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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대통령, 노무현 할아버지의 삶과 꿈

이채윤 지음 | 스코프
바보 대통령, 노무현 할아버지의 삶과 꿈

이채윤 지음

스코프 / 2009년 7월 / 200쪽 / 10,000원



첫 번째 이야기 -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돌 콩


1946년 9월 1일, 노무현은 경남 김해군(현재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작은 마을인 봉하마을에서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무현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천자문과 붓글씨 솜씨가 뛰어나 동네 어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콩만 한 녀석이 어떻게 이런 글씨를 쓸 수가 있지? 우리 동네에 신동이 태어났어!" 이렇게 해서 언제부턴가 무현이의 별명은 '돌 콩'이 되었습니다. 봉하마을은 아주 가난한 마을이었는데, 작은 과수원을 하는 무현의 집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난하지만 무현은 공부 잘하고 장난도 잘 치는 학생이었습니다.

학창시절 무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셨던 신종생 선생님입니다. 그 선생님은 젊음의 패기와 열의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엉뚱하고 당돌하지만 당당하고 공부도 잘하는 무현이를 무척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한번은 선생님이 무현에게 전교 회장 선거에 나서길 권했는데, 무현이 용기가 나지 않아 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답답하다는 듯 외쳤습니다. "바보 같은 놈, 그런 용기도 없어? 실망스럽구나." 무현이는 자신을 그토록 믿고 신경 써 주시는 선생님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결국 선거에 나서게 되었는데, 연설을 썩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결국 무현은 압도적인 표로 당선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답니다.

무현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소신을 굽히지 않는 당당한 성격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3ㆍ15 부정선거가 있던 해, 2월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3월 26일에 있을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는데, 알고 보면 3ㆍ15 대통령 선거를 앞둔 선거 운동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 무현이는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쓰지 말자며 '백지 동맹'을 선동했고, 결국 교무실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반성문을 쓰라는 지도부 선생님의 꾸중에도 무현이는 끝까지 잘못한 것이 없다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학교 내에서 말썽꾼으로 통하던 무현이는 2학년 때 아주 어려운 시험인 '부일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시골 학교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 무현은 장학생으로 부산 상업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삼해공업'이라는 어망회사에 잠시 취직을 했으나, 곧 아주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고향에 내려가 고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 저, 고시에 합격했어요! / 세 번째 이야기 - 인권 변호사 노무현입니다무현이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부모님은 무척 실망하셨습니다. "법대를 나온 네 큰형도 포기한 사법고시를 치겠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두 형님들도 직업이 없이 집에 있던 때라 막내아들마저 실업자가 되어 돌아와 엉뚱한 소리를 하자 어머니는 질색을 하며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던 무현이를 믿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무현은 큰형이 보던 빛바랜 법서를 꺼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기 시작하고 보니 고시 공부에 필요한 책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려운 형편에 마음대로 책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현은 돈을 벌기 위해 친구와 함께 울산으로 가서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는데, 작업 중 사고로 이가 3개나 부러지고 턱이 찢어지는 부상만 입고, 돈도 벌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마침 징집영장이 나왔고, 무현은 바로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무현이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큰형님과 작은형님이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집안 사정은 아주 좋아져 있었습니다.

무현은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때 무현에게 뜻하지 않은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양숙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무현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가끔 그녀와 마주치면 마음이 설레곤 했는데, 그녀를 다시 본 순간부터 사랑을 느끼고는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 갈수록 무현은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었어요. 고시 공부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자니 공부에 지장이 생겼던 것입니다. 고민 끝에 무현은 차라리 결혼을 해서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양숙 어머니의 눈에는 직장도 없이 고시공부만 하고 있는 무현이 사윗감으로 못마땅했고, 무현의 집은 무현의 집대로 양숙의 집안이 사돈으로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현은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숙을 만났고, 망설이던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데도 성공하여 1973년 1월,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곧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무현에게 뜻밖에 커다란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무현의 정신적 지주였던 큰형님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무현은 어릴 때부터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큰 형님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던지라, 슬픔을 가눌 길 없었지만 형님의 꿈이기도 했던 고시에 반드시 합격하겠다고 더욱 독하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후로 무현은 다섯 번의 도전 끝에 드디어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2년 동안의 사법 연수원 교육이 끝나고 무현은 대전지방법원에 판사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무현은 수동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판사들의 체질에 회의를 느끼고, 결국 판사 생활을 시작한 지 8개월도 안 되어서 사표를 제출하고 평소의 꿈이던 변호사 개업을 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습니다. 무현의 변호사 사무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크게 번창했습니다. 노 변호사는 상업 고등학교 출신답게 회계에 밝아서 승률 높은 조세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잘나가는 변호사 노무현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1981년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였습니다. 1979년에 일어난 부림 사건이란 이흥록 변호사가 만든 '좋은 책 읽기 모임'의 회원들 대부분이 경찰에 잡혀간 사건을 말합니다. 그 모임에서 읽은 책은 나쁜 사상을 다룬 것들이 아닌 평범한 책들이었지요. 그런데 회원의 돌잔치에 모인 몇몇 사람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 대수롭지 않은 말이 정권을 뒤엎으려는 행위로 둔갑했고, 찻집에서 나눈 사적인 이야기까지 모두 불법 집회와 계엄 포고령 위반의 죄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노 변호사는 자신이 시국에 대해 최소한의 인식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이 사건이 조작된 사건임을 밝히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재판에서는 결국 지고 말았지만 '부림 사건'은 노 변호사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노 변호사는 차츰 민주 투사로 변신해 갔고, 주로 산업재해와 관련한 소송을 많이 맡았습니다. 소송 의뢰인 중에는 주로 작업 중 기계에 손을 잘린 노동자가 많았는데, 노 변호사는 스스로가 그들에 대한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고민 속에서 자신의 삶이 죄스럽고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그는 민주 투사로서의 명성을 쌓아 갔고, 1987년 2월엔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를 주도하다 경찰서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이 6ㆍ10항쟁으로 이어지면서 노무현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졌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 - 똥고집 정치인 노무현 / 다섯 번째 이야기 - 바보 노무현과 노사모

1988년은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때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 씨가 평소 돈키호테 같은 노 변호사의 용기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그를 불렀습니다. 김 총재는 노 변호사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무척 존경하는 정치인이었는데, 그런 김 총재가 부르니 노 변호사는 무척 영광스러웠습니다. 김 총재는 노 변호사에게 곧 있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로 나서라면서 부산 지역 공천을 제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노 변호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 국회의원이 되어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짓눌리고 이용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해 보자' 하는 소박한 생각으로 공천을 받아들였습니다. 1988년 4월, 그는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습니다. 상대 후보는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에서 실세 중의 실세로 손꼽히는 허삼수 씨였는데, 그를 보기 좋게 쓰러뜨리고 변호사 노무현이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해 11월, 국회에서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제5공화국 비리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는데, 청문회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어 전국으로 방송되었습니다.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정계와 재계를 아우르는 거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였던 정주영 씨에게 '회장님', '증인님'이라고 부르며 오히려 대접을 했고, 장세동은 아무 죄도 지은 것이 없다는 듯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고 권력을 휘두른 자들과 그 권력에 빌붙어서 돈을 번 못된 자들이 혼쭐나는 장면을 구경하며 한풀이를 하고 싶었는데, 그런 장면을 보자 실망만 커졌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제 막 국회의원 배지를 단 햇병아리 노 의원이 논리 정연하고 핵심을 찌르는 질문으로 증인들을 몰아세워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던 국민들은 속이 시원하다며 탄성을 터뜨렸고, 그는 텔레비전이 만든 스타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 세 사람은 어이없는 일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 그리고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이렇게 세 사람이 '3당 합당' 선언을 하고 민주자유당이라는 정당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뭐야? 민주의 제단에 피를 뿌리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어떻게 민주 투사와 광주 시민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잡아 가둔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노 의원은 김영삼 총재를 비난했고, 당장 통일민주당을 떠났습니다. 소신을 굽히지 않고 김영삼 씨의 손을 뿌리친 후, 정치인 노무현은 번번이 선거에서 패배했으며 한순간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지역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경상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출신의 정치인인 김대중 씨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 후 그는 부산에서 출마한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와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전라도 출신인 김대중 씨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지요.

비록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당에서는 그를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뽑아 주었습니다. 그 후 1997년 12월 18일, 당의 총재인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노무현은 난생처음 집권 여당의 일원이 되었지요. 그리고 1999년 7월, 정치인 노무현은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 다시 종로가 아닌 부산에 출마했고, 또 다시 패배했습니다. 그가 지역주의라는 벽을 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정치인 노무현에게는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이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뻔히 떨어질 줄 알면서도 지역주의를 깨 버리기 위해 거듭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그의 순수함을 사랑한 사람들이 붙여 준 '애칭'입니다. 한편 '바보 노무현'이란 말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특별히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중에서도 열성적인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그것입니다. 노사모 회원들은 그가 내건 '지역주의 타파'와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이란 구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노사모는 대중이 정치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서 만든 세계 최초의 온라인 팬클럽이 되었고, 훗날 돈, 조직, 계보도 없는 '3무 정치인' 노무현을 21세기 첫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 - 대통령은 우리 친구 / 일곱 번째 이야기 - 봉하마을 지킴이, 노무현

노무현은 드디어 여당의 대통령 후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 후보가 몸담고 있던 새천년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국민이 뽑는 국민 경선제를 우리나라 최초로 채택했습니다.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퍼센트)들과 국민(50퍼센트)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경선에는 노 후보를 포함한 7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승부를 겨뤘습니다. 2002년 3월, 경선은 제주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노 후보는 그 지역에서 3위, 두 번째 지역인 울산에서는 1위, 그리고 세 번째 경선지인 광주에서 경상도 출신인 노 후보가 당당히 1위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2002년 4월 26일, 마지막 경선지인 서울에서 노 후보는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임이 공식화되었습니다. 여당 당원들은 그가 원칙대로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절대로 반칙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노무현 후보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여론조사에서는 야당의 강력한 후보인 이회창 씨에게 한참이나 밀리고 있었고, 월드컵 바람을 타고 정몽준 후보도 거센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자 노 후보의 든든한 지원군인 노사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노사모 회원들이 노란 풍선, 노란 목도리를 앞세우고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벌인 '희망 돼지 저금통' 운동에는 60억 원 이상의 국민 성금이 모였습니다. 그것은 우직스런 원칙 정치를 펼쳐 나간 '바보 노무현'의 승리였습니다. 이미 그는 원칙과 도덕성의 정치인, 정치를 바꿀 정치인으로 국민들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최후의 승자가 됐습니다.

드디어 신념과 소신의 정치인 노무현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를 하던 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세력을 얻는 나쁜 제도는 반드시 없어져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원칙을 바로 세워 신뢰가 뿌리내리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그 후 대통령은 새로운 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정부의 이름을 '참여 정부(전 국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이 열려진 정부)'로 정했고,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와 국민과 함께하는 서민 대통령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경제 운용을 할 때에도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부양책을 쓰지 않고 고집스럽게 원칙을 지켰으며, 그 결과 우리 경제의 체질이 튼튼해지고 투명성이 높아졌습니다. 또 노 대통령은 남북 관계도 잘 이끌었는데, 2007년 10월 4일,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했고, 남북 교류를 양적으로 크게 확대시켰습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전에 종종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했고, 임기가 끝난 후에 고향인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돌아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약속대로 2008년 2월 25일,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봉하마을로 돌아갔고, 수많은 고향 사람들에게 뜨거운 환영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생태 농촌 만들기'와 '시민 민주주의 발전'이란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그가 숲 가꾸기와 오리농법, 화포천 정비사업 등을 시작하자 마을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봉하마을이 친환경 농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각지에서 많은 농민들이 봉하마을로 친환경 농업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고 있습니다. 한편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뿐 아니라, 토론 사이트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국민들과 활발히 소통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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