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풍선 거울
박효미 지음 | 사계절
새벽에 엄마가 정신없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모가 금방 아기 낳을 것 같대. 엄마가 가 봐야 하니까 알아서 챙겨 먹고 학교 가라." 그 소리에 눈을 비비고 일어났는데, 뭐라고 말할 짬도 없이 엄마는 벌써 나가 버렸고, 나는 일어나서 지금껏 알림장만 뒤적거리는 중이다. 알림장(준비물:손거울)을 펴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엄마한테 준비물 사야 한다는 걸 미처 말하지 못했고, 나한테는 손거울 살 돈이 없다. 이런 날 할아버지도 없다. 할아버지는 골동품 수집가인데, 할아버지 방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으나, 종이돈은커녕 동전 한 닢 없었다. 다시 꼼꼼히 둘러보다가, 서랍장이 있어, 서랍을 잡아당겼더니, 서랍이 빠졌고, 안에 든 엽전이 쏟아졌다. 대충 엽전을 쓸어모아 서랍에 담는데, 서랍 귀퉁이에 반짝이는 손거울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용 두 마리가 에워싸고 있는, 낡은 손거울이었다.
참고로 우리 반 모두는 자기 할 일이 있는데, 나는 교과서 펴는 당번이었다. 삼 주전에는 걸레빨기 당번이었다. 그러니까 삼 주 동안 나는 완전히 믿어도 될 진짜 모범생으로 인정받은 셈이었다. 2교시는 과학 시간인데, 손거울은 과학 시간에 쓸 준비물이었다. 나는 애들 책상 위를 쭈욱 살폈다. 올라와 있는 손거울은 대부분 문구점에서 사온 것이었다. 어질어질했다. "서한결! 네가 맡은 일은 이제 안 하기로 마음먹었니?" 들어 온 선생님이 나한테 핀잔을 주었다. "예? 죄송해요. 선생님." "사고는 다 치고, 죄송하다는 거, 마음에 안 들어. 준비물 가져왔지? 안 가져온 사람, 미리 고백해."
나는 책상 서랍에 있는 손거울을 만지작거렸다. 황인호가 나를 흘낏 보더니 소리쳤다. "선생님, 한결이 안 가져왔대요." 나도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말았다. "뭐? 준비물도 안 가져왔어? 너 왜 그래? 아까는 선생님 교과서도 안 펴놓고. 무슨 일 있니? 아니면 아주 딴 사람 되기로 작정한 거냐? 한결, 이순신 장군!" 아이들이 킥킥거렸다. 나는 용이 새겨진 거울을 가져왔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그게 아니라 이모가 새벽에 아기를 낳아 집에 아무도 없었다는 변명도 못 하고 뒤로 갔다. 선생님은 교과서나 준비물을 안 가져온 아이에게는 수업 시간 내내 뒤에 가 서 있으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꼼짝없이 서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선생님은 그 벌을 '이순신 장군'이라고 불렀다.
뒤에 가서 서니 심장이 콩콩거리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콩콩 뛰던 심장도 시간이 흐르면서 걸음을 늦추었다. 뒤에 서 있다보니 아이들이 뭘 하는지 아주 잘 보였다. 햇살이 빤히 교실로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있던 거울을 꺼내 햇빛에 비추었고, 거울은 햇살을 되비추어 동그랗고 하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나는 반사된 빛을 선생님 머리 꼭대기 쪽으로 올렸다. 반사된 하얀 그림자는 선생님 머리 위쪽 벽에 동동 떠 있더니, 느닷없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면서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건 회색빛 글자였다. '어디 간 거야? 어디다 뒀지? 아이참, 왜 없지? 가만…, 책상 당번 누구지? 얘네들이 정말!' 거울을 든 손이 떨렸다. "야! 저거 뭐야? "누군가의 목소리에 선생님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거울을 가렸다. 그러자 모두 사라졌다.
다시 3교시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한결. 너 혹시 선생님 쇠자 못 봤니?" 교실로 들어오던 선생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선생님은 우리보고 수학 익힘책에 있는 문제를 풀라고 했다. 그러더니 창가에 있는 선생님 책상으로 가 뭔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거울을 꺼내 햇살을 받아 되비추어 보았다. 아까처럼 하얀 빛 그림자가 동동 떴다. 다시 선생님 머리 위로 올렸다. 벽에서 맴도는 동그란 그림자는 놀랍게도 아까처럼 서서히 부풀어오르면서 또 뭔가를 만들어 냈다. 글자였다. '아이참. 도대체 쇠자가 어디로 간 거야? 그걸 대고 박박 그어야 금세 끝낼 텐데. 이래 가지고 환경 미화를 언제 끝내나? 어떤 녀석이 만진 거 아냐?'
"말풍선이다!" 그 때 누군가 소리쳤다. 선생님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나는 거울을 가렸다. 모든 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거울이 분명했다. 말풍선 안에 박힌 글자는 선생님 생각이었다. "말풍선이다!"하고 소리친 아이는 박성우였다. "박성우! 너 뭐라고 했어?" "선생님, 쇠자 찾으세요?" "응, 내가 너한테 물어 봤니? 어떻게 알았지? 너 혹시 가져갔니?" "아뇨, 그게 아니라." "박성우! 아니긴 뭐가 아냐? 네가 가져갔냐고!" 선생님이 소리치자 박성우는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 그게 아니라, 말풍선이, 어, 어." "얘, 얘! 관둬! 나중에 얘기해. 너희들 문제 다 풀었니?"
수학 문제로 꼬리를 감춘 말풍선 이야기는 쉬는 시간에 왁자하게 터져 나왔다. 박성우 말고도 말풍선을 본 아이가 여럿이었다. "야, 찐득아. 우리 탐정 되자. 어디서 그런 글자가 나타났는지 우리 말고 누가 찾겠냐? 응?" 황인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인호와 박성우는 책상을 밀치고 교실 앞쪽으로 뛰어가 선생님 책상 언저리를 뒤지기 시작했고, 열중하다보니 수업 시작 종소리를 듣지 못했다. "지금 뭐 하니?" 하는 선생님 목소리에 아이들이 와장창 넘어졌다. 선생님은 황인호와 박성우에게 이순신 장군을 시켰고 "너희 모두 마찬가지야. 한결! 너는 당번 또 까먹었니?" 하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3학년이 되고 나서 오늘처럼 시끄러운 날은 없었다. 그게 내 거울 탓이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콩콩 뛰었다. "5교시, 재량 시간에 당번 새로 정할 테니까, 그리 알아. 난 흐트러지는 건 질색이야. 너희들이 자꾸 까먹고 안 지키면 내가 계속 잔소리 퍼붓거나 무식한 선생님처럼 매타작해야 되는데, 난 그거 싫어. 알아서들 해." 선생님은 당번을 다 바꿨고, 나는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당번이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아이들은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교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울을 책상 서랍에 슬그머니 넣고 나서, 칠판 옆에 붙어 있는 시간표를 확인했다. 갑자기 누가 뒤통수 한 대를 콱 친 것 같았다. 난 교과서도 바꾸지 않고, 어제 가방을 그대로 들고 온 것이다. 첫 시간부터 엉망이었다. 황인호가 "선생님, 한결이 쓰기책 안 가져왔대요."라고 말했고, 선생님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한결, 뒤로 나가 이순신 장군!" 오늘은 뒤에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겁나고 덜덜 떨렸던 어제의 내 마음, 좀 전까지 쿵덕대던 내 심장도 조금씩 말짱해졌다.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별일 아니야.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냐.'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뭐가 그리 바쁜지, 우리보고 시를 한 편씩 쓰라고 하고는 책상에서 뭔가를 하기 시작했는데, 절반이 넘는 아이들이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거울을 꺼냈다. 거울에 햇빛을 받아 천장으로 올렸다. 반사된 빛은 천장을 지나 선생님 머리 위에서 멈추었고, 하얀 그림자는 투명한 풍선껌처럼 부풀어오르면서 회색빛 글자를 만들어냈다. '아이참, 딱 하루 남았는데, 이래 가지고 일등 할 수 있을까. 아, 지금이라도 환경 미화 당번을 정해서 좀 하라고 할까. 아, 진작 그렇게 할걸.' "야. 말풍선이야! 만화다 만화." 또 박성우였다. 나는 왼쪽 손바닥으로 잽싸게 거울을 가렸다. 선생님이 박성우를 자로 가리켰다. "뭐, 만화? 박성우 너 만화 보냐?" "어, 어, 아니에요. 선생님." 박성우가 더듬거리며 아니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자로 뒤를 가리켰다. "박성우, 이순신 장군! 서한결, 들어오고, 너네들 시 다 썼니?" 이 말에 아이들이 움츠러들었다.
선생님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말풍선을 본 아이들이 제법 되는 것 같았다. 햇살이 길게 내 자리까지 뻗쳐 들어왔다. 나는 다시 거울을 꺼냈고, 하얀 빛 그림자를 이순신 장군을 하고 있는 박성우 머리 위로 살짝 올렸다. 환경 미화를 하려고 만들어 놓은 초록색 판 위로 동그랗고 하얀 그림자가 뽀그르르 부풀어올랐고, 말풍선을 만들어냈다. '애걔걔. 내가 이순신 장군이면 선생님은 일본 놈이네요. 치! 선생님은 일본 놈. 나는 이순신 장군! 무찔러라! 돌격!'
"박성우!" 선생님 목소리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거울을 서랍에 넣었다. 선생님이 헛기침을 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저, 저, 아, 암말도 안 했는데요." "너, 지금 뭐라고 했잖아." 자신이 없는 듯 선생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너 혹시 풍선 갖고 있니?" "어 어, 몰라요. 선생님." 박성우가 더듬거리자, 선생님은 박성우 쪽으로 다가가, 손을 살피고 등뒤를 기웃거렸다. 물론 뭔가 있을 턱이 없었다. "뭘 잘못 봤나? 헛것이 다 보이고 원." 종소리가 나고,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자 교실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수업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한결, 교과서는 있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렸다. "너, 집에 무슨 일 있니? 엄마 좀 오시라고 해야겠다. 집안이 그러니 네가 알아서 더 잘해야지." 어, 그 때랑 똑같은 말이다. 지난 해 여름 엄마는 아빠랑 이혼한 지 얼마 안 돼 선생님과 면담했다. 들으나마나 뻔했다. 나를 잘 보살펴 달라 이런 말을 했을 터였다. 그 날 나는 안내문을 내지 않아서 아침부터 선생님한테 혼난 참이었는데, 또 미술 준비물을 빠뜨렸다. 나는 본디 그렇게 깜빡깜빡 잘 잊어버렸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집안이 그러니 알아서 잘하라고 애들 다 보는 앞에서 대놓고 핀잔을 줬다. 그 때 들은 말을 오늘 또 들은 것이다.
나는 픽 웃었다.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때처럼 기분이 왕창 나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태껏 쌓아 온 모범생 이미지가 고작 이틀만에 무너졌다는 게 어쩐지 한심했다. 모범생이란 딱지는 기껏 모래성 같은 거였나 보다. 쳇!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나는 선생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어제 책가방을 그대로 가져왔어요. 이모가 아기를 낳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요." 선생님이 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이 하나같이 나를 쳐다봤다. 모두 '쟤 갑자기 왜 저래.'하는 얼굴이었다. "어? 그랬니? 오늘은 봐주마."
5교시, 우리는 모두 글짓기를 하는 중이었다. 거울을 살짝 꺼내 빛을 받았다. 선생님은 뭔가를 열심히 자르고 오리는 중이었다. 다시 선생님 머리 위로 하얀빛을 올리니, 벽에 하얀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또 그랬다.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배 아파. 점심에 소시지를 너무 많이 먹었나? 배탈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김치라도 한 조각 먹을걸.' 아이들이 까르륵 웃었다. "선생님, 화장실 갔다 오세요." 은수였다.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은수를 봤다. 그러더니 "아, 그래."하고 종종종 나갔다. 선생님이 나가자 아이들이 왁자그르르 떠들어댔다. "야! 봤어? 그거, 말풍선 또 나타났어. 그거 어디서 나온 거야? 응?" "야! 사물함 있는 데서 칠판 쪽으로 쏘는 거 아냐? 영화 볼 때 뒤쪽에서 하얀 천 쪽으로 빛을 쏘잖아." 누군가 이렇게 소리치자, 황인호가 의자를 가지고 가 사물함 위로 올라갔고, 아이들도 우르르 의자랑 책상을 가져가 그걸 딛고 사물함 위로 올라섰다. "야! 비켜! 내가 볼 거야!" 황인호 목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사물함에서 와당탕 떨어졌다. 덩달아 그림도 찢기고, 사진도 떨어지고, 선생님이 환경 미화하느라 장식해 놓은 나뭇잎 모양의 스티로폼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벌써 교실에 들어선 선생님은 입을 떡 벌리고 스티로폼이랑 뒤엉켜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교실 뒤쪽에 있던 애들에게 그 자리에 서서 손들라는 벌을 내리고, 선생님은 칠판 앞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거울을 꺼내 선생님 머리 위로 하얀 빛 그림자를 올렸다. 뽀그르르 말풍선이 부풀어오르고 글자가 빠르게 만들어졌다.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당번을 또 바꿔? 아, 아냐. 그래 봤자야. 왜 내가 짜 맞춘 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내가 세운 계획은 빈틈없는데, 왜 그러지?' 선생님은 고민 중이었다. 그 순간 선생님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나는 잽싸게 손바닥으로 거울을 가렸다. "한결! 너 뭐야? 이리 갖고 나와!" 선생님이 내 거울을 보고 말았다. 내가 엉거주춤하는 사이 선생님이 뚜벅뚜벅 다가왔고, 결국 선생님은 서랍 속에 든 내 거울을 빼앗아 들었다. "이건 뭐니? 거울이네. 옛날 거울 같은데." "할아버지 거예요. 주세요. 할아버지한테 혼나요." 내가 눈물을 흘려서 놀랬는지, 선생님은 그냥 거울을 주고 가 버렸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황인호가 나한테 소리 질렀다. "한결, 다 알아냈어. 네 거울한테서 말풍선 생기잖아. 빨리 보여 줘." 책가방을 챙기던 아이들이 죄다 내 자리로 몰려들었다. 한꺼번에 몰려든 아이들이 책상을 잡고 흔들고, 내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책상이 넘어지고 나도 넘어졌다. 서랍 속에 있던 물건들이 왕창 쏟아졌다. "여기 있다." 황인호가 쏟아진 물건들 틈바구니에서 거울을 날렵하게 주웠다. 황인호는 거울을 들고 사물함 쪽으로 내뺐다. 야! 하고 소리치며 나는 황인호 쪽으로 뛰어갔다. 황인호는 거울을 요리조리 살피더니, 이런 아수라장에도 칠판을 닦고 있는 민성이 머리 위로 햇빛을 반사했고, 나와 아이들은 민성이 머리 위에 떠오른 말풍선을 보고 말았다. '에이! 우리가 뭐 로봇인가. 만날 시키는 일만 해야 하나.'
"야 박성우 받아!" 박성우가 거울을 받으려고 손을 벌리는 게 보였다. 순간 '쨍!' 그 소리에 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소리 난 쪽으로 뛰어갔다. 거울은 쏟아지는 햇살처럼 사방팔방 금이 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황인호를 찾았다. "너! 황인호, 죽었어." 나는 황인호한테 냅다 달려들었다. 울면서 나는 아무 소리나 막 해댔다. 웅성대던 교실이 느닷없이 조용해졌다. 내 눈에서는 쉴 사이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서한결 계속 울거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선생님이 옆에 서 있었다. 애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가 맡은 청소 구역으로 가서 다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나. 왜 이렇게 엉망인지. 너희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반성문 써 내."
반성문을 쓰려고 하니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깨진 거울이 낯설지 않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익숙했다. 황인호가 거울을 깼다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썼다. 원래 그 거울은 어제 준비물로 가져왔던 거라고도 썼다. 그런데 하도 낡고 오래돼서, 사실은 조금 창피해서 못 꺼냈다고도 썼다. 생각해 보니 그걸 꺼내는 게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고 덧붙여 썼다. 그런데 이렇게 반성문을 쓰다 보니, 늘 좋은 것만, 남들하고 똑같은 것만 가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날마다 잘할 수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반성문에 쓰지 않았다. 물론 말풍선의 비밀도 쏙 뺐다. 반성문을 쓰는 동안 내 마음은 조금씩 차분해지고 화도 가라앉았다. 반성문은 두 장이나 됐다. 아이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님은 창밖을 내다보며 아이들이 써 낸 반성문을 읽고 있었다. 나는 맨 꼴찌로 반성문을 냈다. 선생님이 들릴락말락 아주 작게 한숨을 "후유" 하고 내쉬면서 반성문을 받았다. 내일은 교장 선생님이 환경 미화를 검사하는 날이다. 나는 교실 뒷문을 드르륵 밀고 나가다 말고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책상 위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챙기던 선생님이 문득 고개를 들어 교실 뒤쪽, 찢어진 게시판을 바라보았다. 잠깐 머뭇거리던 선생님은 집에 가려는지, 가방을 챙겨들었다. 햇살이 사라진 교실로 이제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