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참사랑을 남기고 간 아름다운 의사 - 장기려
고정욱 지음 | 뜨인돌어린이
고정욱 지음
뜨인돌어린이 / 2007년 9월 / 132쪽 / 8,500원
제1장 가슴 벅찬 해방"여보, 왜놈들이 물러간대요." "뭐, 뭐라고요?" 자리에 누워 있던 장기려는 벌떡 일어났다. 꿈에서라도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내가 했기 때문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고 맨발로 방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장기려. 그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한 의사이며, 평양의 기홀병원 원장을 지낸 사람이다. 한편 3개월 전에 급성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은 장기려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음에도 식민지의 불안한 정세로 인해 신경쇠약까지 걸려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해볼 수 있는 게 공기 좋고 세상과 떨어져 있는 곳에 가서 모든 걱정과 시름을 잊고 푹 쉬는 것이어서, 장기려는 묘향산 약수터 옆 초가집에 와서 한여름을 보내는 중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장기려는 1911년에 태어났다. 굴욕적인 한일 합병이 1910년의 일이었으니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내 나라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아무튼 해방 소식을 들은 장기려는 벌써 병이 다 나은 듯 느껴져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오니 정신이 정말 맑아지고 있었고, 오로지 새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는 생각뿐이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낯선 청년들이 찾아와서 장기려에게 말했다. "저희는 건준에서 나왔습니다. 일본 놈들이 물러갔으니 새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임이죠. 조만식 선생이 저희를 이끌고 계십니다. 저희 건준의 위생과장 일을 맡아 주시지요. 조만식 선생의 부탁입니다."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 장기려는 몸이 완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기쁜 마음으로 평남건준위원회 사무실로 출근을 시작했다.
그 무렵 한반도는 전쟁에서 패한 일본이 물러가면서 삼팔선을 경계로 이북을 러시아가 장악하고, 이남은 미군이 장악했다. 그 결과 소련군이 평양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건준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소련군은 김일성이라는 젊은 소련군 장교를 지도자로 내세웠다. 이내 북한 사회는 기독교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분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조만식은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장기려는 이것이 그토록 갈망했던 해방된 조국의 모습인가 하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김일성 대학에서 그에게 외과학과 과장으로 와달라는 제안을 했다. 장기려가 독실한 기독교인데도 그를 부르는 것은 그가 그만큼 북한에서 소중한 인재라는 뜻이기도 했다. 계속 거절을 하면 가족들이 위험해질까봐 할 수 없이 장기려는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강좌장으로 일하게 되었고, 부총장은 수시로 장기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하도록 주문했지만 장기려는 따르지 않았다.
제2장 동족상잔의 비극공산주의 치하에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신념에 투철한 인격자였고, 어느 누구보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그는 가정적으로 육남매의 자녀들을 거느리고 부모님까지 열 명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아주 어려웠다. 급기야 아내까지도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해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 소련군은 김일성과 무리지어 남조선으로 쳐들어가 완전한 적화 통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미국은 1949년 6월 말까지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에 따라 남한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놓고 있었다. 드디어 6월 25일 전쟁에 대한 기사가 노동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그 기사는 남한이 먼저 침공해 자신들이 반격했다는 조작된 내용이었다. 곧이어 공산군이 서울도 빼앗았고, 7월 19일에는 대전 전투에서도 이겼다고 했다. 그러자 미국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여 평양 비행장이 폭격되었고, 70여 대의 북한 전투기들은 떠보지도 못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9월 15일에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져 멀리 내려가 있던 북한군은 허리가 끊어지게 되었다. 유엔군의 폭탄은 엄청난 위력으로 평양 시내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병원에서는 밀려드는 환자들을 응급 처치해 놓고 나면 또 다른 환자들이 밀려왔다. 그들을 바라보는 장기려의 마음은 너무나 아팠다.
드디어 10월이 되자 연합군이 황해도를 거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평양은 이제 곧 연합군의 손에 들어가게 생겼다. 병원의 정치 담당자들은 의사와 간호사 등의 직원들이 모두 다 차를 타고 떠나도록 등 떠밀었다. 장기려는 그들과 같이 가지 않으려고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들이 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모두 떠난 후 숨어 있는 가족들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가족들은 이미 평양에서 1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반성이라는 지역의 토굴 속에 피신해 있었다. 10월 20일, 평양은 함락되었고, 동굴에 숨어 있던 장기려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상은 며칠 만에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제3장 눈물겨운 피난"여보, 나는 병원에 좀 다녀오겠소." 장기려는 도저히 집에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위험하긴. 전쟁에는 의사가 항상 필요한 법이오. 그리고 내 젊은 날의 맹세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장기려는 의사의 길을 준비할 때 하나님과 굳게 약속을 했다. '주님, 제게 의사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저는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설령 어떤 어려움과 위험에 처해 있다 해도 그는 의사의 본분을 다할 결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기려가 이미 국군이 장악해 야전병원으로 쓰고 있는 기홀병원을 찾아가자 낯익은 경성의전 후배들이 그를 반겼다. 장기려의 인간 됨됨이를 너무도 잘 아는 후배들 덕에 그는 다시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직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한국군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려의 평양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공군에게 밀려 미군들이 철수했고, 중공군이 온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모두 국군들을 따라 남으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국군 야전병원에서는 장기려를 위해 특별히 구급차에 태워주겠다고 했으나, 장기려의 부모님이 피난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장기려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대동강을 건너라고 하고는 자신은 작은아들인 기용이만 데리고 구급차를 타고 대동강을 건넜다. 대동강을 건넌 뒤, 그곳에서 구급차를 보내고 찬바람을 맞으며 장기려 부자는 남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아내와 나머지 자식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들과의 영원한 이별일 줄은 그는 꿈에도 몰랐다. 참고로 장기려의 아내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남편만을 바라보며 살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 아내와 생이별을 한 후 장기려는 평생 동안 아내와 남겨진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걸어서 개성까지 간 장기려 부자는 개성역에서 간신히 기차 지붕에 올라탄 뒤 기차를 몇 번씩 갈아타며 마침내 평양을 떠난 지 보름만에 바다 내음 나는 부산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18일이었다. 물어물어 조카의 집을 찾아가니 조카는 고맙게도 장기려 부자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조카의 사는 형편도 매우 어려웠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선 장기려는 고향 후배의 도움으로 제3육군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곳은 부산 시내 남일 초등학교에 차려진 임시 야전병원이었는데 북한에서 내려온, 얼굴을 알 만한 의사들이나 피난민들이 근무하고 있어서 장기려도 마음이 편했다. 기용이도 약국에서 급한 심부름을 하며 지내게 되어 장기려 부자는 밥도 세끼 꼬박꼬박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제4장 복음병원병원 앞에는 늘 가난한 환자들이 찾아와 치료해 달라고 애걸했지만 병원 규정상 민간인들을 치료해 줄 수가 없었고, 매일 이 장면을 보면서 병원을 드나드는 장기려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전쟁이 난 지 1년쯤 된 1951년 6월 20일, 장기려와 친한 초량 교회의 한상동 목사가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전영창이라는 청년과 함께 찾아왔다. 전영창은 유학 중 고국의 전쟁 소식을 듣고 기금을 모아 급히 고국을 위해 돌아왔고, 국제연합민사원조사령부(UNCAC)를 찾아가 의논한 끝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장기려는 전영창의 손을 불끈 쥐며"한번 해봅시다, 우리. 나 역시 돈이 없어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한번 만들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뜻을 모은 세 사람은 병원 이름을 복음병원으로 결정하고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제3영도교회의 창고에 천막을 치고 병원을 개업했다. 육군병원에 사표를 낸 장기려가 원장을 맡고, 운영자는 한상동 목사, 총무는 전영창이었다.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왔고, 아무리 거지꼴을 한 사람들이라도 장기려는 인상 찌푸리는 일 한번 없이 그들의 때 묻은 팔다리를 소독하고 치료 해주었다.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유엔민사원조처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군용천막을 지원해주어 병원 공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공간이 해결되자 이번에는 의사가 부족했다. 장기려 혼자 있는 힘을 다해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마침 경성의전 후배인 전종휘 박사가 함께 근무하겠다고 와주어서 장기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제5장 감사함을 설치하자복음병원의 가장 큰 적은 병원 운영비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무료로 환자를 진료하다 보니 직원들 월급을 주는 일도 벅찬 지경이 되었다. 교회와 다른 곳의 도움이 있긴 하였으나 환자들에게 좀 더 나은 서비스를 하고 그들에게 약이라도 하나 더 주려면 돈을 어떻게든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의논 끝에 복음병원 입구에는'감사함'이라는 상자가 놓여졌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병원비를 내라고 한 것이다. 다행히 양심 있는 환자들은 단 얼마라도 감사함에 돈을 넣고 갔지만 그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병원 전체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기려는 반드시 이겨내야 되겠다는 신념으로 어려운 시절을 헤쳐 나갔고, 늘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며 견뎠다. 자신이 이렇게 남을 위해 봉사하면 그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제6장 최초의 의료보험1953년 마침내 지긋지긋하던 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끝이 났다. 부산으로 피난 왔던 사람들은 썰물처럼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장기려는 복음병원을 짓고 환자들을 돌보다 보니 부산을 떠나 어딘가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장기려를 모교인 서울의대에서 불렀다. 장기려는 이 병원을 떠나야 할 것인가, 남아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해야만 했다. 그때 장기려는 애타게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이 생각났다. 전력을 다해 이 병원을 살려달라고 애타게 빌었었고, 그것을 도와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하지 않는 장기려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건 초인적인 열정과 의학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병원은 여전히 운영이 어려웠고, 결국 현실의 어려움을 어찌할 수 없어 장기려는 약간의 병원비를 받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려움에 빠지면 항상 도움의 손길이 있었으니 이 세상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1954년 말에 평소 친분이 있던 말스베리 선교사와 한상득, 한부선 목사가 그를 찾아와서 복음병원을 고려신학교와 합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장기려는 운영 걱정 없이 환자들만 돌보고 의대 학생들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의 도움을 시작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여 드디어 1956년 2백50평 규모의 병원이 1차 준공되었는데, 바로 지금의 고신의료원의 옛날 모습이다. 장기려는 결단을 내려 서울대학교 교수직도 그만두었다.
한편 1968년 4월 어느 날, 성경모임에 참가한 장기려는 채규철이라는 사람이 덴마크의 의료보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좋은 제도라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그는 관계되는 문헌과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람들을 만나 의료보험조합의 취지를 설명하여 드디어'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발족되었다. 초기에는 운영이 어려웠으나, 다른 조합들과 합쳐져서 1969년 3월 드디어 보사부의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서 명실상부한 민간의료보험조합이 생겨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며 인술을 편 장기려의 숭고한 뜻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제7장 내 동상 만드는 놈은 벼락을 맞아라! 장기려가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며 신앙 속에서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살아온 이유는 바로 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기 위해서였다. 장기려는 1976년 복음병원장을 정년퇴임했는데, 그때까지 청십자의원 병원장도 겸하면서 진료를 담당했다. 조합원들은 그 병원이 자신들의 병원이라고 생각하며 이용해 주어서 환자수가 한 해 동안 5천5백 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러한 선구자적인 안목 때문인지 정부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조합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장기려는 1988년 농어촌의료보험 시행에 이어서 1989년 도시지역 의료보험이 전면 실시되자 기쁜 마음으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해체했다. 한편 1979년 장기려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장기려의 수상 소식에 모두 열광했지만, 장기려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자신은 그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런 과분한 상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모든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장기려는 아내와 가족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 소원으로 살았다. 그러던 중 약학박사가 되어 국제회의에 참석한 맏아들 택용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맏딸 신용이의 편지도 전해 받게 되었다. 편지와 함께 온 사진 속의 가족들을 보며 장기려는 눈시울을 적셨지만, 장기려는 끝내 아내를 만날 수 없었다. 가끔 다른 나라를 통해 편지를 받아볼 뿐이었다.
이제 장기려도 나이가 들어 그의 몸은 점점 망가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존경하는 몇몇 후배들과 교회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동상을 만들겠다고 하자 장기려는"내 동상을 만드는 놈은 벼락 맞아 죽어라!"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장기려의 진정한 뜻은 자신을 기리는 데 있지 않음을 모르는 자들이 저지른 실수였다. 아무튼 1995년 12월 25일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날 새벽 1시 45분에 장기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을 떠났다. 온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화장하여 부산 앞바다에 뿌려달라던 장기려의 유언을 사람들은 차마 그대로 따를 수 없어 그를 성남의 모란공원 묘지에 묻었다. 그의 묘비명은 채규철이 썼다.
1909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고 1995년 서울에서 승천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