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슈퍼스타 2
정채봉 지음 | 샘터
내가 좋아하는 슈퍼스타 2
정채봉 지음
샘터 / 2008년 10월 / 168쪽 / 11,000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항 -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간디는 1869년 10월, 인도의 '포르반다르'라는 작은 항구 마을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그의 부모님은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를 진실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간디는 학업 성적이 중간을 밑돌 정도였으며, 수줍음을 많이 타서 수업이 끝나면 달음질해 곧장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간디는 결코 선생님에게나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한편, 그 당시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간디의 친구들은 힌두교가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므로 인도인들이 힘이 없어 영국인에게 지배를 받는다며 몰래 고기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간디도 마침내 친구들을 따라 염소 고기를 몇 번 먹었습니다. 또한 간디는 친구와 함께 머슴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담배를 사 피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죄책감에 시달리던 간디는 자신의 잘못을 적은 편지를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그 무렵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간디는 그 뒤로 부모님을 실망시킬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1888년 9월, 열아홉 살의 간디는 변호사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가서 3년 뒤에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해 본 경험이 없던 간디는, 법정에서 당당히 말해야 하는 변호사 일을 잘 해내지 못했는데, 마침 남아프리카로부터 소송 사건을 의뢰받아 남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그곳으로 가던 중에 간디는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간디는 1등 칸의 표를 사서 기차를 탔으나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짐칸으로 밀려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내 권리를 위해 싸울 것이다. 인종 차별은 깊은 병이다.' 이렇게 마음먹은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의 많은 인도인들이 심한 모욕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후 남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 정부가 인도인의 선거권을 박탈하겠다고 하자, 간디는 그 사실을 인도 당국에 알리고, 서명 운동을 벌였습니다. 또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를 고용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백인들은 그러한 간디가 인도인들을 꾀어 자신들을 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몇 번이나 간디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인도 정부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여 간디를 폭행한 자를 처벌하라고 했으나, 간디는 그들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라며 아무도 처벌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간디는 인도인들을 깔보는 오만한 영국인들이 미웠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물리친 것입니다.
191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떠나 인도로 돌아간 간디는 아마다바드 방직공들의 파업 문제에 대한 변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방직공들의 임금이 워낙 낮았기 때문에 파업을 말릴 수가 없었던 간디는 사태의 해결을 위해 단식을 시작했고, 이는 공장주는 물론 직공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흘이 지나자 파업은 중단되었고, 공장주들과 직공들은 합의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폭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무릅쓴 고통을 겪음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적까지 사랑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비폭력 평화운동을 벌이던 간디가 78세 되던 1947년, 간디와 인도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인도의 독립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그 이듬해, 어이없게도 한 청년의 총에 맞아 영원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겨레의 외로운 수호신 - 이순신(1545~1598)우리 민족의 수호신인 이순신 장군은 조선 제12대 인종 임금 때인 1545년,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선비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격이 쾌활하고, 양보심이 강해서 친구가 많았던 이순신은 특히 유성룡이라는 친구와 각별히 친하게 지냈는데, 유성룡이 글공부에 소질을 가진 반면, 이순신은 무술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습니다. 무술 연마에 온갖 노력과 시간을 쏟은 이순신은, 무관을 뽑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함경도의 권감이라는 작은 벼슬을 얻었습니다. 한편 이순신이 함경도로 가서 보니 백성은 가난에 찌들어 있었고, 변방인데도 군졸들의 생활은 술과 노름으로 무사태평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백성을 돌보고, 군사들을 타일러 석 달 만에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함경도의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 이순신은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무찔렀지만,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거짓 보고로 아무런 표창도 받지 못했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이순신의 성격이 못마땅했던 벼슬아치들이 자신들의 부정이 탄로 날까 봐, 이순신을 모함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순신은 정직한 벼슬아치들로부터 그동안의 공헌을 인정받아 '조산보만호'이라는 벼슬과, 녹둔도라는 섬을 지키는 '둔전관' 벼슬도 얻게 되었습니다. 녹둔도에 오랑캐들이 쳐들어 와서 양민들을 학살하고 행패를 일삼는 일이 벌어졌을 때, 부족한 병력으로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운 결과, 싸움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또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가, 친구인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도 정읍의 현감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이순신은 바로 전쟁 준비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그동안의 잦은 싸움으로 터득한 여러 가지 전략을 동원하여 철갑선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거북선'입니다.
1592년 4월 13일, 왜적은 우리나라를 한입에 삼키기 위해 성난 상어 떼처럼 부산 앞바다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울을 향해 진격해 왔고,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라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당장 칼을 빼들고 나서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싸움은 우리나라의 큰 승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옥포대첩'입니다. 이어서 사천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처음으로 사용되어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싸움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순신 장군을 괴롭히려는 계략이 꾸며지고 있다는 것을 장군은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엉뚱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순신 장군은 정탁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고, '백의종군'이라고 하여 아무 지위도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싸움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다시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우리 함대의 상황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있어서 형편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급히 회의를 열었고,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서 장군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했습니다. 통제사를 맡은 이순신 장군은 다시 군사와 배를 모았고, 겨우 12척의 배로 왜적의 배 31척을 격침시키게 되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이번에는 노량 앞바다에서 한참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이 적의 탄환에 왼쪽 가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장군은 병사들이 알면 사기가 떨어질까 봐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뒤늦게 장군이 죽은 것을 안 병사들은 목놓아 울었습니다. 싸움이 끝난 뒤, 나라에서는 장군에게 높은 벼슬과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공적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어떤 칭호로도 감히 대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평화를 위하여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남서쪽 뷔르텐베르크의 시바벤 지방에 있는 조그만 도시 울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조그마한 전기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조상 대대로 독일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이었고, 어머니는 인정이 많은 분으로, 음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몸이 약해서 발육도 몹시 더뎠고, 말도 세 살이 넘어서야 간신히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성격도 무척 과묵한 편이라 늘 입을 꾹 다물고 지냈습니다. 학교 공부에도 관심을 갖지 못하는 아인슈타인을 위해 아버지는 방과후에 삼촌에게 지도를 받도록 해 주었습니다. 삼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인슈타인에게 수학과 과학에 접근하는 방법을 재미있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아인슈타인은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중ㆍ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학교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집에 돌아오면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그때부터는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삼촌이 권해 준 수학과 과학에 관한 책을 즐겨 볼 수 있었으니까요. 이내 아인슈타인의 수학 성적은 학교에서 단연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1896년, 열일곱 살 때 대학에 들어가게 된 아인슈타인은 뛰어난 수학 실력 때문에 학교에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물리학에서는 뉴턴의 '역학 법칙'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연구실에 처박혀 있던 아인슈타인은 역학이 빈틈없는 학문이 아니라는 의문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바로 그러한 탐구 정신과 연구가 뒷날 그 유명한 '상대성 원리'를 낳게 한 것입니다.
졸업을 하고 베른의 특허국 검사원 일을 맡게 된 아인슈타인은 여러 가지 발명품을 검사하며 몇 개의 논문을 썼는데, 그것은 그동안 연구해 온 '광양자 이론', '브라운 운동의 이론', '상대성 이론' 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서른 살이 채 안 된 아인슈타인은 곧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독일의 각 대학과 연구소에서 취임 요청이 쇄도하여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의 왕립 천문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 '빛은 태양의 중력의 힘으로 굴절된다'를 확인하기 위해 실제 관측에 나섰습니다. 확인 결과, 이 이론은 사실로 나타났고, 뉴턴의 원리 이후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는 찬사가 아인슈타인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의 연구 성과를 이용하여 원자 폭탄을 만드는 일을 도와 달라는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과 폭력을 싫어하는 아인슈타인은 그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성공에 질투를 느낀 동료 과학자들은 그의 상대성 이론을 '유대인의 수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온순하기만 했던 아인슈타인은 분노하여 유대인을 위한 국가 수립을 서둘렀습니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그동안의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아직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극심한 혼란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고, 나치의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었지만, 유대인이고 평화주의자라는 이유로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결국, 두 차례의 암살 습격을 피한 아인슈타인은 모든 직위에서 쫓겨났고, 미국으로 건너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간 아인슈타인은 다행히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 있는 공동 학술 연구소의 교수로 초청되어,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이 70세에 연구소에서 은퇴한 아인슈타인은 그 뒤에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운동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1955년 4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습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물리학자로만 알 뿐, 그가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많은 고초를 겪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업적보다는 삶을 어떻게 이루어 갔는가에 있는 것이라면, 아인슈타인은 노벨 평화상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로키산맥의 미풍처럼 - 이사도라 덩컨(1877~1927)이사도라 덩컨은 1877년 5월 26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화로운 저택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사도라의 아버지는 그녀가 갓난아기였을 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가 맡아야 했고, 이사도라의 어린 시절은 지독하게 가난하기만 했습니다. 음악가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음악 강습으로 어렵사리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이사도라는 4남매 가운데 가장 용감하고 적극적인 아이였고, 가난은 이사도라의 용기를 허물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녁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쳐주고, 시를 읊어주었으며,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이사도라는 어머니가 연주해 주는 쇼팽의 왈츠 마주르카, 멘델스존의 무언가 등을 들으며 무용 스텝의 영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즐거움으로 시작했던 춤이 나중에는 그녀의 생활에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도라는 여섯 살 무렵부터 이웃의 어린 아기들을 모아 놓고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사도라의 무용 레슨은 아주 인기가 좋아서 상당히 오래갔고, 나중에는 이웃의 소녀들이 이사도라를 찾아왔으며, 그들의 부모들이 수강료라며 약간의 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사도라가 성장하던 그 무렵 샌프란시스코에는 유명한 공연 단체가 많이 찾아왔는데, 이사도라는 극장의 맨 뒷좌석에서 유명한 예술가들이 펼치는 황홀한 세계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어 상상력이 풍부했던 이사도라는 무대를 바라보면서 무용가로서의 빛나는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이사도라는 희망에 젖어 그들에게 자신의 춤을 선보였지만, 조금의 호감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에서나 어울리는 춤'이라는 핀잔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사도라는 무용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이사도라의 가족은 시카고로 가기고 결정했고, 가진 돈도 거의 없이 시카고에 도착했습니다. 이사도라는 이 극장 저 극장을 찾아다니며 왈츠나 마주르카를 추어 보였지만, 매니저들은 대중적인 춤을 요구했고, 이사도라는 자신의 이상과는 맞지 않는 춤을 추면서 대중을 즐겁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달리의 극단이 시카고에서 공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사도라는 여러 날을 극장 문 앞에서 기다린 끝에 달리를 만났고, 여러 번의 설득 끝에 겨우 그의 극단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달리는 이사도라에게 뉴욕에 와서 연습을 하라고 했고, 그녀의 가족은 뉴욕으로 갔습니다. 맨 처음 이사도라가 맡은 역은〈미스 피그말리온〉이라는 작품의 단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순회공연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춤과 예술에 대한 이사도라의 집념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이사도라는 음악가인 '에델버트 네빈'을 만나게 되었고, 이사도라의 춤을 본 네빈은 무척 감격하여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발표회를 갖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둘은 1898년, 카네기 홀에서 합동 발표회를 열었고, 이사도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어 뉴욕 사교계의 고급 살롱이나 부자들의 별장에 초청되어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이사도라는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 이사도라는 1902년 부다페스트 공연을 시작으로 죽을 때까지 대중에게 갈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전 유럽을 무대로, 예술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지칠 줄 몰랐습니다. 이사도라는 행동하지 않는 사람, 환경의 어려움에 주저앉는 사람,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유분방한 성격과 화려한 춤. 이사도라에게 있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에 세운 뜻을 중도에서 허물어 버리지 않고 일생 동안 계속 키워 나간 그 놀라운 의지와 추진력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