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모 이야기
박이정 지음 | 책이있는마을
유키의 겨울 / 안녕, 마리모
창밖에는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열두 살 유키의 가슴엔 아직도 녹지 않은 잔설들이 생채기처럼 남아있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유키는 마음의 문을 닫아건 채, 세상과의 소통을 완강히 거부했다. 부모님께 여행 티켓을 선물한 것은 유키의 언니인 요코였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남편 마코토가 포상으로 받아온 것이었는데,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가 그 비행기를 타는 건데 하면서 요코는 수도 없이 자책했었다. 그날 이후 유키는 입을 닫아버렸고, 스스로 단단하고 차가운 방어벽을 만들어 일 년 동안 벽 안쪽에 숨어서 부모님에 대한 추억만을 곱씹으며 살았다. 요코는 유키에게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부모님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채워주고 싶어 고민하다, 마코토와 상의해 강아지를 한 마리 키워보기로 했다.
마코토는 친구인 오사무에게서 막 태어난 새끼 강아지를 한 마리 얻어 왔는데, 첫날부터 녀석은 꼬리를 흔들며 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며칠 후 요코는 마당 개집에 걸린 문패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마리모의 집' 매직으로 삐뚤빼뚤 써내려간 유키의 글씨였다. 유키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 오카야마 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다 죽어간 '마리모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유키는 눈물을 글썽였었다. 책에서 찾아보니 녀석은 '시바 이누'종이었다.
너는 내 운명
마리모는 한 달 사이에 거의 두 배로 자랐는데, 마리모는 유키마음의 닫힌 문을 스스럼없이 열고 들어가더니 유키를 아프게 만드는 기억들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유키와 마리모는 함께 외출을 시작했고, 유키는 마리모에게 많은 단어들을 가르쳐 주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리모는 유키의 말과 손짓, 미묘한 감정의 변화까지 이해했다. 어느 날 유키가 마리모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언니, 마리모는 내 동생이야"라고 말했을 때, 요코는 가슴을 옥죄던 응어리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어느덧 마리모는 성견이 되었고, 유키는 마리모와 함께하는 산책시간이 하루 중 제일 편안하고 행복했다. 유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마리모에게 가르쳐주었고, 언젠가 부모님과 함께 가보았던 바다도 마리모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다가 유키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유키네 가족은 불꽃놀이 축제가 열린다는 유이가하마 해변으로 휴가를 가기로 했다. 그런데 마코토가 직장일이 바빠져서 휴가를 내지 못하게 되어, 마리모를 승용차에 태우고 갈 수 없게 되었다.
요코는 포기하지 않고 관광버스회사 몇 곳에 차례로 전화를 걸어서, 이동용 우리에 넣어서 태운다는 조건으로 개를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는 회사를 찾아냈다. 요코와 유키는 오사무 집에서 이동용 개 우리를 빌려왔다. 유키는 마리모에게 선물하기 위해 작은 공도 하나 샀다. 공의 표면에 유성펜으로 '마리모의 것'이라고 써넣은 다음 여행 짐 속에 넣었다.
드디어 버스를 타고 바다에 도착했다. "가자, 마리모! 바다를 보러." 마리모는 물 만난 고기처럼 껑충거리며 따라나섰다. 유키는 손에 쥐고 있던 공을 마리모에게 내밀었다. "자, 이건 내 선물이야. 잡아봐." 유키가 힘껏 공을 던지면 마리모가 쏜살같이 공을 향해 달려가서 공을 물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바닷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마리모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키는 즐거웠다. 밤이 되자 요코와 유키, 마리모는 해안가로 나가서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았다. 요코가 유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했다. "유키, 돌아와 줘서 고마워." 마리모의 눈동자 속에서도 하나둘 불꽃이 피어났다.
행복한 바다여행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휴게소에 들르자, 유키는 마리모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렸다. 유키는 마리모의 굳은 다리를 풀어주기 위해 잠깐 동안 공놀이를 한 다음 다시 버스로 향하다가 마리모를 불렀다. "이 공 갖고 요코 언니에게 가 있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버스 안에서 꼼짝 말고 있어야 한다." 유키는 멀찍이 떨어져서 마리모가 버스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화장실로 달려갔다. 용무를 마치고 유키가 주차장으로 와 보니 이상하게도 버스는 마리모를 태웠을 때보다 훨씬 뒤로 물러나 있었다. 황급히 버스로 달려가서 기사아저씨 얼굴을 확인하고서 유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유키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길을 잃다 / 떠돌이가 된 마리모 / 친구를 만나다
한편 버스에 올라탄 마리모는 요코가 있던 곳으로 걸어갔으나, 웬 낯선 남자가 잠들어 있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유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잠시 후 버스가 출발했고, 한참 달리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마리모가 울음소리를 높였고, 운전기사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 운전기사는 아무도 개주인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자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마리모는 버스에서 내려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낯선 길, 낯선 냄새뿐이었다. 마리모는 휴게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버스가 달려온 길을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리모가 갈림길에서 선택을 거듭할 때마다 유키에게로 향하는 길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마리모는 바람 속에 묻어 있을지도 모를 익숙한 냄새 한 오라기라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모두가 낯선 냄새들뿐이었다. 마리모는 밤이슬이 내려 축축한 풀밭 위에 누워 코를 품속에 묻었다. 두려움과 유키에 대한 그리움이 마리모의 몸속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마리모는 길가 모퉁이에 누워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유키가 그리웠고, 맛있는 아침밥이 그리웠다. 유키를 만나게 될 때까지 마리모는 무작정 걷기로 작정하고 끝없이 거리를 헤매고 또 헤맸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마리모는 점점 누워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떠돌이개가 된 후 처음으로 마리모에게 관심을 보여준 건 공터에서 만난 늙은 개였다. 커다란 덩치에 볼살이 잔뜩 늘어진 개 한 마리가 마리모를 새끼로 아는지 계속 먹을 것을 물어다 주었다. 덩치의 보살핌으로 마리모는 점점 기운을 되찾았고, 외롭고 불안했던 시간들 또한 조금씩 기억 속에서 지워져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늙은 덩치는 숨을 거두었고, 죽은 덩치 옆을 지키고 있던 마리모는 근처 수의사 아저씨에 의해서 동물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마리모는 정들었던 덩치와도 이별했다.
도우미견이 되다
동물병원에서 지내던 마리모는 어느 날 누군가의 집으로 실려 갔다. 현관문이 열리고 안에서 중년남자와 바퀴달린 의자에 앉은 소년이 나왔다. "안녕, 삼촌 말대로 멋진 녀석이네. 난 타로야. 아빠, 내 방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될까요?" "얜 밖에서 살던 놈이야. 이 녀석에게서는 야생의 냄새가 난단 말이다." "좋아요. 얜 내 도우미견이니 내 아지트에서 살도록 받아 주겠어요." 타로의 아지트는 창고를 개조한 곳인데, 휠체어를 타고 방과 창고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난 일 년 내내 이 아지트와 방에서만 지내. 그러니 널 혼자 내버려두는 일은 없을 거야." 타로가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벽에 달린 나팔 모양의 작은 스피커에서 벨 소리가 났다. 타로가 안채를 향해 소리쳤다. "알았어요. 오 분 후에 들어갈게요." 타로는 마리모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고는 안채로 들어갔다.
다음 날, 타로는 아지트로 와서 컴퓨터를 켜고, 친구들이 올린 이름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라 큰소리로 불러보았다. "론! 지금부터 네 이름은 론 트레블러야. 외로운 나그네. 어때, 너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지?" 타로는 쿠로다에게 부탁하여 론의 전용 출입문도 만들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론의 사진에는 그럴 듯한 제목이 붙어 컴퓨터에 저장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타로는 홈페이지에 '론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시바 이누를 기르는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외로운 나그네 론'의 이야기를 연재하면서부터 타로의 홈페이지에는 방문자가 급증했다. 론이 온 이후 타로의 아지트에는 활기가 넘쳤다. 론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타로의 진정한 친구였다.
어느 날 새롭게 홈페이지를 단장하느라 오랜 시간 컴퓨터에 매달린 타로는 갑자기 다리가 심하게 떨리면서 목이 뒤로 젖혀졌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로, 로, 론! 아바바." 론이 안채 입구로 달려가 다급하게 짖으면서 현관문을 소리 내어 긁었다.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던 쿠로다는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창고로 달려가, 타로를 안채로 옮겨 침대에 눕힌 다음 다리를 주물렀고, 타로의 경련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잘했어. 론, 놀랐지? 타로는 조금만 무리해도 이렇게 된단다. 이젠 괜찮아질 거야." 곧이어 의사가 방문했고 타로는 이틀을 꼬박 자리에 누워 지냈다. 타로는 의사의 당부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타로를 구한 론의 이야기로 정보방엔 화제가 만발했다. 점점 살이 찌기 시작한 론을 데리고 쿠로다는 하루에 한 시간 씩 달리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장으로 찬거리를 사러 가곤 했다. 쿠로다는 론과 동행할 때마다 론의 몸에 밴 행동 습관을 보고, 녀석에게 전 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떨쳐버리려고 했다. 강아지 때부터 익힌 습관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간파한 탓이었다.
시간의 저편
론이 버려진 게 아니라는 것을 예감하게 된 건, 론을 데려온 지 일 년 반쯤 지난 어느 날, 타로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짧은 글 때문이었다. 낯선 방문객이 남긴 한 줄의 글을 보았을 때 타로는 아무런 답글을 달지 못하고 그대로 컴퓨터를 꺼버렸다. '론을 발견한 곳이 어디였나요? 혹시 유이가하마 해변 근처가 아닌가요? 전 유키 신스케라고 하는데, 내 동생 마리모와 너무 많이 닮았어요.' 방문자는 자신의 홈페이지 주소까지 남겨놓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타로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마리모!"하고 불러보았더니 론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네 이름이 마리모였니?" 타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난 너 없는 날들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시 혼자가 되긴 싫단 말이야!" 안채로 들어간 타로는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창고 쪽으론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쿠로다는 이틀째 아지트와 컴퓨터를 버리고 마당과 집안을 오가며 생각에 잠긴 타로가 걱정스러웠다. 사흘째 되는 날, 타로는 보여줄 게 있다며 아빠에게 누군가의 홈페이지를 보여주었다. 화면에 강아지와 어린 소녀의 사진이 떠올랐다. 쿠로다 부자는 사진 속의 개가 론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잃어버린 개를 찾는 전단지 사진도 있었다. '00현 00휴게소에서 유키의 사랑하는 동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찾아주시면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쿠로다는 굳은 얼굴로 말없이 타로를 안고서 등을 쓸어내렸다. "저 애의 슬픈 얼굴을 보고서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니. 아무래도 론을 보내는 게 좋을 듯싶구나." 타로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 벌써 론과 헤어질 준비를 해뒀으니까 괜찮아요. 아빠가 전화하세요." 쿠로다는 몰라보게 성장한 아들의 모습이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유키를 만나다 / 타로와 유키 그리고 마리모
세일러 교복을 입은 소녀가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녀의 등 뒤로 마코토와 요코가 다가와 섰다. 유키는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유키가 달려들어 마리모를 안았고, 마리모는 친숙한 냄새에 저절로 꼬리를 흔들었다. "마리모, 이 바보야.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널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아니?" 타로와 쿠로다는 말없이 유키와 마리모의 만남을 지켜보았다. 타로는 카메라를 꺼내 마리모가 가족을 만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론, 잘 가. 너를 그리워할 거야. 다시는 떠돌이개가 되지 마." 유키가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시했다. 마리모는 타로의 슬픈 표정이 신경 쓰이는 듯 유키의 품에 안겨 기쁨을 나누다가도, 슬금슬금 휠체어 앞으로 다가와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때마다 타로는 일부러 냉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마리모를 외면한 채로 마리모와 작별했다.
마리모를 떠나보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타로는 우두커니 정원에 나와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론의 일기'는 원래 주인이었던 소녀를 만나는 사진들과 짧은 설명으로 끝을 맺었다. 론을 보내고 두 주쯤 지난 어느 날, 타로의 홈페이지에 눈에 띄는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유키였다. '마리모가 며칠 전부터 밥을 잘 안 먹고 가끔씩 허공에 대고 울부짖는 버릇도 생겼어요. 내 생각엔 타로 오빠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마리모를 데리고 방문해도 되나요?' 유키에게 방문해도 좋다는 답글을 올려놓고 타로는 들떠서 아지트 정리를 시작했다. 유키와 마리모는 약속대로 일요일 오전에 타로를 만나러 왔다. 마리모와 타로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리모의 목에는 전에 없던 목걸이 하나가 걸려 있었다. '마리모 론 트레블러'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이름표였다. 타로와 유키 그리고 마리모는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해질 무렵, 유키는 마리모를 앞세우고 자전거를 달려 집으로 돌아갔다. 타로는 유키와 마리모가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유키는 한 달에 한 번씩 타로의 집으로 마리모를 데려왔다. 타로는 '론의 일기'를 다시 홈페이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타로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키는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타로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유키는 마리모를 타로의 집에 두고 갔다가 다음 주말에 데려가기도 했다. 한편 마리모는 집으로 돌아가면 타로를 그리워했고, 타로에게 남겨지면 유키를 그리워했다. 유키의 집은 타로의 집에서 자전거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는데, 마리모는 두 집 사이의 길을 모두 기억하게 되었고, 혼자서도 타로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타로가 무섭게 야단을 쳐도 마리모는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길을 잃다
타로의 집에 전화벨이 울렸다. 유키였다. 유키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해서 흐느끼고 있었다. 타로는 마리모의 사고소식을 듣고는 경련이 시작되어 일주일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겨우 결심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유키의 집을 찾아갔다. 타로는 마당에 멈춰 서서 잔디밭 한쪽에 놓인 마리모의 집을 바라보았다. 마당에 있는 테이블 한쪽에는 '마리모 이야기'라고 적힌 사진첩이 놓여 있었는데, 사진 속의 강아지가 조금씩 커감에 따라 사진 속의 여자아이의 얼굴에 깃든 어둠도 조금씩 엷어지고 있었다. 유키가 입을 열었다. "수업시간에 집에서 온 전화를 받고 동물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마리모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 신호등 없는 건널목에서 사고가 났는데, 마리모가 장기를 너무 많이 다쳐서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차라리 고통 없이 마리모를 편하게 보내달라고 요코 언니가 부탁했대." 타로는 가지고 온 앨범을 유키 앞으로 밀었다. "이건 내가 만든 '론의 일기'야. 내가 마리모와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들을 너에게 줄게." 타로는 유키의 집을 나서며 다시 한 번 마리모의 집을 돌아다보고 나직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마리모, 널 만나서 행복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