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다이앤 스탠리 지음 | 맑은가람
미켈란젤로
다이앤 스탠리 지음
맑은가람 / 2008년 10월 / 48쪽 / 9,000원로도비코 부오나로티는 피렌체의 존경받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의 재산과 명예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는데, 1474년 그는 임시 행정장관직을 권유받았고, 그의 가족은 새 직장이 있는 투스카니 지방의 카프레세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했다. 1475년 3월 6일, 이른 아침 그의 둘째 아들이 그 집에서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디 리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다. 훗날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간단히 미켈란젤로라고 불렀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가족들은 다시 피렌체로 돌아갔지만 미켈란젤로는 가족들과 함께 피렌체로 갈 수 없었다. 어머니인 프란체스카가 자주 앓아누웠기 때문에 아기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의 부모는 미켈란젤로를 근처 시골 작은 마을에 사는 유모에게 맡겼다. 그 마을은 석공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유모 역시 석공의 아내였던지라 아기 미켈란젤로는 조각칼로 돌을 깨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곤 했다. 나중에 미켈란젤로는 유모 밑에서 자라면서 조각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회상했다.
미켈란젤로가 겨우 여섯 살이던 1481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가 재혼하여 미켈란젤로를 다시 피렌체에 데려와 학교에 입학시킨 것은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미켈란젤로의 이웃에는 예술가의 견습생으로 일하는 프란체스코라는 형이 살았는데, 그 형은 미켈란젤로가 예술을 향한 뛰어난 재능과 진심 어린 열정이 있는 것을 보고 공부할 만한 그림들을 가져다주곤 했다. 프란체스코는 피렌체에서 제일가는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여서, 가끔 스승의 작업실에 미켈란젤로를 데려가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1488년, 미켈란젤로는 기를란다요의 견습생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초보 견습생이었지만 미켈란젤로는 다른 견습생들과 함께 기를란다요 일생의 가장 중요한 역작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프레스코는 '신선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갓 칠한 회벽에 그림을 그리는 미술 기법인데,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로부터 프레스코화 기법을 배운 기간은 고작 1년이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피렌체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한 인물로 말미암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일하고 1년 정도가 지나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다스리던 로렌초 데 메디치를 만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피렌체 공화국은 부유한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고, 로렌초 데 메디치는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부호였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자신의 정원에서 조각가를 양성하기 위한 특수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학교에서 수학할 학생들을 모집하던 중 로렌초는 기를란다요에게 견습생 중 몇 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고, 기를란다요가 선택한 학생은 프란체스코와 미켈란젤로였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의 비범한 재능에 감동해 미켈란젤로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대 주었고,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를 위해서도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인 1490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제의로 메디치 가문에 양아들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그 당시는 예술이 부흥하던 시대였는데, 미켈란젤로가 참여하게 된 메디치가가 중심이 된 귀족사회는 식사하면서 시, 과학, 철학, 예술을 자신들의 대화 주제로 삼고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깊은 생각을 시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의 학교 동창 중에는 로렌초의 세 아들인 피에로, 지오바니, 줄리아노와 조카 줄리오도 있었는데, 함께 자라난 이 다섯 명의 소년들 중에 네 명이 역사에 남을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영리했던 지오바니와 그의 사촌 줄리오는 훗날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트 7세의 자리에 올랐고, 피에로는 비록 엄청난 불운을 가져왔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세계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예술가 자리에 올랐으니 이들 모두를 능가하는 인물이 되었다. 1492년 4월, 로렌초 데 메디치가 세상을 떠났고,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부터 미켈란젤로는 그 후 어려워진 가족의 생계를 평생 책임졌다.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고, 그의 아들인 피에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르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아들 피에로는 아버지처럼 뛰어난 지도자가 아니었다. 피에로는 모든 사람들과 분쟁을 일으켰고, 자주 잘못된 결정을 내렸으며, 피렌체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피에로를 '불운의 피에로'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조용히 혁명을 논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피에로는 피렌체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피렌체를 떠났고, 군중은 그가 머물던 궁을 약탈했다. 이렇게 메디치가는 통치 60년의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메디치 가문과 가깝게 지내 왔기 때문에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났다.
일을 찾아 로마로 간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유명인사로 만들어줄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 사람은 은퇴를 앞둔 나이가 지긋한 프랑스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팔에 안은 모습을 대리석 조각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이런 주제를 가진 미술품을 '피에타'라고 부르는데 이탈리아어로 '경건'이라는 뜻이다. 실제보다도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미켈란젤로가 동정녀 마리아가 입은 겉옷의 주름을 깎아내고, 예수님의 손에 있는 정맥과 힘줄을 표현하는 마지막 작업을 마쳤을 때 로마 사람들은 넋을 잃고 이 작품을 쳐다보았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상으로 같은 시대의 예술가들을 능가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의 예술가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조각가로 유명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있는 동안 그의 친구들은 차츰 피렌체의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예술가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새롭게 선출된 정부는 도시를 위해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의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사업 중 하나는 피렌체 대성당 뜰에 있는 '거인'이라고 불리던 거대한 대리석을 조각하는 것이었다. 처음 손을 댄 조각가가 대리석을 잘못 잘라 놓고는 버려두어 아무도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상태였는데, 도시의 원로들은 이 흉물스런 대리석 덩어리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조각가를 찾았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그들이 찾는 적임자라고 생각했고, 피렌체로 돌아와 성당 위원회 앞에 자신의 제안서를 가지고 갔다. 그 직후 위원회는'거인'이 미켈란젤로의 것임을 공표했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는 키가 5미터나 되는 다윗 상을 생생하게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이 다윗 상은 이미 피에타 상으로 유명해진 미켈란젤로를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때부터 미켈란젤로는 후원자들의 주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작업을 요구받았던지 훗날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림과 조각이 나를 망치고 말았다…… 차라리 내 젊은 시절을 성냥 만드는 법을 배우며 지냈다면 그게 나을 뻔했다."
한편,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소환을 받아 로마로 가게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세상에 영원히 남길 자신의 기념비적인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무덤 사업을 시작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이 일이 자신에게 앞으로 얼마나 큰 짐이 될지 몰랐을 것이다. 이 일은 40여 년간이나 미켈란젤로를 악몽처럼 따라다니며 그의 명성에 먹칠하고, 영혼을 파괴했다. 미켈란젤로의 전기 작가 콘디비는 이 사업을'묘지의 비극'이라고 불렀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의 기념비적인 무덤을 만드는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으나,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무덤을 만드는 것이 불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율리우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이름을 따 지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도 천장은 더더욱 싫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일이 교황의 건축가이자 자신의 경쟁자인 브라만테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했다. 천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돈도 안 되고, 시간은 많이 걸리며, 작업하기도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떠맡기려는 수작일 것이라고 미켈란젤로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때부터 4년간 미켈란젤로는 깨어 있는 시간은 모두 16미터 높이의 천장에서 보냈다. 대부분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누워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주 불편하게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림을 그렸다.
1512년 10월 31일, 마침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사람들이 물밀듯이 안으로 밀려 들어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압도되었다. 천장을 빙 둘러 미켈란젤로는 예수님의 조상과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놓았다. 9개의 칸으로 이루어져 있는 천장에서 미켈란젤로는 창조와 파멸의 위대한 성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날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한 천재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그 과정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한편,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가 완성되자 바로 율리우스 2세의 묘지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1513년 교황 율리우스가 죽자 더욱 급해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교황의 부름을 받게 된다.
새 교황 레오 10세는 소년 시절부터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궁에서 함께 공부하고 생활한 로렌초의 둘째 아들 지오바니 데 메디치였다. 레오는 미켈란젤로에게 산 로렌초에 있는 가족 성당의 외벽 장식을 부탁했다. 미켈란젤로는 새로운 성당의 외관을 디자인해서 제출했고 교황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3년 동안이나 그 성당의 외벽 일에 몰두했는데, 이상하게도 어느 날 사업이 갑자기 취소되었다. 모욕을 느끼고 황당한 미켈란젤로는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학자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까지도 산 로렌초 성당의 앞면은 여전히 장식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 후 13년간 로마의 동란, 피렌체 공화국의 몰락, 교황이 두 명이나 더 바뀌는 사건, 전염병의 유행,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겪으며 미켈란젤로도 어느덧 노년이 되었다.
예순 살이 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정착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율리우스의 묘지를 완성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교황 클레멘트가 죽자 새 교황 파울루스 3세는 미켈란젤로의 후원자가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이를 거절하려 하자 교황은 화를 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새 교황의 요구로 다시 묘지 작업을 뒤로하고 시스티나 대성당에 새 프레스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 작업은 천장이 아니라 제단 뒤의 넓은 벽에 그림을 그려는 것이었다. 가로 14미터에 세로 12미터라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제단 높은 곳에 성인들과 천사들의 호위를 받는 성난 그리스도를 그렸고, 그리스도의 밑에는 인간들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올라오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했다. 축복받은 자들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죄인들은 끔찍한 마귀가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모습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 또한 그 그림 속에 섬뜩한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성당 벽 전체를 극적이면서도 오싹한 장면,〈최후의 심판〉으로 채우는 작업에 열정을 쏟았다. 〈최후의 심판〉은 너무나 생생하면서도 간담을 서늘케 하는 그림이이서 교황 바울이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나체의 인물들이 너무 많이 그려져 있다고 망측하다는 평이 돌았고, 그러한 평가에 미켈란젤로는 화를 냈지만, 결국 2년이 지나, 다른 화가가 그림 속의 나체에 옷과 천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1545년 2월 '묘지의 비극'이라 불린 율리우스에게 바치는 기념비의 끝을 맺게 되었다. 원래의 디자인에서 대폭 축소되었고 미켈란젤로가 만든 조각품은 세 점밖에 없었다. 율리우스의 후계자들과 미켈란젤로는 이 묘지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교황의 뼈는 다른 곳에 묻혔다. 1547년에 미켈란젤로가 72세가 되었을 때 교황 파울로스 3세는 미켈란젤로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임명했다. 브라만테가 새로운 성당 건축을 시작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공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그는 이 성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남은 생애를 이 작업에 바칠 생각이었다. 90세가 가까워져 오는 나이에도 미켈란젤로는 매일 건축 현장에 가서 공사를 감독했다. 미켈란젤로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이 임무에 마지막 17년의 시간을 쏟아 부었음에도 미켈란젤로는 그 어떤 보수도 거절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노라고 말했다.
죽기 전에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지은 시와 그림들, 그리고 설계도 등을 자세히 검토하고 아무나 자신의 작품들을 보지 못하도록 불태워버렸다. 그때 미켈란젤로의 생각은 이미 다음 세상과 영혼의 구원을 향하기 시작했다. 1564년 어느 추운 겨울날, 미켈란젤로는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살았던 시대를 살았던 미켈란젤로는 그들 중 단연코 최고의 예술가다. 예술의 세 분야인 조각, 회화, 건축 모두에서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는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미켈란젤로와 견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미켈란젤로의 개인적인 삶을 잠깐 살펴보면, 그는 평생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좋은 음식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으며 번 돈의 대부분을 피렌체에 있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보냈다. 하지만, 정말 원해서라기보다는 의무감에서 돈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친구들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외롭고도 괴로움 많은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애정 깊은 우정을 맺은 일이 놀랍게도 두 번 있었다. 괴팍한 미켈란젤로와 친구가 된 첫 번째 사람은 중년의 명문가 출신 미망인 비토리아 콜로나 부인이었다. 그녀는 지적이고 유명한 시인이었으며 매우 세련되고 독실한 여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는 한 남자의 고뇌에 찬 진지한 이야기들을 비토리아에게 터놓았다. 또 한 사람은 젊고, 지적이며, 친절한 귀족 토마소 카발리에리였다. 미켈란젤로에게 카발리에리는 완벽한 인간의 이상 그 자체였다. 미켈란젤로는 토마소에게 열심히 시를 지어 주었고 아름다운 그림을 선사하였으며, 미켈란젤로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 토마소는 미켈란젤로의 곁에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너무나 훌륭한 아내가 있다. 나를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도록 격려해준 내게는 과한 아내, 그것은 나의 예술이다. 나의 작품은 곧 나의 자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