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의 총소리 안중근
이상현 지음 | 영림카디널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 열차 / 하얼빈의 총소리1909년 10월 26일, 만주벌판을 달리는 열차 안에는 우리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었다. 이토는 당시, 러시아의 재무 대신 코코브세프를 만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압적으로 맺게 하여 우리나라를 일본에 병합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열차는 이 날 오전 9시경,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환영 나온 각국 영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막 되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환영 인파 속에서, 한 젊은이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이토를 향해 권총을 쏜 것이다. 일본 수행원들이 이토를 급히 열차 안으로 옮겨 응급 치료를 했으나, 이토는 30분쯤 후 사망했다. 이토를 향해 권총을 쏜 그 젊은이는 바로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로, 그때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안중근은 사건 후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되어 끌려갔고, 그 이듬해인 1910년 3월 26일 아침 10시, 5개월간의 옥고 끝에 사형을 당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 최후를 맞은 순간에도 그는 소리 높이 외쳤다. "대한 제국 만세!" 그 때,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괴상한 소문 / 청계동의 개구쟁이 소년 / 활쏘기 대회에서 생긴 일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일찍이 과거 시험에 합격해서 안 진사라 불렸고, 집안은 넉넉하였다. 안중근의 어릴 때 이름은 응칠이었는데, 응칠이가 일곱 살 되던 해 가족은 해주에서 40킬로미터쯤 떨어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 당시 나라는 안팎으로 몹시 어지러워서 백성들은 언제 난리가 날지 몰라 불안에 떨며 지냈는데, 안 진사네도 알맞은 피난처를 찾아 청계동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응칠이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담이 커서 무서움을 몰랐고, 고집도 세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아무튼 응칠이는 네 살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여 하루가 다르게 학문을 깨쳐 나갔고, 활쏘기와 총쏘기 등 무예도 부지런히 닦아서 열두 살이 되자 말을 타고 달리며 하늘을 나는 새도 쏘아 떨어뜨리는 실력을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응칠이는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도 아는 마음이 따뜻한 소년이었다.
천주교 신자가 되다 / 심야에 체결된 치욕의 을사조약고종 31년(1894년), 응칠이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 김흥섭의 딸 아려라는 처녀와 결혼을 했다. 지금까지 불러 왔던 응칠이란 이름도 이때부터 중근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무렵,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백성들 사이에 무섭게 번져가고 있었는데, 안중근도 외국에서 온 신부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참고로 그 신부는 프랑스 사람 빌렘으로서, 우리나라 이름은 홍석구였는데, 안중근은 이 프랑스 신부에 의해 새로운 종교의 세계에 눈뜨게 되었다. 아무튼 안중근은 열아홉 살 때 홍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은 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라는 홍 신부의 설교를 듣는 순간, 안중근은 두 눈을 빛내며, "신부님, 저는 나라를 위해 일본과 맞서 싸우겠습니다. 먼저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쳐, 자주정신을 심어 주겠습니다. 또 산업을 일으키고 군사를 길러,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안중근의 말을 들은 홍 신부는 "도마의 생각은 정말 훌륭합니다. 나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느님께 빌겠습니다"라며 안중근의 손을 굳게 잡았다.
한편 그 당시, 우리나라 조정은 너무나 어수선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고, 일본은 드러내 놓고 우리나라를 삼키려고 날뛰고 있었다. 아무튼 1905년 11월,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우리나라에 특파대사로 보냈고, 1905년 11월 17일, 고종 황제는 어전 회의를 열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열게 한 것이다. "조선은 약한 나라이므로, 우리 일본이 조선의 외교를 맡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려 하는데 어떻습니까?"라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에 고종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으나, 친일파의 우두머리인 이완용과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 찬성의 뜻을 나타내어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 치욕의 을사조약으로 인하여 민영환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분함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금강산 일본 수비대 습격 / 길 잃은 나라, 명성 황후의 비극이 소식은 황해도 일대 고을에도 전해졌고, 안중근의 사랑방에서는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나라의 꼴이 이 모양이 돼 가는데, 젊은 우리들이 구경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들이 힘을 모아서 강제로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을 쳐부숩시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아무튼 다음 날 안중근은 대원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가서 일본 헌병 수비대를 습격했고, 작전이 성공하자 안중근은 대원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낸 뒤, 혼자 중국의 상하이로 향했다. 그러나 그 해 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온 안중근은 아버지의 묘소 앞에 엎드려 통곡했다. 한편 그 무렵, 우리나라는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상 최악의 혼란과 수치스런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중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가 일본의 암살단을 동원, 궁중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고종의 친아버지인 대원군과 왕비의 세력 다툼이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신하들이 외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라는 끝내 길을 잃고 말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다 / 가족과의 비통한 이별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그 이듬해 봄, 안중근은 가족을 이끌고 평안도의 진남포로 이사를 했다. 젊은 인재들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 안중근은 1906년 진남포에 삼흥 학교를 세웠고, 온 힘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도산 안창호 선생이 진남포에 강연을 하러 왔다. 선생의 강연을 들으러 간 안중근은 강연장에서도 감시하러 온 일본 헌병에게 당당하게 맞섰고, 안창호 선생도 그의 용기에 놀랐다. 그리고 안중근과 안창호는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싸우자며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한편 안창호 선생은 강연회가 끝나자마자 몰려든 일본 헌병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는데, 안창호 선생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안중근은 독립 투쟁을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비장한 각오로 가족들의 눈물을 등지고 길을 떠났다. 1907년 안중근은 함경도 원산으로 가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독립군들이 맹렬하게 활동하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해서였다. 스물아홉 살 때였다.
만국 평화 회의와 황제의 밀사 / 이준 열사, 헤이그에서 순국
이토의 협박과 고종의 하야한편, 안중근과 같은 독립투사들이 국내외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조국 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나라의 운명은 날로 걷잡을 수 없이 기울고 있었다. 1907년에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밀사로 보낸 이준 열사가,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자결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더욱 압박하였고, 결국 순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게 했다. 그리고 끝내 일본의 계획과 야욕대로 융희 4년인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이른바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이로써 대한 제국은 끝내 막이 내리고,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정치 아래서 압박과 치욕의 삶을 살아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 / 회령 전투 패배와 단지회 조직한편 안중근은 가족과 이별한 후, 먼저 북간도로 들어갔다가, 일본군들이 막 와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연해주 지방에 있는 항구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청년회 활동과 함께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08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이범윤 장군을 찾아가서 도왔다. 당시, 그곳에는 안중근과 성격이 비슷하고 담력과 의협심이 강한 엄인섭과 김기룡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과 의형제를 맺은 후, 안중근은 의병을 일으키기로 이들과 모의하는 한편, 독립군 부대 운영을 위한 모금 운동에 나섰다. 안중근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조선 독립을 위해 목이 터져라 열변을 토했는데, 그의 연설은 가는 곳마다 동포들에게 큰 감동과 새로운 깨달음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동포들은 자원해서 의병에 참여했고, 많든 적든 다투어 금품을 모아 주었다. 마침내 1908년 6월, 이범윤과 안중근 등은 여러 장교와 의병들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안중근의 독립군 부대는 함경도 경흥 일대에서 두세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독립군에게는 힘겨운 싸움이었다. 안중근 부대는 이어, 같은 함경도의 회령으로 다시 진격했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신식 무기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병력이 무려 5,000여 명이나 되었던 것에 반해 독립군 부대는 겨우 300여 명에 불과해 일본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참담하게 후퇴한 안중근은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독립 의병군을 조직했다. 1909년 봄, 안중근을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2명의 애국 동지들이 모두 피로써 이름을 쓰고 독립 투쟁의 의지를 함께 다짐한 뒤, 피로 물든 태극기를 두 손으로 높이 펼쳐 들었다. "대한 독립 만세!" 안중근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겠소." 다른 동지들도 다투어 자신의 몫을 선언했다. "만약 삼 년 안에 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맹세를 어긴 죄를 씻겠소." 안중근은 비장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좋소!" 12명의 동지들은 그 날, 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맹세를 했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모임을 단지회(斷指會)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극비의 이토 암살 작전안중근이 거사를 꿈꾸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분노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1909년 10월 중순경의 어느 날, 러시아의 재무 대신 코코브세프가 연해주와 북만주 지방을 시찰할 예정이라는 보도와 함께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가 코코브세프를 만나기 위해 10월 하순,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안중근의 가슴에서는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때마침 알고 지내던 애국 동지 우덕순이 안중근과 뜻을 같이 하겠다고 찾아왔고,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뜨거운 결의를 나눴다.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을 며칠 앞두고 안중근과 우덕순은 비밀리에 거사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권총도 마련했다.
10월 21일 아침. 마침내 안중근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들은 도중에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하를 만나 같이 갔고, 또 하얼빈에서는 조도선이라는 동지를 만나 동포인 김성백의 집에 머무르며 이토를 죽일 계획을 함께 의논했다. 참고로 그들은 서로 팀을 짜서 역할을 나누기로 했는데, 안중근은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거사하기로 했고, 우덕순은 안중근의 거사가 만약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조도선과 같이 남쪽 지역인 차이자거우역으로 미리 내려가 1차로 그곳의 길목을 지키기로 했다. 드디어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하는 10월 26일, 우덕순과 조동선은 여관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새자마자 차이자거우 역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역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헌병대의 엄명이 있었다며 여관주인이 방문을 열어주지 않아 결국 거사에 실패하고, 이들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근처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이 날 아침 안중근은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하와 함께 서둘러 하얼빈 역으로 나갔고, 안중근의 총탄에 '작은 일본' 이토는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안중근이 저격 현장에서 체포되어 끌려간 직후, 유동하 역시 러시아 헌병대의 검문에 걸려 체포되고 말았다.
감옥에서 쓴 '안응칠 역사' / 일본인들 멋대로 진행된 날치기 재판
검찰관과 변호인의 공방전 / 안중근 의사 최후의 진술ㆍ1 / 안중근 의사 최후의 진술ㆍ2사건 직후, 안중근이 끌려간 곳은 하얼빈 역구내에 있는 러시아 헌병 파견소였다. 당시 일본인 미조부치 검찰관은 이토를 살해한 이유를 중점적으로 조사했는데, 안중근은 15가지에 걸쳐 아토의 죄목을 낱낱이 꼽았다. 4~5일 후에 안중근은 같이 잡혀 온 동지들과 함께 뤼순 감옥으로 넘겨졌다. 이로부터 안중근은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이 감옥에서 남은 삶을 보내야 했다. 참고로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갇힌 뒤, 이때부터 밤낮으로 본격적인 조사와 재판에 시달리면서도 틈틈이 밤을 새워 '안응칠 역사'란 제목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즉 태어난 이후, 성장 과정, 의병 활동, 이토의 암살과 옥중 생활 등 지금까지 살아온 파란만장한 자신의 일생을 기록해 나갔던 것이다.
한편 안중근을 비롯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 대한 재판이 처음 열린 것은 사건 이듬해인 1910년 2월 7일이었다. 재판관은 일본인 판사 마나베였다. 재판은 2월 8일과 9일 등 불과 3일 동안 세 차례의 재판을 거쳐 10일 검찰관의 논고, 12일 변호인의 변론과 각 피고의 최후 진술 그리고 14일 오전 10시에 판사의 마지막 판결이 내려졌는데, 안중근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날치기 재판이었다. 참고로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자세한 의견을 진술하려고 했으나, 재판관은 그저 회피하는 데 바빴고, 오히려 안중근의 입을 막아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게 하여 안중근은 재판 첫 날부터 울화가 치밀었다. 아무튼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할 때 안중근은 일본의 잘못을 조목조목 준엄하게 꾸짖었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의연하고 당당하게 끝까지 주장했다.
순국의 현장, 뤼순 감옥의 오늘1910년 3월 26일, 32세의 아까운 나이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은 2000년대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역사 유적지로 그 의미가 길이 빛나고 있다. 중국 다렌에서 서쪽 해안으로 약 50리 떨어진 이곳 뤼순 감옥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국보급 중요 문화재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너무나 애통하고 분한 노릇은 안 의사가 처형당한 후, 지금까지 안 의사의 유해와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간교한 일본 경찰은 안 의사의 유해가 조선 독립운동에 이용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비밀리에 사형을 집행했고, 그래서 안 의사의 유해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비록 그의 넋은 다른 나라 아주 먼 곳, 하얼빈의 하늘에서 아직도 외롭게 떠돌고 있겠지만, 그의 애국정신은 우리 겨레 모두의 가슴에 위대한 역사의 빛으로 오래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