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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이유정

유은실 지음 | 푸른숲
멀쩡한 이유정

유은실 지음

푸른숲 / 2008년 11월 / 148쪽 / 8,500원

할아버지 숙제


오늘 숙제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살아온 얘기를 적는 거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저마다 할아버지 자랑을 해 댔다. 승호네 할아버지는 용감한 경찰이어서 도둑을 잡다가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고 했고, 명규네 할아버지는 조기 축구회 회장이어서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나도 뭐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사진을 떠올렸는데, 할아버지 이마에 있는 이쑤시개만 한 흉터가 생각나서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도 흉터 있어. 아마 강도를 붙잡다가 생겼을 거야."집에 오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할아버지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내가 물었다.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 유명했지요?" "유명했지.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유명했어요?" "골목에서 노래를 불렀어. 술만 마시면 목이 쉴 때까지 불렀지. 아이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마에 흉터 있잖아요. 그거 강도 잡다가 찔린 거 아니에요?" "아니야, 술 마시고 자빠져서 다친 거야." 머리가 멍했다. "정말이에요?" "어머니! 왜 그러세요!" 아빠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어쨌다고 그래!" "어머니, 경수한테 좀 숨기면 안 돼요? 주정뱅이 손자라는 걸 꼭 가르쳐 줘야 해요!" "아니, 이놈이!" 할머니는 화가 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가 나았다. 나는 가만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애들한테 괜히 할아버지 얘기를 했다. "경수야."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는 척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중요한 게 떠올랐다. 나한테 할아버지가 한 명 더 있다는 거! 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엄마, 외할아버지 얘기 해 줘. 오늘 숙제야." "그래?"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경수야,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 "돌아가시기 전에는 뭐 했는데?" "……그러니까, 외할아버지는 게임을 하셨어." "그럼, 프로게이머?" "아니, '노름'이라고, 옛날 아저씨들이 하던 게임이야." "만날 노름만 했어? 혹시 경찰은 안 했어?" "안 했어." "혹시 회장 같은 건 안 했어?" "그런 것도 안 했어." "근데 외할아버지는 어쩌다 돌아가셨어?" "노름은 조그만 방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하거든. 그러다 폐가 나빠져서 돌아가셨어." "엄마, 우리 할아버지들은 왜 그래?" 나는 울고 싶었다. 우리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수야." "왜?" "엄마는 어렸을 때, 누가 아버지 얘기를 물어보면 이렇게 말했어. '우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났을 때 좋아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눈이 커요.', '우리 아버지는 육이오 전쟁 때 새끼발가락에 총알이 스쳤어요.' 이렇게." "그건 다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그럼 친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는 엄마 눈이 크다고 좋아하셨지. 할아버지는 닭고기를 좋아하셨어. 그리고…… 맞다! 할아버지는 육이오 전쟁 때 동생을 잃어버렸어. 그런 걸로 숙제를 해 볼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옆방에 가서 할머니를 모셔 왔다.



나는 할머니와 엄마가 불러 주는 대로 썼다. '친할아버지 정광식 씨, 1937년 안성에서 태어나셨다.' "아버님이 노래 말고 잘 하시는 거 없었어요?" 엄마가 할머니한테 물었다. "우산을 잘 고쳤지." "그래. 그럼 그것도 넣자." '우산을 잘 고치셨고, 골목에서 노래를 잘 부르셨다.' 할머니가 말했다. "경수야, '골목에서'는 빼고 노래 잘 불렀다고만 써라." '우산을 잘 고치고, 노래를 잘 부르셨다. 별명은 '가수'였다. 할아버지는 육이오 전쟁 때 동생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오랫동안 슬퍼하셨다. 우리 엄마 눈이 크다고 좋아하셨고, 닭고기를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아직도 할아버지를 잘 기억하고 계신다.' "술병이 나서 죽었다고 쓰면 경수가 창피하겠지?" 할머니가 엄마한테 물었다. "그럼, 간이 안 좋아져서 돌아가셨다고 하지요." "그래. 그게 좋겠다. 간에 병이 생겨 갖고 96년에 돌아가셨다고 써라." '간에 병이 생겨서 1996년에 돌아가셨다.'



다음은 외할아버지 차례였다. 나는 이제 할아버지 숙제 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래서 엄마가 조금만 도와줬다. '외할아버지 김갑렬 씨, 1929년 천안에서 태어나셨다. 육이오 전쟁 때 총알이 새끼발가락을 스쳐 다치셨다. 눈이 크고 누룽지를 좋아하셨다. 우리 엄마 김영숙 씨를 아주 예뻐하셨다. 재미있게 게임 하는 걸 좋아하셨고 폐에 병이 생겨서 1979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렇게 할아버지 숙제를 했다. 그리고 한번 읽어보았다. 괜찮았다. 별로 자랑할 건 없지만, 부끄럽지도 않았다.



"근데 경수야, 너 명규랑 같은 반 아니야?" 할머니가 물어봤다. 우리 할머니는 명규 할머니랑 같이 약수터에 다닌다. "예." "걔는 숙제 어떻게 하냐?" "왜요?" "명규 할아버지가 바람나서 지금 명규 할머니한테 쫓겨나게 생겼거든. 걔도 숙제하기 힘들겠다." 나는 또 멍해졌다. 명규 할아버지는 회장이고, 트로피도 탔다던데……. '명규가 할아버지 숙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나는 명규가 걱정됐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들 말고도 훌륭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멀쩡한 이유정

유석이가 학교 어디에도 안 보였다. 이학년 삼반을 찾아가니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유석이 담임선생님이 유석인 벌써 갔다고 하셨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얼른 복도 끝으로 걸었다. 사학년인 나는 삼 월 이 일부터 삼 주 째 동생인 유석이를 따라 학교를 다닌다. 내가 길을 잘 못 찾는 '길치'인데다가, 이사를 하는 바람에 학교 가는 길이 바뀌어서 그렇다. 유석이는 나 때문에 친구랑 못 논다고 투덜댔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 참았다. 나는 길을 못 찾는 게 창피해서 유석이에게 과자랑 음료수를 한 번 사 주면서 부탁했다. "유석아, 내가 너 따라다니는 거 비밀이야."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오른손 도장도 찍었다. '이유석, 내가 저녁까지 집에 못 가면 너는 엄마한테 죽었다.' 유석이가 혼나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혼자서 집에 갈 수 있을까?' 새로 이사한 동네는 집이랑 길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학습지 선생님이 세 시 이십 분에 오시는데.' 벌써 두 시 사십 분이었다. 나는 교문 쪽으로 걸었다. 유석이랑 가던 길을 떠올려 봤다. 약국까지는 알 것 같았다. 약국을 지나 사거리 쪽으로 걷다 보니까 좀 이상했다. 어묵이랑 떡볶이를 파는 가게가 안 보였다. "저기요, 여기 떡볶이 파는 데 어딨어요?" 나는 어떤 아저씨한테 물었다. "왼쪽으로 돌면 나와." 속으로 얼른 '왼쪽 왼쪽' 하고 외웠다. 나는 길치인 데다가 오른쪽, 왼쪽을 쉽게 알아내지 못한다. 엄마는 그런 나를 데리고 한의원에 가서 총명탕을 지어 주었다. 총명탕을 다 먹고 나니까 공부를 조금 더 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오른쪽, 왼쪽은 계속 몰랐다. 그런데 이학년 겨울 방학 때 내가 걷다가 팍 엎어져서 손목 바로 위가 찢어진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응급실에 가서 일곱 바늘을 꿰맸는데, 덕분에 흉터가 생겨서 오른손, 왼손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흉터가 없는 쪽이 왼쪽이었다.



왼쪽으로 도니까 바로 떡볶이 파는 데가 나왔다. 하지만 좀 이상했다. 아줌마가 달라진 것 같았다. "아줌마, 혹시 치연 아파트가 어느 쪽인지 아세요?" "치연 아파트? 횡단보도 건너 좌회전해서 쭉 가. 그 블록 끝에서 우회전하면 왼쪽으로 보여." 나는 정신이 없어졌다. 나는 좌회전, 우회전 소리만 들으면 겁이 난다. 아줌마 말을 내가 아는 말로 바꾸었다. "좌회전, 왼 좌, 왼쪽 회전." 나는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가며 길을 찾았다. 걷다 보니까 좀 이상했다. 벌써 세 시 삼 분이었다. 평소에는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까 떡볶이 아줌마가 해준 말도 안 떠올랐다. 그래서 대학생 같아 보이는 어떤 언니한테 물었다. "언니, 치연 아파트가 어느 쪽이에요?" "이 도로를 따라 직진해. 그러다가 옷 가게가 나오면 옷 가게를 끼고 좌회전해. 그리고 또 직진이다." 들은 말을 외우면서 한참을 걷다 보니 아파트가 나왔다. 아파트 뒤에 아파트가 계속 있었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기가 좋다. 달리기에는 오른쪽, 왼쪽이 없다. "이렇게 순발력이 좋은 애가 평소엔 왜 그렇게 느려." 삼학년 때 선생님이 말한 게 생각났다. 그 선생님은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일 학기 회장이라서 그랬다. 한번은 별관 자료실에 가서 지구본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자료실에 가서 지구본을 받는 것까지는 잘 했다. 하지만 자료실 밖으로 나오니까 오던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헤매다 부회장 한상규에게 발견되었다. 선생님이 걱정돼서 보낸 거였다. 나는 한상규를 본 순간부터 다리를 절었다. 한상규는 지구본을 들고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날 집에 올 때까지 다리가 접질려서 저는 척을 해야 했다. '혹시 내가 멀쩡하게 걸으면서 헤매는 거 봤을까?' 나는 자꾸 한상규가 의식되었다. '너 길치지? 자료실에 갔다가 교실도 못 찾지?'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상규가 두려웠다. 게다가 한상규는 우리 아파트 바로 옆 동에 살아서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몰랐다. 나는 한상규가 제발 사학년 때 다른 반으로 가길 빌었다.

달리다 보니 치연 아파트 112동이 보였다. 우리 아파트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102동 1003호가 있는 치연 아파트가 아닌 것 같았다. "아저씨, 여기 102동 있는 치연 아파트 맞아요?" 나는 경비 아저씨한테 물었다. "102동? 거긴 정문 쪽인데, 쭉 가서 우측으로 돌면 좌측이야." 오른쪽으로 돌고 시계를 보니까 세 시 이십 분이었다. "늦었다." 나는 다시 달렸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102동이 안 보였다. 104동이 보여서 그쪽으로 갔는데 막힌 길이었다. '집에 유석이가 있을까?' 학습지 선생님이 복도에 서 있을까 봐 걱정이었다. 한편으론 이러다가 한상규 엄마나 한상규한테 들킬까 봐 걱정되어 나는 계속 두리번거렸다.



"유정아, 이유정!"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학습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학습지 선생님이 나를 찾으러 나올 줄은 몰랐다. 갑자기 교회 종탑을 발견한 것 같았다. 선생님은 오래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나를 찾느라고 애를 쓴 것 같았다. "유정아, 잘됐다. 나 너희 집 좀 데려가 줘." "예에?" "아파트 단지를 십 분째 헤매고 있었거든."선생님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선생님 손을 꼭 잡고 치연 아파트를 휙 둘러보았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좌향좌를 하는 것처럼 손에 진땀이 났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또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엄마가 저녁상을 차리면서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손을 모으고 나를 봤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엄마는 기도를 안 하면 밥을 안 준다. 그것도 불공평하다. "우리 영지는 불공평해서 억울한 게 많습니다. 우리 영지가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엄마는 그렇게 기도했다. 엄마 꿈이 너무 큰 것 같다. 나는 공부도 잘 못하고, 성격도 꽝이다. 그런 내가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게 분명하다. 우리 아빠를 살려달라고 여러 번 기도했는데, 안 들어준 걸 보면 그렇다.



"불공평해. 아빠가 없으면 아빠 무덤이라도 있어야지."나의 불평에 엄마가 대답했다. "설악산 대청봉 가서 울어. 거기다 아빠 뼛가루 뿌렸잖아. 대청봉이 전부 아빠 무덤이라고 생각해." "불공평해. 왜 우리 아빠 무덤은 그렇게 높아? 세상에 공평한 건 하나도 없어." "있다. 공기." "아니야. 삼촌네 동네는 공기가 맑은데, 우리 동네는 공기가 나쁘잖아. 여기로 이사 오고 엄마 계속 목 아프다며, 공기도 불공평해." "그러네." 잠시 후 엄마가 갑자기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있다!" "뭐?" "눈. 어깨가 쑤신 걸 보니까 내일 새벽에 눈이 올 것 같네. 눈은 공평해. 모든 걸 덮어 주잖아."



엄마 말이 맞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을 보니 세상은 온통 흰빛이었다. 우리가 사는 옥탑 앞 옥상에는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나는 장갑을 끼고 나갔다. 그리고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기기 시작했다. 나는 옥상 끝까지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며 가서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눈은 쓰레기통, 자동차, 자전거까지 모두를 공평하게 덮고 있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눈사람을 만들 생각이었다. 눈을 뭉치고 있는데, 옆집 옥상에서 누가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옆집 옥탑에 사는 조그만 여자 아이였다. 여자아이는 나이가 많은 아줌마랑 산다. 그 아줌마가 할머니인지 엄마인지는 모르겠다. 가끔 아이한테 욕하고, 화내는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린다. 아이 우는 소리도 들린다.



"뭘 그렇게 빤히 봐." "눈사람 만들고 싶어." "만들면 될 거 아니야." "장갑이 없어서." 아이는 조그만 눈 뭉치를 난간에 내려놓고 손을 비볐다. 아이의 손은 입술처럼 빨갰다. 엄마 말이 틀렸다. 눈도 공평하지 않았다. 눈도 장갑 있는 사람에게만 공평했다. '집에 새 장갑 있는데, 내가 주면 공평해질까?' 아이는 눈으로 '장갑 줘, 장갑 줘' 그러는 거 같았다. 나는 화가 났다. 아무래도 어제 저녁 엄마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려는 것 같았다. 세상에 장갑 많은 애가 얼마나 많은데, 아빠도 있고 부자인 애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나보고 주라니! 우리 아빠 살려 달라는 기도를 안 들어줬으면서, 우리 엄마 어깨 안 아프게 해 달라는 기도도 안 들어주면서!



나는 하나님을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시비 건 쪽은 하나님이었다. 나는 '장갑 줘' 하는 눈빛을 무시했다. 아이는 맨손으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아이 손으로 눈길이 갔다. 아이 손은 이제 아주 빨갛게 되었다. '그렇게 불쌍하게 보여도 안 줘요.' 나는 아이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하지만 계속 뒤통수에 뭐가 매달린 기분이었다. "에이 씨." 나는 장갑을 벗어서 두 짝을 단단하게 뭉쳐서는 옆집 옥상으로 던졌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분홍 장갑이 그림 같았다. 내 손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예뻤다. 나는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았다. 이제, 설악산 대청봉에 가서 울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집에 들어와 새 장갑을 끼었다. '이건 못 줍니다. 절대 못 줍니다.' 하나님이 또 빼앗아 갈까 봐, 나는 장갑을 손목까지 팽팽하게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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