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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풀꽃

정채봉 지음 | 샘터
바람과 풀꽃

정채봉 지음

샘터 / 2008년 8월 / 136쪽 / 8,500원



천 년 노래


아이야. 천년을 바람결처럼 휘감고 살아온 내 이야기를 들어주렴. 아주 먼 옛날 신라 말, 나는 서라벌에 있는 대궐 담장 밖에서 엄마은행나무의 한쪽 팔로 살고 있었어. 엄마은행나무는 어찌하여 엄마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우리한테 들려주곤 했지. 처음엔 우리 엄마도 농부의 소쿠리 속에 든 여러 은행알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는데, 어느 날, 농부가 살고 있는 마을 앞길로 임금님의 행렬이 지나가게 되었대.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있는데, 글쎄 농부의 철없는 아이가 좋아라고 길 한가운데로 뛰어나가는 것이었어. 이때 임금님을 호위하던 병정들이 칼을 빼들고 달려왔대. 그 시절의 법은 누구든 임금님의 앞길을 가로지르면 죽여도 되었다는구나. 바로 이 순간 행렬 속에서 말을 탄 소년이 달려 나와서 농부의 아이를 채 갔는데, 그는 바로 왕자님이었어.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왕자님의 넓은 사랑에 감격했대. 특히나 자식을 살리게 된 농부는 왕자님이 너무도 고마워서 임금님의 궁이 보이는 대궐 담 곁에 은행알 하나를 심게 되었는데 그 은행나무가 우리 엄마였다는 거야.

그런데 신라 말에는 전쟁이 그칠 새가 없었단다. 어느 날 대궐에서는 긴 회의가 열렸는데, 싸움과 싸움에 지친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한테 주어버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는 회의였지. 더러는 반대하고, 더러는 찬성했어. 반대하는 사람 가운데는 왕자님이 있었어. "어찌 천 년이나 지켜 온 왕실을 하루아침에 죽 먹듯 넘긴단 말입니까?"왕자님은 너무도 안타까워했어. 바람처럼 소문은 점점 퍼져 나가서 나중에는 온 나라 안 백성이, 그리고 산과 내, 들도 울었지.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어. 궁궐에서 삼베옷을 입고, 삼으로 꼰 줄을 가지고 왕자님이 걸어 나오더니 우리 쪽으로 와서는 여러 형제 가지 중에서도 하필이면 나한테다 목을 매는 것이었어. 이때 나는 엄마나무의 기도를 들었지. '벼락을 주십시오. 내가 죽음으로 저 생명의 끈을 잇게 하소서.' 순간 하늘로부터 번쩍 빛이 났고, 나는 정신을 잃었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왕자님의 지팡이가 되어서 성문을 나서고 있었지.



내가 충청도를 거쳐 여기 용문산까지 왕자님의 지팡이로 다니면서 생명의 끈을 놓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왕자님의 눈물 덕분이란다. 목마르면 젖어 오고, 목마르면 젖어 오고. 마침내 이곳 용문산 자락에다 나를 꽂으면서 왕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은행나무야, 나는 곧 죽으나 너는 내 눈물의 뜻을 키우면서 천년만년 살아 다오. 베풀기 위해서 살아 다오. 그리고 오래오래 살기 위해서는 적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겨 두기 바란다." 그날 이후 나는 왕자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단다. 내 온몸을 적시고 가는 소나기도 사랑하고, 내 겨드랑이에, 허벅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풀한테도 마음을 모으고, 심지어는 내 귀를 잘라간 벼락까지도 사랑한단다. 아이야. 이 세상살이가 외롭고 슬플 때면 내 이야기를 떠올려 다오.



바람과 풀꽃

활짝 비가 개었습니다. 저는 친구한테 전화를 걸고자 집을 나왔습니다. 날씨도 좋아지고 했으니 낚시질을 하러 떠나는 게 어떨까 의논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 아이를 발견한 것은 공중 전화통이 보이는 솜틀집 앞에서였습니다. 근처 어디에 화원이 있는 듯, 꽃향기가 흐르고 있는 그곳에서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골목 구석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냐고 물어도 그 아이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내 곁에 와서 섰습니다. "저 아이가 돈을 잃은 모양이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한 아저씨가 또 멈춰 서서 물었습니다. "보석이라도 잃었는가요?" 이때 회오리바람이 뭉클뭉클 일어났습니다. 구석 안쪽에 박혀 있던 휴지들이 공중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아, 하고 아이가 갑자기 환호하였습니다. 아이의 손에는 어이없게도 보잘것없는 대리석 조각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네가 찾던 것이 겨우 그것이었단 말이냐?" 어른들은 별 싱거운 아이도 다 보았다며 흩어졌습니다. 나는 강 언덕 쪽으로 멀어져 가는 아이의 머리 너머로 찬란히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공중 전화통으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더니 혼선이었습니다. "어머니, 한 번도 바람을 본 적이 없다는 어른들이에요. 내 동무 풀꽃이 왜 예쁜지를 알려고 하지 않아요. 어른들은 속옷 한 벌을 껴입거나 아니면 벗어버리는 것으로 바람을 다스리고 있어요." 그만 참을 수 없었는지 어머니 되시는 분이 콜록콜록 기침을 하였습니다. "어머니, 풀꽃의 어여쁨은 들녘을 나는 나비들을 위하여 피어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잖아요?" 기침 소리가 더욱 커졌습니다. 콜록, 콜록, 콜록 -. 순간, 탁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 들었습니다. "여보세요. 여기는 출장 수리반입니다. 고장계 나오세요." "네. 고장계입니다." "밖에 와서 전화선을 조사해 보니 이상이 없는데요." "거참, 묘한데. 기계에도 전화선에도 이상이 없는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니……." 저는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친구에게 전화 걸 생각도 없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엿들었던 전화 속의 주인공만이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문득 작은 대리석 조각을 주워 간 아이가 생각났습니다.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열심히 그것을 찾았을까? 나는 강 언덕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강 언덕 위에는 유치원이 있었습니다. 마침 미끄럼을 타고 노는 아이들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얘들아, 얼굴이 둥글고 눈이 큰 아이를 못 보았니?" "아저씨, 혹시 저기 보았어요?" 한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꽃밭 가운데 성모자 상이 서 있는데 성모님의 품에 안겨 있는 그는 대리석 조각을 주워 가지고 간 아이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비둘기가 한 마리 성모님의 팔꿈치에서 훨훨 날아갔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성모 마리아님의 팔꿈치, 언제 보아도 있던 굽 떨어져 나간 상처가 감쪽같이 나아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전화 속에서 들리던 말씀의 주인공과 기침을 하던 그의 어머니가 비로소 누구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이상한 사진기

그 사람의 어릴 적 소원은 무엇이든 뚝딱하면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를 발명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는 사람들의 옷 속으로 알몸을 볼 수 있는 투시경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더 나이가 들면서는 밥벌이가 되는 것들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어 사는 동안에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세상을 하직하면서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꼭 발명해 내고 싶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다가 어느 날 문득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를 만들어 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고 지내는 수도자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는 소원대로 과자가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를 만들었으면 했고, 젊은 날에는 재미로 투시경을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저 제 욕심을 채우고 싶었지요.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머지않은 지금에 제가 발명하고자 하는 것은 다릅니다. 저는 마음을 찍는 사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글쎄요.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지극히 필요한 물건일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 제가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연구실로 들어가 실험과 조작을 거듭하였고, 마침내 완성된'마음 찍는 사진기'를 메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마침 거리에서는 정치인의 군중집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분의 가슴속에는 가난한 국민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서 한 장 찍었습니다. 호텔 커피숍에서 기자를 만나고 있는 유명한 예술가도 몰래 찍었습니다. 대학교로 들어가서 근엄한 박사님도 찍었고, 학생 회관으로 가서 학생회장도 찍고 노동 회관으로 가서 노조 위원장도 찍었습니다. 지나가는 아저씨, 할머니, 아이도 찍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를 하며 찍어온 사진들을 인화지에 옮겨 본 그는 아연 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감투, 돈다발과 여체, 안락한 침대, 자동차 등 모두 다 실망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딱 하나, 시골의 작은 초가집 뜰에 상추며 쑥갓이며 부추가 잘 자라고 있는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할머니의 마음인가 봅니다. 로봇이 찍혀져 나온 사진은 아이의 것일 테고.



그는 마음 찍는 사진기를 들고 수도자를 찾아갔습니다. "마음을 찍는 사진기를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거리에 나가서 찍은 사진을 인화해 보니 한심스러운 것뿐이었습니다. 감투나 돈다발, 여체……." "그런데 그 사진기는 왜 여기까지 가지고 왔습니까?" "마음다운 마음을 찍어 보고 싶어서요. 아까 수도자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 수도자님을 이미 찍었습니다." "뭐라구요? 안 됩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수도자는 그의 손에서 마음 찍는 사진기를 빼앗아 내동댕이치면서 소리쳤습니다. "이건 악마가 들어가서 장난하기 쉬운 물건입니다. 이후로는 절대 이러한 것을 만들지 마시오."



흙 한 줌

유미는 할머니 집이 보이는 살구나무 밑에서부터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마침 텃밭에서 상추를 솎고 계시던 할머니가 두 팔을 벌리며 나왔다. "서울에서 우리 유미가 왔구나." 그러나 유미는 할머니를 보자 뒷걸음질을 했다. "왜 그러냐? 이 할미가 싫으냐?" "아냐요. 새 옷을 입었으니까요. 할머니한테서 더러운 흙이 옮을까 봐 그래, 할머니." "원, 녀석도." 할머니의 얼굴에 그늘이 스쳤다. 이날 밤에 할머니는 유미를 팔베개해 눕히고서 물었다. "유미야, 왜 흙이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느냐?" "옷에 묻혀 가면 엄마한테 더럽다고 야단맞아. 서울에는 흙이 적어. 그러니까 깨끗해." 할머니는 까칠한 손으로 유미의 뺨을 만졌다. "이 할머니의 손이 까칠해서 싫지?" "아니야, 할머니. 할머니한테서는 구수한 튀밥 내음이 나. 나는 할머니의 이 내음이 엄마의 화장품 내음보다 더 좋은걸." "이 할미한테서 나는 것은 흙내음뿐인데. 흙은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소중한 것이란다. 흙에서 곡식도 나고, 채소도 나고, 과일 나무도 나고. 흙이 없으면 우리는 살지 못해요."



서울로 올라가는 유미한테 할머니가 흙이 담긴 작은 옹기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이 속에 내가 비밀을 하나 살짝 묻어 놓았으니 집에 가서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고 사흘마다 한 번씩 물을 주거라. 그러면 비밀이 풀릴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유미는 할머니가 시킨 대로 흙 담긴 옹기를 창가에 두고 사흘마다 한 번씩 빠뜨리지 않고 물을 주었다. 얼마 가지 않아 흙 속에서는 푸른 싹이 돋아났고, 오늘 아침에는 마침내 노오란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엄마, 할머니가 주신 비밀이 이제야 풀렸어." "오오, 그렇구나. 금잔화다." "엄마, 흙 한 줌이 저렇게 예쁜 꽃을 피우는데, 엄마는 왜 흙을 미워해?" "아니지. 네가 옷이나 손발에 흙으로 분탕질을 해 오니까 네 부잡스러운 것을 야단친 것이지 흙을 미워한 것은 아니란다." "참, 엄마. 시골 할머니 집에 가서 자던 밤에 말이야. 내가 하늘동네에 올라간 꿈을 꾸었는데, 우리 할머니께서 치마폭에 흙을 담아 가지고 거기에 오셨지 뭐야."



그리고 또 그 나머지

못난이 잎이 이 세상에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는 실비가 내렸다. 못난이 잎은 태어나자마자 형제들로부터 가슴 아픈 소리를 듣고 말았다. "어머, 쟤는 우리보다 손이 하나 더 있네." "정말 그렇구나. 별 애도 다 보겠네." 이날부터 못난이 잎은 고개를 숙이고 지냈다. 못난이 잎한테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 원두막에서 간혹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피리는 외다리 소녀가 불었다. 어느 날, 외다리 소녀는 동생과 함께 못난이 잎이 살고 있는 밭두렁으로 다가왔다. 이때 못난이 잎은 일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소녀의 발밑에 밟혀 들어갈 뻔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다행히 소녀의 발이 하나 없음으로 해서 놓여나게 되었다. 못난이 잎은'병신'됨으로 해서 남에게 오히려 덕을 베풀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외다리 소녀와 그의 동생이 나누는 대화를 못난이 잎은 들었다. "누나, 참외 하나만 따먹을게." "안 돼. 익은 참외는 하나라도 더 내다 팔아야 해. 그래서 엄마의 수술비를 얼른 마련해야 해." 이튿날부터 며칠 동안 원두막으로부터 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기다림이란 몸살나는 일임을 못난이 잎은 이때 알았다.



며칠 후 물레방앗간 모퉁이에 상여 행렬이 나타났다. 그제야 못난이 잎은 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외다리 소녀와 동생 소년이 상여의 뒤 행렬 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고 상여를 바라보고 있는 못난이 잎에게 형제들이 또다시 소리쳤다. "고개 숙여! 너는 병신이란 말이야." 못난이 잎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또 며칠이 지나자 못난이 잎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외다리 소녀와 동생이었다. "누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것보다도 누나의 하나뿐인 다리가 더 큰 멍이지? 그치, 누나?" "아니야. 하느님은 내 다리 한쪽 대신에 다른 무엇을 주셨으리라 나는 믿고 있어." 못난이 잎이 소녀와 소년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용기를 내어 살며시 고개를 든 순간, 소년의 초롱한 눈빛이 못난이 잎한테 와 머물렀다. "누나, 행운의 네잎클로버를 찾았어." 소년이 못난이 잎을 따려고 하는데 외다리 소녀가 말렸다. "따면 안 돼. 우리는 이미 보았으니까 행운을 지니게 된 거야. 우리보다 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 잎을 본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어."못난이 잎은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고개를 바로 하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하늘이 이렇게 넓고 깊을 줄이야!



내 마음 성냥개비 하나에 실어

내 고향은 외딴 두메 양지골이야. 작은 오두막집 뒤꼍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보초처럼 서 있었는데, 나는 그 미루나무의 맨 아래 막내 가지로 태어났어. 그 오두막집엔 어린 소녀가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소녀를 좋아했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녀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는데, 소녀가 들어간 방에서 이내 소녀의 아버지가 눈을 부라리며 나오더니 나를 우지끈 꺾어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어. 글쎄 내가 사랑하는 소녀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가 된 것이었어.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의 종아리를 때린 후 나를 마당가에다 던져 버렸지. 이튿날 아침, 눈이 퉁퉁 부은 소녀가 나와서 나를 집어 들며 말했지. "너로 하여 아빠의 깊은 사랑을 알았어. 너를 심어서 내 마음의 의지로 삼을 테야." 소녀는 나를 냇물 가에 꽂았고, 그날부터 나는 한 그루의 미루나무로 살게 되었어. 소녀는 종종 나를 찾아와서 내 그늘에서 쉬곤 했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소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어.

세월은 흘러갔어. 한 번만 더 소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빌었으나 소녀는 나타나지 않고, 백발이 된 농부가 톱과 도끼를 들고 찾아왔지. 나는 베어져 성냥 공장으로 흘러 들어갔어. 수십만 개비로 나뉘어진 나의 몸. 모두들 머리마다에 한 점 유황을 얹고 그곳을 빠져 나와 헤어졌지. 그런데 어느 날 내가 한 아주머니의 손가락에 잡혀 갑 속에서 나왔을 때, 나는 가슴속으로 흘러드는 전류를 느끼었지. 얼굴에 주름살이 생겨나 있기는 하였지만, 그녀는 양지골의 바로 그 소녀가 틀림없었어. 나는 조용히 기도하려는 그녀 앞의 촛불을 붙이는 데 내 온몸을 살랐지. 한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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