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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은 천만 개, 열정은 억만 개

박효인 지음 | 올리브M&B
꿈 앞에선 자신의 약점도 장점이 될 수 있어요 - 키 작은 농구 선수 남건이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이었어요. 운동이라면 못하는 게 없는 나의 우상, 우리 형이 나를 보고 농구나 한 판 하자고 했습니다. 농구공은 내가 갖고 놀기에는 큰 공이었는데, 형이 그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드리블하고, 슛을 터뜨리는 모습에 나는 홀딱 빠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도 형처럼 되고 싶어서, 그날부터 열심히 농구공을 두드렸어요. 학교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농구공을 들고 집 앞 골목에 있는 골대 밑으로 달려갔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혼자 농구를 하고 있는데 길을 지나가던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 나보고 농구선수를 해보라고 했어요. 그 아저씨는 전에 농구 국제 심판을 했던 사람인데, 제 농구 실력이 아깝다며 동산 초등학교에서 농구부를 지도하고 있는 후배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어요. 뜻밖의 제안에 형이랑 부모님은 진지하게 의논을 했어요.



운동을 좋아해서 대학도 체육 교육학과에 들어간 형은 망설이는 부모님을 설득했고, 나도 농구가 좋았기 때문에 4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자마자 동산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정식 농구 선수가 되어, 좋은 감독님 밑에서 배울 수 있게 되었던 거죠. 농구 선수가 되었지만, 막상 눈앞에는 험난한 길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기마다 승리를 거두고 우승을 하기는커녕 번번이 질 때가 많았어요. 실망한 나는 농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형의 격려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학교에서 날마다 50~80개씩 슛 연습을 하고, 집에 오면 다시 50개씩 연습했죠. 이제 우리 팀은 아직 우승은 못해 봤지만 준우승은 이제 해 봤답니다. 그리고 내 곁에는 친구 같고, 선생님 같은 든든한 형이 있습니다. 형은 큰 경기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가, 분석하면서 저를 지도해 준답니다. 시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형은 다시 그날의 문제점과 좀더 보완해야 할 점들을 지적해 줍니다.

그런데 나에겐 고민이 있습니다. 농구 선수인 제 키는 겨우 150센티미터입니다. 같이 뛰는 친구들 중에는 나보다 30센티미터나 더 큰 친구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승현 선수는 180센티미터가 채 안 되지만 포인트 가드로서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팀을 이끌어 갑니다. 나도 지금 팀에서 가드 역할을 맡고 있는데, 가드는 자유자재로 공을 다루면서도 움직임이 빨라야 하기 때문에 키가 작은 사람이 더 유리할 수도 있어요. 김승현 선수처럼요. 우리를 지도하는 송재업 감독님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남건아, 나는 네가 잘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잘해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자신감을 갖고 뛰어라."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 꿈을 이룬 사람들을 보며 오늘도 나는 힘을 냅니다. 키가 작으면 높이 뛰면 되니까요. 그리고 내 꿈은 키보다 훨씬 더 높으니까요.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어요 - 동시 통역사 준영이



내가 다른 나라의 말을 직접 들어 본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집 근처에서 마주친 외국인이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얼굴로 말을 걸어 오더군요. 그런데 나는"난 영어 못해요. 그래서 도와줄 수 없어요." 라고 말해 버렸어요. 그날 외국인과의 만남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돕기를 좋아하는데, 말이 안 통해서 그냥 보냈다고 생각하니 속상했거든요. 그때부터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텔레비전의 케이블 방송 가운데 미국 만화 영화를 전문으로 방송해 주는 채널을 틀어 놓기 시작했어요. 〈톰과 제리〉도 나오고 〈조니 브라보〉도 나오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몰랐는데, 오래 보다 보니까 서서히 귀에 영어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톰이 우유를 먹으면서 "밀크"라고 말하면, 아, 저게 우유구나, 하는 식으로 알게 된 거예요. 그렇게 영어 단어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난, 만화 방송뿐만 아니라 팝송을 함께 틀어 놓기도 했어요. 지금껏 나는 한 번도 머리 아프게 영어 공부를 한 적이 없어요. 엄마는 가끔 영어로 된 만화책과 동화책을 사 주셨어요. 큰 소리로 읽고, 모르는 단어를 사전으로 찾아가면서 읽다 보니 우리말로 번역된 책을 읽는 것과는 그 맛이 확실히 달랐어요.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쓰기와 말하기뿐! 그때부터 일기장에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영어와 우리말이 반반씩인 이상한 글이었죠. 나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일기를 써 나갔어요. 늘 영어로 된 만화를 보고, 듣고, 영어 책을 읽다 보니 점점 표현이 다양해졌죠. 저는 영어 공부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나는 내 영어 실력을 한 번 점검해 보기로 했습니다. 바로 우리 고장에서 열리는 '가야 세계 문화 축전'에서 통역 자원 봉사를 하기로 한 것인데요. 인도, 중국, 몽골, 일본 같은 아시아 각국에서 공연단이 오는 큰 행사였어요. 나는 이 축제에서 열세 살 최연소 통역사가 되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했던 파키스탄 여행의 추억이 없었다면 아마 선뜻 도전할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엄마와 나는 의료 봉사를 가는 의사들과 함께 파키스탄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약을 달라고 외치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는 생각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문화와 문화를 이어 주는 동시 통역사가 된다면, 그들을 좀더 많이 도울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동시 통역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한편 나는 인도 공연 팀의 통역을 돕는 역할을 맡았어요. 우리 일행은 김수로왕릉을 찾아갔는데 인도 여성이 저를 보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 달라고 하자, 갑자기 자신감이 싹 사라지고 결국 한 마디도 못하고 말았죠. 동시 통역사는 그 나라 말만 할 줄 안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요. 아주 폭넓은 지식과 교양을 쌓아야 되죠. 문화와 풍습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역사까지도 말이에요. 다음날부터는 적극적으로 인도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말을 붙였어요. 외국어를 배울 때 점잔을 빼거나 자존심을 지키려 하면 절대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걸 알았거든요. 다른 나라 말을 배우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자세와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답니다. 영어는 친구 관계와 비슷해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 할수록 친해지거든요. 오늘도 나는 더 넓은 세상과 친해지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딛고 꿈에 도전해요 - 맹인 피아니스트



내 이름은 은비입니다. 올해 중학생이 된 열세 살 소녀이지요. 나는 피아노를 칠 때, 내 손가락이 아름다운 음을 만들어 낼 때 기분이 너무나 좋아요. 하지만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 속도는 매우 느려요. 손가락으로 점자 악보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죠. 혹시 짐작했나요? 나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내 동생 단비랑 엄마 뱃속에서 여덟 달 만에 세상으로 나와서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단비는 괜찮았지만, 나는 '미숙아 망막증'으로 시력을 잃게 되었어요. 시력을 잃은 내가 상처 받지 않는 것, 마음을 다치지 않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의 변함없는 소원입니다. 나는 눈이 불편한 대신 귀가 예민합니다. 몇 번만 들으면 음을 금방 기억했죠. 그래서 엄마는 자주 음약을 들려주었어요.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 선생님과 만났습니다. 나와 똑같이 시각 장애를 가진 딸을 둔 분이었죠. 처음에는 피아노를 배우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점자 악보를 더듬어서 머릿속에 떠올렸고, 다른 아이들처럼 눈으로 악보를 따라가며 칠 수도 없기에 악보를 몽땅 외워야 했어요. 알쏭달쏭한 부분을 자꾸 틀리면 흐릿한 눈이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답답해 하는 나에게 스티비 원더라는 가수에 대해 얘기해 주셨습니다. 스티비 원더도 나처럼 맹인 소년이었는데, 자신의 잘 들리는 귀를 이용하여 소망을 품게 되었죠. 귀에 들리는 음들을 잘 듣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소망 말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마침내 미국에서 유명하고 존경받는 가수가 되었어요. 장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력하고 애써야 하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가끔 아주 가끔 나는 단비가 부러워요. 하지만 그 말을 털어놓진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엄마에게 물었어요. "엄마, 단비는 일반 학교에 다니는데 왜 나는 맹아 학교 다녀?" 그러자 엄마가 말했어요. "너는 그래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와 건강한 손발을 가졌잖아. 몸의 수많은 기관 중에 오직 눈만 불편할 뿐인데, 다른 수백 개 기관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면 안 되겠지?" 나는 눈만 불편할 뿐이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더 힘든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두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 언니가 미국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주하는 텔레비전 방송을 들으면서, 나는 가슴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솟아나는 듯했어요. 열 개의 손가락으로 불평만 하고 있으면 희아 언니한테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요. 나의 천국과 지옥은 모두 음악에서 시작되고 끝난답니다. 피아노 연습이 안 될 때에는 정말 슬퍼요.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답니다. 진짜 지옥은 꿈이 없는 거란 것을요. 여러분도 나처럼 꿈을 가지고 있나요?



꿈을 키우며 남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을 배웠어요 - 뮤지컬 배우 세영이



나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아기일 때부터 작은 소리에도 퍽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해요. 자라면서 나의 소질을 발견한 건 유치원 때 참가한 콩쿠르 대회에서였어요. 처음 참여한 대회인데도 무대에서 당당하게 서서 노래를 하더래요. 내가 무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일곱 살 때입니다. 나는 그날 라디오 생방송으로 열리는 '이흥렬'이라는 작곡가의 추모 음악회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근데 하필이면 그 전날 감기가 심하게 걸렸지 뭐예요. 엄마는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반주가 시작되자 나는 연습한 대로 초롱초롱하게 마지막 가사까지 빠짐없이 불렀어요. 노래가 끝나자 관중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와, 그때의 감격이란! 내 노래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 기쁨이 나에게 되돌아 왔을 때 그게 얼마나 큰 감격과 뿌듯함인지 알아 버린 겁니다.



그때부터 엄마와 나의 음악 공부가 시작됐습니다. 성악을 전공한 엄마가 나의 선생님이 되어 주셨어요.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와 함께 노래하고 또 노래했답니다. 같은 곡을 수백 번 부른 적도 많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 진열장에는 음악 콩쿠르 대회에서 내가 받은 트로피와 상장이 가득했죠. 그러던 어느 날, 노래만 불렀던 나에게 오페라에 아역으로 출연할 기회가 생겼어요. 나는 학교에 갈 때도, 차에서도, 집에서도 내내 오페라의 음악을 듣고 또 들어서 모든 파트의 음악을 다 외워 버렸죠. 나는 많은 오페라에 출연했고 뮤지컬에도 출연하게 되었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이들과 음악에 빠져 노래할 때면 너무나 신났거든요. 게다가 뮤지컬은 춤 실력도 빼놓을 수 없잖아요. 리듬을 잘 타는 아빠를 닮아서인지 춤추는 것도 재미있어요.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서, 작품을 할 때마다 내 꿈도 바뀌었죠. 성악을 해서 파바로티처럼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까, 아니면 남경주나 최정원처럼 멋진 뮤지컬 배우가 될까. 정말 고민입니다. 사실 오페라든, 뮤지컬이든 다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이며, 나는 무한히 성장할 가능성이 있고 변화할 수 있으니 천천히 결정하려고 합니다. 올해 중학생이 된 나는 변성기를 맞고 있어요. 그래서 변성기가 지나 정확한 음역을 찾을 때까지 피아노를 배우기로 했어요. 하지만 예전부터 해 오던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노래와 이어진 끈은 놓지 않고 있어요. 리듬 잃지 않기! 나는 그것만을 기억하려 애씁니다. 그래서 요즘도 음악을 귀에서 놓지 않고 지내요. 피아노를 배우고, 중요한 공연이 있으면 꼭 찾아가서 보거든요. 이 모든 노력들이 언젠가는 내 손으로 직접 뮤지컬을 만들고 연출해서 미국의 브로드웨이 못지않은 명문 뮤지컬 브랜드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 깊이 있는 음악의 감동을 관객들에게 전해 주는 꿈, 그 꿈을 위해 오늘도 나는 더 큰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엄마가 내게 꿈을 주었어요 - 파티쉐 태연이



나는 냄비와 숟가락으로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아이랍니다. 나의 마법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유치원을 운영하는 엄마는 일 때문에 늘 바빴어요. 게다가 엄마는 조기 교육 바람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해서 나를 학원에 보내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보면 멋진 엄마라고 할지 모르지만 혼자 오후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나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죠. 나는 집에서 뭐 재밌는 게 없나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 찾았는데, 내가 부린 최초의 마법은 전기밥솥을 가지고 밥을 만드는 거였어요. 하루 종일 일하시다 돌아오는 부모님은 따끈한 밥은 물론이고, 내가 식은 밥에 갖은 야채를 넣어 볶은 엉터리 볶음밥도 맛있게 드셨어요. 그때 처음으로, 맛있는 음식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준다는 것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큼 나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나는 또 재미있는 것이 어디 없나, 집안을 돌아다녔죠.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밀가루였어요. 그건 정말이지 부드럽고 달콤하고 행복한 세상이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밀가루를 이용해 카스텔라 만들기에 도전했는데 안타깝게도 대실패였고, 나는 엄마를 졸라 제빵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는 열심히 배웠고, 빵 만드는 게 너무나 좋았어요. 학원에 다닌 지 8개월 만에 제빵 기능사 자격을 따는 데 성공했어요. 너무 좋아하는 나를 보고 선생님께서는 "어머, 태연이는 파티쉐가 되고 싶은가 보구나. 빵과 과자를 만드는 장인을 파티쉐라고 하는데, 파티쉐가 되려면 정말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밀가루와 버터, 우유를 가지고 맛있는 빵과 과자를 만드는 것도 신나는데, 그걸 평생 직업으로 삼아 돈도 벌 수 있다니 정말 굉장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파티쉐가 되기로 했습니다. 파티쉐가 되려면 케이크 디자인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어려운 용어 때문에 애를 먹긴 했지만, 부지런히 준비한 결과 필기시험에는 무난히 통과했어요. 이제 남은 건 실기시험뿐! 아무튼 나는 케이크를 꾸밀 때가 가장 신나요. 같이 배우는 아주머니들도 제 실력을 부러워한답니다. 한편 나는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아서 친구들과 활발하게 어울리지 못했는데, 중학교에 입학한 뒤, 내 생활은 180도로 달라졌어요. 반에서 인기도 꽤 높답니다. 비결이 뭐냐고요? 저의 마법 때문이죠. 나의 주특기인 밤식빵을 만들어 가면 친구들이 그냥 쓰러집니다. 너무 좋아서요. 앞으로도 나 임태연의 교우 관계는 이상 없을 겁니다. 내가 만든 요리로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그 행복으로 내가 다시 행복해지니, 이 맛에 내가 파티쉐가 되고 싶은가 봐요.



나는 얼마 전 케이크 기능사 시험도 거뜬히 합격했어요. 아직도 제과 기능사 시험이 남아 있어요. 제과 분야야말로 파티쉐가 가장 많은 활약을 펼칠 수 있는 무대랍니다. 나는 아직 꼬마 마녀예요. 그래서 나는 더 큰 마술사가 되기 위해 한국 과학조리 고등학교에 들어가려고 해요. 그 학교는 성적이 상위 20퍼센트 안에 든 사람만 갈 수 있다고 하니, 열심히 노력해야죠. 그리고 일본어 공부도 하고 있어요. 제과 분야가 발달한 곳으로는 프랑스와 일본을 첫손에 꼽거든요. 일본에 가서 파티쉐가 되기 위한 선진 기술을 배워 오고 싶어요. 온 세상을 달콤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 파티쉐를 향한 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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