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의 위대한 스승 김구
이상현 지음 | 영림카디널
경교장의 총소리 / 통곡의 장례식 현장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1가 1번지 경교장(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역사적 장소)에서, 우리 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은 안두희라는 젊은 육군소위가 쏜 총에 맞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 7월 5일, 김구 선생의 장례식이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영구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온통 인파로 뒤덮였고, 모두들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 숙여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효창 공원 서쪽 기슭에 고이 묻혔는데, 이곳에는 일찍이 선생의 피 끓는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나라에 몸 바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열사가 잠들어 있었다. 김구 선생은 나라를 위해 먼저 목숨을 바친 옛 애국 동지들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붉은 밤 한 톨의 꿈 / 산골의 개구쟁이 소년 / 분노의 과거 시험
1876년 8월 29일(양력), 김구는 황해도 해주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첫 이름은 창암이었는데, 창암의 가문인 안동 김씨는 대대로 이름난 양반의 집안이었으나, 조선 시대 김자점이라는 집안 어른이 역모에 가담한 죄로 사형을 당하는 바람에 가문은 완전히 망하게 되었고, 창암의 11대 할아버지는 살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황해도 해주의 텃골로 몰래 숨어 들어갔다. 그때부터 창암의 집안은 모두 상민의 신분이 되었는데, 어려운 형편에서도 창암은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글을 익혔다.
철이 들면서는 그의 가슴에 양반들의 권력에 대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고,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종 29년인 1892년. 열일곱 살이 된 창암은 이름을 창수로 바꾸었고, 그 당시 과거시험의 부조리한 문제점들(남의 글을 빌리거나 돈을 주고 사서 내는 관행)에 실망하여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 동네에 글방을 마련해 친척, 동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동학군의 '아기 접주' / 방랑의 길 / 사형 집행일
한편 창수는 동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동학의 평등주의가 너무 반가웠고, 썩어 빠진 정치를 없애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동학의 정신에 심취하여 열심히 포교운동을 했고 동학혁명에도 참여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결국 동학의 우두머리 전봉준은 처형을 당했고, 동학군의 일부 무리들은 숨어서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창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 무렵 창수는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 진사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청나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1896년 2월 하순, 스물한 살의 창수는 집을 나섰으나,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나 어수선하여, 일부러 청나라까지 갈 필요가 없이 나라 안에 머무르면서 당분간 정세를 살펴보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하고 발길을 돌려 안악으로 향했다.
안악으로 가는 길에 창수는 왜놈으로 보이는 자가 있어, 일본군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으려 그를 살해했는데, 그 일본군은 일본군 군사간첩 스치다였다. 그 일로 인해 창수는 인천 감옥에 갇혔고, 감옥 안에서도 꾸준히 책을 읽고 다른 죄수들에게 글도 가르쳤다. 창수는 죄수들의 선생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붙잡혀 온 죄수들을 위해 각종 편지, 소송장 등을 써 주었다. 그런데 그 해 7월, 다른 살인 죄수 및 강도들과 함께 김창수도 7월 27일에 사형시키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예정 날, 고종 황제는 어전 회의를 열고 김창수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당시 법무 대신이 창수와 함께 사형에 처할 죄수들의 명부를 가지고 들어와서 황제의 최종 결재를 받았는데, 창수의 죄명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인을 했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다시 어전 회의를 열고 사형을 면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심야의 탈출 / 추적자 / 민족의 슬픔 / 애국의 횃불
창수가 극적으로 사형 집행을 면한 지도 7개월이 지났지만, 왜놈들은 창수를 풀어 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창수는 1898년 3월 9일 2년 동안 갇혀 있던 인천 감옥을 탈출했고, 오갈 데가 없어 몇 군데의 절을 옮겨 다니며 스님으로 지내다가, 그 해 늦가을에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곧 다시 집을 나와 동지들의 집으로 옮겨 다녔고, 이름도 김창수에서 김구로 바꾸었다. 그 후 1901년 2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구는 당분간 집에 눌러앉아 농사를 짓다가 학교를 세웠고,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자 진짜 교원이 되기로 결심하고 결국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참고로 나이 서른이 다되어 맞은 김구의 신부는 황해도 신천의 사평동이라는 마을에 사는 최준례라는 처녀였다.
한편 광무 9년인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나라 안의 곳곳에서는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이 조직되었다. 이때, 김구는 진남포 예수 교회의 청년회 총무 자격으로 서울 상동 교회에서 열리는 전국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이 회의는 사실은 애국 운동을 위한 모임이었다. 그 뒤 상동 교회의 모임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다른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김구는 황해도로 돌아가 안악에 있는 양산 학교의 선생이 되었고, 최광욱 등의 교육가들과 더불어 교육자들의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즉 김구는 황해도 안에 학교를 많이 세우고, 그것이 잘 운영되도록 이끌어 주는 책임을 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구는 순회강연도 다녔는데, 송화군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하여 일본 경찰에게 끌려갔다. 한편 1909년 10월 26일, 김구가 경찰서로 끌려간 바로 다음 날,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뉴스가 신문에 실렸다. 일본인 검사는 김구에게 안중근과의 관계를 캐물었지만, 김구는 안중근의 부친과는 아는 사이지만 안중근은 잘 모른다고 했다. 결국 김구가 안중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총격 사건과도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밝혀져 김구는 석방되었다. 김구는 다시 안악으로 돌아와 양산 학교의 일과 함께 재령군 복률면에 있는 보강 학교의 교장직도 함께 맡았다.
17년의 징역 선고
그러던 어느 날 밤,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었다. 안명근은 독립 운동 자금을 내놓기로 한 부자 놈들이 이제 와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권총으로 모두 쏘아 죽이겠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또한 동지들을 이끌고 황해도 일대의 공장을 습격해, 공장에 있는 왜놈들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김구는 한 나라의 독립이 그 같은 일시적인 분풀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더 많은 동지들을 모으고, 동포를 가르쳐서 실력을 쌓은 뒤, 한 번을 싸워도 크게 싸우라고 타일러 보냈다. 안명근이 다녀간 며칠 뒤에, 신문에는 안명근이 사리원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뉴스가 크게 보도되었다. 그 이듬해인 1911년 1월 5일 새벽. 김구는 헌병 파견소로 끌려갔는데, 7, 8명의 양산 학교 선생들까지 차례로 끌려와 있었다. 왜놈들은 다짜고짜 김구의 손발을 꽁꽁 묶은 뒤, 천장에 매달고 매를 쳤다. 그들은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과의 관계를 추궁했으나, 김구는 아는 사이이기는 하나 안명근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고 단호히 대답했다. 왜놈들의 모진 고문은 밤을 새우면서 계속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뜬눈으로 고문을 계속 당하면서도 김구는 마음속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열면 안 된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구는 결국 안명근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죄로 17년의 징역 선고를 받았다. 김구의 징역살이는 그 뒤,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죽어서 8년이 감해졌고 몇 달 뒤에는 메이지의 부인이 죽었다고 해서 나머지의 3분의 1이 감해졌다. 그 무렵 김구는 감옥살이 기념으로 이름자인 거북 구(龜)를 아홉 구(九)로 고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정했다. 이와 같이 이름자를 고친 것은 일본인의 국적에서 벗어난 것을 뜻하며, 백범이라고 호를 정한 것은 가장 천한 계급이었던 백정과 무식한 천민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애국심을 갖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그 뒤 김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인천 형무소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나머지 징역살이를 끝내고 풀려 나왔다. 한편, 양산 학교는 강제로 폐교가 되고 말았다.
상하이 임시 정부 시대
1919년 3ㆍ1운동 직후, 김구는 국내에서는 많은 행동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건너가 활약하기로 작정을 했다. 김구가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그 곳에 막 세워지던 해였다. 그 당시, 중국 상하이는 3ㆍ1운동 이전부터 해외로 망명했던 독립 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던 곳으로, 이곳이 중심이 되어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가 추진되었는데, 4월 10일에는 상하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위원으로 하는 임시 의정원 회의가 열려, 국호(대한민국)와 중요한 조직의 규정을 정하고, 국무 위원을 선출함으로써 임시 정부로서의 공식적인 면모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특히, 임시 정부 조직의 난립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당시, 상하이의 임시 정부 이외에도, 노령 지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의회', 서울에서 조직 선포된 '한성 정부' 등 세 갈래로 임시 정부가 나뉘어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무엇보다 대내외적으로 항일 독립 운동에 있어서 힘의 분산 내지 혼선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남의 나라 땅인 상하이에서 탄생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인 국무총리에는 이승만 박사, 그 밑에 내무, 외무, 재무, 법무 등 각 부서가 있었으며, 광복 운동에 참여한 여러 선배 동지들이 각각 그 책임자인 총장 자리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당시 상하이 임시 정부의 내무 총장으로 있던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서 자신을 정부 청사의 문지기로 써 달라고 간청했고, 안창호는 김구의 인간 됨됨이와 항일 운동의 경력을 참작해 정무 국장으로 임명했다.
그 이듬해인 1920년에 김구의 부인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으며, 2년 후에는 어머니도 건너왔다. 그리고 이 무렵에 아들 신도 낳았다. 그 뒤 백범 김구는 곧 도산 안창호의 뒤를 이어 내무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김구의 부인이 아들 신을 낳은 뒤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는 신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고, 김구는 상하이에 혼자 남게 되었다. 1927년 11월, 백범 김구는 국무령으로 뽑혔다. 국무령은 상하이 임시 정부의 최고 수령의 자리였다. 김구는 국무령으로 있으면서 한인 애국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 조직을 통해 김구는 갖가지 지하 애국 운동을 도왔고, 또 애국 청년들을 길러 조국 광복 운동에 앞장섰다.
뜻밖에 만난 애국 청년 이봉창 / 애국 동지 윤봉길과의 또 다른 만남
1931년 1월 중순, 낯선 청년이 임시정부로 찾아왔는데, 그 청년은 일본 사람들로부터 온갖 횡포와 학대를 받아온 동포로, 왜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김구는 그가 보통 청년이 아님을 알고 일본천황 암살 계획을 치밀하고 은밀하게 계획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이봉창이었는데,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사쿠라다 문 앞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근위병만 부상시키고 일본 천황은 맞지 않았다. 이봉창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속에 조사를 받게 되면서 그 배후 인물이 김구란 사실이 드러나자, 김구는 피신을 해 한동안 숨어 지내게 되었다. 결국 이봉창 의사는 10개월 후에 처형을 당했다. 이 무렵, 세계정세의 변동과 함께 혼란과 분쟁에 휩싸인 상하이의 임시 정부도 새롭게 구성이 되었는데, 김구는 새 국무위원의 주석이 되었다. 한편 이봉창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이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의 주요 인물에 대한 김구의 암살 공작과 파괴 공작은 극비리에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라한 채소 장수 한 사람이 김구를 찾아왔다. 그가 바로 윤봉길 의사였는데, 윤봉길은 김구를 만나자마자 이봉창 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 달라고 간청을 했다. 김구는 그의 큰 뜻에 감탄해서, 그와 굳은 악수를 했다. 김구와 윤봉길은 4월 29일에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있을 예정인 천장절 축하식 때에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 마침 천장절 축하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점심 도시락 하나, 물통 하나, 일본 국기 하나만을 휴대할 수 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를 보고 김구는 폭탄 장치를 한 도시락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피바다가 된 훙커우 공원 / 조국 광복으로 27년 만에 귀국
1932년 4월 29일. 김구와 윤봉길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다. 두 사람은 뜨겁게 손을 마주 잡았다. 윤봉길은 드디어 도시락을 들고 왜놈들의 경비를 뚫고 무사히 훙커우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낮 12시, 윤봉길의 손이 번쩍 솟구치면서 도시락 하나가 경축 단상 위로 날아갔다. 윤봉길은 나머지 폭탄으로 자살을 하려 했으나 불발이 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요네사토, 카와바타 등 주요 인물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수많은 일본 고관들이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 역사 중에서도 가장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고,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윤봉길은 그 해 12월 19일 처형되었다. 김구는 애매한 동포들에게 해를 끼칠까봐 1933년 8월 14일, '한인 애국단장 김구'라는 이름으로 폭탄사건의 주범은 자신임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자 왜놈들은 김구를 당장 잡으려고 했고, 김구는 자싱이라는 곳으로 피신을 했다.
그 뒤 김구는 다시 중화민국 주석인 장제스의 초청을 받아 난징으로 갔고, 그곳에서 발판을 다져 이청천, 이범석과 힘을 합쳐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뒤 1940년 9월, 김구는 미국과 하와이에 있는 교포들로부터 4만 원의 독립 운동 기금을 받아 대한 광복군을 조직했는데, 총사령관에는 이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1920년 7월경,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파견한 청년단 간부들이 주동이 되어, 보다 효과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도록 조직된 독립군 부대로, 대표적인 전투는 청산리 전투를 꼽을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고, 국민 모두가 한 마음, 한 덩어리가 되어 기쁨을 나누었다.
1945년 11월 23일, 일흔 살의 노혁명가 김구는 마침내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땅을 27년 만에 밟았다. 한편,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나라 안은 먹구름이 뒤덮이고 있었다. 그것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 미국, 영국, 소련 등 3개국의 외상들이 모여,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5년 동안 우리나라를 맡아 다스린다는 신탁통치 안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38선을 정해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주둔한다는 협정도 맺었다. 이에 온 국민이 나서서 신탁 통치를 반대하자, 미ㆍ소 공동 위원회는 결국 한국 문제를 유엔 총회로 넘겼고,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소련의 반대로 유엔은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세우도록 하자고 결의했다. 이에 김구는 나라가 남북으로 갈리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남한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져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후, 김구는 경교장에서 침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청년 장교 안두희의 권총 저격을 받아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통일을 끝내 보지 못하고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