 3학년. 열 살이 된 앤디는 여름방학 내내 아파서 침대 생활을 하며 지냈다. 바로 류머티즘열이 발생한 후에 나타나는 ‘무도병’때문이었다. 이 병은 운동신경 체계에 일시적으로 장애가 생기는 것으로,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발작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이 아파도 앤디의 손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림 그리는 연필과 스케치북이었다. 그의 뛰어난 드로잉(소묘) 실력은 어릴 때부터 이런 자발적인 연습을 통해 만들어졌다.



앤디는 미술 분야 외에 무척 좋아하는 것이 또 있었다. 영화배우들과 만화였다. 앤디의 어머니는 그런 앤디에게 필름 프로젝터까지 사주며 단편 영화와 만화를 보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 살 때는 처음으로 카메라를 사주어 사진 찍기에 관심을 갖게 했으며, 집 지하실에 임시로 암실을 만들어 직접 필름을 현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어쩌면 앤디의 예술성을 일찌감치 키워준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도 아닌 1930년대 중반에 아이가 필름 프로젝터와 카메라를 직접 사용하며 놀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시대를 앞서고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앤디 워홀의 예술적 성향이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앤디 워홀(본래는 앤드루 워홀라였는데, 나중에 미국식 이름인 앤디 워홀로 바꾸었음)은 1928년 8월 6일에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맥키스포트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온드레이 워홀라와 어머니 줄리아 주스티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트란스카파디안 지방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 1세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앤디네 집안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민자 거주지인 도시의 소외된 빈민 지역에서 앤디는 의기소침하고 소심한 소년으로 자랐다. 그런 앤디에게 그림 그리기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림 그리는 것이 가장 즐거운 놀이였다.



카네기 공과대학에 들어가다

미술교사보다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어: 홈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스켄리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앤디 워홀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다. 워홀은 194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가난한 형편이지만 대학에 진학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워홀은 대학 진학 문제를 고민하다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광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려면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카네기 공과대학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네가 정말 좋아하는 학과를 선택하렴.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어머니는 워홀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산업디자인과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삽화와 광고 디자인이었지만, 워홀은 예술사 등 교양 과목을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워홀의 대학 시절에서 주의를 끌 만한 특별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후에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성공한 필립 펄스타인과의 우정이다. 워홀과 펄스타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알아보았다. 그 열정에 이끌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워홀조차도 펄스타인과는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



백화점에서 일하며 상업미술에 접하다

딱 맞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 형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기가 부담스러워진 워홀은 스스로 돈을 벌면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방학 때였다. 워홀은 피츠버그에 있는 조지프 혼 백화점을 찾아가서 볼머라는 사람을 만났다. “제가 이 백화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저는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습니다.”그는 워홀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림을 잘 그립니다. 특히 드로잉과 페인팅은 자신 있습니다.”“좋아. 그렇지 않아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을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네. 난 뉴욕에서 왔는데, 여기는 참신함이 부족해. 새로움이 필요하지.”그가 뉴욕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워홀은 더욱더 그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그 당시 뉴욕은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동경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뉴욕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고: 워홀은 볼머가 내민 패션 잡지 《보그》와 《하퍼스바자》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해 여름 내내 워홀은 《보그》와 《하퍼스바자》, 그리고 유럽의 패션 잡지들을 훑어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보고 고민하다보면 밤을 꼬박 새기도 했지만, 그는 흥분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2장. 예술가들이 모이는 뉴욕으로 가다



훗날 대가가 된 필립 펄스타인과 함께 뉴욕으로

마음은 벌써 뉴욕에 가 있어: 1949년에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예술학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에 대한 동경과 그곳에서 미술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열정을 아는 펄스타인이 워홀에게 뉴욕으로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각각 200달러씩 들고 피츠버그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에 도착한 두 사람은 뉴욕의 남동쪽에 있는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에 작업실을 얻어 함께 지냈다. 이곳은 뉴욕 문학과 음악의 원천이었고, 그 후 1980년대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 벽이나 다양한 화면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처럼 긁는 그림)의 발상지가 된 곳이었다.



멋진 가게들이 있는 5번가, 광고업의 중심이자 상업예술이 꽃피고 있는 매디슨 애비뉴, 고급 아파트 지역인 파크 애비뉴 등은 그의 꿈과 욕망을 자극했다. 뉴욕은 그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욕망들을 하나하나 펼쳐보고 이룰 수 있는 꿈의 도시였다.



일자리를 찾아서: 하루는 패션 잡지인 《글래머》를 발행하는 잡지사를 찾아 갔다. 그곳의 아트 디렉터였던 티나 프레더릭은 워홀의 포트폴리오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굉장하군요. 전율이 느껴져요.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드로잉은 상업적인 이미지예요. 특히 우리 잡지에 필요한 것은 구두 드로잉뿐이에요.”그녀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워홀은 밤새도록 구두 드로잉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날, 50장의 구두 드로잉을 종이봉투에 담아 들고 다시 프레더릭을 찾아갔다. 그녀는 워홀의 열정과 재능에 탄복했다. “놀랍군요! 하룻밤 만에 이렇게 많은 드로잉을 그려내다니…. 게다가 대부분 괜찮은 것들이군요. 좋아요. 우리 잡지사에서 프리랜서(자유계약에 의해 일하는 사람)로 일해봐요.”프레더릭에게 드로잉 실력을 인정받은 워홀은 《글래머》의 삽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작업은 <성공은 뉴욕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에세이에 들어갈 삽화였다. 그런데 그 에세이의 제목이 신기하게도 워홀의 성공을 예견한 듯 했고, 그래서인지 삽화를 그리면서 그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대중문화의 수도 뉴욕

예술가의 심장이 뛰는 곳: 뉴욕이 문화· 예술의 도시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이곳에 유럽의 예술적 대가들이 많이 이주해왔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급속히 세력을 키운 사회주의 정부가 이념이 맞지 않는 예술가들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수많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예술) 예술가들은 자기 나라에서 마음껏 예술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좀 더 활동하기 편한 미국으로 와서 그들의 예술적 열정을 꽃피웠다. 이들은 주로 뉴욕에서 정착해서 활동했는데, 그들 중 막스 에른스트, 마르셀 뒤샹,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등이 미국의 모던 아트(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한편으론 유럽의 예술가들이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 당시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같은 젊은 화가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거론되었으며, 뉴욕 스쿨 1세들의 추상표현주의는 자랑스러운 미국의 모던 아트로서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이러한 현상은 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뉴욕에 와서 활동하고 싶어지는 이유가 되었고, 워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혼의 발전소 그리니치빌리지: 뉴욕의 여러 지역들 중에서 예술가들이 모여 생활하면서 문화 반란의 중심이 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그리니치빌리지이다. 이곳에는 카페와 찻집, 화랑, 극장, 서점 등이 줄지어 서있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좋아해 하나둘씩 모여 살기 시작했다. 전위예술가, 화가, 작가,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동성연애자, 자유연애자 등 기성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어울리며 한데 뭉친 것이다.



1961년은 뉴욕에서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룬 해였다. 짐 다인이 마사 잭슨 화랑에서 아상블라주(Assemblage, 폐품이나 일용품을 비롯해 여러 물체를 한데 모아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기법 및 작품) 작품을 전시했고, 톰 웨슬먼의 <그레이트 아메리칸 누드>가 타나제 화랑에 전시되었다. 또 클래스 올덴버그는 자신의 작업실에 아주 크게 만든 생활소품들을 전시했으며,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장면을 이용한 작품을 전시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을 의미하는 용어가 ‘팝’으로, ‘팝’은 터진다는 의미 외에 ‘인기 있다’는 뜻도 있다.



상업예술가로 성공하다

첫 번째 상업미술 전시회: 1952년 여름이었다. 소설책을 읽던 워홀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작가에게 반했어. 이 작가를 위해 내가 그림을 그려야겠어.”워홀이 읽은 소설은 트루먼 커포티가 쓴 《다른 목소리, 다른 방들》이었다. 워홀은 소설뿐만 아니라 소설책 표지에 실린 커포티의 사진을 보고 반했고, 그를 위한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했다. 워홀은 드디어 1952년 6월 16일부터 7월 3일까지 뉴욕의 휴고 화랑에서 <앤디 워홀: 트루먼 커포티의 글에 기반을 둔 열다섯 개의 드로잉>전을 개최했다. 그의 첫 번째 전시회였다.



3장.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벽을 허물다



농담 같은 그림

상업미술의 성공을 과감히 접다: 1960년 초에 워홀은 확고한 결심을 했다. 상업적 드로잉을 그만두고 순수미술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렇게 꾸준히 순수미술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던 시기에 워홀에게 힘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에밀드 안토니오였다. 워홀은 안토니오를 ‘디’라는 애칭으로만 불렀다. 워홀은 디를 믿고 존경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미술을 향한 자신의 행보에 대해 디가 충고하거나 조언해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 디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고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어느 날 디가 워홀을 방문했다. 워홀은 디에게 막 완성한 두 점의 그림을 가져와 디가 잘 볼 수 있도록 벽에 기대어놓았다. 그림을 보여줄 때 워홀은 디가 입을 열 때까지 절대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봐, 앤디! 이 그림은 개똥같아. 여러 요소들이 한데 섞여 있어서 보잘것없어. 저건 괜찮은 것 같은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같고 우리 자신 같기도 하고, 아름답고 적나라해 보여. 그러니 이건 갖다 버리고, 저건 출품하도록 해.” 디가 칭찬한 흑백의 코카콜라 병 그림은 나중에 팝아트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그림이 되었다.



‘코카콜라 병’을 선택한 예술철학: 순수미술을 하겠다고 결심한 워홀이 코카콜라 병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그의 특별한 예술철학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코카콜라 병을 예술의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선을 허물고 싶었다. 또한 특정 계층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예술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화가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거야

내가 미치려면 무조건 새로워야 해: 워홀이 순수미술 작업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미학적 측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특히 자신의 그림이 다른 사람의 그림과 비슷한 것을 싫어했다. 그가 화랑들을 자주 방문해 최근의 그림들을 살펴본 이유는, 단지 인맥을 쌓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화랑에 전시된 그림들 중에 자신이 그리고 있거나 구상하고 있는 그림과 비슷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그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신선한 충격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였다.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하다

무엇이든 남이 안 하는 기법을 원해: ‘워홀’하면 떠오르는 것이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스타들의 그림과 수프 통조림 그림, 코카콜라 병 그림 등이다. 이러한 그림들은 모두 실크스크린이라는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워홀이 순수미술에 사용한 제작기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마치 워홀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지는 실크스크린 기법이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처음 작업을 한 것은 1962년이었다. 실크스크린 기법은 손으로 그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워홀이 추상표현주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한 결정적 수단이 되었다. 실크스크린으로 작업을 하면 기계적인 정확함과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워홀이 생각해낸 새로운 작품 세계였다.



예술적 성과를 한 단계 높인 재난 시리즈

이번에도 남과 다른 발상을: 1962년 6월 4일, 워홀은 헨리 겔달러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 앞에는 신문이 펼쳐져 있었는데, 비행기 추락 사고로 129명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사고를 작품으로 다루면 어떨까? 우리 주변에서 항상 일어나는 재난들, 작품 소재로 쓸 만하지 않아?”워홀은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작품 소재에 대한 아이디어를 묻기도 하고, 그들이 제안한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그려왔다. 그 후 탄생한 작품이 <129명 사망>이며, 이 작품을 시작으로 워홀의 재난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재난은 현대인의 일상에 숨어 있는 거야 <129명 사망>으로 시작된 재난 시리즈는 <시각적 차사고>, <오렌지색 5명의 죽음>, <붉은빛의 인종 폭동>, <라벤더빛 재난(전기의자)>, <13명의 지명 수배자> 등으로 이어지고, 1965년의 <원자폭탄>까지 이어진다. 워홀은 <원자폭탄>에서 인류의 자멸을 경고했다. 이러한 재난 시리즈는 그의 작품에 더욱더 선명한 예술적 가치를 부여했다.



4장. 예술사에 기록될 팝아트의 선두가 되다



팝아트란 무엇인가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의 경계선을 허물다: ‘팝아트’라는 말은 1958년에 영국의 평론가 로렌스 앨로웨이Lawrence Alloway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원래는 미국의 대중매체가 주도하는 대중문화, 특히 할리우드 영화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앨로웨이는 공상과학 소설이 그랬듯이 팝아트도 예술영화나 순수문학, 엘리트 문화의 산물처럼 진지하게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와 차이가 생기면서, 상업문화에 등장한 물건과 이미지 또는 그 사용법이나 의미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해당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그린 그림과 조각만 의미하게 되었다.



팝아트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앤디 워홀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일치하는 것이 있다. ‘비딩턴Bidding.com’이라는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팝아트에 대한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 팝아트는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이미저리Imagery와 기술들을 활용했던 20세기 예술운동이다.1950년대 후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고,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전성기이다. 팝아트는 형상을 주로 하는 이미저리와 캠벨 수프 캔, 4단 만화, 광고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늘 보는 대상들을 재생한다. 이 운동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이라고 구분을 짓던 경계선을 허물었다. -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