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한시
선현경 지음 | 휴머니스트
처음 만나는 한시
선현경 지음
휴머니스트 / 2009년 3월 / 144쪽 / 10,000원
왕 할머니의 마법 주문나는 할머니가 아주 많아요. 친할머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 그리고 고모할머니들, 작은할머니들, 이모할머니들까지. 10명도 넘죠. 그런데 제일 재미있고 웃긴 할머니는 왕 할머니예요. 왕 할머니는 증조할머닌데 할머니들의 엄마고, 우리 엄마의 할머니죠. 난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는 대신 왕 할머니라고 불러요. 진짜 왕 같거든요. 다른 할머니들이 왕 할머니가 너무 무섭다고 모두 다 쩔쩔매요. 처음엔 나도 무서웠어요. 게다가 왕 할머니께서는 이상한 말도 중얼거리세요. 그러니까 이런 식이에요.
영 춘(詠春) - 김부식
류색사사록(柳色絲絲錄) 도화점점홍(桃花點點紅)
웃지도 않고 그렇게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시면 가까이 가기가 겁이 나죠. 하지만 어쩐지 '사사록', '점점홍'의 그 음이 예쁘게 느껴졌어요. 무슨 마법사의 주문 같기도 하구요. 그래서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까 그제야 미소를 지으시며, 시래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하니 한자로 쓰였기 때문이라네요. 할머니께선 바로 그 알 수 없는 한자 시를 다음과 같이 한글 시로 바꿔 주셨죠.
봄날
버들빛은 실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다.
봄이 오니까 버드나무의 가지들이 저마다 파랗게 되고, 복사꽃들은 송이마다 붉다는 말이래요. 정말 멋지네요. 왕 할머니가 얼마나 재미있고 멋진 할머니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죠. 그래서 요번 방학 때는 왕 할머니한테 한시를 배우기로 했어요. 우리 집에서 왕 할머니 집은 정말 가깝거든요.
시 속의 보물찾기 오늘은 아침부터 한시가 생각났어요. 그래서 빨리 아침을 먹고 준비를 했죠. 난 바로 왕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어요. 도착하니 할머니께서 웃으시며 이 시를 들려 주셨죠.
제목 미상 - 노연양
음안일개자(吟安一箇字) 연단기경자(撚斷幾莖 )
이 시는 제목이 알려지지 않았대요. 하지만 할머니가 자주 중얼거리시던 걸 기억해요. 끝이 '개자', '경자'하며 '자'로 끝이 나서 할머니 친구들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 시의 '개자'랑 '경자'는 사람 이름은 아니래요. '개자'는 '한 글자'란 뜻이고, '경자'는 '수염 줄기'란 뜻이라네요.
한 글자를 꼭 맞게 읊조리려고
몇 개의 수염을 배배 꼬아 끊었던가.
시를 쓰는 시인이 한 자 한 자 맞추려고 고민, 고민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을 말하는 시래요. 이 시인은 아마도 턱수염이 길었나 봐요. 생각할 때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배배 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툭 하고 끊어지는 거죠. 할머니께선 끊어진 수염이 많다는 건 생각을 많이 했다는 뜻일 테니, 단숨에 쓴 사람들보다는 더 좋은 시를 썼을 거라고 하셨죠. 아, 시는 좀 복잡하단 생각이 드네요. 시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 사물을 데려와서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 대요. 그래서 시 한 편을 읽는 것은 시인이 말하고 싶었지만, 직접 하지 않았던 말을 찾아내는 거래요. 흠, 그럼 좀 재미있겠는걸요? 어쩐지 숨은그림찾기나 보물찾기놀이 같잖아요. 그래서 내일은 시 속에 숨어 있는 보물들을 같이 찾아보기로 했어요.
나중에 깨닫는 것도 시의 맛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왔어요. 그래서 내가 눈을 막 떴을 때 밖의 날씨가 좀 흐리고 어두웠어요. 그래서 아직 한창 새벽인 줄 알고 다시 잤죠. 그 다음에도 한 번 더 눈을 떴는데, 그때도 아직 아침이 안 된 줄 알고 다시 잤어요. 그렇게 늦잠을 잤으면서도 오히려 일찍 일어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어요. 제가 그렇게 착각을 했던 이야기를 할머니께 해 드렸더니, 생각나는 시가 하나 있대요.
산사야음(山寺夜吟) - 정철
소소락목성(蕭蕭落木聲) 착인위소우(錯認爲疎雨) 호승출문간(呼僧出門看) 월괘계남수(月掛溪南樹)
산 절에서 한밤중에
쓸쓸히 나뭇잎 지는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스님 불러 문 나가서 보라 했더니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네요."
정철이라는 시인이 산에 있는 절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잠이 잘 안 왔나 봐요. 잠이 안 와서 가만히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비 오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아니 아까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갑자기 웬 비가 오지?' 하며 그 손님 시인이 마당에 있는 꼬마 스님을 불러 밖을 좀 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 꼬마 스님이 "저쪽 시내 남쪽 나무에 달님이 걸려있는데요, 손님" 하고 대답했대요. 달이 그렇게 잘 보이니까 비가 올 리가 없다는 이야기예요. 시는 이렇게 직접 말하지 않고 사물이 대신 말을 해 준대요. 달이 떴으니까 비가 올 리 없을 테고, 비가 안 온다는 걸 달이 떴다는 말로 빙빙 둘러말한 거죠. 시인은 그 말을 듣고 '그럼 그게 낙엽이 바람에 떨어지는 소리구나' 하고 깨달은 거구요. 이런 게 '시작'이란 건가 봐요. 딱 말하지 않고 나중에 생각하거나, 깨달아야 하는 거 말이에요.
첫눈의 약속 오늘 저녁엔 엄마가 정말 맛있는 김치 부침개를 부치셨어요. 그리고 왕 할머니께 갖다 드리라며 제게 심부름을 보내셨죠. 왕 할머니께선 내가 오자마자 부침개 냄새가 난다며 웃으셨어요. 오늘은 시원하니 마당에 나가서 부침개를 먹기로 했죠. 나가 보니 손톱같이 가느다란 달이 떴어요. 할머니께선 그 달을 보며 또 시를 들려 주셨죠.
대월 - 능운
랑운월출래(郞云月出來) 월출랑불래(月出郞不來) 상응군재처(想應君在處) 산고월상지(山高月上遲)
달을 기다리며달 뜨면 오시겠다고 말해 놓고서 달 떠도 우리 님은 오시지 않네.
아마도 우리 님 계시는 곳에 산이 높아 저 달도 늦게 뜨나 봐.
능운이란 여자가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시래요. 사랑하는 사람이 달이 뜨면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선 달이 떴는데도 안 오고 있는 거잖아요. 여자는 달을 보며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화를 내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 편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여자에게는 아주 잘 보이는 달이 사랑하는 남자 쪽에선 산이 너무 높아 잘 안 보이는 모양이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좀 바보 같은 여자예요. 어떻게 시간 약속을 달이 뜰 때로 할 수가 있는 거죠? 달이 뜨는 건 시계처럼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조금 바보 같다고 웃으니까 할머니께서 우리도 그런 약속을 하나 하자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약속은 올해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날, 내가 붕어빵을 사 들고 할머니께 가서 할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거예요. 햐, 나에게도 이런 약속이 생기다니, 정말 멋져요.
시 쓰는 건 어렵지 않아 왕 할머니께선 시 쓰는 방법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래요. 글자 수를 맞추고, 음을 맞추면 된다고 하셨죠. 하지만 난 한자를 잘 몰라서 한시를 지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할머니께서 시조 짓는 법을 설명해 주셨죠. 글자 수를 '3 4 3 4'로 맞춰서 한번 써 보라는 거예요. 하지만 항상 맞춰야 하는 건 아니래요. 그러니까 이런 식이죠.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3 4 3 4)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2 3 3 4)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손 너뿐인가 하노라. (3 7 4 3)
킥, 킥, 킥 까마귀가 까맣다고 백로가 비웃었나 봐요. 하지만 속은 까맣지 않다는 거죠. 백로처럼 그렇게 남을 비웃는 애는 아무리 겉이 하얘도 속은 검을 거란 이야기예요. 처음 '3 4 3 4'가 중요한 것이라고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내일은 '3 4 3 4' 시를 짓기로 했어요. 집에 오자마자 시가 생각났어요. '3 4 3 4'에 맞춰서 쓰면 된다고 하니까 뭐든 시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 날 나는 할머니께 시를 보여 드리러 갔어요. 밤에 내가 쓴 시가 꽤 마음에 들거든요. 짧지만 슬픈 시였어요. 가자마자 할머니께 읽어 드렸죠.
방학이 끝나가니 마음이 아프구나.
할머니께서도 슬픈 시라고 하셨죠. 하지만 한 가지, 마음이 아픈 걸 좀 더 돌려 말하거나, 사물이 말하게 했으면 더 좋을 뻔했다고 하셨죠. 먼저 내가 마음이 아플 때를 말해 보라고 하셨죠. 아무것이나 좋대요. 흠, 고양이가 밥을 안 먹을 때? 아니면 너무 빨리 밤이 와서 더 놀고 싶어도 못 놀 때? 그럼 그걸 '3 4'로 바꿔서 생각해 보는 거래요.
방학이 끝나가니 고양이 밥 안 먹네. 방학이 끝나가니 하늘이 깜깜하네.
와, 더 좋아요. 더 슬픈 느낌의 시가 되었네요.
거짓말 같은 시오늘도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어요. 거짓말의 시들을 듣기로 했거든요. 거짓말은 우리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시도 거짓말을 한대요. 내가 가자마자 할머니께선 바로 시를 들려 주셨죠.
정석가
바삭바삭한 가는 모래밭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에 움이 돋아 싹이 나와야 유덕하신 님을 여의겠습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바위 위에 접붙입니다.
그 꽃이 삼동에 피어야만 유덕하신 님을 여의겠습니다.
아니 구운 밤을 모래밭에 심으면 싹이 나오나요? 옥으로 새긴 연꽃이 바위에서 꽃이 피나요? 그러니까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말한 거지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헤어질 수 없다는 거니까,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말이죠. 나도 헤어지기 싫은 사람들이 있어요. 엄마나 아빠, 그리고 우리 고양이들이나 지금 나랑 이야기하고 있는 할머니 같은 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죠. 그렇게 말했더니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죠. 사람들은 다 헤어진대요. 너무 슬퍼요. 오늘은 어쩐지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할머니의 가방오늘은 할머니께 내가 쓴 마음의 시를 들고 가야 해요. 어쩐지 조금 쑥스럽고 창피한 기분이 들어요. 아무리 봐도 여태껏 할머니가 이야기해 주신 시들처럼 멋지지가 않거든요. 할머니 댁에 도착하니 할머니께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래떡을 구워 놓고, 내 시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래서 창피하지만 보여드리기로 했죠.
개학이 다가오네 - 은서
한시를 알아 가며 방학을 보냈더니
모르던 할머니가 너무나 좋아졌네.
무섭던 왕 할머니가 재미있게 바뀌었네.
이 시를 읽으시더니 왕 할머니께서 정말 크게 웃으셨어요. 정말 내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마음에 드는 시래요. 할머니께서 너무 좋아해 주시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부끄러운 마음이 싹 사라지고, 진짜 시인이 된 기분이 들었죠. 어쩌면 이런 게 마법일까요? 할머니가 내 시를 좋아해 주시자마자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께 자랑하고 싶어졌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왕 할머니께서 비밀 이야기를 하나 해 주시겠대요. 할머니는 마음속에 아주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가방이 하나 있대요. 그 가방엔 할머니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랑 좋아하는 것들만 집어넣으신다고 했죠. 아무리 커져도 무겁지가 않대요. 마음속에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 가방 안에 넣어 두면 절대 잃어버리지도 않는대요. 그래서 이렇게 많은 시들을 기억하고 있는 거라 말씀하셨죠. 아, 그런 가방을 나도 마음속에 가지고 싶어요.
왕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갔어요. 집으로 가는 동안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내 마음속에 뭔가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이게 혹시 할머니께서 말해 주신 그 가방일까요? 그럼 나도 그 마음의 가방에 뭐든 좋은 것들을 집어넣을래요.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랑, 내가 좋아하는 것들, 잃어버리면 안 되는 생각들, 사랑하는 것들, 아, 정말 다 들어가고 있어요. 하나도 무겁지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