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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

닉 헬리 지음 | 산하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폴란드는 한때는 유럽에서 가장 커다란 영토를 가지고 있던 나라였지만, 마리가 태어날 무렵에는 여러 나라에게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는 폴란드의 문화와 전통을 거의 존중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폴란드 말을 하는 것도 눈치를 보아야 할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폴란드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웠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어린 마리에게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났습니다.

다섯 아이들 가운데 막내였던 마리의 어렸을 때 이름은 마냐 스클로도프스카였습니다. 마리라는 이름은 나중에 프랑스의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갖게 된 이름이지요. 마리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마리의 가족은 비교적 여유 있게 살았는데, 아버지는 공립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사립 여학교의 교장이었습니다. 마리는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는데, 마리는 딱 한 번만 듣고도 시를 줄줄 외울 정도로 영리했습니다. 자라면서 마리는 아버지의 물리 실험용 기구들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던 마리의 집에 우울한 일이 연거푸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가 학교에서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데다, 큰언니인 조시아가 장티푸스로 죽었고, 두 해 뒤에는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마리가 열한 살 되던 1878년의 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마리는 제3김나지움이라 불리는 공립학교에 들어갔는데, 러시아 선생들이 폴란드 학생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해서 학교생활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빨리 졸업을 하고 싶은 생각에 마리는 공부에만 매달려서 전교 1등으로 졸업했지요. 이제 마리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또래 친구들은 결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꿈을 꾸었지만, 마리는 친구들과 다른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마리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폴란드에서는 여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언니인 브로냐와 마리는 러시아가 지배하는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데 있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약속을 했습니다. 언니가 먼저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마리가 돈을 벌어 언니를 돕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언니가 학교를 마치면, 그때부터 돈을 벌어 동생의 학비를 대 주기로 했습니다. 마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답니다.



꿈을 위한 길



1886년, 마리는 다른 가족의 집에서 살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바르샤바에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하는 조라프스키 씨네 집이었는데, 마리는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나면, 주인의 허락을 받아 마을에 사는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마리는 돈을 언니에게 부칠 수 있었어요. 마리는 힘들어도 참고 또 참았지요. 그리고 일을 하면서도 남는 시간에는 중요한 문학 작품들을 읽거나 과학책들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리가 가장 좋아하던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었어요. 마리의 마음은 점점 더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올랐어요. 마리는 하루빨리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그곳을 떠나 바르샤바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바르샤바에서 가정교사 일을 했습니다.



1890년에 언니 브로냐는 졸업을 앞두고 의과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남자와 약혼을 했습니다. 언니는 파리로 와서 자기들과 함께 살자고 마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리는 아버지를 홀로 폴란드에 남겨두고 떠나는 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다음 해인 1891년, 마리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마침내 파리로 떠났습니다. 파리는 생기 있고 힘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난 마리는 너무 반가웠지만 언니네 집에서는 공부에만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는 언니 집을 떠나, 대학 근처의 동네에 허름한 다락방을 얻었습니다.



1891년 11월 5일, 마리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소르본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마리는 프랑스 말도 서툴렀고 8년 동안이나 학교를 쉬었지만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마리는 학문의 세계로 마음껏 빠져들었고, 소르본 대학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두 해가 지나 마리는 1등으로 물리학과를 졸업했으며, 다음해인 1894년에는 2등으로 수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마리는 피에르 퀴리를 만나 호감을 느꼈습니다. 함께 인생과 과학의 길을 걷게 될 동료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잊을 수 없는 만남들

마리와 피에르는 폴란드에서 온 어느 물리학자의 집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반했습니다. 마리보다 여덟 살이 많은 서른다섯 살이었던 피에르 퀴리는 이미 성공한 과학자였습니다. 피에르는 자기의 형인 자크와 함께 여러 중요한 과학 현상들을 발견했고, 과학실험에 필요한 '전위계'와 같은 기구들도 이미 발명했지요. 마리와 피에르는 1895년에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마리는 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 준비를 하고, 피에르는 박사 학위 논문 준비를 했습니다. 결국 피에르는 파리에서 공업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마리는 이번에도 역시 1등으로 교사 시험을 통과했지요.



하지만 마리는 자신이 두 개의 길 - 연구와 집안일 - 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당시만 해도 연구나 실험실 일은 남자들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다 여자가 그런 일을 하더라도, 세상은 그런 여성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지요. 아무튼 마리는 연구와 집안일을 함께 잘하려고 노력했어요. 큰딸 이렌을 낳고 나서도 두 가지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답니다.





마리는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온 힘을 쏟았는데, 그 과정에서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앙리 베크렐이라는 학자의 논문을 읽고, 우라늄이라는 광석이 스스로 빛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마리는 우라늄에 대해 강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리는 학교에 있는 낡은 창고에 처박혀 우라늄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우라늄처럼 광선을 내보내는 또 다른 물질을 찾는 연구도 했습니다. 한 가지 발견은 또 다른 발견으로 이어져, 연구 성과는 아주 빠르게 나타났습니다. 피에르도 자신의 연구를 그만두고 마리의 일을 돕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침내 퀴리 부부는 우라늄보다 훨씬 더 강한 빛을 내뿜는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마리의 조국인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이 새로운 원소에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퀴리 부부는 1898년 7월에 폴로늄의 발견을 세상에 알리는 논문을 쓰면서, '방사능'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뒤 1898년 12월, 강력한 방사능을 뿜어내는 라듐이라는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이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라듐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을 가지고 몇 년 동안 실험을 해야 했고, 마침내 1902년, 마리는 순수한 라듐 0.1그램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1903년 6월, 마리는 「방사능 물질에 관한 연구」라는 박사 논문을 완성했고, 같은 해 12월에 퀴리 부부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과학의 새 길, 핵 시대



퀴리 부부는 방사능이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로 알려진 원자 안에서 나온다고 설명했고, 그것은 엄청난 힘을 갖는 핵에너지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참고로 마리가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시작한 연구는 그에 앞서 다른 과학자들이 발견한 결과에 뒤이은 것입니다.



보충 설명하면 마리가 방사능 물질을 발견하기 두 해 전에, 독일의 물리학자 뢴트겐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을 발견했습니다. 이 빛은 종이나 피부 같은 물질은 통과할 수 있지만, 금속이나 뼈처럼 단단한 물질은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뢴트겐은 이 광선에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 뒤로 X선은 의사가 환자의 병을 찾아내고 치료하는 일뿐만 아니라, 물체의 구조를 검사하는 일 등 아주 많은 쓰임새로 이용되고 있지요.



한편 퀴리 부부와 함께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는 베크렐은 X선에 관한 연구를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갔는데, 베크렐은 금속 원소인 우라늄이 햇빛을 받지 않아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뢴트겐이 발견했던 X선은 전기를 흐르게 해야 나왔지만, 우라늄에서는 스스로 광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베크렐의 논문을 읽은 마리는 이 이상한 광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노력했고, 전위계를 사용하여 이러한 광선의 또 다른 성질을 발견했습니다. 그건 우라늄이 모양이나 외부 조건과 관계없이 일정한 에너지를 내보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와 피에르는 역청우라늄 광석이 그때까지 발견된 어떤 것보다도 가장 강한 에너지를 내뿜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아무튼 이들 부부는 이렇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게 된 거랍니다. 처음에는 우라늄에서 나오는 신비한 빛에 이끌려 시작한 연구가 새로운 원소의 발견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라듐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 에너지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마리의 연구는 전 세계의 과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원소들을 발견한 것도 그렇지만, 그 원소들이 스스로 에너지를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러한 발견은 다른 과학자들이 원자의 구조를 밝히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다고 여겨졌던 원자가 더 작은 입자로 쪼개질 수 있고, 심지어는 다른 상태로 변화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내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성과는 과학이 인간에게 편리함과 위험을 함께 안겨줄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즉 마리 같은 과학자들 덕분에 원자의 성질이 밝혀지고, 원자력 발전소처럼 원자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불행히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이 발명되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비극과 인내



라듐을 발견한 뒤로 마리의 삶에는 성공의 기쁨과 시련의 아픔이 엇갈렸습니다.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만, 마리는 스웨덴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지도 못할 만큼 몸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퀴리 부부는 자기들이 왜 아픈지 몰랐습니다. 그 원인은 나중에 밝혀졌는데 방사능 때문이었어요. 퀴리 부부는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방사능 물질을 다루었고, 심지어 코트 주머니 안에 라듐을 넣고 다니기까지 했답니다. 기운이 점점 떨어지고 자주 피곤했지만, 마리는 자기가 너무 열심히 연구에 매달려서 그런 거라고 여겼습니다.



1906년 4월, 엄청난 비극이 마리의 삶을 뒤흔들었습니다. 과학 교수 모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피에르가 그만 마차 바퀴에 깔리고 말았지요.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마리는 남은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남편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기고 실험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리는 남편의 자리를 이어받아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소르본 대학에 학생으로 처음 발을 디딘 지 1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마리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여성교수가 되었습니다.



1911년에 마리는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순수한 라듐을 분리해 낸 공로로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그해 봄에 마리는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후보로 선정되었지만, 여자가 어떻게 학술원 회원이 되냐고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아깝게도 두 표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과학자 폴 랑주뱅과 사귄다는 안 좋은 소문까지 도는 바람에, 마리의 마음은 두 배로 힘들었고 몸도 아팠지만 꾹 참고 라듐 연구소를 세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라듐 연구소는 1914년에 문을 열었지만 그해 8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연구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마리는 X선 장치를 실은 구급차 열 대를 마련하여 전쟁터로 나섰습니다. 큰딸인 이렌도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간호하기 위해 전선으로 달려갔답니다. 전쟁이 끝나자 마리는 라듐 연구소로 돌아와서 더욱더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라듐 기금 모금을 위해 미국에 간 마리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대통령도 만났으며 수천 달러를 모았습니다.



한편 1920년대가 되어서야 과학자들은 방사능의 위험을 깨달았습니다. 라듐 같은 방사능 물질을 다루는 사람들이 빈혈에서 암까지 여러 가지 병에 걸려 시름하다 죽어갔습니다. 1934년 7월 4일, 마리는 백혈병으로 눈을 감았는데, 병의 공식적인 원인은 '방사능 장기 축적'이었습니다. 마리의 나이가 예순여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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