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놀이
권정생 지음 | 산하
학교놀이
권정생 지음
산하 / 2010년 03월 / 77쪽 / 9,000원
산버들나무 밑 가재 형제장맛비가 쏟아질 동안 가재 형제는 구멍 속에 꼼짝없고 갇혀 있었습니다. 일곱 밤을 자고 나자 비는 질금질금 뿌리더니, 여드레째에 깨끗이 개었습니다. "언니야, 이젠 비가 그쳤으니 집 밖으로 나가도 될까?" "아냐, 아직도 한 밤 더 자야 해. 흙탕물이 콸콸 소리 내면 흘러가는데, 나갔다가 함께 떠내려가면 어쩔 테니?" "배가 고픈걸." "어느만치?" "배때기하고 등때기하고 통일하려고 한다."
물소리가 잠잠해지고 흙탕물이 깨끗이 가라앉았습니다. 가재 형제는 구멍 속에서 나왔습니다. 얼마 전에 하얗게 꽃을 피웠던 찔레 덩굴엔 푸른 열매가 째금 째금 열렸습니다. "아아, 맛있다!" 동생 가재는 자꾸자꾸 먹었습니다. 배가 둥둥 불렀습니다.
찔레 덩굴이 우거진 그늘 아래서 가재 형제는 돌틈바구니에 꼭 끼어 앉아 놀았습니다. 무종달이 한쌍이 물 위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언니 가재가 홀린 듯이 날아가는 무종달이를 쳐다보는 것을 동생 가재가 얼핏 보았습니다. 동생 가재가 잠깐 있다가 말했습니다. "언니도 이제 장가가야지?" 언니 가재는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 아래 미루나무 밑 바윗돌 밑에 이쁜 색싯감이 있다더라. 언니도 알지?" "알아. …하지만 내가 가 버리면 너 혼자 괜찮겠니?" "괜찮아. 조금은 외로울지 몰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건데, 뭐." 언니 가재는 말없이 동생 가재를 보듬어 안았습니다.
다섯 밤 자고 나서 언니 가재는 미루나무가 있는 바윗돌 밑 이쁜 아가씨 가재한테 장가를 갔습니다. 꼭 쥐었던 손을 놓고 떠나갈 때, 언니 가재 눈에 눈물이 그윽히 맺혀 있었습니다. 동생 가재는 큰구멍집 할머니 가재가 모퉁이 돌무더기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언니가 가 버려 안됐구나." "언니가 더 많이 울었어요." 동생 가재는 힘없이 말했습니다. "헤어질 땐 다 그렇지. 하지만 금방 잊어버리게 마련이야. 하느님이 잊어버리도록 해 주시니까." "하느님도 알아요? 언니 장가간 거." "그럼, 알잖고." "어떻게 알아요?" "하느님은 무엇이나 다 보고 듣고 헤아리고 계시거든." "밤중까지도 보고 계셔요?" "그럼, 절대 안 주무시니까."
그날 밤, 동생 가재는 어제까지 언니 가재와 함께 자던 구멍방에 혼자 누웠지만 잠이 쉬 들지 않았습니다. 언니 가재와 함께 있을 땐 비좁아서 불편했는데, 혼자 누우니 너무도 자리가 많이 남았습니다. 동생 가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하면서 잠을 자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문득 낮에 큰구멍집 할머니 가재가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은 밤에도 안 주무신댔지.' 동생 가재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동생 가재는 물속에서 캄캄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하느니임!" 하고 불렀습니다. "……."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하느님!" "……." 역시 대답이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까지 안 오셨어요?" "……." "왜 대답이 없으셔요?" "……." "대답하기 싫더래도 들어주셔요." "……." 대답이 없는데도 동생 가재는 자꾸자꾸 말했습니다. 하느님네 언니도 장가갔나요?" "……." "엄마하고 아부지 돌아가셨구요?" "……." 하느님도 이담에 튼튼해지면 장가가셔요?" "……." "하느님은 밤중에 혼자 있어도 무섭잖으셔요?" "……." "대답 않으셔요?" "……." "자꾸 가만 계시면 내가 울 거예요." "……."
동생 가재는 그만 콧등이 시큰시큰거렸습니다. 하느님은 그래도 아무런 대답이 없고, 대신 바람이 물결을 쓸고 갔습니다. "하느님, 무섭다아!" 동생 가재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가재는 자꾸 울었습니다. 울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눈을 떠 보니 곁에 큰구멍집 할머니 가재가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가재가 동생 가재의 볼을 가만히 만져 봅니다. "왜 이렇게 밖에 쓰러져 있니?" 동생 가재는 어젯밤 일이 생각났습니다. 왠지 무서워집니다.
"할머니." "응?" "어젯밤, 하느님 불러도 대답도 않으셨어요." 동생 가재는 너무도 하느님이 야속했습니다. "무섭더냐?" "하느님하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무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해서요. 그런데 하느님은 귀를 꼭 막아 놓고 내 말 안 들었어요. 하느님은 늑대보다도 나빠요." "아니다. 하느님은 어젯밤 틀림없이 네가 부르는 소리 듣고 계셨어." "아니에요. 듣지 않았어요. 딴 데 한눈팔고 계셨어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네가 겁쟁이가 되지 말고 용감한 애가 되라고 대답하고 싶어도 가만히 계셨어. 하느님은 간신히 참고 계셨을 거야." "……." "그러시면서 속으로만 '쪼꼬만 가재야, 참고 살아라. 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애가 되어라.' 하시면서 빌었을 거야."
"정말로 하느님이 대답해 줬지만 네가 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아주 조용조용 이야기하시는 분이거든." 동생 가재는 혼자서 산버들 그늘 아래로 기어가면서 생각했습니다. '난 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애가 될 테다. 하느님은 소곤소곤 나한테 얘기해 주신다.'
학교놀이 울타리 이쪽에 엄마 닭이 없는 7마리 병아리가 있습니다. 라면 상자에 담겨 어디론지 모르게 실려 다니다가, 이곳 장에까지 왔습니다. 거기서 50마리도 넘는 형제들이 뿔뿔이 헤어져서 팔려 갔습니다. 그중 7마리가 슬레이트로 지붕을 인 이 집으로 온 것입니다. 학교놀이를 하고 있는, 엄마가 있는 옆집 아기 병아리들을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왠지 쓸쓸한 생각이 듭니다. "참 재밌겠다." "재들은 엄마가 있는데, 우린 왜 없지?"
병아리들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 버립니다. 옆집 아기 병아리들이 한없이 부러워집니다. '우린 왜 엄마가 없을까?' '우리도 엄마하고 학교놀이 하고 싶다.'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7마리 병아리들은 어느새 잠이 꼬박꼬박 들어 버렸습니다. 병아리들은 꼭같이 꿈을 꿨습니다.
하얀 구름 너머 하늘나라였습니다. 거기 엄마 닭을 찾아간 것입니다. 엄마는 아기 병아리들을 보더니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습니다. "그래, 옆집 아기 병아리들이 부럽다는 거지?" "그래요, 엄마. 우리도 학교놀이 하고 싶어요." 엄마 닭은 곰곰 무엇인가 생각에 잠깁니다. 엄마가 없어도 씩씩하게 잘 자라는 아이들로 만들어야 됩니다. 한참 만에 엄마 닭은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담 너희들 가운데 누군가 하나가 내 대신 이 자리에 남아라. 그러면 내가 따라갈 테니." "우리 중에서요!" "그래, 누구든지 좋으니, 하나만 여기 남아 있어." "……." 병아리들은 말없이 서로 얼굴을 쳐다봅니다.
"왜들 대답이 없냐? 동생들을 위해 맏아이가 남지 않겠니?" 맏형 병아리는 잠깐 놀라는 듯했지만, 선뜻 대답을 했습니다. "좋아요. 제가 남겠습니다." "언니, 안돼요!" "그럼 제일 막내가 남아 있겠니?" "안 돼요, 엄마. 막내도 언니도 모두 안 돼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병아리들은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습니다.
꿈을 깨었습니다. "나 꿈꿨어. 엄마 꿈 말야." "저런, 나도 방금 엄마를 꿈에서 봤어." 병아리들은 모두들 꼭같이 꿈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엄마보다 형제들을 더 사랑한다는 거지?" "그게 아냐. 엄만 어쩔 수 없이 우리 곁에 안 계시니까, 우리끼리 한데 뭉쳐 사이좋게 살라는 거야." "맞았어, 바로 그거야." 7마리 병아리들은 옆집 아기 병아리들을 보았습니다. 쓸쓸했지만, 아까처럼 못 견딜 만치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우린 죽은 엄마보다, 살아 있는 형제가 더 소중하다!' 꼭 같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조금 뒤, 7마리 병아리들은 울타리 안에서 저희들끼리 학교놀이를 시작했습니다. "엄마 대신 큰언니가 선생님이 되면 문제없어." "그래그래!" 언니 병아리가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갓! 용용용……." "하낫, 둘, 셋, 넷……."
학교놀이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언니 병아리 선생님은 더 씩씩하고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학교놀이는 날마다 날마다 했습니다. 병아리들은 점점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울타리는 많은 풀이 우거져 벌레들이 많았습니다. 자벌레도 기어가고, 여치도 살았습니다. 호박잎에는 청개구리도 파란색으로 변장을 하고 앉아서 놀았습니다. 모두들 뜨거운 여름 볕을 싫다 않고 자라고만 있었습니다. 쬐그만 꼬마 벌레들까지, 참으로 신기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각자가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놀이는 아무도 모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선생님도 되고 학생도 되면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병아리들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꼬꼬댁 꼬꼬!" 무섭다고 달아나면서, 친구들에게 목청껏 소리쳐 알리는 신호입니다. "꼬로로로 꼬오오!" 이건 소리개나 매가 날아가면 숨으라는 신호입니다.
울타리 안과 밖, 그리고 하늘엔 언제나 무서운 적이 있습니다. "한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어느 날, 언니 병아리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동생들이 따라 말했습니다. " 한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우리는 힘을 모아 적을 막고 무찌르자!" "우리는 힘을 모아 적을 막고 무찌르자!" 또 다른 것도 배웠습니다. "약한 자는 돕자!" "약한 자는 돕자!"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자!"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자!"
언니 병아리는 마지막 한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서로서로 사랑하자!" "서로서로 사랑하자!" 동생 병아리들이 소리 맞춰 읽었습니다. 참 좋은 것을 배우고, 가르쳤다는 생각을 꼭같이 했습니다. 그건 먼 곳에 계시는 엄마가 가르쳐 준 것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