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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찾아가는 서울 600년 이야기

김근태 지음 | 산하
함께 찾아가는 서울 600년 이야기

김근태 지음

산하 / 2008년 10월 / 296쪽 / 18,000원



의리의 채씨 형제와 돈의동 (종로구)


지하철 1호선과 3호선, 5호선이 만나는 종로3가역 근처가 돈의동이라는 곳인데,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단다. 조선 시대 한양에 허풍을 잘 떠는 채제민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한번은 평양에 갔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해서 구경을 다니다가 자기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준 사람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어. 처자에게 반한 채제민은 처자의 아버지에게 자기가 한양 명문가의 자식이라고 허풍을 치며 따님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어. 처자의 아버지는 채제민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었지만, 결국은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어. 결혼을 한 채제민은 장인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하루는 장인이 평안감사가 새로 부임을 했다고 알려 주었어. "이번 감사가 채제공이란 분인데, 자네 혹시 아는가? 성도 같고 항렬도 같은 것 같은데." 체제민은 이번에도 넉살 좋게 대답했어. "아다마다요. 제 사촌 형님이신데요." 장인은 사위 덕을 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럼 왜 빨리 뵈러 가지 않느냐고 다그쳤지.



할 수 없이 채제민은 무거운 마음으로 감사를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님과 항렬이 같은 바람에 장인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제 목을 베어 주십시오"라고 말하곤, 그동안 집을 나와 장가를 들고 아내의 집에 얹혀살아 온 이야기를 쭉 했어. 그러자 뜻밖에 감사는 부인과 아이들에게 채제민을 사촌동생이라고 소개시키고, 장인과 함께 다시 찾아오라고 채제민에게 말하는 것이었어. 채제민은 고맙고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 그 뒤 채제민이 장인과 함께 감사를 찾아왔더니, 감사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인사하며 채제민의 장인을 잘 대접했지. 그래서 채제민은 평양에 있는 동안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낼 수 있었고, 나중에 채제공이 다시 한양으로 발령이 나서 옮겨 갈 때 채제민도 함께 갔대. 두 집안은 지금의 돈의동에 아래위로 집을 지어 나란히 살며 어찌나 절친하게 지냈는지 그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두 집안이 의리를 두텁게 했다 하여 두터움을 뜻하는 '돈(敦)'자와 의리를 뜻하는 '의(義)'자를 써서 이 동네를 돈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해.



칼을 씻은 세검정 (종로구)

이번엔 세검정을 찾아가 보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종로구 구기동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홍제천 바위 가에서 세검정을 볼 수 있어. 이 정자의 이름은 바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면서 생겨난 것이란다. 광해군 15년(1623)의 일이었어. 이괄, 이귀, 김류 등은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기로 약속하고 홍제원에서 만나기로 했어. 먼저 이괄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홍제원에 도착했지.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귀도, 김류도 보이지 않았어. 힘을 모으기로 약속한 여러 사람 가운데 일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바로 이이반이라는 사람이었어. 이이반은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음모가 있다고 승정원에 고해바쳤어. 승정원은 임금의 비서실 정도 되는 기관이었는데, 승정원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했겠지. 곧 광해군에게 알리고 대책을 세우느라 떠들썩했어.



한편, 홍제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괄은 멀리서 불빛이 깜박거리는 것을 보고 창의문 밖으로 달려가 보니, 함께 난을 일으키기로 한 이귀 등이 수백 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와 있었어. 이때 장유라는 사람이 급하게 말을 달려왔어. "큰일났습니다. 누군가가 승정원에 고자질을 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반정군은 술렁대기 시작했어. 겁이 난 군사들을 다독여서 이괄과 이귀, 또 늦게 달려온 김류 등은 함께 창덕궁으로 진격하여 일을 성공시켰어. 이 일을 역사에서는 인조반정이라고 해. 이괄 등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로 세운 임금이 인조거든. 반정이란 옳지 못한 임금을 내쫓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을 말하지. 뒷날 사람들은 이괄, 이귀, 김류 등이 광해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칼을 씻은 곳에 있던 정자를 세검정이라 불렀대. 씻는다는 뜻의 '세(洗)'자와 칼을 뜻하는 '검(劍)'자, 그리고 정자라는 뜻의 '정(亭)'자를 써서 부르게 된 이름이지. 이렇게 마을이나 문화재의 이름에는 역사의 흔적이 서려 있어. 그러니 그냥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될 거야.



나라를 구한 밥 할머니 (은평구)

대도시인 서울에는 아직 같은 성씨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남아 있어. 예를 들면,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불광동 일대에는 대대로 해주 오 씨 집안이 많이 살고 있어. 지금 집성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오늘 찾아가는 밥 할머니 이야기 때문이지. 자, 그럼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고양시 동산동 '창릉 모퉁이공원'을 찾아가봐. 바로 그 공원에 있는 석상이 밥 할머니라고 전해져 왔어. 밥 할머니는 조금 전에 말한 해주 오 씨 집안에서 태어난 분으로 역시 은평구의 집성촌인 남평 문 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밥 할머니는 의병을 모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어. 양반들은 자기만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오히려 연약한 여자가 나라를 위해 나선 거야.



왜군들이 벽제관 전투에서 이겨 이곳 창릉천까지 이르렀을 때의 이야기야. 말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희부연 개울물의 색깔에 이상함을 느낀 왜군들이, 마침 빨래를 하고 있던 할머니에게 개울물의 색깔이 왜 그러냐고 묻자, 할머니는 태연하게 말했어. "저기 산처럼 쌓인 노적가리를 보면 모르오? 지금 저녁 시간이라 조선군이 밥을 짓기 위해서 쌀 씻은 뜨물이 흘러 냇물이 이렇게 흐려진 것 같소." 사실은 할머니가 왜군들이 이곳에 올 것을 먼저 알고, 가마니와 새끼줄로 산봉우리를 둘러싸서, 멀리서 보면 마치 쌀가마니를 쌓아 놓은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거야. 왜군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싸울 기세를 잃고 물만 허겁지겁 마시고 달아났는데, 사실 그 개울물은 개천 상류 쪽에서 생석회를 풀어 흘려보낸 물이었어. 그 물을 마신 왜군은 물론 말까지 모두 회독으로 심한 복통을 일으켰고, 결국 왜군들은 이 고장에서 서둘러 도망치고 말았다고 해. 또 전투가 치열할 때에는 할머니가 근처 마을의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아군들에게 밥을 만들어 나눠주었대.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밥 할머니라고 부르게 된 거야.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밥 할머니의 석상을 만들어 삼각산의 노적봉이 잘 보이는 창릉 모퉁이에 세우게 했대. 밥 할머니는 전쟁의 위기에서 우리 민족을 여러 차례 구해 주어, 민간에는 신령한 모습과 능력으로 받들어졌어. 이 밥 할머니의 석상은 세 번이나 옮겨 다니다가, 2004년에 지금의 자리로 왔어.



동대문과 남대문 (종로구/중구)

드디어 서울 동쪽으로 설화 여행을 떠날 차례구나. 동대문에서 출발해 볼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경복궁과 종묘를 세운 다음 시작한 일이 성을 쌓는 일이었지. 성을 쌓으면서 동서남북으로 4대문(동-흥인지문, 서-돈의문, 남-숭례문, 북-숙정문)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4소문(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을 세웠던 거야. 그 중에 보물 제1호인 동대문은 흥인지문이라 했는데, 옛날부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바로 섰다는 이야기가 있었어. 예를 들면, 고종 19년(1882)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동대문이 기운 적이 있었대. 그리고 우리나라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이 만든 1901년의 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동대문이 기우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굵은 삼밧줄을 동대문 다락과 청계천 수표교 사이에 연결해서 꽁꽁 동여맸대. 겨울 동안에는 팽팽해진 삼밧줄이 동대문을 끌어당겨서 기우는 것을 막아 주고, 여름에 비를 맞으면 삼밧줄도 늘어나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하면서 조선 사람들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해. 이렇듯 오묘한 변화를 보이던 동대문은 500여 년 동안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의 얼굴이라 할 만큼 유명한 곳이었어.



보물 1호인 동대문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 바로 국보 1호인 남대문(숭례문)이지. 이름을 숭례문이라 한 것은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지. 숭례문은 '예의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이거든. 숭례문의 글씨는 태종 때의 명필인 신색의 글씨라고도 하고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글씨라고도 하는데, 매우 잘 쓴 글씨로 평가되고 있어. 그런데 얼마 전 숭례문에 정말로 충격적인 사건이 발행했어. 2008년 2월 10일, 사회에 불만을 품은 어떤 사람이 방화를 하여 600여 년을 지켜 온 문화재가 겨우 다섯 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한 거야.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건물의 1층과 돌로 쌓은 기단 및 현판은 훼손되지 않아 원형대로 복구가 가능하다는 점이야. 문화재청에서는 2013년 1월 1일까지 숭례문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기로 했대. 그리고 복구 과정도 생생하게 공개하겠다고 약속했어. 국민들은 이런 과정을 보면서 견고하고 아름다운 목조건물을 만든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배우고, 전통문화를 잘 계승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새롭게 다짐할 수 있을 거야.



서울의 유래와 왕십리 (성동구)

오늘은 지하철 2호선과 5호선이 만나는 왕십리역 부근을 찾아갈 거야. 그런데 우리의 수도 서울은 대체 언제부터 '서울'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이곳 왕십리의 유래를 듣다 보면 그 답이 나온단다.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자, 신하들이 새 임금에게 도읍지 또한 새로운 나라에 맞는 곳으로 정하자고 말했어. 그래서 이성계는 풍수지리에 밝은 무학대사라는 스님에게 도읍 정하는 일을 맡겼지. 무학대사는 땅의 모양이 빼어나고 인심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던 한양으로 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녔는데, 어느 날 동야(지금의 왕십리) 근처에서 땅의 모양을 살피고 있으려니까 한 노인이 밭을 갈면서 소를 막 야단치는 것이 아니겠어? "무학처럼 멍청한 소야, 좋은 길 두고 왜 엉뚱한 데 와서 이러는 게냐" 무학대사는 깜짝 놀라 노인에게 물었어. "어르신은 제가 도읍터를 찾고 있다는 걸 다 아시는군요. 어디 좋은 곳을 알고 계신지요?" 노인은 그 곳에서 서쪽으로 십 리만 더 들어가 보라고 하는 것이었어. 무학대사가 서둘러 서쪽으로 십 리를 갔더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아주 좋은 터가 있어서 그곳을 도읍지로 결정했어. 그러고 나니 또 놀랍게도 어느 겨울날 밤에 눈이 내렸는데, 한양 주위에 울타리처럼 경계가 만들어졌고, 그 눈 울타리를 따라가며 성을 쌓게 된 거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눈을 가리키는 한자인 '설(雪)'과 울타리의 '울'을 합해, '설울'이라고 한 데에서 서울이라는 말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어.



또 하나 전해 오는 주장은, 옛날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지금의 경주)의 발음이 변해서 서울이 되었다는 거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울이라는 말에 '나라의 중심'이라는 넓은 뜻이 있다는 거지. 한편,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여기서 십 리만 더 가시오' 했던 곳은 왕십리(往十里), 즉 '십 리를 가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어. 그 노인은 신라 시대 말에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설을 처음으로 만들었던 도선 대사의 혼령이라는 말이 있단다.



단종비 송 씨의 동망산신각 (성북구)

드디어 서울 북부 지역의 설화 여행을 시작하는 날이구나. 먼저 단종비 송 씨 부인과 관련된 유적을 찾아가 볼까? 지하철 6호선 창신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성북구 보문동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중턱에 청룡사라는 절이 있는데, 예로부터 여승들만 살았다고 해. 이 절 안에는 작은 비각이 있는데, 비각 안에는 1771년에 영조 임금이 친필로 써서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새겨진 빗돌이 있어. 그러면 지금부터 정업원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줄게.



세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임금이 된 지 2년 4개월 만에 죽고 말았어. 아들인 단종은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어린 임금으로 인해 왕실의 세력이 약화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빌미로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이 야심을 품고, 1453년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어. 이를 계유정난이라고 부르지. 단종은 할 수 없이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이름뿐인 상왕이 되었다가, 결국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영월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지. 정순왕후 송 씨는 왕비가 된 지 1년 만인 열여덟 살에 남편인 단종과 이별하고, 정업원에서 여승이 되어 살았대. 정업원은 조선 초기에는 예전 왕의 후궁들이 주지가 된 절이었다가, 나중에는 선비들이 독서를 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후일에 영조 임금이 직접 다녀가면서 송 씨 부인이 살던 터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 거야. 송 씨 부인은 여든 살 넘게 장수하다가 이곳에서 한 많은 삶을 마쳤어.

청룡사에서 언덕길을 계속 올라가면 숭인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는 동망봉(東望峰) 표지석이 있어. 송 씨 부인이 유배를 간 남편의 무사함을 빌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이곳 봉우리에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이 앞에 있는 동명산신각에서는 한을 품고 죽은 송 씨 부인의 영혼과 마을 전체의 평안함을 비는 제사를 해마다 음력 10월 3일에 올리고 있대.



누에치던 동네, 잠원과 잠실 (서초구/송파구)

옛날에는 무엇이든 직접 손으로 만들고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누에를 치는 것도 그런 일이었지. 누에는 누에나방의 애벌레인데, 사람들은 누에의 고치를 이룬 실을 풀어내어 비단실을 만들어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었거든. 그래서인지 서울의 동네 이름 중에는 누에와 관련된 것이 많아. 누에를 한자로 '잠(蠶)'이라고 하는데, 이 글자가 들어간 동네로 서초구의 잠원동과 송파구의 잠실동이 있어. 지금 우리는 옛날에 나라에서 관리했던 오래된 뽕나무를 찾으러 가는 거야. 지하철 3호선 잠원역 근처에 한신16차아파트가 있는데, 이 아파트의 120동 앞 길가에 조선 초기에 심어진 것으로 알려진 커다란 뽕나무가 있단다. 기록에 보면, 성종 2년(1471)에 지금의 성북구 성북동에 선잠단을 세웠다고 해.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가 잘 자라서 누에를 살찌우고 결국 좋은 실을 얻게 해 달라는 기원을 드리기 위해 이 제단을 만들었고, 해마다 봄에 왕비가 시범적으로 뽕나무를 가꾸고 누에를 길렀다고 해. 그러니까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이 뽕나무도 아마 비슷한 때에 심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그러면 서울에 누에를 많이 치게 된 유래를 설명해 주는 이야기를 해 줄게.



조선 시대에 유명한 지관이 있었대. 이 사람이 보기에 한양의 앞산인 남산은 생긴 모양이 꼭 누에의 머리와 같더래. 지관은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나라에 상소를 올렸어. "한양에서 가장 중요한 산이 남산인데, 남산의 모양은 누에를 닮았습니다. 그러니 한양에서 누에가 잘 자라게 해야 남산이 살고, 남산이 살아야 한양이 삽니다. 누에가 잘 되게 하려면 남산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한강 남쪽 백사장에 누에가 먹고사는 뽕나무들을 심어야 누에머리 모양을 한 남산이 살아나고 한양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지관의 상소를 받아들였고, 지금의 잠원동과 잠실동 일대는 뽕나무 천지가 된 거야. 이제는 잠원동과 잠실동이 모두 아파트 숲으로 변해 버렸지만 잠원동에 있는 이 뽕나무 한 그루가 서울시 기념물로 정해져 보호를 받고 있어서 옛날의 흔적을 알 수 있게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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