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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앤 피츠패트릭 지음 | 산하
앤 피츠패트릭 지음

도서출판 산하 / 2007년 7월 / 55쪽 / 10,000원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


1910년 8월 26일, 마더 테레사는 오스만 제국의 도시였던 스코페(그 뒤, 이곳은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나라 이름이 바뀌었지요)에서 태어났어요. 세례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아주예요. 아그네스의 가족은 가톨릭교를 믿는 알바니아 민족이었는데, 이 지역에는 다양한 종교와 언어를 가진 민족들이 살았고, 오랫동안 갈등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어요.



아그네스는 언니와 오빠를 둔 삼 남매 가운데 막내였어요. 이들은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교육을 받았답니다.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아그네스가 여덟 살이 되던 1919년, 심하게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당시 알바니아 민족은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알바니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아버지가 독살되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함께 장사하던 사람이 아그네스네 재산을 가로채고 말았어요. 그 바람에 아그네스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바느질이나 자수를 해서 내다 판 것으로 겨우 살아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계속 이웃을 도왔어요. 왜냐하면 어머니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 돕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아그네스 가족은 날마다 기도하고, 교회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좋은 일을 하려거든, 바다에 돌멩이를 던지듯 조용히 하렴." 한편 눈이 크고 깊은 소녀 아그네스는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장난도 잘 쳤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또 책 읽기와 시 쓰기를 좋아해서, 작가나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런데 열두 살이 되었을 즈음, 아그네스는 하느님에게 자신을 바치는 수녀가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어요.



참고로 아그네스는 어릴 적부터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교회에서『가톨릭 선교』 같은 잡지에서 인도에서 일하는 알바니아 선교사들의 소식을 읽게 되었어요. 선교사들의 삶은 아그네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어요. 그리고 아그네스는 로레토 수녀회의 활동도 알게 되었지요. 로레토 수녀회는 아일랜드에 지부를 둔 국제적인 여자 수도회로, 인도에서도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 뒤 열여덟 살이 된 아그네스는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가서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과 살기로 결심했어요. 아그네스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아그네스에게 한 가지를 당부했어요. "얘야,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려무나."



집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아그네스가 떠나는 날, 아그네스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스코페에서 북서쪽으로 600킬로미터 떨어진 자그레브(지금의 크로아티아의 수도)까지 갔어요. 아그네스는 거기서 베티카 카얀이라는 젊은 여성을 만나, 함께 로레토 수녀회가 있는 아일랜드로 가기로 했어요. 아그네스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어요. 이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에요. 아무튼 아그네스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낯선 곳으로 신앙에만 의지하고 떠났고, 아그네스와 베티카 카얀은 마침내 인도의 마드라스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아그네스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아무튼 1929년 5월 23일, 아그네스는 로레토 수녀회의 수련 수녀가 되었는데, 수련 기간 동안에는 히말라야의 산기슭에 있는 다르질링에서 지냈어요. 이때부터 아그네스는 검은 옷을 입고 베일을 썼어요.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테레사라고 지었는데, 그것은'아기 예수의 성녀'라고 불렸고, '사랑을 위한 아주 작은 행동'으로 유명했던'리지외의 성녀 테레사'에서 딴 이름이었답니다. 그 뒤 2년 동안의 수련 기간이 끝난 뒤, 테레사 수녀는 콜카타의 로레토 수녀회로 돌아와 수녀원에 딸린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지요. 참고로 로레토 수녀원 밖은 모티즈힐이라는 빈민가였는데, 테레사 수녀는 일요일마다 음식이나 옷 같은 것들을 들고 빈민가를 찾아가곤 했어요.



그 후 1937년, 어느덧 스물일곱 살이 된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수녀회에서 청빈ㆍ정결ㆍ순명을 서원하고, 종신 수녀가 되었어요. 서원이란 선하고 훌륭하게 살겠다고 하느님에게 엄숙하게 약속하는 일이지요. 테레사 수녀는 이때부터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게 되었어요. 그리고 마더 테레사는 몇 년 뒤에는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되었답니다.



한편 1946년 9월 10일, 마더 테레사는 해마다 있는 피정을 가기 위해 로레토 수녀회를 떠나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를 탔어요. 기차 안에서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라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어요. 다시 말하면 편안하고 익숙해진 수녀원을 떠나 가난한 사람들과 살면서 그들을 도우라는 하느님의 뜻이 마음을 울린 거예요. 마더 테레사는 용기를 냈지요. 그래서 수녀원을 나가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수녀원에 간청했어요. 2년이 지나서야 마더 테레사는 1년 동안 수녀원 밖에 나가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어요. 수녀의 서원을 지키고, 콜카타 대주교의 감독에 따른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요. 마침내 마더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뒷날, 마더 테레사는 이때를 돌이켜 보며 이렇게 말했어요. "로레토 수녀회를 떠나는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가장 큰 희생이었어요.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가족과 고향을 떠날 때보다 더 힘들었지요. 로레토 수녀회는 나의 전부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1948년 8월 16일, 서른일곱 살에 마더 테레사는 정들었던 로레토 수녀회를 떠났고, 검은 수녀복 대신에 인도 전통 의상인 푸른색 줄무늬가 있는 하얀 사리를 입었지요. 기차표 한 장과 단돈 5루피만 가진 믿음의 여행길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먼저 갠지스 강 근처에 있는 파트나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의료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지요. 교육을 마치고 콜카타로 돌아온 테레사 수녀는 작은 방을 얻었어요. 그리고 로레토 수녀회 옆에 있는 빈민가인 모티즈힐에 찾아갔어요. 모티즈힐의 모습은 두렵기도 했지요. 아이들은 헐벗은 채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어요. 제대로 된 시설이 없는 거리의 하수도에서는 쓰레기와 벌레들이 넘쳐 났어요. 마더 테레사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아이들을 마당에 불러 모아 진흙 바닥 위에서 글자를 가르쳤어요. 그리고 진료소를 열어 아픈 사람들도 치료했지요. 마더 테레사가 작은 학교를 열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레토 수녀회에서 함께 일한 동료들과 제자들도 찾아와 도왔어요. 1950년 4월, 마더 테레사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 '사랑의 선교회'를 만들었고, 1953년 4월, 그녀와 함께 일하던 수녀들은 새로운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선한 삶을 약속했지요.



어느 날, 마더 테레사는 길을 가다 길바닥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을 보았어요. 여인은 쥐와 개미에게 뜯겼는지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마더 테레사가 병원에 데려갔지만, 이미 늦어 손쓸 수 없다며 받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더 테레사는 관청에 찾아갔어요. 길거리에서 가난과 외로움 속에 죽어 가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달라고 한 거예요. 관청에서는 힌두교 사원의 한쪽에 있는 빈 방 두 개를 내어 주었지요. 이곳이 바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세운'니르말 흐리다이'입니다.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은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들, 혼자 아파하며 죽어 가는 사람들을 데려와 이곳에서 돌봤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감사하며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어느 날은 아이가 여덟 명이나 있는 가족이 오랫동안 굶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마더 테레사는 그 집을 찾아가서 쌀을 나누어 주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의 엄마는 받은 쌀을 반으로 나누더니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나중에 어디를 다녀왔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옆집 사람들도 굶고 있어서요." 감동을 받은 마더 테레사는 가난하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사람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답니다.



이 무렵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은 어느 집의 꼭대기 층을 빌려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싼 값에 아주 크고 마당도 넓은 집을 구하게 되었어요. 그 집이 1953년부터 지금까지 사용하는 사랑의 선교회 본부가 되었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 상을 받다

사랑의 선교회는 1960년까지 인도에 스물다섯 개의 집을 세웠고, 1965년에는 로마 교황청의 허락을 받고 해외에도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코코로트가 첫 번째 해외 공동체였습니다. 그 뒤 10년 동안 미국, 이탈리아, 에디오피아, 영국을 비롯한 열두 개 나라에서 스물네 개도 넘는 공동체가 문을 열었어요. 참고로 마더 테레사는 굶주리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라, 소중하고 거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여겼지요. 마더 테레사와 사랑의 선교회의 이런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보내오기도 했어요.



그 뒤 마더 테레사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졌어요. 그리고 1979년 12월 10일, 예순아홉 살이 된 마더 테레사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대강당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나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상을 받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 상 덕분에 노르웨이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 기자들과 텔레비전 카메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요. 마더 테레사는 특별히 준비한 원고도 없이 평소처럼 말을 시작했어요. 마더 테레사의 연설은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어요. "평화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사는 곳에서 가난한 사람을 찾아 사랑을 나누세요. 그리고 나는 오늘날 평화를 파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낙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전쟁이고 살인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죽일 수 있다면, 이제 내가 여러분을 죽이고 여러분이 나를 죽이는 일만 남은 게 아닌가요?" 낙태는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지만, 마더 테레사의 연설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편 마더 테레사의 부탁으로 노벨 평화상 기념 파티는 취소되었고, 그 비용은 마더 테레사에게 줄 상금에 보태졌는데, 이 돈만으로도 400명 정도의 사람들이 1년 동안 먹을 양식을 얻을 수 있었어요.또한 마더 테레사는 이 상금으로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병 환자들을 위한 집을 지을 계획이었어요. 다음 날, 노르웨이의 한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어요. '전 세계의 언론은 가발이나 화장을 하지 않고 밍크코트나 보석으로 치장하지도 않았지만, 진정한 빛으로 반짝이는 위대한 인물에 매혹되었다. 마더 테레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받은 상금을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다

마더 테레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편하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이 주목받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어요.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더 테레사를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보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으로 생겨난 희생자를 돕게 했어요.



마침 그 때 서른여덟 명의 장애 어린이들이 전투 지역에 갇히는 일이 생겼어요. 공무원과 적십자 대표, 성직자 들이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이 어린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논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자 마더 테레사는 휴전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고, 기도를 시작하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온 도시가 조용해졌어요. 마더 테레사는 겁에 질려 있는 장애 어린이들을 데리고 무사히 전투 지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하지만 마더 테레사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어요. 공산주의가 정권을 잡고 있는 알바니아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었어요. 이 무렵,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와 언니는 알바니아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지요. 알바니아 정부는 마더 테레사가 한번 알바니아에 들어온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어요. 또한 가족들이 마더 테레사를 만나러 갈 수도 없었어요. 결국 마더 테레사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다 1972년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이듬해에는 언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마더 테레사는 알바니아의 민주화가 시작된 1991년에야 비로소 고향에 갈 수 있었어요. 어머니와 언니의 무덤을 찾아가 많은 눈물을 흘렸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던 마더 테레사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쇠약해졌어요. 이제 사랑의 선교회는 100여 개 나라의 500군데 정도에 세워졌지만, 나이 든 마더 테레사가 그곳을 모두 찾아가는 일은 힘들었어요. 그녀는 사랑의 선교회 총장에서 물러나겠다고 간청했으나, 적당한 후임자가 없어 결국 여든 살이나 된 그녀가 계속 총장의 자리에 있어야 했어요.



1997년 9월 5일,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장례식은 인도의 국민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마더 테레사는 자신이 일생동안 하느님을 위해 일했던 사랑의 선교회 본부 건물인 '마더 하우스' 옆에 묻혔어요. 마더 테레사는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미소를 짓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 준 위대한 성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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