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소나무
권정생 지음 | 산하
아기 소나무
권정생 지음
산하 / 2010년 03월 / 81쪽 / 9,000원
하느님의 눈물돌이 토끼는 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돌이 토끼는 산토끼인 셈이죠. 어느 날, 돌이 토끼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칡넝쿨이랑 과남풀이랑 뜯어 먹으면 맛있지만 참말 마음이 아프구나. 뜯어 먹히는 건 모두 없어지고 마니까.' 돌이 토끼는 중얼거리면서 산등성이로 뛰어갔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난 먹어야 사는걸. 이렇게 배고 고픈걸.' 돌이 토끼는 발걸음을 멈추고 둘레를 살펴보았습니다.
아기 소나무 곁에 풀무꽃풀이 이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돌이 토끼는 풀무꽃풀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풀무꽃풀아, 널 먹어도 되니?" 풀무꽃풀이 깜짝 놀라 쳐다봤습니다. "……." "널 먹어도 되는가 물어봤어. 어떡하겠니?" 풀무꽃풀은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갑자기 그렇게 물으면 넌 뭐라고 대답하겠니?" 바들바들 떨면서 풀무꽃풀이 되물었습니다. "……." 이번에는 돌이 토끼가 말문이 막혔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대답을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니?" "정말이구나. 내가 잘못했어. 풀무꽃풀아, 나도 그냥 먹어 버리려니까 안되어서 물어본 거야." "차라리 먹으려면 묻지 말고 그냥 먹어." 풀무꽃풀이 꼿꼿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먹힌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 모두가 운명이고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돌이 토끼는 말없이 돌아섰습니다.
깡충깡충 뛰어서 풀밭 사이로 갔습니다. 댕댕이덩굴이 얽혀 있었습니다. '댕댕이도 먹을까 물으면 역시 무서워할 거야.' 돌이 토끼는 갈매 덩굴 잎사귀 곁에 가서도 망설이다가 돌아섰습니다. 바디취 나물도 못 먹었습니다. 고수대 나물도, 수리취 나물도 못 먹었습니다.
해님이 서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해님 아저씨, 어떡해요? 나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왜 아무것도 못 먹었니?" 해님이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습니다. 돌이 토끼는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얘기를 죄다 들려주었습니다. "정말 넌 착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먹지 않으면 죽을 텐데 어쩌지." 해님이 걱정스레 말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어요. 괴롭지만 않다면 죽어도 좋아요." 돌이 토끼는 기어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말았습니다. 해님도 덩달아 울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서산 너머로 넘어갔습니다.
돌이 토끼는 자꾸자꾸 울다가 잠시 눈을 떠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수많은 별빛이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돌이 토끼는 말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은 무얼 먹고 사셔요?" 어두운 하늘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습니다. "보리수나무 이슬하고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 조금 마시고 살지." "어머나! 그럼 하느님, 저도 하느님처럼 보리수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 주셔요." "그래, 그렇게 해 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요?" "그래,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이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사람들은 기를 써 가면서 남을 해치고 있구나." 돌이 토끼 얼굴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하느님이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아기 소나무오늘은 팔월 한가위, 1년 중 가장 커다란 달님이기 때문에 희고 둥근 달님의 얼굴이 온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었습니다. "달님 아줌마! 달님 아줌마!" 산등성이 외딴 봉우리에서 작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엉, 누구니?" 달님은 소리 나는 쪽으로 눈과 귀를 한꺼번에 돌렸습니다.
"저예요. 여깄잖아요!" 달님이 자세히 내려다보니, 조그만 소리로 부른 건 아기 소나무였습니다. "오오, 너였구나! 그래, 나를 왜 불렀니?" "저, 말예요." "으응." "지난 여름, 억수같이 퍼붓던 물 누가 쉬한 거예요?" "……." "아줌마가 눈 거예요? 아니면 해님 아저씨가 눈 거예요?"
달님은 금방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아기 소나무야, 그건 쉬한 게 아니다." "에그 거짓말. 아줌마 얼굴이 빨개진 걸 보니 달님이 쉬했군요. 그렇죠?" "아니야, 그건 오줌이 아니고 '비'라고 하는 거야. 온 세상의 나무들이 잘 자라라고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거야." "그럼, 그때 시커먼 포장은 왜 잔뜩 가려 놓았어요? 누가 볼까 봐 궁뎅이 감추느라 그랬죠?" "포장이 아니고, 그게 바로 '구름'이라는 물통이야. 여름엔 날씨가 덥고 농사철이기 때문에 물이 굉장히 많아야 되거든. 시원하고 달짝한 비를 너도 실컷 마시고 컸잖니?"
달님이 차근차근 들려주었습니다. 아기 소나무는 약간 알아들은 듯했습니다. "참말 그랬어요. 시원하고 달짝한 걸 보니 쉬는 아닌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아니다." 아기 소나무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자꾸 따지고 들면 버릇이 없을 테니까요.
"아기 소나무야, 너는 이담에 키가 어느만큼 크고 싶니?" 달님이 물었습니다. "달님한테까지 내 손이 닿도록 크고 싶어요." "어머나! 그만치 커서 무얼 하려고 그러니?" "언젠가 바람이 내게 가르쳐 줬어요. 저어기 산골짜기랑, 시냇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슬픈 사람들이래요. 아들들은 군인으로 뽑혀 가고, 딸들은 도시의 공장으로 돈벌이 가고……" "쯧쯧, 안됐구나. 정말……."
"그래서 할머니랑 할아버지들은 달님만 쳐다보고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초가 삼간 집 짓고 살고 싶어라' 한 대요." "정말 그렇겠구나." "그러니까 내가 하늘만큼 키가 자라서 튼튼해지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를 베어다가 초가집 짓고 사시라고요." 아기 소나무는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쥐면서 정성껏 말했습니다.
달님은 갑자기 목이 메려고 해서 억지로 참았습니다. "아기 소나무야, 고맙다." "달님 아주머니도 저 아래 산 밑, 한국의 할아버지랑 할머니들이 불쌍하셔요?" "그래, 할아버지 할머니들뿐만도 아니지. 군인으로 간 아들들도, 공장으로 간 딸들도, 한국에 살고 있는 모두가 불쌍하지."
"그럼 내 키가 얼른얼른 자라게 도와주셔요." "도와주고말고지. 하느님도 네가 제일 착하다고 하실 거야." "아니에요. 제일로 착한 건 싫어요. 보통으로 착하면 되어요." "그래그래, 아기 소나무야." 달님은 한 번 더 목이 메려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두꺼비 좁다란 오솔길로 두꺼비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맨드라미처럼 생긴 볏이 붉은 해처럼 고운 수탉 한 마리가 두꺼비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두껍아, 너 혼자서 참 외롭겠구나. 내가 친구가 되어 줄게. 두둘두둘 네 징그러운 몸뚱이를 보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을 거야. 게다가 네 발로 엉기적엉기적 걸어가는 모습은 바보같이 보이거든. 커다란 입가 툭 불거진 눈망울은 꼭 괴물처럼 생겼으니, 아무도 널 좋아할 사람은 없는 게 마땅해. 난 이렇게 멋지게 잘생겼다고 모두들 칭찬을 한단다. 그래서 다투어 친구가 되려 하지만, 그건 도리어 귀찮은 일이야. 친구란 마음이 맞아야 된다는 걸 난 알고 있거든." 수탉은 친절하게 두꺼비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꺼비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었습니다. "고맙다, 수탉아."
둘은 시냇물이 흐르는 둑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수탉은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보리알, 과자 부스러기, 죽은 메뚜기의 시체, 여러 가지 벌레들이랑, 길바닥엔 먹을 것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주워 먹느라 수탉은 숫제 아래만 내려다보고 걸었습니다. 반대로 두꺼비는 그 큰 눈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한나절을 함께 걸었어도 둘은 얘기 한마디 나눌 수 없었습니다. 두꺼비가 잠깐 멈춰 서더니 수탉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처럼 잘생긴 친구와 걷는 것은 좋지만, 줄곧 땅만 내려다보고 먹을 것만 찾는 너하고는 아무래도 사랑하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먹을 것이란 세끼 필요한 양식만 있으면 그만이야." 그러고 나서 두꺼비는 주저하지 않고 혼자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수탉은 멍청해진 채 그 자리에 서서, 두꺼비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소낙비무시무시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휘익, 바람이 붑니다. "에그 에그, 무섭다." "이젠 이젠 다 죽는다." 오랜 가뭄으로 타 죽어 가던 시냇가 풀들이 잔뜩 울상이 되었습니다. 도꼬마리 아기는 곁에 있는 명아주 아기를 꼭 껴안았습니다. 후드득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잇따라 폭포수 같은 비가 촬촬 쏟아졌습니다.
"살려 주셔요!" "살려주셔요!" 도꼬마리도 명아주풀도 눈을 꼭 감았습니다. 꾸루루루 꽝! 꽝! 꾸루루루 꽝! 꽝! 빗소리, 천둥 치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게다가 해님마저 없는 캄캄한 세상입니다. 정말 세상이 송두리째 없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잠깐이었습니다. 도꼬마리 아기와 명아주 아기가 정신을 차렸을 땐, 파라안 서쪽 하늘에 해님이 벙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잘 참았어." "우린 꼭 죽는 줄만 알았어요." 아기 풀들은 그새 화안해진 들판을 둘러보았습니다. 시원한 비를 맞고 파래진 노과 밭, 시냇물엔 졸졸졸 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동쪽 하늘에 보이는 예쁜 무지개. "하느님이 주시는 건 모두 좋은 것뿐이다!" 모두 달콤한 이슬을 맛나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