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을 움직인 역관 홍순언
정명림 지음 | 푸른숲
정명림 지음 / 이우창 그림
푸른숲 / 2007년 12월 / 128쪽 / 9,500원
홍 통사, 자네만 믿네 / 고난의 귀국길
1574년(선조 7년) 5월 조선의 조정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생일에 맞추어 보낼 사신단을 꾸렸다. 이번 사행(사신의 행차)을 다녀올 일행은 정사(사신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서장관(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질정관(중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한자 용어나 방언, 제도 따위에 대한 의문점을 중국에 물어 알아 오는 일을 맡아 하던 벼슬)과 홍순언을 비롯한 통사(조선시대에 통역을 맡아보던 벼슬아치) 여덟을 포함하여 36명 가량 되었는데, 상통사(통사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로 임명된 홍순언은 통사로 참여했던 지난 사행보다 더욱 큰 책임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사신단의 우두머리는 정사지만, 실제로 일행을 지휘하고 명나라 관리와 외교 업무를 처리하는 등 웬만한 일은 통사의 우두머리인 상통사가 알아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출발하던 날 일행은 이른 새벽에 모였지만, 배웅하러 온 이들과 인사를 하다 보니 저물녘에야 출발하게 되었다. "어서들 서둘러라. 시간이 촉박하구나." 조급한 마음에 길을 재촉하는 정사에게 홍순언이 말했다. "정사 나리, 아직 시간이 넉넉하니 마음 놓으십시오. 더운 날씨에 먼 길을 가려면 체력을 아껴야 합니다. 조바심 내면 몸이 상하기 쉬우니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십시오." "상통사 말을 들으니 그렇겠구나. 아무튼 자네가 있어 든든하네." 그렇게 한양을 출발한 사신 일행은 약 한 달이 걸려서 파주, 개성을 거쳐 의주에 이르렀다. 이제 압록강만 건너면 명나라 땅이었다. 일행은 세 조로 나누어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 요동까지 가는 길에도 조선처럼 험한 고개와 큰 강이 많았다.
일행은 압록강에서부터 2천 리가 넘는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으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 사신 일행은 너무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홍순언에게 이야기를 들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성문을 보니 기가 질렸다. 일행은 무사히 황제의 생일잔치에 참석하여 임무를 마쳤다. 북경에서의 일정은 무사히 마쳤지만 한양으로 돌아갈 길은 멀었다. 국경 지역에는 늘 달자(서북변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몽고족을 이르던 말)나 도적 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예물을 가지고 다니는 사신 일행은 그런 무리에게 좋은 표적이었다. 그럴 때 불안해하는 일행을 다독거리고, 가는 길에 별다른 위험이 없는지 알아보고, 짐 실을 수레를 마련하는 일 등이 모두 통사들의 몫이었다.
하루는 사신 일행이 길 떠날 차비를 하고 있는데, 달자가 쳐들어와서 어느 곳에서는 군사들이 말을 빼앗기고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조선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는데, 사신단 일행은 통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레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홍순언이 광녕 첨사(광녕 지방을 관할하는 첨사)를 만나 무릎을 꿇고 간곡히 청하여 첨사의 마음을 움직여 수레를 구한 덕에 사신 일행은 지체하지 않고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일행은 6000리가 넘는 여정 끝에 드디어 한양에 도착했다. 조정에서는 무사히 사행을 마친 일행을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었고, 무려 여섯 달에 이르는 길고 긴 사행이 끝을 맺었다.
기적으로 이어진 인연
그 뒤로 홍순언은 또 한 차례 명나라 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사행에서 돌아온 홍순언은 곧바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나랏돈을 쓰고 갚지 못해서였다. 옥에서 첫 밤을 맞이한 홍순언은 북경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다. 석 달 전 북경에 도착한 홍순언은 거리 구경을 나섰다가 어느 기생집 앞에 쓰인 글귀를 보고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은 천 냥이 아니면 들어오지도 마시오.' 얼마나 예쁜 기생이기에 저런 큰돈을 내라고 하는지 궁금해진 홍순언은 그 기생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얼굴빛이 몹시 슬퍼 보였고 아무리 봐도 기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이상히 여긴 홍순언이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여자는 대답했다. "제 아버지가 북경에서 벼슬을 하다 죄를 입고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장례비용이 없어 돈을 마련하고자 이렇게 기생집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평생 나리만을 섬기며 살 것입니다."
홍순언은 여자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사행을 오면서 맡아 가지고 있는 나랏돈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고민하던 홍순언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그 여인에게 나랏돈을 내어 주었다. 여인은 너무도 고마워서 훗날 은혜를 갚겠다며 홍순언의 이름을 물었고, 가르쳐 주지 않으려는 홍순언에게 떼를 쓰다시피 하여 이름을 알아내었다. 홍순언은 나랏돈을 썼다는 생각보다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자를 도와주었다는 기쁨이 컸다. 그러나 홍순언은 한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옥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편 조선 왕조는 나라가 세워졌을 때부터 한 가지 커다란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종계변무로, 조선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 책에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치는 일이다. 명나라 역사 기록에는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조상이 역적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조선은 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종계변무를 끊임없이 요청했으나 명나라에서는 고치겠다는 약속만 할 뿐 지키지 않았다. 선조 임금은 이번에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일을 맡아서 갈 사신단의 일행으로는 모든 역관이 가지 않으려 했다.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죽음으로 져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눈치만 보던 역관들은 옥에 갇혀 있는 홍순언의 빚을 갚아주고 사신단으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렇게 하여 목숨을 건 사행에 홍순언이 통사로 가게 되었다.
사신 일행이 명나라 북경에 도착했을 때, 예부상서(중국 벼슬 가운데 하나로 의례를 맡아보는 부서의 우두머리) 석성의 하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홍통사라는 사람이 왔는지 물었다. 홍순언이 그 하인을 따라 예부상서의 집으로 가 보니 뜻밖에도 예부상서의 부인이 전에 홍순언이 도와주었던 기생집의 그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홍순언 덕분에 아버지의 장례를 무사히 치르고 예부상서 석성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홍순언에게 은혜를 갚고자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 그 부인은 예부상서와 함께 도울 일이 없는지 물었고, 홍순언은 조선 사신이 해결해야 할 종계변무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예부상서는 애써 보겠다고 했고, 드디어 조선 건국 때부터 문제가 되어 200여 년 동안 조선의 조정이 노력해도 되지 않던 일이 석성의 도움으로 거짓말처럼 해결되었다. 사신단은 명나라 역사 기록에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조선으로 가지고 왔다. 조선 왕조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선조 임금은 공을 세운 사신 일행을 공신(공을 세운 신하)으로 대우했다. 공신이 된다는 것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영광을 누릴 만큼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신분의 벽 /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1591년(선조 24년) 2월에 사간원에서 홍순언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말을 올렸다. 홍순언이 서얼(양반의 첩이 낳은 자식이나 그 자손) 출신이라 높은 벼슬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선조 임금은 계속 사간원의 건의를 물리쳤지만 신하들의 청을 끝까지 모른 체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홍순언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조선 시대에 서얼은 아버지가 양반이라고 해도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씌워진 서얼이라는 굴레는 이렇게 평생 홍순언의 앞길을 막았다. 하지만 곧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 조정에서는 다시 한 번 홍순언의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년) 4월 13일, 일본 군대가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선조 임금은 1년 전 일을 떠올렸다. 1591년 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의 무장이자 정치가)가 선조임금에게 보낸 편지에는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명나라에 들어가겠다. 조선이 앞장서라'라는 전쟁을 예고하는 글이 쓰여 있었다. 만약 일본이 진짜로 쳐들어온다면 일본과 조선이 한통속이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고심 끝에 조선은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단을 통해 그곳 분위기를 살핀 뒤 일본의 침략 계획을 알리기로 하였는데, 그 어느 때보다 노련한 통사가 필요했기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이미 일흔 네 살이나 된 홍순언이 포함되었다. 홍순언 일행이 요동에 들어서자 그곳에는 벌써 일본의 침략에 대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이 조선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신단의 말도 믿어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 홍순언은 명나라의 의심을 풀 방법을 궁리하다가 조선에 다녀간 적이 있는 허국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허국은 명나라 조정의 높은 자리에 있었고 홍순언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사신단이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홍순언은 허국을 만나 일본과 있었던 일에 대해 앞뒤 사정을 설명하였다. "알았다. 내 너희 나라의 진심을 믿고 있으니 힘을 써 보겠다." 조선 사신이 올린 보고문과 허국의 적극적인 변호 덕분에 명나라 조정은 어느 정도 의심을 풀었다. 게다가 사신 일행은 일본의 침략 야욕을 보고하였다 하여 황제에게 칙서와 상을 받기까지 했다. 홍순언 일행은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해내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번 사행은 자칫하다 얼어붙을 뻔한 명나라와의 관계를 지켜 낸 크나큰 외교적 성과였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이 큰소리친 대로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전쟁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조선은 계속 패했고, 선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자 일본 군대는 순식간에 한양까지 점령했다. 홍순언도 임금의 피란 행렬에 함께했다. 신하들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신점을 사신으로 임명하여 홍순언과 함께 명나라로 보냈다
조선의 파병(전쟁을 위해 군대를 보냄) 요청에 대해 명나라가 고민하고 있을 때, 명나라 병부상서가 파병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는데, 그는 바로 홍순언과 오래전에 인연을 맺은 석성이었다. 석성의 노력으로 마침내 명나라 조정은 파병을 결정했고, 1592년 12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4만 3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명나라 군대와 조선 군대는 힘을 합쳐 싸워 드디어 평양성에서 일본 군대를 몰아낼 수 있었다. 조선 조정은 그 승리를 발판 삼아 내친 김에 한양까지 되찾기를 바랐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전투를 미루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여송에게 하루 빨리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를 바란다는 글을 써 보냈고 홍순언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명나라 군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원수를 고이 돌려보낼 수는 없다 / 역사에 이름을 남기다
조선을 도우러 왔다고는 하지만 명나라는 조선의 바람과는 달리 일본과 협의하여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전해 듣고 선조 임금이 홍순언을 앞세워 직접 이여송을 만나 일본군을 무찔러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8월, 명나라와 일본은 화의를 맺었고, 일본군이 철수를 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원통했지만 나라를 되찾은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조선이 전쟁의 뒷마무리도 채 끝내지 못한 1597년 정유년 1월, 잠시 물러갔던 일본 군대가 다시 쳐들어왔다. 일본이 명나라에 요구한 강화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명나라도 다시 군대를 보내왔는데, 뜻밖에도 병부상서 석성이 강화 교섭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파병으로 인해 나라 살림을 어렵게 만들었다며 옥에 갇히게까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홍순언은 석성을 돕고 싶었지만 남의 나라 일이라 어찌 할 수 가 없었다(후에 석성은 감옥에서 죽었고, 조선에 가서 살라는 그의 유언대로 자식들은 조선으로 건너와서 살았으며, 조선 조정에서는 그 아들들과 자손들에게 상을 내려 두고두고 석성의 공을 기렸다). 더구나 조선의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 다행히 처음에는 밀리는 듯하던 조선 군대가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맹활약으로 다시 힘을 찾았다.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은 물러갔고 전쟁도 끝이 났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홍순언은 벌써 여든한 살의 노인이었고, 이제는 쉬고 싶은 마음에 고향인 청담동으로 내려갔다. 홍순언은 늘 긴장하고 지내던 역관 생활에서 벗어나 고향 집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다가 1608년(선조 41년) 91세의 나이로 죽었다. 서얼로 태어났기에 출세를 꿈꿀 수는 없었지만 역관이 된 홍순언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홍순언이 서얼 출신이라 하여 업신여기고 명분과 허울만 내세우던 양반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묻혀 버렸지만, 오로지 실력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킨 홍순언의 이름은 조선을 빛내고 나라를 구한 역관으로 당당히 역사 속에 남아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