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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다리 이야기(1권, 2권)

김숙분 지음 | 가문비어린이
무학대사를 기념하는 무학교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나, 18세에 집을 떠나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 홀로 토굴 속에서 살며 열심히 공부하고 수도 생활에 전념했어요. 고려 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무학대사를 존경했지요. 어느 날 이성계는 토굴로 무학대사를 찾아가서, 통나무 세 개를 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뜻을 알고 싶다고 말했어요. 무학대사는 놀라며 말했어요. "통나무 세 개는 임금 왕(王)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장차 왕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스승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늘 가까이 머물며 도움을 청하곤 했어요.



고려 말은 사회가 몹시 혼란했어요. 백성들의 마음이 이성계에게 기울자 힘을 얻은 이성계는 결국 고려를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어요.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이성계는 왕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어요. 어느 날 이성계는 또 꿈을 꾸었는데, 왕의 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나 이성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네놈이 우리 자손을 모두 죽였으니 어찌 원한이 없으리오!"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꿈에 나타난 왕은 분명 왕건일 것이라고 말하자 무학대사는 새 도읍지를 찾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어요.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도읍지를 찾아 나선 무학대사는 남쪽으로 걸어가서 청계천에 도착했어요. 청계천을 따라 계속 걷다 왕심평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저편에서 백발노인이 소를 타고 오더니 무학대사에게 말했어요. "여기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를 가면 아주 좋은 땅이 나온다네! 왕(往) 십 리 하시오!" 왕십리란 십 리를 가라는 뜻이지요.



무학대사는 서둘러 노인이 알려 준 대로 왕심평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를 걸어 올라갔더니, 그곳은 뒤에는 북악산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청계천이 흘러 새 도읍지로 삼기에 좋은 곳이었어요. 이렇게 해서 한양이 조선의 새 도읍지가 되었어요. 이성계는 백발노인이 일러 준 곳에 경복궁을 짓기 시작했어요.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찾아 내려왔던 왕심평은 그 뒤로 왕십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어요. 그리고 왕십리 앞에 흐르는 청계천에는 다리가 하나 세워졌는데, 그 다리는 무학대사의 이름을 기념하여 무학교라고 부른답니다.



앙부일구가 놓인 혜정교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은 천민 신분으로 태어났어요. 장영실은 열 살 때부터 관청의 노비가 되었지요. 하지만 똑똑하고 재주가 뛰어나 이치를 쉽게 깨달았고, 특히 손재주가 남달라 무슨 물건이든 잘 만들었어요. 장영실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만들어 내는 것을 즐거워했지요. 그런데 마침 태종이 '양반이든 천민이든 재주가 있는 사람을 알리도록 하라'라는 분부를 내렸어요. 평소 장영실을 아끼던 동래현 현령은 장영실을 한양으로 보내 주었고, 장영실은 마침내 1410년 2월 대궐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장영실을 가까이 두고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격려했어요.



세종은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이는 이치를 잘 알아야 자연의 변화를 알기 때문에 농사도 잘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세종은 천문과 지리 연구를 하면서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있는 시계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장영실을 명나라로 유학 보냈어요. 그곳에서 장영실은 간의와 자격루를 살펴보고 돌아온 뒤, 1434년 별의 위치와 움직임을 기록하는 혼천의와 시각을 자동으로 알려 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완성했어요. 동시에 앙부일구라는 해시계를 만드는 일도 진행되었어요. 앙부일구에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시각을 읽을 수 있도록 자시(밤 11시~오전 1시)에는 쥐를, 축시(오전 1시~오전 3시)에는 소를, 인시(오전 3시~오전 5시)에는 호랑이를, 정오를 나타내는 오시에는 말을 그려 넣었어요. 앙부일구 역시 혼천의와 자격루가 완성된 1434년 10월에 만들어졌어요. 세종은 앙부일구를 2개 만들도록 하여 많은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한 개를 종묘 남쪽 거리에 두고, 또 한 개는 청계천 혜정교에 두었어요.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모두 함께 보는 시계)였지요.



세계 최초의 발명, 수표교

세종은 해마다 가뭄과 홍수를 걱정하는 백성들이 안타까웠어요. '비의 양을 잴 수 있거나 강의 높이를 잴 수 있다면 미리 어려움을 막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한 세종은 장영실을 불렀어요. "계절에 따라, 장소에 따라 내리는 비를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시오." 1441년 8월 18일 장영실은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빗물을 재는 그릇을 발명했고, 그 이듬해인 1442년 5월 8일 빗물 재는 그릇의 표준을 정했어요. 높이 30.9센티미터, 지름 14.4센티미터였어요.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빗물 재는 그릇에는 측우기라는 이름이 지어졌어요. 세종은 구리로 만든 측우기를 조선 각 고을마다 설치하게 하고, 비의 양뿐 아니라 비가 내리기 시작한 날짜와 시각, 멎은 날짜와 시각을 기록하고 한양 정부에 보고하라고 명령했어요. 이렇게 하니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지요.



또 장영실은 흐르고 있는 물의 양을 재는 방법을 생각했어요. 장영실이 생각해 낸 것은 냇물에 눈금이 새겨진 쇠기둥이나 돌기둥을 세워 물의 깊이를 보는 것이었어요. 이 기둥을 양수표라고 했어요. 양수표 역시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었어요. 세종은 장영실의 의견을 물어 수표를 마전교에 세우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마전교는 다리 기둥을 과학적으로 특별하게 만들어, 아무리 비가 와도 버틸 수 있는 다리였거든요. 1441년(세종 23년) 세종의 명령으로 마전교 곁에 수표와 측우기가 세워졌어요. "이제 이 다리에 수표가 세워졌으니 수표교라 부르도록 하라." 백성들은 수표교를 자랑스러워했어요. 지금의 청계천 다리 중 고스란히 보존된 것은 수표교뿐이에요.



단종이 정순왕후와 이별한 영도교

세종의 뒤를 이은 맏아들 문종은 몸이 몹시 약했어요. 게다가 왕비 권씨도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뒤에 단종)를 나은 지 3일 만에 죽고 말았어요. 결국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에 39세의 나이로 죽고 12세의 외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지요. 문종의 동생은 17명이나 되었는데 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등 왕숙(왕의 삼촌)들이 어린 단종을 위협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년) 10월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에게 충성하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동생 안평대군까지 유배시켰다가 죽였지요. 이제 단종은 수양대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어요. 1454년 정월, 단종은 정순왕후 송씨를 왕비로 맞아 큰 위로가 되었어요. 어린 단종과 정순왕후는 왕과 왕비의 자리에는 욕심이 없었고,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1455년 6월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되었을 때 수양대군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단종은 왕의 자리를 내놓았고,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그가 바로 세조이지요.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하지만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1456년 6월(세조 2년)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는 상왕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그들을 모두 죽였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키고 영월로 유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유배를 떠나는 단종과 배웅하러 따라 나선 정순왕후는 흥인지문 밖 청계천에 이르러, 영미다리 위에서 손을 잡고 울며 이별을 했어요. 단종을 떠나 보낸 정순왕후는 흥인지문 밖에 있는 정업원이라는 절에 들어가, 영월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초가 암자를 짓고 오로지 단종만을 생각하며 살았어요. 1457년 6월 세조는 마침내 단종을 서인으로 강봉시키고 사약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단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정업원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아침저녁으로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눈물로 단종의 명복을 빌었어요. 그래서 그 산봉우리엔 '동망봉'이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또 청계천의 영미다리는 단종이 정순왕후와 이별하고 영영 못 건너온 다리라고 해서 '영도교'라고 불렀어요.



청계천을 가장 사랑한 왕, 영조

조선의 임금 중 청계천을 가장 사랑하고 보호했던 왕은 영조였어요. 영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라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없고, 산에서 쏟아져 흘러온 흙들이 청계천 바닥에 높게 쌓였어요. 백성들과 신하들은 모두 청계천을 파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간수교에서 영도교까지의 흙을 파내는 일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려고 청계천에 모여들었어요. 파낸 모래흙이 얼마나 많았는지 산을 이룰 정도였지요. 그 산을 '조산'이라고 불렀어요. 마침내 청계천이 깨끗해져서 사람들은 기뻤고 일거리를 얻어서 행복했어요. 영조는 광통교, 오간수교, 영도교 다리 기둥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을 새기게 했어요. 처음 청계천을 파낸 1760년이 경진년이었기 때문이지요.



57일간의 청계천 준천 때 영조는 여러 번 오간수교에 나가서 일꾼들을 격려하고, 화가에게 오간수교 위에 있는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했는데, 그 그림이 '어전준천제명첩'이지요. 영조는 개천의 흙을 파서 쳐내는 일을 맡아보는 준천사를 만들었고, 준천사에서 한 일들을 『준천사실』이란 책자를 만들어 모두 기록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청계천 양쪽 가장자리에서 자꾸만 흙이 떨어져 내려오고 깨끗하지 못해, 1773년 6월 10일부터 8월 6일까지 다시 한 번 청계천 공사를 했어요. 이때에는 흙을 쳐냈을 뿐 아니라 개천 양쪽에 돌을 쌓아 튼튼하고 깨끗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틈이 생기는 곳에 나무를 심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했어요. 영조의 청계천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남달랐지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을 기리는 다산교

조선후기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은 1762년 6월 경기도 광주군 마재리 영유당이라는 집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정재원이 정6품 호조 좌랑에 임명되자 가족 모두가 한성으로 이사하여, 청계천 부근의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집을 마련했어요. 정약용은 한성에서 이승훈과 이가환을 만나 교류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공부한 성리학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편리하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정약용은 28세에 대과에 합격하고 한강을 손쉽게 건널 수 있는 배다리를 설계하게 되었지요. 정조는 이런 정약용을 매우 아껴 자주 궁궐로 부르곤 했어요. 정약용은 이승훈, 이가환과 친구 이벽을 통해 실학뿐만 아니라 서양 종교인 천주교를 새롭게 믿게 되었고, 조선 사회의 신분 차별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깨달았어요. 정약용의 둘째 형인 정약전과 셋째 형 정약종도 함께 천주교인이 되었어요. 점차 많은 평민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신앙심을 갖게 되었어요.

정약용은 31세 되던 해 홍문관 수찬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무덤이 보이는 곳에 정조가 머무를 별궁을 짓는 일을 맡게 되었어요. 이때 정약용은 거중기를 만들어 10년이 걸려도 못 쌓을 성을 2년 6개월 만에 완성했어요. 성에는 여러 가지 군사 시설과 함께 궁과 정자, 아름다운 연못도 만들었어요. 화성은 조선 후기의 '건축의 꽃'이라 불리게 되었지요. 정약용을 사랑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려고 애를 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정약용은 크게 슬퍼하며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 마재리로 다시 내려갔어요. 그 뒤를 이은 순조는 나이가 너무 어려 증조할머니인 정순왕후가 대신 나랏일을 맡아보게 되었는데, 정순왕후는 천주교도를 몹시 싫어해서, 천주교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했어요.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해요. 이승훈과 이가환, 이벽이 모두 처형당했고 정약용의 형 정약종도 죽임을 당했어요. 조정에서는 정약용을 전남 강진으로, 정약전을 전남 흑산도로 귀양을 보냈어요.



정약용은 1808년 강진 사람 윤박의 도움으로 경치가 뛰어난 다산으로 이사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자신의 호를 '다산'이라고 붙였어요. 정약용은 귀양살이를 하며 관리가 지킬 도리를 밝힌 『목민심서』 48권, 올바른 정치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경세유표』 48권을 완성했어요. 정약전도 흑산도 근처 155종의 바다 생물을 조사하여 『자산어보』라는 책을 썼어요.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은 고향 마재리로 돌아가서도 계속 글을 썼고, 관리들이 주의해야 할 내용이 담긴 『흠흠신서』 30권을 완성했지요. 정약용은 평생 동안 철학, 역사, 지리, 법률, 정치, 문학, 군사 등에 관한 500여 권이나 되는 책을 남겼고,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완성시켰지요. 1836년 2월 22일 다산 정약용은 마재리 고향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정약용이 처음 실학을 만난 청계천 명례방 부근의 길을 지금 '다산로'라고 부르고, 그 길 가까운 곳 청계천에 세운 다리는 '다산교'라고 부른답니다.



3ㆍ1운동을 기념하는 삼일교

조선을 강제로 점령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맺고 사실상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이에 고종은 일본의 침략 사실을 세계에 알리려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특사로 보냈고, 일본은 이를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로 덕수궁으로 내쫓고 감시를 했어요. 왕위는 순종이 이어받았지만 순종 역시 아무 힘도 없었어요. 일본은 조선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시켜 버렸고, 토지 조사 사업을 시작하여 대부분의 조선 땅을 빼앗았어요. 이제 우리 민족의 공동 목표는 오로지 일본과 맞서 싸워 나라를 찾는 일이었어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가장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러시아 하얼빈 역에서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현장에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다 뤼순 감옥에서 죽었어요.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일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져 백성들은 일본에 대한 분노를 누르지 못했어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3인이 고종의 장례식 날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고, 이화학당의 학생이었던 유관순은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며, 뜻이 맞는 친구 다섯 명과 모여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을 다짐했어요. 1919년 3월 1일 정오,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고, 같은 시각에 청계천 가까이의 탑골 공원에도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어요. 지방 곳곳에서도 3월 1일 정오부터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일본에 대항한 거대한 만세 운동이었어요. 그 날 33인은 모두 잡혀갔고, 일본은 학교 문을 강제로 닫게 했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마을 사람들과 만세 운동을 계획했어요. 음력 3월 1일 12시,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모여든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유관순은 결국 잡혔고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모진 고문으로 숨져 갔고, 만세 운동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어요. 청계천 물길 위에는 3월 1일 그 날을 잊지 않으려고 다리를 놓았지요. 그것이 '삼일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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