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다 할머니
브리기테 윙어 지음 | 미래아이
반다 할머니
브리기테 윙어 지음
미래M&B / 2008년 5월 / 88쪽 / 8,000원내 이름은 반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두고 휴가를 떠나버렸다. 솔레미오인가 어딘가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한테 가야 한다! 난 할머니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쳇!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서 지낸 적이 있다나 뭐라나. 할머니는 아주 먼 촌구석에서 사신다. 그런 지루해 빠진 곳에서 뭘 하라고? 솔직히 말하면, 여름 방학을 이렇게 보낼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할 수 없이 떠났다. 기차역으로 나를 마중 나온 할머니는 남자 같았다. 바지는 구겨지고, 손은 지저분하고, 잿빛 머리는 길게 땋아서 묵고 있었다.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완전 시골길이었는데, 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풀밭과 들판과 나무들뿐이었다. 할머니 집은 숲 끝 조용한 곳에 있었다. 집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방이 네 개였는데 층마다 하나씩 있었다. 이제 맨 꼭대기 다락방이 내 방이란다.
점심을 먹고 난 뒤, 할머니는 부엌 한 편에 놓인 커다란 소파에 털썩하고 몸을 던지셨다. "우리 낮잠을 조금만 자자꾸나." "밤에도 부엌에서 주무세요?" "아니지, 천사야. 밤엔 2층에 있는 할머니 방에서 잔단다." "그럼 3층에 있는 방은 누구 방이에요?" "거긴 할아버지 방이지." 할아버지한테 무슨 방이 필요하다는 거지?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할머니는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사방이 끔찍하게 조용했다. 텔레비전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할머니 집에는 라디오만 하나 있다.
다음 날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할머니와 나는 들판을 여기저기 산책했다. "천사야, 저기 나비 좀 보렴." "할머니, 근데 제 이름은 천사가 아니라 반다예요!" "그런데 우리 천사는 할머니 이름이 뭔지 알고 있니?" "뭔데요?" "반다." 뭐? 할머니 이름하고 내 이름하고 똑같다고? "내가 너를 반다라고 부르면, 꼭 내가 나하고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거지." 그렇구나!
할머니 집에는 시계가 없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매일 아침 8시면 아침을 먹으라고 나를 깨우신다. "할머니, 벌써 8시예요?" "창밖을 내다보렴. 앵두나무 그림자가 보이지?" "네, 기다랗게 그림자가 졌어요." "그것 보렴. 8시가 맞다니까!" 아침마다 식탁의 내 자리에는 두 잔의 우유가 놓였다. "한 잔은 할아버지 방 앞에 두렴. 할아버지도 배가 고프실 거야."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우유 잔은 반시간 후면 텅 빈다. 할아버지 방 앞에 야옹이가 앉아서 수염을 핥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밝고 아늑했다. 할머니는 수건으로 피아노와 책 더미에 앉은 먼지를 닦으셨다. "텔레비전 볼래, 천사야?" "할머니 댁에 텔레비전도 있어요?" "저기 할아버지의 장롱을 열어보렴." 장롱 속에는 희한한 잡동사니들이 가득했지만 텔레비전은 없었다. "맨 위 오른쪽에 보이지?" "이건 망원경인데요?" "오냐, 망원경은 멀리 본다는 뜻 아니냐. 텔레비전도 멀리 본다는 뜻이고. 그러니까 그게 그거지." 참 유식하신 할머님이시다! 아닌 게 아니라 할아버지 방 창문은 전망이 좋아서 망원경으로 멀리까지도 훤히 다 볼 수 있다. 나무들 사이로 뭔가 파란 것이 반짝거린다! "이 근처에 호수가 있었다니, 정말 몰랐어요!" "날씨 좋은 날 호수로 소풍을 가자꾸나." "야호, 신난다!"
그런데 며칠 동안 계속 비가 왔다. "할머니, 오늘도 비가 와요." "우리 천사는 비가 오면 집에서 무얼 했니?" "우리 집에선……." 흠, 할머니는 게임기나 컴퓨터 같은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아예 모르실 거다. "내가 진작 뜨개질을 배워 뒀더라면 네게 한 수 가르쳐 줬을 텐데." "저 뜨개질 할 줄 알아요, 할머니!" 할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시더니 껄껄껄 웃으셨다. "오늘 할 일이 생겼는걸! 반다, 할머니한테 뜨개질 좀 가르쳐 주려무나." 뜨개질을 배우는 할머니의 바늘에서 코가 자꾸 빠졌다. 결국 할머니는 바늘이며 실이며 모두 집어던지셨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거라, 반다. 도저히 못 하겠는 걸 어쩌겠니." "저도 처음에는 똑같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게 원래 그렇다는 거니, 반다?" "그럼요. 자, 이리 오세요. 다시 가르쳐 드릴게요."
며칠 후 할머니와 나는 둘이서 망원경 속에서 본 호수로 소풍을 갔다. 할머니가 준비 운동을 하셨다. 수영복을 입은 치렁치렁 잿빛 머리 할머니! "왜 웃니, 천사야?" "할머니 수영복이 참 멋있어요." "할머니가 이 줄무늬 수영복을 입고 오래전에 이곳에서 열린 수영 대회에서 일등을 했다는 얘기했었니?" 설마 그럴 리가! "할머니 수영복의 줄무늬가 꼭 우리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잠자리 같아요."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리셨다. "잠자리라, 뚱보 잠자리로구나. 그런데 호수는 아직 그 신비한 마법의 힘을 잃지 않았구나, 천사야." "마법이요?" "호수는 마치 단단한 땅처럼 너를 받쳐 줄 수 있단다. 물 위에 한번 누워 보렴. 정말 멋진 마법이 아니냐? 또 아무 생각 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가끔씩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들을 보여주기도 하지." 할머니가 빙긋 웃으시며 담요 위에 눕더니 눈을 감으셨다. "근데 할머니는 물에 언제 들어가시려고요?" "이따가. 일단 조금 쉬어야겠구나."
나는 호숫가를 조금 걷기로 했다. 어? 그런데 높이 자란 풀들 속에 무언가 숨어 있다. 그건 낡아빠진 나무 배였다! 배에 올라타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는 소리 없이 호수 위로 미끄러져 갔다. 나는 길게 누워서 배가 가는 대로 둥둥 떠 있었다. 배가 꼭 요람 같다. 살살 흔들리는 것이 참 기분 좋다. 호수에 진짜 보물이 있을까? 하지만 호수 위에는 햇살만이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바람이 부는 거지? 이 구름들은 또 뭐야? "반다……!" 할머니가 호숫가에 서서 손을 흔들고 계셨다. "보물을 찾고 있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여전히 저쪽 호숫가에 서서 손을 크게 흔들고 계셨다. 그런데 할머니가 왜 계속 한 손으로 위를 가리키시는 거지? 커다란 먹구름이었다. 당장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내 보물은 어쩌고! 노는 어디에 있지? 천둥이 무시무시하게 내리쳤다. 차갑고 굵은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추웠다. 할머니는 더 이상 손을 흔들지 않으셨다.
추워. 이빨이 미친 듯이 덜덜덜 떨리네. 저 앞에 갑자기 커다란 물고기가…… 잠자리 줄무늬가…… 헤엄치고 있다……. "할머니!" 할머니가 배 위로 올라오셨다. "자, 할머니 품으로 오려무나." 축축이 젖은 부드럽고 주름진 할머니 품을 절대로, 다시는 놓지 않을 거야! 할머니가 배 옆을 꽉 잡더니 갑자기 기다란 막대기를 꺼내셨다. 할머니가 그걸로 물을 젓자 한순간에 우리는 앞으로 쑥 나갔다. 천천히, 천천히 호숫가가 점점 다가왔다. 그리고 비가 그쳤다. 나는 할머니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나는 팔을 할머니 목에 두르고, 얼굴을 비볐다. "할머니가 이렇게 멋진 수영 선수인 줄 몰랐어요. 고마워요." "천둥 번개가 할머니 수영 솜씰 보더니 물러갔지 뭐냐."
먹구름이 사라졌다. 우리는 옷가지들을 나무에다 깃발처럼 걸었다. "옷이 다 마를 때까지 호숫가를 한 바퀴 산책하자꾸나." "할머니, 호수에 자주 오세요?" 할머니가 걸음을 멈추시더니 웃으셨다. "이런, 여기에 와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안 나는구나. 할아버지가 아직 건강하실 때 가끔 왔으니까 얼마만이야."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가방에 든 조약돌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반다, 힘들게 왜 무거운 돌들을 들고 왔니?" "호수를 몽땅 가져올 수는 없잖아요, 할머니. 어느 돌멩이를 골라야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는걸요."
집에 돌아오자 할머니는 뜨거운 코코아와 함께 초콜릿을 드셨다. "할머니, 초콜릿을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얘야, 이 할미가 너무 힘을 썼잖니. 할머니 신경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것뿐이란다." 할머니는 부엌에 있는 소파에 누우셨다. 그리고 두터운 이불을 덮고 덜덜 떠셨다. "할머니, 이마가 아주 뜨거워요!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이건 그냥 콧물이란다. 이런 걸로 의사를 부를 필요는 없어. 이런 감기는 그냥 너 혼자서도 낫게 할 수 있단다. 에취!" 나는 할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보리수 찻잎 세 숟가락에다 뜨거운 물 반 리터를 붓고, 7분 동안 우려냈다. 자, 이제 '감기 안녕 차' 완성! "차 맛이 어때요, 할머니?" "천사야, 꿀을 깜빡했구나." 이런!
'감기 안녕 차'를 할머니에게 만들어 드린 후, 나는 한 시간이나 부엌에 앉아서 감자랑 당근 껍질을 벗기고 있다. 손이 저리고 아팠다. 냄비에 물을 얼마나 부어야 하나? 할머니한테는 물어볼 수가 없다. 지금 막 잠이 드셨으니. 당근이랑 감자 조각은 얼마나 오래 끓여야 하는 거야? 아무튼 한참 뒤에 내 요리를 드신 할머니가 말했다. "천사야, 감자랑 당근 요리를 어쩜 이렇게 맛있게 했니!" "정말요?" 식사를 마친 할머니가 담뱃갑을 가리키셨다. "안 돼요. 할머니! 할머니는 아프시잖아요. 담배는 할머니 건강에 좋지 않다고요!" "그럼 커피 한 잔은 어떠냐? 담배는 말고." 그때였다. 따르르릉. 초인종 소리인가? 전화 소리네! 부엌 옆 골방에서 울리는 거잖아! "뭐 하니, 반다. 얼른 전화 받으렴." "여보세요! 아빠!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셨다고요? 싫어요. 아직 집에 가기 싫단 말이에요! 에잇, 짜증나는 학교! 싫어요! ……네, 알았어요. 안녕."
우리는 벌써 30분도 넘게 부엌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반다, 어째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게냐?" "할머니, 할머니 집에 전화가 있다는 걸 왜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전화가 있냐고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잖니." "할머니, 저 오늘 다락방에서 안 잘래요." "그럼 어디서 자려고?" "할머니 침대는 크잖아요." "하지만 내 콧물은 어쩌려고? 할머니는 코도 곤단다." "괜찮아요, 할머니." "그럼, 좋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설마 아빠가 벌써 온 걸까? 계단을 내려가는데 자동차가 막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오늘은 왜 저를 깨우지 않으셨어요?" "너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 반다야, 정원에 가자꾸나!" 할머니는 나에게 아침 이슬이 맺혀서 촉촉해진 풀밭을 한 바퀴 빙 돌라고 하셨다. "반다, 정원을 한번 둘러보렴. 뭔가 빠진 게 있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니?" "맞아요, 할머니. 정원에 나무가 하나도 없어요." "자, 그럼 삽을 좀 가져오렴.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서 흙을 파렴." 할머니가 등뒤에 감추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기 나무네!" "사과나무란다." "할머니, 이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줄 때까지는 한참 걸리겠는데요."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이 나무는 매일매일 조금씩 자랄 거란다. 반다 너처럼 말이다." "자주 할머니 댁에 올게요. 언제 첫 번째 사과가 열릴지, 언제 나보다 키가 커질지 다 보고 싶어요."
오후에 할머니가 뜨개질하신 것을 살펴보았다. "반다, 할머니가 코를 또 빠뜨렸구나." "괜찮아요, 할머니. 제가 다시 찾아서 끼워 드릴게요." "반다, 할머니 머리 좀 땋아 주겠니. 그럴 게 아니라 할머니 머리를 잘라 주는 건 어떠니?" "안 돼요, 할머니! 댕기 없는 반다 할머니는 상상이 안 되는 걸요. 참, 들국화를 조금 가져가면 안 될까요? 우리 집 발코니에 있는 화분에서도 들국화가 자랄 수 있을 거예요." 할머니가 흙으로 빚은 화분을 짚더니 그 속에서 하얀 봉지를 꺼내 주셨다. "이거면 화분 여러 개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천사야."
집으로 가는 날이다. 가방은 벌써 다 싸서 대문 앞에 두었다. 나는 천천히 집을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집 안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반다, 뭘 꾸물거리는 게냐? 이러다 정말 늦겠구나!" "할머니, 잠깐만요. 잊어버린 게 있어요! 전화기 좀 가져오려고요." "전화기를?" "네. 전화기가 부엌 소파 옆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래야 전화가 울리면 바로 받으실 수 있잖아요." "비상시에 받으라고?" "네, 비상시에요! 이젠 비상 전화가 자주 울릴 테니까요." 할머니, 이제 반다가 자주 전화 드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