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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쏙 들어오는 세계사

라인하르트 바르트 지음 | 산하
라인하르트 바르트 지음

산하 / 2009년 12월 / 256쪽 / 10,000원

선사 시대




최초의 인류는 언제 어디서 나타났을까? : 1924년에 아프리카 동남부 지방에서 최초의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인류학자들은 이 최초의 인류에게 '남방의 원숭이'라는 뜻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신체 구조는 오늘날의 인간과 비슷했지만 생김새는 유인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300만 년에서 400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직립 보행을 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시작하여 인류는 계속 진화했고, 약 20만 년 전에 오늘날의 인류와 같은 종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났다. 인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아프리카에서부터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간 것으로 추정되며, 마침내 기원전 1만 년 전후에는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에 인간이 살게 되었다.



고대



대규모 문명은 어디에서 처음으로 생겨났을까? :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에 위치한 커다란 강들의 주변 지역은 인간이 생활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었는데, 이들 지역에서 인류의 4대 문명이 탄생했다. 가장 오래된 문명의 발상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주변의 지역으로 주로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으로 필요한 것보다 많은 식량을 생산했다. 또 그들은 귀한 물을 논밭에 일정하게 공급하기 위해 둑, 수로, 수문을 설치했는데, 이런 일을 혼자서는 할 수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생활했다. 그리고 공동생활을 하다 보니 통치자, 관료, 경찰과 군대를 갖춘 국가들이 생겨났고, 이들 국가에서는 세금도 거두었다. 작은 촌락들은 마을과 도시로 발전했고, 그 도시들이 발굴되어 오늘날까지 유적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피라미드는 왜 만든 것일까? : 이집트인들은 왕을 '큰 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파라오라고 불렀다.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를 믿었기 때문에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는데, 파라오가 죽으면 시체가 썩지 않게 미라로 만들어 영원히 보존하려 했다. 제3왕조(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파라오의 계보에 따라 모두 31왕조로 나뉜다)의 통치자였던 조세르는 피라미드를 세운 첫 번째 왕이었다. 피라미드는 거대한 무덤으로, 미라뿐만 아니라 저승에서 사용할 부장품들도 함께 묻었다. 또한 피라미드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힘과 권위를 보여 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가장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기원 전 2570~2460년경)의 쿠푸 왕을 위해 기자에 건설한 것으로, 높이가 146미터나 된다. 이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10만 명이나 되는 일꾼들이 동원되어 10여 년에 걸쳐 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어떻게 건국되었을까? : 기원전 1200년경에 북쪽의 라틴인들이 이탈리아 중부 지방으로 내려와서 오늘날의 로마 근처에서 살다가 기원전 8세기에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히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여러 면에서 앞서 있었다. 특히 그들의 정치 제도는 나중에 로마 고유의 정치 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면 원로원, 민회, 공무원 선출 제도와 관료제 따위가 그것이다. 기원전 600년경에 테베레 강가의 라틴인 부족들이 동맹을 맺으면서 로마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로마는 바다로 연결되는 강을 끼고 있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기원전 510~509년경에 로마는 에트루리아계의 왕을 추방하고 공화정(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하는 대표들이 정치를 하는 체제) 정부를 세웠다.

기독교인들은 왜 로마에서 박해를 받았을까?

로마의 종교는 대부분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거기에다 동방에서 들어온 다양한 제의들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기원후 1세기에 급진적이면서도 새로운 기독교라는 종교가 나타났다. 기독교는 지역을 관할하는 성직자로 주교를 두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 주교들의 권위가 점점 커지게 되었고, 기원후 4세기부터 로마의 주교에게 교황이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로마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될 무렵 기독교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국가의 주된 정책인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질수록 기독교는 더욱 강해졌고, 4세기 초에는 로마 시민의 5분의 1 정도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결국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밀라노 칙령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중세



바이킹은 무서운 해적이었을까? : 게르만족의 일파인 노르만족을 중세에는 바이킹이라 불렀다. 바이킹의 고향은 오늘날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였다. 이곳은 날씨가 춥고, 땅이 메마른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찍부터 바다로 눈을 돌렸고, 조선술과 항해술을 발전시켰다. 바이킹은 대서양의 거센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배를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하여 마침내 배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높게 치솟고, 돛을 조작하기 쉬운 가볍고 날렵한 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이 배로 먼 바다뿐만 아니라 얕은 강도 자유자재로 돌아다녔다. 9세기부터 인구의 증가로 토지가 부족해진 바이킹들이 유럽 전역을 침범하기 시작했고, 거의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바이킹족을 약탈을 일삼은 해적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오해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바이킹은 평화로운 교역을 했으며, 식민지에서 농사와 목축업에도 종사했다. 아무튼 천연자원과 생필품이 모자랐던 바이킹에게 활기찬 해상무역은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교 세력과 벌인 종교전쟁이었으나, 종교 문제만이 전쟁의 원인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인은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무척 강했는데, 터키의 이슬람교도들이 성도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기독교도들을 박해한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십자군을 파병하자고 호소했다.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지원했고,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200여 년 동안 여덟 차례나 원정을 감행했고, 원정 때마다 잔인한 살육과 약탈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머나먼 동방에서 기나긴 전쟁을 치르면서 기독교도들은 점점 힘을 잃었다. 결국 원정은 실패했고 서유럽에서는 로마 교황권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은 서유럽에서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서유럽은 동양 문명을 만나면서 문화적으로 풍성해지는 계기를 맞기도 했다.

칭기즈 칸은 어떻게 몽골을 통일했을까? : 몽골인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생활하던 유목민족이었는데, 칭기즈 칸은 1188년부터 여러 몽골 씨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여, 1206년에 몽골 전체의 맹주가 됨으로써 세계 정복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에 옮길 발판을 마련했다. 그 후 국가 체제와 군대 조직을 정비한 칭기즈 칸은 대원정을 시작하여 중국 금나라의 수도인 베이징과 북페르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단숨에 정복했다. 한편 그가 사망할 무렵에 몽골 제국의 영토는 중국에서 러시아 남부에까지 이르렀고,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중국에 원나라를 세우면서 몽골 제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 되었다. 몽골인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병사들이 목축과 수렵 생활로 단련되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기 때문이다.

근대



르네상스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일찍부터 경제 성장을 이루었는데, 경제 성장으로 도시에 시민계급이 형성되었고, 자치권을 가진 많은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다. 새로 등장한 시민계급은 정치적ㆍ경제적 변화에 어울리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신과 내세 중심의 중세 기독교 문화를 벗어나서 인간과 현실 중심의 문화를 세우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모범으로 삼은 것이 고대 그리스ㆍ로마 문화였고, 그것을 다시 살리려는 문화 운동을 르네상스라고 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은 16세기에 전성기에 도달했고, 특히 미술 분야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성과를 낳았다. 르네상스는 16세기 이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의 국가로 퍼져 나갔다는데, 인쇄술의 발명은 르네상스의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르네상스의 정신은 자연과학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인들의 신대륙 발견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 중세인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나 15세기에 이르러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이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배를 타고 먼 곳까지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신항로 개척은 자원 확보를 위해 시작되었으나, 그 밖에도 기독교 전파와 새로운 시장 개척 등의 목적이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세 척의 범선을 타고 스페인의 팔로스 항구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항해한 지 3개월 만에 한 섬에 도착했고, 그 섬이 인도라고 생각한 콜럼버스는 그곳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발견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였다. 그 뒤 콜럼버스의 뒤를 이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의 중부와 남부를 정복하고, 최초의 식민지들을 건설하여 식민지에서 들어온 풍부한 물자로 빠르게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나 식민지가 된 국가들은 극심한 착취와 빈곤에 시달려야만 했다.



계몽주의 운동은 왜 일어났을까? : 17~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계몽주의 운동이 벌어졌다. 합리적 사고를 통해 인간 생활을 진보시키려 한 이 운동으로 유럽은 종교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계몽주의 운동을 주도한 것은 시민 계층이었는데, 시민들은 정신적 자유, 기존 질서 비판, 종교적 관용, 인본주의적 교육 등을 추구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철학, 문학, 교육, 역사, 자연과학, 심지어는 종교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계몽주의 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는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영국의 베이컨이 있고, 주권재민론을 펼친 영국의 존 로크와 삼권분립을 주장한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는 서구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루소가 주장한 사회계약론 사상은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 분야에서도 계몽주의는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가운데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최대한으로 보장하자는 사상인 자유방임주의를 등장하게 했다.



19세기



산업혁명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 산업혁명이 인류에게 행복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산업혁명 시대에 공장에는 안전 대책이 전혀 없었고, 노동 시간이 법으로 규정되지 않아서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또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급격히 이동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급격한 도시화는 빈민가, 범죄, 전염병, 상ㆍ하수도 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들을 야기했다. 이러한 때에 독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고통 받는 노동자 계층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섰는데, 두 사람은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지금까지의 사회 질서를 무력으로 전복시켜야 자신들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들을 물리쳐야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받아 조직적인 노동 운동이 벌어졌고,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미국은 어떻게 영토를 넓혔을까? : 1976년에 독립을 선언할 당시 미국은 북아메리카 동부 지역의 13개 주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국은 1783년 파리조약에서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고, 1803년에 1500만 달러라는 헐값으로 프랑스가 통치하던 루이지애나를 구입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서부 정복'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목표는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생활 터전을 찾는 것이었다. 한편 백인들은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1880년경부터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메마른 땅에 이른바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머지 인디언들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하여 미국 서부는 미국의 경제적 발전의 토대가 되었지만, 그러한 과정에는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엄청난 탄압과 학살이 있었다.



20세기와 현대



유대인 대학살은 왜 일어났을까? : 고대부터 18세기까지 유대인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주로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이들에 대한 박해와 학살이 있었는데, 민족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면서 19세기 유럽에서 인종과 민족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반유대주의가 확산되었다. 참고로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면서 절정에 이른 반유대주의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는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동유럽을 정복한 독일군은 본격적으로 유대인 대학살, 이른바 홀로코스트(넓게는 인간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좁게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되는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무도한 범죄로 기록되고 있다.

유럽 통합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얻은 유럽 국가들은 유럽의 통합을 꿈꾸기 시작했고, 경제 분야부터 통합이 시작되었다. 1950년,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전쟁 물자의 핵심 자원인 석탄과 철강 등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하자고 주장하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자국의 경제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이 참가하여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그 뒤 1957년 이들 6개 회원국이 새로이 창설한 유럽경제공동체(EEC)는 1970~1980년대에 활동 범위를 점점 넓혀서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을 포함하게 되었고, 그 후 1992년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들은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하나의 유럽'을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인 조약을 체결했고 이로써 유럽연합(EU)이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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