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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으로 일제와 싸우고 글로써 독재와 싸운 장준하

김옥선 지음 | 뜨인돌어린이
느티나무의 배웅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때 장준하의 아버지는 객지에 나가 있었고, 학문이 높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아버지 밑에서 장준하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일주일에 한 번 신문이 오는 날이면 할아버지와 함께 신문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 뒤 열여섯 살에 평양 제일의 명문학교인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장준하는 여름 방학을 앞둔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서 동아일보에서 여름 방학을 이용해 '브나로드 운동(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의 뜻으로, 러시아의 귀족 청년과 학생들에 의해 전개된 농촌 운동)'에 참가할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계몽 희망 지역을 고향으로 신청했고, 고향으로 돌아가 밤낮으로 사람들에게 노래와 글자를 가르쳤는데, 일본 경찰에서 그것을 알고 항상 순사들을 보내 감시를 했다. 장준하는 '이것이 다 조국이 없어 당하는 모욕이다. 독립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라고 생각하여 더욱더 열과 성의를 다해 가르쳤고, 한글과 의식을 깨우치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뿌듯했다.



그 뒤 중학교 졸업 후 장준하는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데,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 장준하는 제자 김희숙(훗날 장준하의 아내)네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다가,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장준하와 김희숙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갔다. 한편 일본은 전쟁에서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조선학생들을 '반도인 학도 특별 지원병제'라는 제도를 만들어 전쟁터로 끌고 갔는데, 장준하는 일본이 조선처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다는 말에 바로 귀국하여 김희숙과 결혼하고 2주 후에 징병으로 끌려갔다. 그 뒤 중국 쉬저우에 있는 일본군 쓰카다 부대에서 동료 세 명과 함께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장준하는 중국군 유격부대로 가서, 평생 친구가 될 김준엽을 만나게 되었다.

이상한 작전 / 되찾은 밀가루 / 사라져 버린 꿈

장준하 일행과 김준엽은 몸을 의탁하고 있던 한치륭 유격대가 공산군의 습격을 받아 믿고 따르던 한사령관이 목숨을 잃자,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으로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충칭까지는 너무 멀고 위험해서 중간지점인 임천에 있는 중국 사관학교 특별반에 입학했다. 많은 한국군 청년들이 그곳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광복군 훈련반에서는 훈련과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답답한 장준하는 동료들과 함께 훈련생들에게 직접 강의를 했고, 강의한 내용들을 모아 《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4개월간의 훈련반 과정을 마치고 장준하는 중국군 준위 계급을 받았고, 동료들과 함께 충칭으로 가기 위해 다시 준비를 했다. 함께 떠난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모두 53명이었는데, 몹시 추운 겨울날에 길을 떠나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1945년 1월 31일, 장준하 일행은 드디어 임시 정부에 도착했다. 장준하는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일에 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을 빨리 만나고 싶었는데, 김구 선생의 진심 어린 환영을 받고 일행은 모두들 감격과 통한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장준하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임시 정부의 요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비방하고 헐뜯는 모습을 보고 심한 회의를 느꼈고, 장준하와 동료들은 이범석 장군을 따라 시안으로 가서 광복군 훈련을 받았다. 고된 훈련을 받는 틈틈이 장준하는 그전에 만들었던 《등불》에 대한 애착으로 다시 《제단》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내놓았다. 마침내 1945년 8월,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연합국에 통고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대한 독립 만세!"라며 함성을 질렀지만, 장준하는 온몸에 힘이 빠지며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일본을 꼭 우리 손으로 몰아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원통할 수가…….'

김구 선생이 남긴 정신

1945년 11월, 임시 정부 책임자들은 미군정이 보내준 수송기 편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 김구 선생 일을 도왔던 장준하는 선생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드디어 비행기가 고국 땅에 착륙하자 임시 정부 책임자들을 맞아준 것은 달랑 미군 장갑차 몇 대와 미군 병사 몇 명뿐이었다. 한편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유엔으로 넘겨졌는데, 유엔에서 38선을 경계로 해 미국은 남한을, 소련은 북한을 한시적으로 다스리기로 했고, 미군은 서울로 들어와 남한에는 미군정이라는 하나의 정부만 있을 뿐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였으며, 김구 선생 또한 임시 정부의 대표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국민들이 김구 선생을 따른다는 것을 알고는 김구 선생과 국민들의 접촉을 막으려고만 했다.



게다가 임시 정부 책임자들은 정부의 일보다 서로 각자의 세력을 키우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고,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미국은 북한과는 별도로 남한에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 당시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승만과 그 정당은 단독 수립을 환영했으나, 김구 선생은 분단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노력은 헛된 것이 되고, 그해 5월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이후 김구 선생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독서로 소일거리 삼아 평안한 날들을 보냈고, 장준하도 신학 공부에 매달렸다. 그 뒤 1949년 6월, 안두희라는 국군 장교에게 김구 선생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구 선생의 부음을 들은 국민들의 통곡 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졌고, 깊은 충격을 받은 장준하는 오랫동안 슬픔에 빠져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으로 '선생님이 그토록 이루시려 했던 통일, 그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잡지 만드는 사람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북에서 내려와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이 사흘 만에 점령당했고, 사람들은 집과 살림살이를 그대로 두고 몸만 급히 빠져나와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장준하도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장준하도 전쟁 중에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은 실종되었으며 두 살 된 딸은 약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었다. 장준하는 슬픔 속에서도 다시 용기를 내어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문교부 장관으로 있는 백낙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백낙준은 장준하가 김구 선생 밑에서 비서로 있을 때 연설문이나 담화문을 맡아 쓴 것을 알고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문교부에서 지금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국민들 정신에 약을 발라 줄 수 있는 잡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자네가 해 보겠는가?" "예.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날부터 장준하는 《사상》이라는 잡지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장준하의 의욕과는 달리, 잡지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4호까지만 발행되고 끝이 났다.



그 뒤 장준하는 《사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자신의 힘으로 잡지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잡지의 이름을 《사상》의 후속으로 《사상계》라고 지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자유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민족정기를 세우는 데 앞장서는 잡지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장준하는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무작정 원고를 청탁했고, 원고를 써 주는 학자들은 확고한 신념과 열정을 지닌 무일푼의 젊은 잡지 발행인에게 관대했다. 작업할 사무실도 없었던 장준하는, 친지의 소개로 만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사장 이춘우의 도움으로 사무실도 빌려 쓰고, 조판, 인쇄, 제본까지 외상으로 거래할 수 있었다. 어려움 끝에 부산에서 《사상계》는 탄생했고, 학생들을 위주로 한 독자들의 반응은 대성공이었다. "그래. 국민들이 바라는 건 바로 이거야. 무엇이든 진실을 알려야 해." 장준하의 정열로 세상에 첫 선을 보인 《사상계》는 1953년 11월까지 8권을 부산에서 발행하고, 12월호부터는 서울에서 발행하게 되었다.



세계로부터 인정받다

한국 전쟁이 아무런 진전 없이 소강상태였던 1952년에 이승만은 자유당을 만들어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헌법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3선 제한을 철폐한다는 조항을 억지로 만들어 넣어 1956년에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또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승만 정부는 전쟁으로 상처 받고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생활을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장준하는 직접 《사상계》의 앞머리에 권두언이라는 자신의 글을 실었는데, 그의 권두언은 독자들에게 늘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 뒤 장준하는 함석헌(장준하가 존경하는 시인이며 사회운동가, 종교사상가이다. 1985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선생을 찾아갔는데,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써서 장준하에게 주었다. 한편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고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라는 글이 실린 8월호 《사상계》가 서점에 배포되자마자,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함석헌과 장준하는 경찰에 끌려가 매를 맞았고, 함석헌은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이유로 20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장준하와 함석헌이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자, 대학생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그 내용이 궁금해 《사상계》를 사 보는 바람에, 그 달은 《사상계》가 가장 많이 팔렸다.

한편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는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극에 달했다. 이에 국회의원들은 이번 선거는 불법적이고 무효라고 주장했고, 전국적으로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부정 선거와 불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4월 27일 대통령직을 내놓고 5월에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이것이 4·19혁명이다. 4·19혁명은 국민들의 승리였다.

장준하는 더욱더 잡지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잡지사는 많은 빚을 안게 되었는데, 그때 새 정부의 재무 장관인 김영선이 장준하를 찾아와서 정부에서 추진하는 국토 건설 사업을 도와 달라고 했다. 장준하는 《사상계》의 살림살이가 매우 어렵고, 《사상계》는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거절하자, 김영선은 《사상계》의 채무를 해결해 줄 테니 국토 건설 사업을 맡아 달라고 장준하에게 부탁했다. 결국, 장준하는 김영선의 설득에 못 이겨 국토 건설 사업의 기획부장을 맡았다.



그 뒤 1961년 5월 16일, 현 정치에 불만을 느낀 군인들이 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청와대로 몰려와서, 2년 동안 안정적인 정치를 이룩한 뒤에 군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해 군인들이 일으킨 5·16쿠데타는 올바르지 않으니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어서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라는 글을 실었고, 군사정권은 장준하가 김영선에게 받은 돈을 문제 삼아 장준하를 부패 언론인으로 몰아갔다. 실망한 독자들의 외면으로 《사상계》의 판매부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장준하는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 뒤 1962년 8월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필리핀의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제적인 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 수녀도 수상하였음) 언론 문화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시민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장준하의 수상소식으로 인해 《사상계》의 독자들은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



거짓말하는 대통령 / 박정희와의 한판 대결

1963년 3월 16일, 박정희는 2년만 정치에 관여하겠다는 혁명 공약을 뒤집고, 2년으론 부족하니 2년을 더 정치에 관여해야겠다고 선언했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어기는 것을 보고 《사상계》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게 처음 약속한 대로 민간인에게 정치를 넘겨주고 어서 군대로 돌아가서 나라를 지키라고 말했고, 이 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사상계》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1966년 10월 15일 대구에서 장준하는 박정희와 재벌들의 부정부패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고, '국가 원수 모독죄'라는 죄명으로 두 달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에 맞서 처음으로 한 감옥살이였으며, 그 이후로 장준하는 서른일곱 번이나 구속되고 아홉 번이나 감옥에 갇혔다. 그 뒤 1967년 4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 때에도, 장준하는 윤보선 후보의 편에서 박정희는 절대 안 된다고 부르짖었지만,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장준하는 선거법에 의해 '국가 원수 모독죄'로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장준하는 박정희에 맞서 6월 8일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했다.

유세장에서 연설을 해야 할 사람이 감옥에 있으니 그의 주변 사람들이 선거운동을 대신 했는데, 수염이 하얀 함석헌의 날카로운 연설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장준하에 비해 상대편 후보는 막강한 국회의원이었지만, 선거 유세가 계속되자 점점 장준하에게 투표하겠다고 마음을 바꾸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투표일을 일주일 앞두고 석방된 장준하의 유세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결국 장준하는 상대편보다 두 배나 많은 표를 얻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사람들이 장준하를 뽑아 준 건 장준하가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원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장준하는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던 《사상계》를 부완혁에게 넘겨주었으나, 《사상계》는 1970년에 폐간당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 헌법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단체를 만들어 여기서 대통령, 국회의원들을 뽑는다는 것이었는데, 1973년 12월 박정희는 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선거에 의해 임기 6년인 8대 대통령이 되었다. 장준하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고, 박정희가 다시 발표한 긴급조치법에 의해 최고형인 15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년 만에 석방되었다.



장준하는 참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고, 가슴이 답답한 날에는 등산을 떠났다. 그 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친하게 지내던 산악회 사람들과 약사봉 등산을 갔다가 사람들이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혼자 산길을 걸어 올라갔는데, 몇 시간 후 암벽 아래에서 숨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장준하의 주검을 본 사람들은 그 험한 암벽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상처 하나 없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며 타살이라고 울부짖었고, 소식을 방송으로 전해들은 사람들도 오열했다. 가슴이 답답해 참을 수 없다던 장준하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에 있는 천주교 나사렛 묘지에 조용히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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