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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의 친척

남상순 지음 | 사계절
아버지 집으로 가다 / 새로운 가족 / 꿈 / 의문점 / 생활기록부

엄마가 돌아가시고 지난 2년 동안 나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 엄마와 외가 식구들이 아버지에 관해 한 말은 다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오늘 두 번째로 아버지를 만났다. 외삼촌네 식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아버지가 자동차에 올라탔고, 나도 외삼촌에게 인사를 하고 얼른 차에 탔다. 아버지의 차여서일까? 처음 탄 차인데도 마음이 제법 편안했다. 소영이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힘내. 다 잘 될 거야.' 힘들 때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 든든했다. 아버지는 어떤 여자, 그리고 나와 동갑인 남자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친척들이 그 남자아이는 아버지의 처조카인데 갓난아기였을 때 부모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 아버지 집으로 이사 가는 중이다. 도착하니 과연 한 아줌마와 남자아이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잘 지내보자." "안녕, 윤준석이야. 잘 부탁한다." 내 이름은 이미용인데 그 아이와 성이 달랐다.



저녁식사 때, 준석이가 물었다. "아빠! 저랑 어떻게 되는 친척이예요? 아버지는 윤용경인데 이미용으로 성이 다른 걸 보면……" 윤용경? 내가 아는 아버지 이름은 이용경이었다. 아버지가 당황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아, 아버지 외가쪽 친척이야. "아줌마조차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아버지는 안정을 찾은 후 다시 말했다. "문제는 앞으로야. 너희들은 이제 남매란다." "네에." 녀석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버지의 친척이라니. 어지러웠다. 월요일 날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갔다. 다행스럽게도 준석이와는 다른 학교였다. 전학 절차를 밟는 중에 나는 담임이 켜 놓은 컴퓨터 화면의 가족 사항란을 엿보았다. 낯선 여자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 내 이름 밑에 동거인으로 윤준석이라는 이름이 올라 있었다. '맞아. 준석이는 편의상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라 / 새 친구

아버지와 나는 교복과 책을 사고,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는 물었다. "준석이는 누구예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러지 않아도 너한테 그 이야기를 해 주려고 하는데……. 준석이는 아버지 이름을 이용경이 아니라 윤용경으로 알고 있단다." 부모를 잃은 뒤 친척집으로 떠돌던 준석이를 이모였던 아줌마와 아버지가 키우겠다고 나섰을 때, 준석이의 친할아버지가 준석이의 성은 못 바꾸게 했고 결국 아버지는 가짜 윤용경이 되어야 했다. 설명을 한 후, 아버지는 나를 보며 말했다.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조금만 기다려 주렴. 조만간 준석이에게 모든 것을 말할 작정이다." 며칠 후, 야자가 끝난 뒤 같은 반 미선이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데, 준석이가 나를 불렀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미선이가 준석이에게 아는 척을 했다.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떴고, 준석이가 나를 뒤따라 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물었다. "내가 길에서 아는 척하니까 불편하니? 인상 좀 펴라." "널 보고 실실거리며 웃으라는 거야?" "그,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길에서 만나면 아는 척은 했으면 해." 나는 어이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이 / 미선이의 상상 / 모과나무 아래로 달려가지 못한 날

어느 날 밤, 아버지가 흥분한 목소리로 이번 시험에서 준석이가 전교 일등을 했다며 여기저기 막 전화를 하더니, 토요일에는 축하도 할 겸 친척들과 외식을 하자고 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려는데, 아버지가 나에게 성적표 안 나왔느냐고 물었다. 이번 시험 성적은 엉망이었기 때문에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줌마가 지각하겠다며 어서 가라고 해 준 덕에 얼른 문을 닫고 나왔다. 준석이가 정말 얄미웠다. 가장 좋은 것은 이미 그 애가 다 가졌다. 아버지, 집안에서의 확고한 위치, 이제는 성적까지……. 토요일이 되었다. 학교에서 오는 길에 일층 우편함을 지나치다가 408호에 꽂힌 우편물을 꺼내서 살펴보았더니, 아버지 이름이 적힌 우편물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가 조처한 것이 틀림없다. 갑자기 외가 친척들이 아버지가 서울대학생이라고 속였다며 수군대던 것이 생각났다. 나라는 존재가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엉터리 결과물이라니. 그런데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은, 미워하려 했던 아버지가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 모임에서, 나는 / 슬픔은 복받치고 아픔은 씻어내고 / 돌연한 외출

음식점에 모인 많은 가족들에게 나는 몹시 긴장하며 인사를 했다. 그들은 어색하게 나를 아버지의 친척으로 대했다. 준석이의 성적이 화제에 오르자 할머니가 말했다. "애비가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준석이 너는 대학까지 기대하면 못쓴다. 알았니?" "네……." "앞으로는 딸도 제사를 지낸다더라." 아버지가 그만 하라며 화를 냈고, 모두들 아버지를 말렸다. 나는 악마 같은 마음으로 준석이와 할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식사가 끝나자 다들 큰집으로 몰려갔고, 거실에 있는 가족사진에서 준석이의 얼굴을 보았다. 당연한 일인데도 사진 속에 내가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다들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와 준석이가 다시 나갔다.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니 두 사람이 놀이터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나도 상처받고 있는데, 무심한 아버지는 준석이만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름을 속이고 우편물을 감추고 딸을 친척이라고 둘러대면서까지. 아버지와 나는 너무 멀리 서 있다.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를 보고 싶다고 했고, 나도 이모가 보고 싶어서 이모를 잠깐 만나고 소영이네 집에 가서 자기로 했다. 집에는 이모네 집에서 잔다고 하기로 말을 맞췄다.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아줌마와 준석이도 거실에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너희들 탓이 아니고, 할머니가 엄마 아빠에게 대한 불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뿐이야. 알겠니?" '거짓말!'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외출 허락을 받았다.



소녀와 외톨이와 건맨 / 오래된 에피소드

지하철을 타고 한참 가다가, 나는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모는 나를 만나자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모란 내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존재였다. 따지고 보면 아줌마도 준석이의 그런 이모인 셈이다. "집은 어때? 학교생활은?" 이모는 질문을 퍼부어 댔다. 조금 있으니 이모의 휴대폰으로 가족들이 전화를 해 대는 것을 보고, 나는 그만 일어섰다. 열한 시가 넘어 소영이네 집에 도착했다. 우리가 한참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소영이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남친인 것 같았다. 소영이의 통화가 끝난 후 나는 소영이의 자백을 받아 냈다. "4학년 땐가 한반이었던 한지섭." "그 건맨?" "응."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자식하고 사귄다고? 넌 벌써 그 일을 잊었니?" "그 일?" 소영이의 반응에 나는 기가 막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 지섭이가 비비탄 총을 쏘아댔고, 무서우니까 쏘지 말라는 나와 몸싸움이 벌어져서 총이 망가져 버렸다. 지섭이는 나에게 총 값을 물어내라고 했고, 아이들도 모두 지섭이 편을 들었는데, 소영이가 유일하게 내 편을 들었다. 결국 엄마는 총 값을 물어주었고, 다음 날 아이들이 남의 총을 망가뜨려 돈을 물어낸 애라며 나를 놀릴 때, 또 소영이가 나서서 도와주었다. 소영이는 그 때 나의 영웅이었고, 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소영이가 그 한지섭과 사귀고 있다니. 소영이가 말했다. "지섭이는 이제 어릴 적 철없는 남자애가 아니야." 나는 화가 나서 가겠다고 일어섰다. 붙잡는 소영이를 뿌리치고 나는 큰길로 달려 나와 택시를 잡았다.



귀가 / 여보세요, 넌 누구니?

집에서 어떤 일이 생겼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내 휴대폰은 밤 10시경 울어 대다가 '야, 폰을 왜 안 받아? 이모네 집에서 잔다는 거짓말 들통 난 거야?'라는 문자가 떴을 것이고,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무척 화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열쇠를 안 가지고 나와서 한밤중에 벨을 누를 배짱도 없었다. 결국 나는 집 근처까지 택시를 타고 와서 생각해 둔 찜질방으로 들어가 밤을 보냈다. 아침에 문을 연 것은 준석이였다. "잘 갔다 왔어? 아빠가 너 들어오면 전화하라고 하셨어." 아버지와 아줌마는 가게에 나간 뒤였다. 나는 긴장하며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잘 있다 왔어?" 순간 힘이 쭉 빠지면서 허탈한 느낌이었다. 내 휴대폰에는 내가 밖에서 밤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소영이의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는데,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밤새도록 시끄러웠을 딸의 휴대폰에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을까?



잠을 좀 자고 나서 학원으로 향했다. 일찍 나온 탓에 만화책이나 잠깐 보려고 학원 근처 비디오 가게로 들어갔는데, 중학생쯤 된 아이 하나가 회원 가입을 하려고 하니까 종업원이 집에 확인 전화를 하는 것을 보고, 순간 내 머릿속에 계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회원 가입을 하겠다고 했더니 역시 확인 전화를 해야 한다고 해서 나는 부모님이 싫어하니까 비디오 가게라는 말은 하지 말고, "누구누구 씨 댁이죠?" 라고 해 달라고 했다. 종업원이 수화기를 들었다. "이용경 씨 댁인가요?" 나는 통쾌했다. 준석이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잠시 후에 종업원이 "그냥 확인할 게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더니 말했다. "회원 가입이 되셨습니다." 그럴 리가. 준석이는 분명히 이용경씨 댁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이제는 거꾸로 이용경이라는 이름을 컴퓨터에 남긴 게 마음에 걸렸다.



야참 / 낯 뜨거운 상황 / 유리창에 새겨진 구름 그림자

학교에서 돌아와 내 방에서 엠피쓰리를 듣고 있는데, 아줌마가 빨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줌마는 노크를 해도 반응이 없어 들어왔다며 나에게 좋아하는 가수와 음악에 대해 물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서운한 게 많지? 네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서 우리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준석이가 워낙 예민한 성격이라서." 아줌마는 몇 년 전에 동네 아는 형들에게 돈을 빼앗긴 준석이가 한 달 가량을 밥을 못 먹고 잠을 설쳐서 정신과 치료까지 생각했는데, 한 달 정도 아버지가 데리고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더니 차츰 좋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아줌마는 아버지한테 받은 사랑을 나한테 돌려주고 싶다고, 또 나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하고는 같이 라면을 끓여 먹자고 했다.



다음 날 학교 가는 길에 준석이가 자꾸만 나를 따라오더니 화난 얼굴로 물었다. "너 비디오 가게에서 아버지 이름으로 회원 가입했지?" "무슨 소리야?" "나도 그 가게 회원인데, 테이프를 빌리려고 전화번호를 댔더니 이용경, 윤준석 중에 누구냐고 묻더라. 아버지는 가입한 적 없다고 하셨어. 아버지 이름을 대고 집에 확인까지 하게 한 저의가 뭐야?" 나는 당황하여 학교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했고, 준석이는 개천가 두 번째 다리 밑에서 다섯 시에 보자고 하고 학교로 갔다. 그런데 준석이는 이용경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 걸까. 나는 창피하면서도 준석이가 곧 알게 될 진실이 더 흥미로웠고, 다섯 시가 은근히 기다려졌다. 그러나 준석이는 다리 밑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밤에 준석이 방으로 찾아갔다. "어떻게 된 거야?" "담탱이한테 붙들려서 못 나왔어." "그럼 놀이터에라도 나갈래?" "피곤해." "내 저의를 알아야 한다며? 당장 놀이터로 나와."



나의 세 번째 영장류 /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 저 태양 때문에 / 내 마음의 지도

놀이터에서 준석이가 입을 열었다. "미용아. 난 네가 친근하게 느껴져. 우리 집에 온 뒤 너는 화가 났을 거야. 친아버지를 친척이라고 해야 하다니." "뭐? 아, 알고 있었니?" "넌 아버지 진짜 딸이고, 난 가짜 아들이잖아."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준석이가 말했다. "어른들은 왜 꼭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까?" "글쎄 말이야." 나는 처음으로 준석이와 마음을 맞추었다. 준석이는 엄마와 소영이에 이어 세 번째로 내게 다가온 영장류였다. 그런데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우린 다 알고 있으니 애써 그러지 마시라고."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말할게." 토요일 아침 식사시간에 아버지가 준석이에게 근처 운동장으로 축구경기를 보러 가자고 하자, 내가 한 마디 했다. "축구 보면서 그 말씀도 드리면 되겠네." 순간 준석이가 나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그 때 나는 알았다. 준석이 역시 아버지처럼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다.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점심시간에 미선이가 말했다. "준석이가 사고를 쳤대." "뭐라구?" 선화고등학교에 다니는 미선이 친구들 문자가 왔는데 준석이가 학교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 버려서 다쳤다는 것이다. 준석이는 아버지에게 진실을 털어 놓으라는 내 독촉에 화가 나 있었던 모양이다. 가슴이 떨렸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니 아무도 없어서 가게로 갔더니 종업원이 아버지와 아줌마는 병원에 갔다고 알려주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더니, 준석이 수술이 잘 되었다며 오늘은 아줌마와 함께 병원에 있겠다고 했다. 나는 강가로 가서 울고 앉아 있는데, 미선이가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친구랑 싸웠다고 둘러대자, 미선이가 노래방에 가자고 했고, 우리는 노래방으로 갔다. 미선이와 노래를 부르며 평생 잊혀지지 않을 내 동무들을 생각했다. 소영이, 준석이, 그리고 네 번째 영장류인 미선이…….



이해와 오해의 사이

집에 돌아와 가방에 짐을 챙겨서 현관에다 놓고 식탁에 앉아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라고 편지를 쓰다가 구겨 버리고, 이모한테 전화를 걸었다. "옛날에 엄마는 아빠랑 헤어진 걸 후회 안 했어?" "후회 많이 했지." "아빠가 속여서 헤어진 거라며?" "젊은 날 네 아버지가 엄마를 붙잡으려고 대학생이 아니라고 하지 않은 것을 엄마는 대학생이라고 믿어 버리면서 오해가 시작된 거야. 서로에 대한 감정을 숨긴 채 잘못만을 탓하며 싸운 걸 엄마는 평생 후회했단다. 에이, 그런 얘긴 그만두자." 전화를 끊는데 아버지가 들어왔다. "가방을 챙겨 놨네? 내가 짐 챙기러 올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니?"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준석이가 다쳤는데 왜 저한테는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미안하다. 정신이 없었어. 서운했니?" 아버지는 가방에 뭘 넣었냐고 물었다. 뭐라고 말하지? 그 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소영인가?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자를 열어 보니 놀랍게도 준석이였다.



'나야 준석이. 많이 놀랐지?' 가슴이 뛰었다. 답을 했다. '괜찮아?' 계속 문자가 오갔다. '괜찮아. 걱정 많이 했지? 미안해.' '내가 아버지한테 빨리 말하라고 해서 그런 거야?' '아니 그냥 좀 겁이 났어. 다 말해 버리면 아버지를 잃을 것 같아서.'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 '아냐. 내가 머뭇거릴수록 엄마 아빠도 힘들어진다는 걸 알았어. 누가 뭐래도 우리 아버지 훌륭하신 분이잖아.' '그래. 바보처럼 훌륭하신 분이지!' '그 말이 딱이다. ㅋㅋ' 거기서 대화는 끝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니, 아버지가내가출용 가방의 손잡이를 끌고는 현관에 서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서고 말았다. 아버지는 내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병원으로 출발했다.차 안에서 사실을 말하려 했더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우연히 뒷거울을 쳐다보았더니 아버지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나도 웃어 주었다. 아버지의 진심을 알고 있다는 인상을 최대한 강하게 풍기려고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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