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방정환
고정욱 지음 | 산하
고정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방정환
고정욱 지음
산하 / 2009년 7월 / 112쪽 / 9,000원
검은 마차 / 개구쟁이 방 도령 / 학교에 가다1899년 11월 9일, 방정환은 서울의 한복판인 야주개(지금의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정환네는 중인 집안이었습니다. 중인이란 양반과 평민의 중간에 있는 신분이었는데, 장사나 치료, 통역 같은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야주개는 그런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였습니다. 정환네 점포는 야주개 시장 거리에서 제법 큰 편이었고, 곡식과 해산물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부잣집이었습니다. 정환은 시장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먹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아무거나 손에 쥐고 왔습니다. 나중에 가게 주인들이 장부를 들고 점포로 찾아가면, 손자를 무척 귀여워하는 정환의 할아버지가 흔쾌히 값을 치러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를 소학교라고 불렀는데, 정환보다 두 살 위인 삼촌이 소학교에 다니게 되자 어느 날 정환이 아무도 모르게 삼촌을 따라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일곱 살 밖에 안 된 정환이 며칠 전부터 삼촌을 따라 학교에 가겠다며 떼를 썼는데, 할아버지가 아직 어려서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환은 꼭 학교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삼촌을 따라 도착한 학교는 '보성소학교'였습니다. 정환이 교실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학생들은 올망졸망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선생님은 맨 앞에 서서 무언가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는데, 정환에겐 그 모습이 신기해 보였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운동장에서 혼자 놀고 있는 정환을 본 교장 선생님이 학교를 다니고 싶으면 다음 날부터 학교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정환이 그토록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결국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정환은 학교생활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천도교를 만나다그러나 정환의 행복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몇 년 뒤 집안 어른들이 벌인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빚에 몰리면서 점포가 문을 닫게 되었고, 정환네는 이웃 마을인 사직골의 허름한 초가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인쇄소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거기서 받는 돈으로 온 식구가 먹고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환은 가난할수록 마음이 굳세고 정신이 꼿꼿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친한 친구들과의 토론 모임이었습니다. 토론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한 친구의 집에 모여, 궤짝에 먹칠을 해서 만든 칠판을 걸어 놓고 '바다가 좋으냐, 산이 좋으냐?'와 같은 아이들다운 주제에 대해 토론을 벌였습니다. 아이들은 이 모임의 이름을 '소년들이 뜻을 세우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소년입지회'로 지었고, 이렇게 모인 아이들은 자유롭게 생각을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스스로를 가다듬었습니다.
한편 정환은 미동보통학교(소학교가 보통학교로 바뀌었음)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정환은 얼른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정환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집안 살림을 일으키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환은 상업학교에서 배우는 숫자 공부가 따분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정환은 졸업을 1년 남기고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정환은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이 조선 땅을 샅샅이 조사해서 빼앗는 작업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는 일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을 하고 받는 돈도 너무 적었습니다. 그 시절, 정환은 책 읽기에 빠져들었고, 최남선이 펴낸 잡지《청춘》을 즐겨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간 천도교 교당에서 정환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교당에는 많은 청년들이 나와 있었는데, 그들은 자유롭게 토론을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정환은 이곳에서 천도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천도교는 1860년 최제우가 세운 민족 종교인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동학은 빠르게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1894년에는 동학교도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일어섰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 세력을 물리치고, 정말로 백성을 위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뜻을 모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패배로 끝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만 심해졌습니다. 동학의 3대 교주였던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새롭게 발전시켰습니다. 정환의 생각과 행동은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어지는 민족정신에서 커다란 영항을 받게 되었고, 정환은 날마다 교당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온 백성의 외침, 조선 독립 만세! / 10년 뒤를 생각하자!1917년, 방정환은 열아홉의 나이로 결혼을 했습니다. 신부는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였고, 정환은 장인의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손병희의 사위가 되자, 끼니 걱정에서 벗어나면서 깡말랐던 얼굴에 조금씩 살이 올랐고,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공부를 하게 된 정환은 유광렬을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경성 청년구락부'로 정했는데,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토론하고 실천하려는 비밀 모임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1910년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도교를 비롯하여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의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힘을 합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바로 3ㆍ1운동입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썼고, 민족 대표 33인이 뜻을 함께한다는 서명을 했으며,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아무도 모르게 독립선언서를 인쇄했습니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 모인 민족 대표들은 한용운의 힘찬 연설을 듣고 나서,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본 경찰들이 태화관을 에워싸고 있었고, 민족 대표들은 그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한편, 탑골공원에는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있었는데, 민족 대표들이 모두 체포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만세를 부르고 평화적으로 행진을 하면, 머지않아 독립이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총칼을 앞세워 무기도 가지지 않은 조선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기 시작했고,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평화적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은 한번 불길이 당겨지자 전국 방방곡곡으로 뜨겁게 퍼져 나갔습니다.
방정환도 일본 경찰에 잡혀 갔습니다. 집에서 몰래《조선독립신문》을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정환의 집에 모여 3ㆍ1운동을 알리는 신문을 만들고, 새벽마다 조심스럽게 여기저기에 뿌렸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집을 에워쌌습니다. 경찰들은 집 안을 온통 뒤지며 신문을 어디다 감췄냐고 다그쳤고, 정환을 잡아다 때리고 고문했지만 정환은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며 비밀을 지켰습니다. 정환의 한결같은 태도에 일본 경찰도 더는 어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문을 만들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기 바로 전에 정환은 등사기며 신문 뭉치를 모두 우물에 처넣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일본 경찰은 그 뒤로도 정환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간섭하고 감시했습니다.
정환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아, 우리나라의 현실이 너무 어둡구나.' 그러다 눈을 번쩍 떴습니다. '맞아. 일본을 이기려면, 장차 우리나라를 이끌게 될 우리 아이들을 잘 길러야 한다.' 정환은 이런 생각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는데, 마침 천도교에는 정환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정환은 열심히 말했습니다. "어린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면 반드시 머지않아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십 년 뒤의 조선을 생각하며 어린이들을 길러야 합니다." 정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가슴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움트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선의 어린이들, 사랑의 선물을 받다 / 어린이날이 만들어지다1920년 9월 즈음에 방정환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천도교에서 펴내는 잡지《개벽》의 특파원이자, 도쿄의 천도교 청년회 담당자로 간 것입니다. 이듬해에는 도오요 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도 계속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환은 학교 수업이 없는 날이면 많은 시간을 서점에서 보냈는데, 동화책과 어린이 잡지가 무척 많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정환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조선의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위해 해준 게 너무 없구나. 그래!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읽을거리, 놀 거리, 즐길 거리를 만들어 주자!' 정환은 틈이 날 때마다 어린이 잡지와 동화책을 사 가지고 하숙집으로 돌아와서는 방에 틀어박혀 한 권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환의 가슴에는 어느덧 새로운 계획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1922년 7월, 마침내 뜻 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환이 우리말로 옮기고 엮은 세계 명작 동화집『사랑의 선물』이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사랑의 선물』에는 열 편의 외국 동화들이 실렸는데, 『난파선』, 『왕자와 제비』, 『신데렐라』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정성스레 우리말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 동화집을 읽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눈물을 글썽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어린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사랑의 선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정환은 이제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를 서둘렀습니다. 추운 겨울날, 정환은 원고 부탁을 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 와 있는 작가들을 찾아다녔고, 정환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인 작가들이 원고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원고는 정환의 차지였습니다. 한편으로 정환은 어린이 운동을 함께할 동지들도 모았습니다. 뜻이 맞는 일본 유학생들을 모아 '색동회'라는 모임을 만든 것입니다. 동화 작가 마해송, 동요 작곡가 윤극영 등이 색동회 회원이었습니다. 정환은 이제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1923년 3월 20일, 드디어 어린이를 위한 잡지인《어린이》가 나왔습니다. 《어린이》에는 어린이들이 읽고 싶어 하는 동화나 동요, 아동극 같은 작품들, 새로운 소식이나 새로운 놀이와 운동을 소개하는 글 그리고 학교에서는 알려 주지 않는 조선의 지리와 역사, 위인 이야기들을 실었습니다. 그야말로 어린이들에게 유익하면서도 재미있는 잡지였습니다.
마침내 1923년 5월 1일,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해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방정환이 이끄는 색동회가 어린이날을 선포한 것입니다. 어린이날은 장차 우리나라의 주인이 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 만든 기념일이었습니다. 1924년,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온 방정환은 기쁜 마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1924년 5월 1일, 두 번째로 맞는 어린이날이 되었습니다. 손에 손을 잡은 어린이들이 천도교 교당의 앞마당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드디어 식이 시작되어, 무대에 올라온 방정환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오늘 이 행사는 어린이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치다꺼리나 하며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이제부터는 어린이들을 어른과 같은 사람으로 존중해 주십시오. 어린이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구경하던 어른들도 한마디씩 거들었습니다. "듣고 보니 방 선생 말이 옳아." 기념식이 끝나자, 어린이들은 음악대를 앞세우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습니다. 마치 어린이들이 세상의 주인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어린이날 행사는 서울뿐 아니라 평양, 광주, 마산 등에서도 치러졌고, 정환의 노력 덕분에 잡지 《어린이》도 시간이 지날수록 독자들에게 더욱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동화 선생 방정환 / 영원한 어린이들의 벗방정환은 동화구연도 잘해서 어린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정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슬프기도, 재미나기도, 무섭기도 했는데, 마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 같았습니다. 정환이 이렇게 동화 구연을 열심히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무리 열심히 잡지를 만들어도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방정환은 색동회 회원의 도움으로, 세계 여러 나라 어린이들의 그림을 모아 천도교 기념관에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었습니다. 볼거리가 요즘처럼 흔치 않던 시절이라, 다른 나라 어린이들의 그림은 대단한 구경거리였고,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전람회를 보러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고깝게 보는 눈초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의 경찰들이었습니다. 정환이 벌이는 일이라면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겁이 났던 겁니다. 경찰은 결국 정환이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에 나서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정환은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을 느끼며 억울해 했고, 주위 사람들도 안타까워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잡지를 더 잘 만들면 됩니다. 《어린이》를 읽고 자란 청소년들이 읽을 잡지로 《학생》도 만들 계획입니다."
방정환은 어린이들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글을 쓰고 원고를 다듬는 일뿐 아니라, 잡지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많은 돈을 장만하는 것도 방정환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고, 몸이 아파도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일하던 방정환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한번 터진 코피는 도무지 멈추질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방정환을 억지로 차에 태워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정환을 진찰한 의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고혈압에다 신장까지 나빠져서 오줌독이 퍼져 온몸이 붓고, 호흡도 힘든 상태입니다. 좀 일찍 오셨어야 했는데……." 가족들과 동료들 모두 충격이 컸습니다. 방정환은 곧 정신을 잃었고, 며칠 후 잠깐 정신을 차린 정환이 부인의 손을 잡고는 말했습니다. "부인, 내 호가 작은 물결이라는 뜻의 소파잖소? 나는 지금껏 어린이들 가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하지만 이 물결은 언젠가는 큰 물결이 되어 우리 겨레의 앞날을 이끌 것이오. 부인은 부디 오래오래 살아 그 물결을 꼭 지켜봐 주시오."
1931년 7월 23일, 우리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소파 방정환은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방정환의 장례식은 천도교 교당 앞마당에서 치러졌습니다. 한여름의 더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슬픔 속에 모였고, 방정환을 존경하며 따르던 어린이들도 수백 명이나 참석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방정환은 서울 홍제동의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고, 남은 뼈는 납골당으로 옮겨졌습니다. 당장에는 산소를 마련할 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5년이 지난 뒤에, 뜻있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 망우리에 조그만 산소를 만들고 묘비도 세웠습니다.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습니다. '어린이의 마음은 천사와 같다'라는 뜻으로, 어린이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하늘처럼 여기며, 평생을 어린이들을 위해 살았던 소파 방정환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