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영웅이 필요해
이어령 지음 | 푸른숲
나만의 영웅이 필요해
이어령 지음
푸른숲 / 2009년 10월 / 184쪽 / 9,800원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품자 - 때로는 너그럽게 때로는 날카롭게황희 정승은 조선 시대에 가장 오랫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과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야. 황희 정승이 그렇게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학문이 깊고 나랏일을 잘 해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덕이 높았기 때문이야. 황희 정승은 누구의 실수나 잘못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지. 그래서 모두들 황희 정승을 믿고 따랐단다.
어느 날 황희 정승 집에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대감, 큰일 났습니다. 삼각산이 무너졌습니다!" 하고 말했단다. 그러자 황희 정승은 "아, 삼각산이 뾰족해서 위태위태하더니 드디어 무너졌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어. 잠시 뒤, 다른 사람이 급히 뛰어오더니 "제가 확인해 보니 삼각산은 그대로 서 있습니다"라고 말했지. 그러자 황희 정승은 "응, 그러면 그렇지. 산이 무너질 리가 있나" 하는 거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은 어이가 없었어. "아니, 대감. 아까는 삼각산이 뾰족해서 무너지게 생겼더라고 하고, 이제는 무너질 리가 없다고 하니, 대감의 뜻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은 그 사람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래, 자네 말도 맞네" 하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니? 황희 정승이 꼭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그래, 이처럼 덕이 있는 사람은 때로 줏대 없는 바보처럼 보이기도 해. 왜 황희 정승이 세 사람 모두에게"그래, 자네 말이 맞네" 하고 대답했겠니? 첫 번째 사람은 어쩌면 삼각산 어느 봉우리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걸 보았을 거야. 물론 두 번째 사람은 그 반대편에서 삼각산을 보았을 테고, 그러니 두 사람 다 맞는 말이면서, 두 사람 다 틀린 말일 수도 있는 거지. 황희 정승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같은 일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쓸데없는 싸움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세 사람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던 거지. 하지만 늘 그렇지 않아. 넉넉한 덕을 지닌 황희 정승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당당하게 맞서 싸웠단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에는 여진족이 자주 침범해서 골치였는데, 김종서 장군이 나서서 여진족을 물리치고 국경선을 확정했단다. 김종서 장군은 그 공로로 병조 판서가 되었는데,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김종서 장군은 한껏 거드름을 피웠어. 그러던 어느 날, 황희 정승과 여러 대신들이 회의하는 자리에 김종서 장군이 들어와서는 삐딱하게 앉아 거들먹거렸지. 그걸 본 대신들은 속으로 못마땅했지만 위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바로 그때였어. 황희 정승이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단다. "여봐라! 병조 판서께서 앉으신 의자 다리 한쪽이 짧은가 보구나. 어서 의자 다리를 고쳐 드려라!"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김종서 장군을 바로 앞에 두고 이처럼 서슬 퍼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제야 김종서 장군은 자세를 바로잡고 용서를 빌었단다. 그 뒤로 김종서 장군은 잘못을 뉘우치고 황희 정승에게만큼은 예의를 지켰다고 해.
늘 너그럽고 인자하던 황희 정승이 왜 김종서 장군에게는 화를 냈을까? 황희 정승은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려면 덕과 관용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김종서 장군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다고 다른 대신들을 얕잡아 보았고, 남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았거든. 그러면 덕과 관용이 사라지는 거지. 이처럼 황희 정승은 한없이 넓고 부드러운 마음을 지녔지만, 덕을 어지럽히는 경우를 보면 불같이 들고 일어났단다. 그야말로 덕의 참뜻을 몸으로 보여 준 인물이었어.
불꽃같은 열정으로 한길을 가다 - 깊고 그윽한 울림, 영혼을 담은 소리
너 혹시 바이올린 소리 들어 봤니? 가녀리면서도 힘차고, 잔잔하면서도 격정적인 바이올린 소리는 듣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주지. 바이올린이 이렇게 깊고 그윽한 음색을 지니게 된 건 매혹적인 소리를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친 바이올린 악기공들이 있었기 때문이야.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도 그중 한 사람이지. 스트라디바리는 1644년쯤에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태어났어. 크레모나는 예로부터 악기를 만드는 지역으로 유명했고, 그중에서도 아마티 가문은 바이올린을 잘 만들기로 이름 높았어. 스트라디바리는 어린 나이에 어렵사리 아마티 가문이 운영하는 악기 만드는 공방에 들어갈 수 있었단다.
스승인 니콜라 아마티는 제자를 깐깐하게 가르치기로 소문이 자자했어. 스트라디바리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호랑이 같은 스승도 칭찬할 정도였지. 1665년에는 드디어 스승의 허락을 받고 독립해서 바이올린을 만들게 되었단다. 하지만 스승 아마티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지.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바이올린은 아마티 바이올린과 견주어 모양과 소리가 전혀 다르지 않았어. 그러니 똑같은 바이올린이면 이름 없는 젊은이가 만든 것보다 아마티가 만든 걸 선택할 수밖에. 그렇게 다시 15년쯤 지난 뒤, 스트라디바리는 크레모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어.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스트라디바리는 자기만의 독특한 바이올린을 만드는 실험에 들어갔단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은 정말 힘들어. 우선 악기에 쓰일 나무를 고르는 일만 해도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야. 나무를 골랐으면 몸체와 부품을 만들 차례야. 사실 바이올린 소리를 결정하는 건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어. 몸체의 크기와 넓이, 줄의 높이 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차이 나는 거지. 좀 더 깊고 그윽한 울림을 주는 소리를 내 보고 싶었던 스트라디바리는 다시 처음부터 바이올린 음색을 실험해 갔단다. 몸체의 두께, 줄의 높이, 부품 모양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모든 부분을 새로이 다듬었지. 그렇게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렀지.
1700년 무렵, 스트라디바리도 어느새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있었어. 평생 바이올린을 만드느라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파이고,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눈은 침침했어. 드디어 스트라디바리는 새로운 바이올린에 눈뜨게 되었어. 이전 바이올린과는 다른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만들게 된 거야. 그런데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이 곧바로 사람들을 사로잡지는 못했어. 사람들 대부분이 여느 바이올린과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고 느꼈을 뿐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거든.
그 뒤 스트라디바리는 1737년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단다. 평생 동안 그저 악기만 만들다 간, 볼품없는 한 악기공의 죽음이었어.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이 하나둘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찾기 시작한 거야. 한 연주자가 같은 음악을 연주해도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 소리는 훨씬 깊은 울림을 주었거든. 그렇게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매력적인 소리를 냈고, 그에 따라 점점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어. 그리고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수억 원을 주고도 사지 못할 만큼 명품으로 인정받는단다.
오늘날 첨단 기술로 만든 바이올린도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의 소리를 따라잡지 못한단다.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음색의 비밀을 다 밝혀내지 못했다는 뜻이지. 나는 그 비밀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거기에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장인의 혼이 서려 있으니까 말이야.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아. 자기 길에서 온 영혼을 불태우는 그런 삶 말이야. 그렇다고 지레 겁먹고 흔들릴 필요는 없어. 그저 스스로 행복하고 만족하면 돼. 언젠가 네가 힘겹게 만들어 놓은 그 길에서 세상 모두를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돈의 노예가 되느냐, 주인이 되느냐 - 나눔의 행복을 일깨운 CEO훌륭한 민족 기업가 유일한을 알고 있니?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어. 당시 우리나라는 힘센 나라들에 둘러싸여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어. 유일한의 아버지는 그럴 때일수록 우리나라가 문을 활짝 열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유일한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단다. 유일한이 미국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동안 바다 건너 우리나라는 사정이 더욱 나빠졌어. 일본은 러시아,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우리나라에서 주인 행세를 했단다. 나라 안팎에서는 일본에 반대하는 운동이 끊이지 않았지. 유일한의 아버지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쳤어. 멀리 미국으로 건너갔던 사람들도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단다.
어엿한 젊은이가 된 유일한은 늘 조국의 운명을 걱정했단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 주권을 앗아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에 살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본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나갔지. 그러면서도 유일한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이름 높은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어. 그리고 온갖 궂은일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학교 공부를 따라가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어. 오롯이 자기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유일한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기 회사에 취직했어.
그 뒤 1922년 유일한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회사를 차렸어. 유일한이 처음 시작한 사업은 숙주나물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파는 거였어. 미국인은 숙주나물을 먹지도 않는데 웬 숙주나물 통조림 사업이냐고? 당시 미국에는 중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이 많이 건너와 살고 있었단다. 동양인들은 숙주나물을 좋아하지만 미국에서는 그걸 구할 방법이 없었어. 그걸 알고 있었던 유일한은 '숙주나물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팔면 사람들이 틀림없이 사 먹을 거야' 하고 생각했던 거야. 유일한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덕분에 사업은 날로 커 갔어.
성공한 사업가 유일한은 1925년에 숙주나물을 기르는 데 쓸 녹두를 구하러 우리나라를 방문했는데, 20년 만에 다시 찾은 조국의 현실은 너무나 비참했단다. 백성들은 끔찍하게 가난했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는 죄다 사라져 가고 있었지. 조국의 현실이 이렇듯 어려운데 바다 건너 미국에서 혼자 배불리 잘살 궁리만 했다는 생각에 유일한은 그길로 미국으로 건너가 회사를 정리했어. 사람들은 모두 유일한을 염려하며 말렸지. 하지만 유일한은 1926년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단다.
귀국한 유일한은 대학교수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거절했어. 민족과 백성을 일으켜 세우려면 좀 더 적극적이고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유일한은 고민 끝에 의약품 회사 '유한양행'을 차렸어. 유한양행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맞은 의약품을 개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고, 의약품을 가난한 사람들도 살 수 있게 싼값에 팔았어. 그러자 유한양행에서 내놓은 약품이 싸고 좋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어. 유한양행이 튼튼한 기업으로 자리 잡은 건 두말할 나위 없지.
한편 유일한은 너무하다 싶을 만큼 검소하게 생활했어. 하지만 가난한 학생들과 학자들에게는 아낌없이 베풀었어. 물론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갖은 노력을 기울였단다. 해방이 된 뒤에도 유한양행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기업으로 성장했어.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자 주식회사로 모습을 바꾸고 주식 일부를 직원들에게 나눠 주었지. 그리고 유한양행은 1954년부터 교육을 일으키는 일을 지원했어. 고려공과기술학원, 한국직업학원, 유한공업고등학교 등을 세워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지. 또 뜻 깊은 일을 하는 여러 사회단체를 지원하면서 사회의 그늘진 곳에 따뜻한 온정을 베풀었단다.
또 1969년에 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때는 자식들이 아니라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지. 이런 유일한의 모습은 당시 우리 기업 문화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어. 그리고 1971년 유일한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과 함께. 요즘처럼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세상에서 유일한이 보여 준 고귀한 정신은 더욱 빛나는 것 같아. 그는 세상 누구보다 많은 돈을 모았지만,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반대로 돈을 지배한 사람이야.
갇힌 몸, 열린 생각 - 휠체어를 타고 우주를 날다우리 주변에는 몸이 아주 불편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단다. 그들은 몸을 마음껏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세상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지. 그런데 말이야.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과학자가 된 사람이 있단다. 바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야. 1942년 영국에서 태어난 스티븐 호킹은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어. 가까스로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파티와 동아리 모임에 푹 빠져 지냈지. 다행히 그의 뛰어난 창의성을 아낀 교수의 도움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어. 대학원에 들어간 스티븐 호킹은 비로소 천문학에 흥미를 느끼고 제대로 공부해 보기로 마음먹었단다.
하지만 스티븐 호킹은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진단을 받았단다.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고 굳어지다가 결국 이삼 년 안에 죽게 되는, 아주 희귀한 불치병이었어. 스티븐 호킹은 한동안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인 채 하루하루를 보냈지. 그러다가 제인 와일드라는 여성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했어. 스티븐 호킹의 마음에는 다시 삶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단다. 스티븐 호킹은 다시 몸을 추슬러 세상 밖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어.
그 후 스티븐 호킹은 아내와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를 이어 갔지. 시간이 갈수록 스티븐 호킹의 몸 상태는 더욱 나빠졌어. 얼마 지나지 않아 휠체어를 타야 했고, 급기야는 펜조차 쥘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지. 44세에는 폐결핵까지 겹쳐 성대를 잘라 내야 했어. 이제 말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거야. 하지만 스티븐 호킹은 더욱 생각의 날개를 펼쳤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물리학과 우주 과학에 큰 공헌을 했어. 스티븐 호킹은 1974년에 '영국왕립학회'의 최연소 회원이 되었고, 또 1980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가장 훌륭한 과학자에게 주는 석좌 교수 자리에 올랐어.
무엇이 스티븐 호킹을 세계 최고의 과학자로 만들었을까? 나는 '자유로운 생각'이라고 생각해. 스티븐 호킹은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할 때에만 장애인이지. 마음의 장애인이야말로 진짜 장애인이다"라고 말했어. 또 스티븐 호킹을 가까이에서 도왔던 한 수학자는 "신체장애가 호킹 박사의 자유로운 생각 날개를 펼치게 해서 남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게 했고, 그 덕분에 우주의 신비를 푸는 '빅뱅 이론'을 완성하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단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장애인인 사람이 참 많은 것 같아. 자기 스스로 어떤 한계를 정해 놓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말이야. 너도 가끔 도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지 않니? 그럴 때면 스티븐 호킹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꼭 한번 떠올려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